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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역사명품길

2024.05.15. 서울 한양도성(혜화문-흥의지문-광희문-남산-백범기념관-숭례문) 탐방

by 하여간하여간 2024. 5. 16.

◎ 한양도성 2차(낙산구간과 남산구간)을 둘러보면서

 

2024.05.01. 근로자의 날 한양도성 1차 1. 인왕구간 - 2. 백악구간 탐방에 이어 오늘 2024. 05. 15. 부처님 오신 날이며 스승의 날을 맞아 한양도성 2차 3. 낙산 구간 - 4. 남산구간을 탐방하였다. 이로써 한양도성 길을 한 바뀌 빙 돌아 보았다. 탐방 후 소감은 한마디로 "와~ 위대하다" 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길 때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경북궁 터를 궁궐터로 잡고 한양도성을 쌓은 이유를 남산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알았다. 남쪽으로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그 광활한 터에 안산과 인왕산 그리고 북악산과 낙산으로 이어지며 그 뒤로 병풍처럼 이어지는 보현선과 북한산 줄기는 지금의 경북궁을 안방 같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경북궁은 참으로 안락하고 포근한 자리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빙 둘러 한양도성을 쌓았다. 조선의 종묘사직이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자자손손 만대에 융숭하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남산에서 바라 본 인왕산 - 북악산 - 낙산으로 이어지는 산능선 과 그 배후에 보현산과 북한산 줄기가 경북궁을 안방처럼 감싸고 있다.

 

돌과 흙으로만 쌓은 조선의 축성 기술은 놀랄만 하다. 토목공학적 해석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1396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구간 구간을 정하고 동시에 쌓은 축성 기술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구간 마다 사용한 돌의 모습이 다르고 축성한 모양이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연의 지형을 활용한 한결 같은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튼튼하게 축성을 하였으니 이는 거대한 국가 사업이고 참여하는 백성은 끌러나온 노역이 아니라 백성으로 자부심을 갖고 참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한 백성들에게 노임을 어떻게 지불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당시의 상황으로 그냥 나라의 명에 의해 한양까지 온 충청지방의 음성지역 백성들은 신이 났을까? 어쩔 수 없이 이 공사에 참여 했을까? 어디 음성 사람들만이던가. 전국 각지에서 도성 쌓는데 동원되었으니 그 수고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들은 힘들었을까? 행복했을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선시대에 더 강화되고 튼튼해진 도성이 일제강점기에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헐리우고 훼손되고 방치되어 많이도 허물어졌다. 특히 남산 아래 신궁을 짓는다는 이유로 도성을 모조리 헐어버린 역사적 흔적 앞에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치를 떨었다. 남의 나라를 부당하게 침략하는 것도 모자라 그 나라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일본인들의 저급한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공력으로 만들어진 문화이기에 비록 전쟁을 하드라도 역사문화는 파괴해서는 안된다. 전쟁은 정치적권력과 싸움이기에 정식으로 나라에서 만들어진 군과의 싸움이지 문화와의 싸움이 아니다. 죄없는 백성과의 싸움도 아니다. 어린 아이들과는 더더욱 아니다. 전쟁을 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병원을 공격하고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키며 문화를 파과하는 전쟁은 어떤 경우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일본은 참으로 비열한 나라이고, 잘 못 된 나라이며, 잘 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몰염치한 나라이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도성 외각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성길이다. 주변의 산세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돌무리 하나 하나를 서로 짜맞춤하여 쌓은 모습을 보면 이 성을 쌓은 석공들과 인부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이 성을 쌓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한양도성을 돌면서 성 주변으로 마라톤을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문화 예술를 즐기러 오는 사람, 연인의 손을 잡고 가족의 손을 잡고 오르는 사람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성을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 숨을 쉬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양도성은 지금도 숨을 쉬고 앞으로도 영원히 숨을 쉴 것이다. 한양도성이 명실 상부한 서울의 역사 관광명소로 환영 받기를 바라고 잘 보전 유지 되길 바란다. 세계적인 문화유적으로써 손색이 하나도 없다. 제일가는 세계적 문화유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 서울 한양도성[사적]

 

1. 인왕 구간 :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월암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인왕산 순성 안내쉼터-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4.0km)

 

2. 북악 구간 :  창의문-창의문 안내소(폐쇄)-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폐쇄)-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4.7km)

 

3. 낙산 구간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 나무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낙산공원 놀이마당-낙산정상-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 (2.1km)

 

4. 남산(목멱산) 구간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이용자 안내센터-N서울타워 -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건립중)-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4.2 km)

 

 

 

1)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벽에는 시기별 축조기술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의 되어 왔다.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규모의 성곽유산서울 한양도성은 고려 고구려 도성 형식에 기원을 두고,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된 독창적인 한국 도성으로서의 위상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한 성곽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과 행정시설, 시장시설, 거주지를 포함하는 한국적 도성체계와 축조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600년의 역사층위가 축적된 유산서울 한양도성은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있어 축조 당시 조선시대 도성 형식의 전통과 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현재 12.854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구간 가운데 일부는 지하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조선왕조의 수도로 도성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왔으며, 시기별 축조형태와 수리기술의 역사적 증거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서울 한양도성의 입지는 풍수에 바탕을 두고 한반도의 지형체계를 고려하여 결정되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건설되었다. 석재로 축적된 성곽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도시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한양도성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성곽을 축조했는데, 구간마다 축조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보존을 위해 내사산의 지형을 잘 보존하여 왔고, 도성 안의 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내사산의 수종들을 관리하여 왔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한양도성은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울 사람들의 삶의 공간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앙, 의례, 문예, 놀이의 장소였다.

 

2) 진정성(authenticity)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오백여 년 동안 수축과 수리의 과정을 통해 지속해서 관리되어왔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시기별로 구별되는 재료와 축조기술이 성곽의 형태와 디자인으로 드러나 있어서 오백 년의 역사적 층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형과 일체화된 구조물로서의 존재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서, 내사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곽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서울 한양도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숭례문이 방화로 부분 소실되었는데, 기존의 실측기록을 토대로 장인기술에 의하여 전통기법으로 복원되었다. 흥인지문과 더불어 도성의 성문 건축물의 원형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서울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지세와 함께 잘 보존되어있어서, 성곽의 입지 및 제도, 성곽축성기술, 성곽시설 등이 잘 보존되고 있다. 현대 서울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면도 도성 경계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장소적 의미가 잘 보존되고 있다.

 

3) 완전성(integrity)

 

서울 한양도성은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형식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전체 구간 중 약 70% 정도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형태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성벽과 더불어 성문·암문·수문·봉수대 등의 서울 한양도성을 구성하는 성곽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서울 한양도성의 내부에는 도성을 구성하는 궁궐과 종묘·사직단 등의 주요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현재 한양도성은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가문화재로서 관리되고 있으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성곽의 잔존 및 훼손구간에 대한 지속적인 복원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종합보존·관리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하고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의 관리지침에 부합하는 기준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제 낙산구간 혜화문에서 부터 탐방을 시작한다.

◎ 한양도성 낙산구간

 

 

구간 : 혜화문 ~ 흥인지문
거리 : 2.1km
소요시간 : 약 1시간 (도보)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4m)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특히 가톨릭대학 뒤편 길을 걷다보면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다.


■ 24시간 개방

■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을 지날 때에는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 나무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낙산공원 놀이마당-낙산정상-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

 

◎ 낙산구간 출발 

 

낙산구간 출발점 현위치

 

낙산구간 시작지점 계단

 

 

인증하고

 

낙산 초입 한양도성

 

축성시기가 확실히 다르다. 처음 축성과 보수 과정이 잘 보이는 역사의 한양도성

 

 

아름다운 한양도성

 

 

확연히 다른 축성의 모습

 

낙산구간을 지나면서 돌아본 성북동 방향 풍광! 혜화문과 성북동 그리고 북악팔각정과 북한산 줄기가 그림 같이 다가온다.

 

낙산구간은 성곽의 아름다움이 많은 구간이다. 줄곧 성곽의 아름다움에 빠져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고 걷고 있다.

 

삼선동 369 성곽마을을 지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성곽

 

인증 한 장 하고

 

 

◎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충청도의 음성현(지금의 충북 음성군) 백성들이 공가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 성벽을 쌓은 지방이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다시 올라와 쌓게 했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첫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 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 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9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음성현(지금의 충북 음성군) 각자성석

 

 

영동현(지금의  충북 영동군) 각자성석

 

 

장수마을 지나서

 

◎ 장수마을

 

낙산공원 아래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뉴타운 예정지였으나 주민투표로 뉴타운 재개발을 중단하고 마을재생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후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2013년 도시가스 공급 공사가 완료되고, 마을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마을재생 

 

주민들이 마을의 특성과 역사적 가치를 살리면서 낡은 주택과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마을을 전면 철거하고 아파트를 짓는 기존의 재개발 방식과는 다르다. 북정마을,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이 마을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

 

1) 장수마을 주민 사랑방 (http://cafe.daum.net/samsun4)

정든 이웃과 함께 살고 싶은 장수마을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같이 토론하고, 정보와 자료를 공유한다.

 

2) 마을박물관

 

한양도성과 함께해 온 장수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는 주민들의 삶을 기록·전시하기 위해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이다. 주민에게는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관광객에게는 성곽 마을의 보전가치를 깨닫게 한다.

 

3) 삼군부 총무당

 

<유형문화재 제37호> 삼선 상상어린이공원 내에 위치한 커다란 한옥이다. 삼군부는 조선 말기 변방 경비와 궁궐 수비, 도성 순찰 등의 군무(軍務)를 통할한 최고 군령 기관으로 관아(官衙) 건물은 광화문 바로 앞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1880년 삼군부가 폐지된 뒤에는 통리기무아문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 사령부 건물이 되었다가 1930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삼군부 총무당은 세종 때 철폐된 삼군부를 흥선대원군이 1865년(고종 2년) 부활시키면서 그 청사로 1868(고종 5년)년에 지은 건물로, 과거 군무를 통솔하고 변방에 관한 일까지 관장하였다.

그 후, 1880년에 삼군부가 혁파된 뒤에는 조선 말 정치. 군사를 총관하던 관청인 통리기무아문과 시위대 청사로 사용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보병 사령부 건물로 쓰였다.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건물의 기둥머리는 새 날개 처럼 뻗어 나온 익공 형식으로 짜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었다.

이조 말기의 건축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 지형의 모습을 그대로 이용하여 높고 낮음을 따라 축성된 도성이라 참으로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셀카 인증

 

 

 

 

사색의 공간 낙산 순성길

 

낙산은 풍수지리상 서술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에 해당합니다. 드러누운 용처럼 뻗은 순성길을 따라 걸으면 발 아래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밥이 되면 성곽을 따라 불이 켜지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현위치

 

내성으로 들어가는 한양도선 내부 순성길 계단

 

내성으로 들어가기 전 지나온 낙산 외부 순성길을 돌아 보고

 

흥인지문에서 혜화문 방향으로 순성길을 걷는 사람은 앞으로 배부 순성길이 없으니 이곳에서 문 밖으로 나가주세요 라는 안내판

 

그러나 나는 혜화문에서 흥인지문으로 순성길을 걷고 있어서 내부로 들어왔다.

 

 

◎ 낙산공원 조망지점

 

서울중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 온다. 서울대학교 병원과 멀리 경북궁, 인왕산과 안산이 저 멀리이다.

 

낙산공원 종합안내도를 지나서

 

낙산공원 조망지점

개운산 방향 조망이 참 아름답다.

 

낙산구간 내부 순성길

낙산은 124.4km정도의 낮은 산이다. 서울시민들이 옹기 종기모여 사는 시골 동네 같은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낙산 순성길을 따라 이야기 거리를 만들며 한양도성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낙산 순성길을 따라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이화동 마을

 

순성길 성벽 아래에는 계절의 섭리에 어김없이 예쁜 꽃들이 피고

 

이화동 마을 하늘 정원길

 

◎ 이화마을

 

 

낙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이화동은 산비탈을 따라 가파른 계단이 나 있고, 좁은 골목에는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하늘동네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2006년 12월,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낙산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지고 조형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마음을 담은 작업이었기에 벽화는 동네의 상징이 되었고, 이화동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가장 가보고 싶은 마을이 되었다.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많은 관광객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으나 관광객으로 인한 소음피해, 마을경관 훼손, 쓰레기 무단투기 등으로 인해 주민들의 불편함도 증가하고 있다. 소박한 주민들의 동네, 이화동 벽화마을을 아끼고 보전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1) 공공미술 낙산 프로젝트

 

 

1970년대 이후 이렇다 할 신규개발 사업이 없어 낡은 건물들로 가득했던 동숭동 일대가 2006년 문화관광부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기획사업인 ‘ART in City 2006-낙산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미술 명소로 거듭났다. 공공미술이란 말 그대로 공중(公衆)을 위한 미술로서 거리나 공원 등 시민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에 설치, 전시되는 미술작품의 창작행위와 창작물을 말한다. 70여 명의 작가가 100여 일에 걸쳐 마을 내 주택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도심부가 내려다보이는 가드레일을 따라 조형물들을 설치하는 등 70여 개의 작품을 제작했다. 오래된 건물과 현대적 미술작품이 어우러진 이 동네는 그 자체로 거대한 박물관 겸 미술관이다.

 

2) 이화장

 

 

<사적 제497호>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한 뒤 대통령에 취임할 때(1947~1948)까지 사저로 썼던 집이다. 이 집의 별채는 조각당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다. 현재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 내외가 거주하며,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공사 중이며 2015년까지 관람예약이 불가하다.

 

3) 홍덕이 밭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효종)이 볼모로 잡혀 청나라 심양에 있을 때, 홍덕이라는 나인이 김치를 담가 매일 대군에게 올렸는데, 귀국 후 왕위에 오른 대군은 그 맛을 잊지 못하여 낙산 아래 밭을 홍덕에게 주고 계속 김치를 담가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서울시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낙산공원 아래에 20평 남짓 되는 작은 밭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순성길 이화마을은 급경사 내림길이다. 급경사 차도에 위태 위태 주차도 많이도 해 놓았다. 햔양도성과 함께 살아가는 이화마을 주민들이 부럽다.

 

 

넓은 공터가 나오고

 

한양도성 박물관이 눈 앞에

 

다시 올려다 본 도성길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 한양도성의 아름다운 모습

 

도성길엔 감나무도 울창하고

 

흥인지문이 어렴풋이 나타난다.

 

와~ 멋진 풍광

흥인지문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고 넓은 흥인지문 공원 언덕과 흥인지문 그리고 동대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 온다.

 

흥인지문

 

흥인지문

 

인증 한 장

 

한양도성 박물관과 흥인지문 공원

 

흥인지문

 

현위치

 

흥인지문

 

◎ 서울 흥인지문

보물

 

서울 흥인지문은 1398년(태조 7년)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년) 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의예지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곽과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웅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 문루 : 궁문, 성문 따위의 바같문 위에 지은 다락집

* 웅성 :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흥인지문

 

흥인지문

 

현위치

 

이곳에서 근 30분을 헤멨다. 광희문으로 가는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신평화패션타운쪽으로 가면 되는 것을 모르고 동대문시장쪽으로 방향을 잡다가 다시 돌아오는 수고로움을 했다. 후발자는 참고하길 바란다.

 

흥인지문

 

흥인지문

 

청계6가 교차로인 오간수교로 가는 중에 시장 통을 지난다.

 

오간수교

 

◎ 오간수문

 

오간수문(五間水門)은 흥인지문  청계천에 건설되었던 수문으로 5개의 구멍이 있어 오간수문이라 불린다. 오간수문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초기 한양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며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청계천 복구 사업으로 정비가 잘 되었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에 오간수문이 있었던 곳이다.

 

옛 오간수문과 영조때 오간수문을 준설한 그림이 벽에 설치되어 있다.

 

 

청계천은 복개되어 천이 오염되고 썩어 죽었던 천이였는데 청계천 복구 공사를 통하여 복개한 시설을 걷어내고 물길을 살려 이제는 잉어가 헤엄치치고 사는 살아있는 물이 흐르고있다.

 

평화시장을 지나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쪽으로 향한다.

 

이곳은 옛날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던 자리이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이곳에 디자인 플라자를 세워 대한민국 디자인의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동대문 시장이 패션의 중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이간수문

 

이간수문은 조선 초부터 남산의 개울물(남소문동천)을 도성 밖으로 흘러보냈던 시설이다. 2칸의 반원형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간수문이라 부른다. 이간수문은 배수시설 외에도 성곽의 일부로서 방어기능도 있었는데 수문군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운동장의 건립으로 파괴된 채 오랜 기간 땅속에 뭍혀 있었으나, 2009년 동대문다자인플라자(DDP) 건립을 추진하면서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간수문은 한양도성과 연결되어 있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을 지나고

 

한양도성 중간지점 현위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가운데로 연결되는 도성길을 걷는다.

 

현위치

 

 

 

◎ 성화대

 

성화는 최초로 이용된 1955년 개최된 제36회 전국체육대회로, 최종 주자는 고 손기정 이였으며, 성화 전국일주는 1969년 제 50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1968년 동대문운동장 보수공사 시 야간 조명 시설과 성화대 등이 설치되었으며, 철근에 콘트리트를 입혀 제작 하였고 상층부 지름은 2.15m, 하층부 지름은 1.15m 이고 살은 16개로 구성되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위치한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방문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순성길은 동대문역사문화 공원 끝에서 90도 오른쪽으로 꺽어 걷는다.

 

DDP 종합안내판을 지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교차로에서 광희문을 향하여 걷는다.

 

광희문

 

광희문

 

 

광희문

 

한양도성 동남쪽 문으로, 시구문 또는 수구문 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본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이곳에 고쳐 지었다.

 

현위치

 

광희문 바로 옆에 세겨진 각자성석

 

 

◎ 광희문성지

 

광희문은 1396년 한양 도성을 창건할 때 세운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위차한 4소문 중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춘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일컽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소문과 함께 한양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 보내는 문으로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렀다. 

박해시기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도성안으로 끌려들어 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순교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에  버려졌으니 실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광희문 밖은 단순이 조선의 죄수와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던 곳이 아닌 순교자들의주검과 피를 통해 성화된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광희문은 6.25 한국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 남산(목멱산)구간

 

 

구간 :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거리 : 4.2km
소요시간 : 약 3시간 (도보)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이 산에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하였다. 한강 남북을 포괄하는 현재 남산은 서울의 행정구역상 중심부에 해당하며 정상 부근에는 서울의 지리적 중심임을 표시하는 ‘서울 중심점’이 설치되어 있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으나 1970년대 이후의 성곽 보존 · 정비 사업과 1990년대 중반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현재는 옛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하였다.


■ 남산-24시간 개방 (신라호텔~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안쪽 구간 09:00~18:00)


■ 장충체육관 뒷길은 주택 지역이므로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이용자 안내센터-N서울타워 -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건립중)-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이제 남산구간( 광희문 - 장춘당 공원 - 남소문 터 - 남산공원 - N서울타워 - 국사당 - 봉수대 - 한양도성유적전시관 -  백범광장 - 숭례문) 을 탐방한다.

 

광희문 현위치

 

여기서 한참을 헤멨다. 순성길 N서울타워로 향한다.

 

광희문화마을 안내

 

이곳에서 다시 성 밖으로 향한다.

 

 

성밖길을 따라 순성길 N서울타워로 향한다.

 

다시 마을 길로 접어들고

 

◎ 한양도성 성곽멸실구간

 

이곳은 광희문과 다산성곽을 잇는 성곽구간입니다.

광희장중 성곽마을은 옛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역사 문화 도심지이나, 일제강점기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문화주택 조성 과정에서 대부분의 성벽이 멸실 훼손되거나 주택 아래로 묻혀있지만 성곽 멸실 구산을 따라 걷다보면 잔존해있는 성곽을 볼 수있다.

 

멸실구간 주택 담장으로 쓰이고

 

원룸 뒤 옹벽으로도 남아있다.

 

장충체육관 앞이다.

 

순성길 N서울타워로 향한다.

 

현위치

 

다시 한양도성 외곽길로 접어 들고

 

인증 한 장

 

참 아름다운 한양도성 지나온 방향

 

 

참 아름다운 한양도성 앞으로 가야할 방향

 

경상도 경산현(지금의 경북 경산시) 각자성석

 

 

 

삼십수 음시 : 13번째 공사구간임을 뜻하는 각자성석

 

 

경상 흥해군(지금의 포항시 흥해읍) 각자성석

 

성돌의모양과 축성 기법이 확연히 다르다.

 

현위치

 

현위치

 

테니스 연습장 옆 현위치

 

테니스장 옆을 지나고

 

데크길을 지나

 

극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놓쳤지만 저기 구석이 남소문 터가 있던 곳이다.

 

다시 한양도성 순성길 방향을 따라 

 

반얀트리클럽엔스파 서울을 돌아서

 

오아시스 아이스링크를 지나

 

한국자유총맹 앞

 

이 땅의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건국대통령 이승만 정신을  기억합니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지만 김일성과 정치적 대결로 광복 후 대한민국을 남북으로 분단시키고 결국은 김일성의 무력침략으로 6.25 한국전쟁을 일으나게 한 한쪽 책임자 였다는 점에서 그 책임이 적다 할 수 없는 대통령이다.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북한에 협조했거나 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 아래 무참히 희생시키는 과오를 범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백성들을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연좌재를 적용하여 사회적 활동을 극도로 제한하고 감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 후로도 5.16 혁명을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까지 실로 오랜 시간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숨소리 죽여 살았던 백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밖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건국대통령이라고 숭상하고 찬양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역사를 올바로 알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질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데 지금도 버젓이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 분통이 터진다. 

 

순성길은 남산공원을 향하고

 

국립극장을 지난다.

 

본격적인 남산공원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 길을 따라 순성길은 오른다.

 

남산공원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소나무 사이로 향양도성이 빼꼼이 얼굴을 내민다.

 

현위치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

 

이곳 데크 길을 따라 한양도성길은 매우 급경사로 오른다.

 

한양 도성은 남산 산줄기를 따라 급경사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급하게 경사지게 형성되어 쌓아졌다.

 

구간마다 성돌의 모양이 다르고 축성 방법이 다른 급경사 구간을 오르면서 한 장

 

급경사 도성길

 

각자 성석

 

급하게 올라온 도성길을 내려다 보며 한숨을 돌리고

 

병꽃일까?

 

현위치

 

도성길은 외곽으로 걷는 길은 막히고 계단을 따라 전망대로 오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한양도성

 

인증 한 장

 

이 구간은 사람들이 자주 왕래를 하지 않는 구간이다.

 

왜 이곳은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을까?

 

일부는 한양도성 옥개석기 무너져 방치되고 있다.

 

철조막을 딸 험한 길을 걷는다.

 

미군통신부대인가 보다

 옛날에는 저곳에 한양도성이 있는데 미군이 주든하는 관계로 우리의 행정력이 못 미치는 곳인가 보다. 한참을 아스팔트 길을 따라 내려오니

 

다시 만난 한양도성

 

이곳은 옥개석을 시멘트로 옹색하게 복원하여 놓았다.

 

서울 남산 타워를 향하는 한양도성

 

남산순환도로 잠시 한양도성은 끓겨지고 도성 바깥을 볼 수 있는 구간에서 한장을 담았다.

 

현위치

 

한양도성 순성길은 남산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잘 자라고 있는 순성길

 

각자성석

 

소나무 숲길

 

각자성석

현위치

 

남산공원 안내센터에서 돌아본 한양도성

 

 

남산공원 안내센터

 

버스정류장

 

 

다시 한양도성은 이어지고

 

도성을 따라 급하게 오른다.

 

남산타워로 오르는 도성

 

남산타워를 눈앞에 두고 급하게 도성을 따라 오르다 보면 

 

 

드디어 남산공원 전망대에 도달한다.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확 터진다.

 

 

현위치

 

지나온 한양도성 외곽을 바라보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길 때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경북궁 터를 궁궐터로 잡고 한양도성을 쌓은 이유를 남산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알았다. 

 

 

남쪽으로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그 광활한 터에 안산과 인왕산 그리고 북악산과 낙산으로 이어지며 그 뒤로 병풍처럼 이어지는 보현선과 북한산 줄기는 지금의 경북궁을 안방 같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경북궁은 참으로 안락하고 포근한 자리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빙 둘러 한양도성을 쌓았다. 

 

조선의 종묘사직이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자자손손 만대에 융숭하게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인증 한 장

 

남산공원에는 사랑을 맹세한 자물쇄통이 빽빽히도 걸려 있다. 이 많은 사랑의 언약이 잘 지켜지길 바래 본다.

 

 

남산공원 팔각정

 

남산 타워를 바라보고 오래전 이곳의 추억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 나 또한 아련한 추억을 새겨 본다. 배가 고프다. 점심을 오랜만에 혼자 근사하게 주문하고 맥주 한캔으로 피로를 달랜다.

 

다시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하산길을 걷는다.

 

팔각정에서 이어지는 한양도성을 따라

 

봉수대를 지나서

 

◎ 목멱산 봉수대

 

목멱산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물렀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봉수제도은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봉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도,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 부터 제 5봉수대 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얀주아차산, 제2봉수대는 겅상도-충청도 - 광주 전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 -황해도 해안 - 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 - 충청도 - 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은 1993년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개 봉수대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

 

급경사 하산 도성을 따라 걷는다.

 

오후에 비가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북쪽하늘이 시커멍게 구름이 오른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비구름 바람이 불어온다.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에서

 

비가 올까 발걸음이 빨라진다.

 

한양도성이 복원되지 못한 구간인가?

 

한참을 하산하니 한양도성이 흔적을 남기며 야외 유적지로 이어진다.

 

한양도성 야외유적지

 

◎ 한양도성 야외 유적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서는 2013~2014년 발굴 조사를 통해 드러난 한양도성 성벽을 살펴볼 수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의 수도 성곽으로 1396년 건설되었는데, 이곳의 성벽은 그 남서쪽 구간에 해당한다. 성벽은 숭례문에서 시작해 남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남산지역에 있었던 한양도성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신궁이 세워지고, 1960~70년대 남산 식물원과 동물원 등이 만들어지면서 오랜 세월 잊혀 있었다. 2009년부터 남산 지형을 되살리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발굴 조사를 통해 그동안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성벽의 유구가 땅속에서발견되었다. 현재 성벽은 발굴 상태 그대로 전시되어 있고, 함께 발견된 조선 신궁의 건물 터와 방공호, 분수대도 관람할 수 있다. 남산은 한양도성과 함께한 500년 조선 왕조의 변화와 일제 강점기 훼손의 흔적, 그리고 현재 서울이 걲었던 수 많은 사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 조선 신궁 배전터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조선 신궁 건물 15개동 중의 하나인 배전의 기초 구조물이다. 조선 신궁은 일제가 신사로, 배전은 일반인들이 참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곳이다. 1920년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5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산 자락에 쌓았던 한양도성 성벽의 상당분분이 파괴되었다. 배전의 기초는 2013년 남산을 발굴조사할 당시에 발견되었으며, 현재까지 유일하게 조선 신궁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이다. 배전은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의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의 기둥이 세워진 건물이다.

 

 

◎ 한양도성의 구조

한양도성의 뒤채움 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산 자락의 성벽은 경사지를 활용하여 한쪽에만 쌓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를 편축성이라 한다. 면석으로 이벽을 쌓고, 성벽의 안쪽과 자연 지형, 토축 사이를 흙과 잡석으로 채웠는데, 이를 뒤채움이라 한다. 면석은 사각뿔 모양으로 뒤뿌리를 길게 빼고, 그 사이사이로 잡석을 넣어 성벽과 지형이 단단하게 맞물리도록 했다. 

성벽은 땅속에 뭍혀 상부의 면석을 받쳐 주는 기저부, 땅 위로 성돌이 켜켜이 쌓여 있는 체성, 맨 위쪽의 여장으로 구성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1단의 지대석과 3단의 면석인데, 오른쪽 그림을 통해 한양도성 성벽의 본래 높이와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규모를 비교할 수 있다.  

 

한양도성 야외 유적 전시관. 발굴조사 당시 모습 그대로를 전시하고있다.

 

◎ 한양도성의 시기별 성돌 변화

 

이 구간에서는 한양도성을 쌓아 올린 기술의 변화와 다양한 성돌 모양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곳 성벽의 맨 아래에는 가로가 긴 대형 기초석이 놓여 있는데, 이 기초석은 14세기 태조 때 쌓은 성돌이다. 그 위에 올려 쌓은 성돌들은 좌우가 서로 다르다. 왼족의 성돌은 비교적 작고 납작하게 생겼는데 15세기(세종)에 쌓은 것이고, 오른쪽의 성돌은 약 40~45cm 크기로 18세기(숙종)에 쌓은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성돌의 크기가 60cm로 아주 커진다. 5세기에 걸친 조선 왕조 축성 기술의 발전 단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점이 남산 한양도성 유적의 특징이다.

 

 

 

◎ 한양도성 축성에 사용된 구조물 흔적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이다. 지름 15~40cm 정도이며, 깊이는 최대 55cm이다. 이 구멍들은 2~3개씩 작을 이루며 성벽과 나란히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부 구멍에서는 나무 기둥의 밑동도 남아 있어다. 남산 한양도성 유적에서는 총 137개의 기둥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구멍 흔적의 보호를 위해 모두 보전처리하였다. 일부는 관람객들이 볼 수 있도록 노출하고, 나머지는 모래를 채워 다시 땅속에 묻었다.

 

 

야외유적 안내 를 지나서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동상과 안의사 광장을 둘러보고

 

 

한양도성 흔적을 따라서

 

길게 이어지는 한양도성 흔적을 따라서 걷다 보면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나오다.

 

 

이시영 선생 동상도 둘러보고

 

현위치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 

 

이곳의 성돌은 확연히 다르다.

 

현위치

 

도동삼거리 건널목을 건너서

 

숭례문을 향해 한양도성 순성길은 이어진다.

 

숭례분을 향해 이어지는 한양도성

 

용궁사를 지나고

 

드디어 숭례문에 도착

 

숭례문에 도착하는 순간 비가 내린다. 다행이다. 숭례문에 대해서는 지난번 1차 탐방한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정리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한양도성 2차 탐방을 마무리하는 인증을 숭례문을 배경으로 남기고 한양도성 탐방을 마친다.

 

한양도성을 둘러보고 나서 참으로 위대한 문화유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훌륭한 역사 문화 유적이 서울 한 복판에서 서울 시민들과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 위대했다. 자랑스럽다.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제일가는 문화유적이다. 500년 조선 왕조의 위대함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