◎ 화림동계곡 선비문화 탐방을 나서며
비가 온다는 예보임에도 경남 함양 화림동계곡 선비문화 탐방길을 트레킹하고자 광주 지오트레킹(대장 김명수)과 함께 아침 8시에 광주를 출발하여 함양으로 향한다. 전국에 비가 많이 내린다 하여 산행을 취소한 곳이 많았는데, 예상했던 비는 다행히 오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 살다보면 늘 이런 행운이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은 하늘의 질서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어찌 그 큰 질서를 다 담아 낼 수 있겠는가?
거연정 주차장에서 트레킹 준비를 하고 거연정-동호정-농월정 순으로 화림동 계곡의 아름다운 정자들을 살펴보면서 조선 선비문화를 탐방해 본다.
화림동계곡은 우리나라 정자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 계곡의 기암들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소나무가 잘 어울어진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들을 둘러 볼 수 있어 참으로 설렌 탐방길이다.
◎ 선비 문화
우선 선비문화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본다.
'선비' 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킨다. 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 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사’의 성격은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관직과 분리되어 인격의 측면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사’의 집단으로 자각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목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도(道)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동호정 앞 차일암
공자는 도에 뜻을 두어 거친 옷이나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격을 선비의 모습으로 강조하였다.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자신의 행동에 염치가 있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켜 “좀스러운 인물들이니 헤아려 무엇하랴.”라고 비평하였던 것도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계급을 넘어서서 인격적인 덕성을 갖춘 존재임을 지적한 것이다.
농월정
선비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초월할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하였다.
거연정에서 바라본 화림동 계곡
말이 좋아 선비지? 도를 실행한답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구 헛날 산천 수려한 깊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시나 읆으면서 음주 가무에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가 입은 옷은 누가 만들며 먹고 자는 데 들어간 물자는 누가 생산할 것인가? 백성의 고달픔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문자 몇 자 안다고 거들먹거리며 하얀 도포자락 휘날리며 양반 행세로 특별한 인격체라고 여기는 공자의 안빈락도 유교 이념을 숭상하는 유생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동호정
만약에 공자가 도를 실천하면서 자기가 입고 먹고 자는 물자는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 도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면 그래서 선비들이 유교이념을 공부하고 그 실천으로 열심히 논 밭에서 농사를 짓고 관아에 나가 백성을 관리하고 우매한 백성을 깨우치는 교육자가 되어 고을 백성을 이롭게 하였다면 선비란 얼마나 위대한 신분이였을까?
동호정에서 바라 본 화림동 계곡
마을 앞 들녁 가장 좋은 자리에 정자를 짓고 잠시나마 농사 일에 지친 심신을 쉬면서 다시 힘을 얻고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백성들과 교류하는 정자 중심에 선비들이 앉아 백성의 노고와 수고로움을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동호정 옆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화림동 계곡
아무것도하지 않으면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마치 특별한 사람처럼 심산 유곡에 정자를 짓고 안빈락도 한답시고 자기 안위에만 정신이 팔려 그들만의 향략을 공공연하게 즐겼으니 이런 엉터리 선비문화도 문화라고 할 수 있는가?
소나무가 울창하게 어울러진 동호정 앞 화림동 계곡 옥류
◎ 함양 화림동 계곡
함양 화림동 계곡은 해발 1,507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남강의 상류인 서상~서하로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 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안의면 광풍루까지 장장 60리(24km)에 이른다.
화림동 계곡 안내도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상류에 있는 거연정에서 농월정를 거쳐 광풍루까지 60리 계곡길을 따라 화림동 계곡을 만들면서 동쪽으로 함양군 서상면에서 서하면으로 흐르다 안의면을 거쳐 생초면에서 경호강으로 잠시 흐른 뒤 산청군을 지나면서 다시 남강이 되어 진양호로 흘러들고 낙동강을 만나 부산 - 김해를 거쳐 남해로 흘러간다.
화림동 계곡 표지석
함양 화림동계곡은 우리나라의 정자 문화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답게 계곡 전체의 넓은 암반 위에 수많은 정자와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곳이다. 계곡에는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 시 장렬히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농월정이 있고, 농월정 주변은 함양군에서 국민관광 단지로 조성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거연정이 있는 화림동 계곡
화림동 계곡은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가 남덕유산에서 서봉을 거쳐 육십령을 지나 백운산으로 뻗어 내려갈 때 남덕유산(1,507m)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거망산과 황석산 산줄기와 백운산과 대봉산 산줄기 사이로 흐르는 크고 작은 계곡 물을 모아 함양 서하면에서 안의면으로 동으로 흐르면서 이룬 계곡으로 물이 깨끗하고 기암들이 즐비하며 특히 계곡 바닥이 너른 암반을 거느리면서 주변에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거느려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거연정 풍광
화림동 계곡은 조선시대에 안의현(안음현)에 속하였는데, 영남 제1의 명승으로 꼽혔던 안의삼동의 하나였다. 안의삼동이란 안의현에서 경관이 빼어났던 세 곳의 동천(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즉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일컫는 말이다.
거연정 풍광
함양군 서상면에서 서하면으로 흐르는 남강 줄기를 타고 동으로 흐르는 화림동 계곡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이 사회질서를 지배하고 있을 때 선비들의 이상적 삶의 형태인 안빈락도로서 딱 맞은 곳이기도 하였다. 이런 안빈락도 삶의 최적지가 함양군 서상면과 서하면 그리고 안의면 일원이였다. 덕유산에서 육십령 지나 백운산까지 내리 뻗는 백두대간의 울창한 숲과 수려한 풍광이 빗어낸 자연 속에 뭍혀 그야말로 이상향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고장이 함양이였기 때문이다.
동호정 앞 차일암
안빈락도는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정신 중의 하나이다. 공자의 제자 중 특히 안회는 안빈낙도를 실천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 작품의 주요한 소재였던 강호가도와도 관계가 있는 안빈낙도 사상은 조선 시대의 가사나 시조에서 많이 드러나고 있다.
거연정과 기암사이를 흐르는 담소
조선 초기의 가사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군자의 미덕을 자연 속에 묻혀 읊기도 하고, 군신 사이의 충의 이념을 남녀 사이의 애정에 비유하여 읊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정극인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 ·송순(宋純) ·백광홍(白光弘) ·양사언(楊士彦) 등이다. 정극인의 <상춘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사는 은퇴한 관료의 생활을 읊은 대표적 작품이다.
◎ 화림재 전공(전시서) 유덕비와 화림재
본격적인 화림동계곡 정자를 둘러보기 전에 거연정 바로 옆에 화림재 전공(전시서) 유덕비와 화림재를 둘러보자 한다.
화림재 전공(전시서) 유적비
거연정(경남유형문화재 제433호)은 1640년(인조18년) 무렵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가 세운 서원 옆에 억새를 엮어 정자를 지었는데 그 정자가 바로 최초의 거연정이었다. 이후 거연정은 철폐된 서원의 자재를 이용하여 19세기에 재건립되었고, 20세기 초에 중수되었다고 전해진다.
화림재
화림재 현판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실학과 서예, 금석학을 공부하고 예서의 묵린에 이름을 떨친 형조판서 위당(威堂) 신헌(申櫶)공이 섰다.
▶ 화림재 전시서 공
조선 인조15년(1637) 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청 태종과 군신간의 삼전도 국치(國恥)가 일어나자, 깊은 산속에 은거코자 인조 17년(1639) 겨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공은 거창 영승리를 떠나 이곳 새들 봉전에 이르러서 들을 개척하고 이듬해 봄 화림재(花林齋)란 서재를 지었는데, 마을에선 신평재(新坪齋)라고도 하였다. 헌종7년(1841)에는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의 사림(士林)들이 화림재 전공의 7대조인 여말 충신 전법판서 채미현 휘 오륜(五倫)공을 제향(祭享)하자고 여러 차례 통문을 돌려 안의현 서쪽 20리 화림동에 서산사(西山祠)를 세웠다고 채미현실기에 전한다.
그러나 철종4년(1853) 봉전 돈 마을에 큰 화재가 일어나 서산사도 화염에 쌓이자, 한 서생(書生)이 죽음을 무릅쓰고 화림재 현판을 찾아 서원 뒤에 놓았는데, 현판은 그대로 남았으므로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이적(異蹟)이라 하였다. 하지만 고종5년(1868) 서원철폐 조령(朝令)에 의해 서산서원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현판은 거연정(居然亭)에 걸려 있다가 1995년 문중에서 중건한 화림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현판글씨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실학과 서예, 금석학을 공부하고 예서의 묵린에 이름을 떨친 형조판서 위당(威堂) 신헌(申櫶)공이 순조 때 썼다.
◎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명승 제86호)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금천(남강)의 상류인 화림동계곡에 있는 명승지이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에서 안의면을 거쳐 흐르는 화림동계곡은 조선시대에 안의현(안음현)에 속하였는데, 영남 제1의 명승으로 꼽혔던 안의삼동의 하나였다. 안의삼동이란 안의현에서 경관이 빼어났던 세 곳의 동천(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즉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일컫는 말이다.
화림교(무지게 다리)
거연정 일대는 높은 산지의 골짜기에 해당한다. 산지를 관통하는 골짜기는 대체로 협곡이 많지만 사면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뒤덮여 있다.
거연정
거연정 주변의 계곡과 계곡가의 바위는 평평한 너럭바위가 아니라 수직절리로 생긴 울퉁불퉁한 바위가 대부분이다. 희고 기묘한 형태의 바위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감돌고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소리가 인상적이다. 수직절리를 따라 깊이 파인 물길에는 수심이 깊은 소(물웅덩이)가 형성되어 있는데, 낮은 암벽 위에 자리를 잡은 거연정 바로 앞에는 특히 깊고 푸른 소가 펼쳐져 있다.
거연정 풍광
조선 후기의 학자 임헌회는 <고산문집>의 <거연정기>에 "영남의 명승 중 안의삼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 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며, 화림동 명승 중 거연정이 단연 으뜸이다." 라고 기록한 바 있다.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은 수려한 경관과 역사를 지닌 건축물이 어우러진 자연유산이자 문화유산으로, 2012년 2월 8일 명승 제86호로 지정되었다.
◎ 함양 거연정
거연정을 만나기 위해 화림교(무지게다리)를 지나는 순간 하나의 선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선경이 이곳에 숨어 있다니! 와~ 탄성이 절로 나온다.
황석산과 남덕유산을 그리 많이 올랐지만 차로 그냥 지나치다 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명승지를 놓치고 말았구나. 이제라도 이곳에와 이런 선경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거연정(居然亭)은 이름 그대로 자연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옛 선비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거연정 주위에는 바위를 뚫고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또 바위틈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도 행인의 바쁜 발걸음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자연경관 속에 정자가 들어가 있는 한폭의 그림같은 곳이다.
거연정은 1613년에 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정자로 가기 위하여 화림교(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다리에서 내려다 보는 검푸른 소와 기암괴석의 암반은 거연정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거연정은 고려 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가 처음터를 잡은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1872년 화림재의 7대손인 진사 전재학, 전개진 등이 세웠으며, 1901년에 고쳤다.
계곡가 바위 위에 세워진 거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형식 정자로, 중층 건물로 내부에는 벽체를 판재로 구성한 방을 1칸 두고 바깥쪽으로 마루를 둘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올린 겹처마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식이다. 정자의 네 귀퉁이를 받치는 각기둥은 바위의 모양에 따라 높낮이가 다르게 만들어졌다.
거연정은 하천의 암반 위에 세워져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거연정 주변 풍광 사진놀이
◇ 봉전교를 지나면서 바라 본 거연정 풍광
봉전교를 지나면서 바라 본 거연정이 있는 화림계곡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봉전교에서 바라 본 거연정 풍광 1
봉전교에서 바라 본 거연정 풍광 2
봉전교에서 바라 본 거연정 풍광 3
◎ 거연정 - (군자정) - 동호정 - 호성마을 - (경모정) - (황암사) - 농월정
거연정 탐방을 마치고 이제 동호정으로 향한다.
탐방로 입구 안내판
거연정을 탐방을 마치고 봉전교를 지나기 전 바로 아래 군자정과 의병장 정선전공 성범 공적비를 살피고 와야하는데 사전 공부 부족으로 놓치고 말았다. 귀중한 탐방지를 놓쳤다. 다음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살펴볼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다.
▶ 군자정
거연정 바로 아래 50m 지점에 있는 군자정은 조선 성종때의 성리학자이며 조선5현의 한분이신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군자정
▶ 의병장 전성범
1906년 5월 면암 최익현이 덕유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드높일 때 중군장으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07년 7월 경남 거창 일대에서 거의, 의병장이 되어 안의에서 왜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의병 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그후 진주 의병장 유종환과 합진하여 용담·금산·영동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1909년 2월 안의에서 그리고 4월에 거창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1911년 1월 양악(현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서 적과 교전 중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틈을 엿보아 일차 탈출할 수 있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끝에 1911년 3월 7일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 선비문화 탐방로 안내도
화림동 계곡 함양 선비문화 탐방은 거연정에서 광풍루까지 이어지지만 오늘은 거연정에서 동호정을 거쳐 농월정까지만 탐방하기로 한다.
함양군에서 이렇게 북쪽이 위로 가도록 안내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세상에 북쪽을 아래로 만들어 놓았으니방향이 완전히 다른 방향이 되었다.
함양군에서 바로 고쳐야 할 것 같다.
함양소방서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봉전교를 지나서
이제 화림동계곡을 따라 금천(남강)의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함양 선비문화 탐방길을 나선다.
금천(남강)을 따라 흐르는 화림동 계곡 탐방길은 편안하다. 오손 도손 세상 이야기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새로운 충전을 하는 시간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걷는 길이 행복이고 우정이다.
다곡마을 정자 다산정
다곡마을 현위치 : 이곳 안내도는 북쪽을 위로하여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
함양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야의 선비의 고장으로 이곳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7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된 금천이 흘러 깊은 화림동 계곡을 따라 8담 8정을 이루고 있었으며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 소를 만들고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을 거쳐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장장 60리에 이르며 우리나라의 정자문화의 보고라고 불러지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다곡마을 다산정에서 잠시 쉬어 간다.
다곡마을을 지나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터널을 지나고
대황길에서 아래로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
동호정으로 향한다.
동호정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면
잠시 데크길이 나오고
울창한 숲길 사이로 걷는 건강한 발걸음이 트레킹을 하는 묘미이다.
작은 실개천도 깨끗하기 이를데가 없다. 생명이 살아 있는 자연을 느낀다.
긴 데크길을 지나며 자연이 주는 음이온을 맘컷 들이마시고 하늘의 기운을 내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면 우주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한참을 숲길을 걸었나? 동호정이 나타난다.
동호정으로 가기 위해 화림동 계곡 청수를 건너고
건너고
놀다가
돌아와 다시 걷는다.
◎ 함양 동호정 (경남 문화재자료 제381호)
차일을 덮은 듯 냇물의 가운데 바위섬으로 넓게 펼쳐진 암반과 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동호정이 마주 서 있다. 차일암 주위에는 보기만 해도 빨려들 것 같은 짙은 담록색의 못이 있어 찾는 이를 섬찟하게 한다.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가 관직에서 물러나 낚시를 즐기며 지내던 곳에 만든 정자이다. 1895년 10대 손인 장대운, 장서부, 정서진 등이 만들고 그의 호를 따서 '동호정'이라 하였는데, 1936년 동호정을 다시 고쳐 지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장만리는 조선 선조 때 학자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10여 리를 업고 피난하였다. 이듬해 피난지에서 향년 40세에 병으로 타계했다. 선조는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영세불망자' 라는 교지를 내리고 오성원종공신으로 봉하였다. 선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정려(旌閭 : 예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이르던 말)를 명하였으며 황산마을 입구에 정려비각이 있다.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에 있는 정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단청이 화려하다. 나무계단이나 기둥은 도끼로 툭툭 쳐서 만들어 투박하고 거친 멋이 있다. 정자 아래에는 수정 같이 맑은 물이 흐르고, 수백 명이 앉을 만큼 널찍한 너럭바위 차일암에는 영가대, 금적대 등의 각서 글자나 무늬 등이 새긴 돌이 남아 있다.
이 곳 차일암은 암반이 평평하고 넓어 년중 불제자들의 방생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차일암에 붙어 있는 계곡 가운데의 솔숲은 행락철에 많은 사람들이 야영을 하는곳이다.
차일암에는 이렇게 가야금을 타고 피리와 노릴은 바위라는 금적암 이라는 각서가 새겨져 있다.
차일암은 동호정 앞 화림동 계곡 가운데 섬처럼 너른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탐방객들이 자연을 즐기기도 하고 불교 신자들이 방생을 하기도 한다.
◎ 동호정 - 호성마을 - (경모정) - (황암사) - 농월정 - 농월정국민광광단지
잠시 계곡을 벗어나 산골 마을 지나간다.
옥수수도 익어가고
참깨 밭엔 참깨 꽃이 예쁘게 피었다. 올 참깨 농사가 풍성하길 기원한다.
명아주
호성마을 가는 길을 따라 농로를 걷는다. 오늘 비가 예보되어 걱정이 많았는데,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살다 보면 이런 행운도 가끔은 있다.
함께 걷는 걷는 것은 우정이고 행복이고 나눔이다.
사과밭을 지나고
작년 사과 농사가 안 되서 사과 값이 금값이 되었다. 우리 같은 서민은 사과 먹어 본지가 오래 됐다.
올해는 사과 농사가 잘 되서 우리 같은 서민도 맛 있는 사과를 먹어 보길 기원한다.
호성마을 앞을 지난다.
호성마을 지나 이제 경모정으로 향한다.
화림동 계곡 탐방 길에는 이렇게 데크길을 조성하여 탐방객이 편안하게 걸을 수있도록 잘 정비하여 놓았다.
숲속 긴 탐방길을 걸으며 자연의 기운을 가득 담는다.
◇ 경모정
호성마을을 지나 300m 정도를 지나면 서하면 경모정이 나온다.
경모정은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의 후손들이 1978년도에 건립한 정자로서 소와 어우러진 주변의 넓은 암반들로서 많은 행락객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 황암사
황암사은 정유재란 시 황석산의 산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 장렬히 순직한 인근의 주민들과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던 사당을 함양군에서 2001년도에 복원한 것으로 저절로 우리 조상들의 순국 정신에 머리가 숙여지는 곳이다
황암사를 멀리서 당겨 담았다.
◎ 함양 농월정(弄月亭)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옛날 우리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간 곳이다.
이 곳 녹수를 사이에 둔 양쪽 산기슭의 송림은 거문고 현을 퉁기는 듯하며, 길게 늘어선 수양버들은 천줄기의 실로 낚시질을 하는 듯 보인다.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란 반석이 펼쳐져 있다. 반석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금물결을 이루는 이 곳에 세워진 고색창연한 농월정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월연암이라 이름 붙은 너럭바위 위로 미끄럼타듯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물길따라 골이 깊게 패였다. 월연의 맑은 물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개구쟁이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 지나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선 선조때 문과에 급제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시 분전 장렬히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이다.
농월정 정자는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인데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의 풍류에 대한 면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농월정은 그 경관이 너무나 뛰어나 지금은 국민관광단지로 지정이 되어 날로 늘어나는 탐방객들의 편리 도모를 위하여 군에서 개발하고 있는 곳이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때의 학자인 함양 안의면 성북마을 출신인 지족당 박명부(1571~1639) 공께서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 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시면서 방대한 너럭바위(넓은바위)와 주변 경관이 수려한 이 곳에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하셨던 곳이다.
농월정은 지족당 박명부가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 등을 지내고 말년에 왕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고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쉬던 곳으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 앞 오른쪽 암반에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 라는 글자를 후손들이 힘있게 새겨 놓았다. 달 맑은 고요한 밤에 암반 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잔의 술로 달을 희롱하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으며 계곡의 위쪽으로 황석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 농월정 국민관광단지
농월정 국민관광단지 현위치
남덕유산에서 시작한 금천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아름다운 소나무 숲과 어울러진 함양의 3개 동천 중 하나인 화림동 계곡에 있는 거연정 - 동호정 - 농월정 정자를 탐방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황석산과 남덕유산을 그리 많이 오르면서 이런 명승을 이제야 돌아보는 것이 아쉽지만 천만 다행이다. 다만 오늘은 시간이 없어 황석산에서 왜침에 항거하여 장렬히 목숨을 바친 의병들을 모신 황암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나중에 시간을 내어 꼭 한번 드려다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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