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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역사명품길

2024.05.01. 한양 도성길(숭례문-인왕산-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

by 하여간하여간 2024. 5. 2.

◎ 한양도성을 둘러보면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을 건국한 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해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청룡(낙산) 우백호(인왕산) 배산(북악산)임수(한강)의 명당 중의 명당인 지금의 경북궁 자리에 궁궐 터를 잡고 정도전의 계획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 침략에 대비하는 4대문과 4소문을 둔 한양도성을 쌓았다. 

 

당시에 참여한 인부가 전국에서 약 20여만 명이라니 당시의 사정으로 얼마나 큰 토목공사였는가? 그것도 100여일의 아주 짧은 기간에 완성을 하였으니, 당시 한양도성을 쌓은 관리자나 참여하는 인부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당시로 돌아가 함께 숨쉬고 싶었다. 나 또한 당시에 살았다면 이곳에 와서 어느 곳일지 모르지만 등에 피가 터지도록 돌을 나르고 흙을 날라 도성을 쌓았겠지. 

 

한양도성은 참으로 귀중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사적지로 꼭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었던 곳이다. 조선건국 당시 천만년 대대 손손 조선의 번영을 기원하며 궁궐 자리를 잡고 빙 둘러 성을 쌓은 정도전의 심정으로 한양도성을 둘러보고 싶었다. 지금 보아도 규모가 큰 궁궐과 도성을 볼 때 당시의 정도전의 꿈이 얼마나 원대하고 컸을까? 를 생각한  순성길이다.

 

오늘 한양도성 역사탐방은 숭례문에서 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숭례문 - 돈의문 터 - 인왕산 - 창의문 -북악산 - 숙정문 - 혜화문까지이다. 보통 하루에 한양도성 모든 코스를 걷지만 나는 반절만 걷기로 했다. 천천히 둘러 보면서 한양 도성과 관련된 역사적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어서이다.

 

◎ 서울 한양도성[사적]

 

1. 인왕 구간 :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월암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인왕산 순성 안내쉼터-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4.0km)

 

2. 북악 구간 :  창의문-창의문 안내소(폐쇄)-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폐쇄)-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4.7km)

 

3. 낙산 구간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 나무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낙산공원 놀이마당-낙산정상-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 (2.1km)

 

4. 남산(목멱산) 구간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이용자 안내센터-N서울타워 -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건립중)-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4.2 km)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 한양도성에는 한국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같은 해 음력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 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처음 축성한 태조 때는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이후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 관리 보수가 어렵다는 이유로 문루가 헐렸으며, 1938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성문과 성벽 일부도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사용했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現 문화재관리과)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약 70%, 13.7km(2023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600여 년 간 서울의 울타리 역할을 한 한양도성은 도성민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신각 종루에 매달린 큰 종을 쳐서 성문 여닫는 시각을 알렸는데 새벽에는 33번, 저녁에는 28번을 쳤다. 저녁에 치는 종을 인경(인정), 새벽에 치는 종을 바라(파루)라 했는데, 민가의 대문도 이 종소리에 따라 열리고 닫혔으니 성문의 개폐 시각이 도성민의 생활 리듬을 지배한 셈이다.

한양도성은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였다. 왕이든 백성이든 생을 마감하면 반드시 도성 밖에 묻혀야 했으니, 서울 사람들에게 도성은 삶의 증표와 같았다.
 

먼 곳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한양도성은 반가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나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하는 선비들의 경우,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밤낮으로 책을 읽었으니 한양도성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 보러 온 선비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도성민에게도 전해져 성을 돌아보는 ‘순성(巡城)’이라는 놀이가 생겼다.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아들인 유본예(1777∼1842년)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적었다.
 

한양도성은 일차적으로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였으나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도 하였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조달해야 하였다. 성벽은 비록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 위에 쌓였으나, 그 돌들은 북한산과 아차산 등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고,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합하였다.


조선 후기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도성방위체계를 완성하였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 시 방어 시설로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떠났고 힘없는 백성만 남아 고초를 겪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애써 성을 쌓아 봤자 무슨 소용이냐”라는 불평이 나올 만도 하였다. 영조 27년(1751) 9월 11일, 왕은 “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성 위에 올라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라는 내용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반포하여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더불어 도성민에게 각각 담당 구역을 정해주고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고 맡은 구역을 지키게 하였다.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도성방위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 한양도성은 산성과 평지성을 함께 쌓는 고구려 이래의 축성 체계와 기법을 계승 발전시킨 성이다.


한양도성은 궁궐을 둘러싼 궁성, 도성을 보호하는 북한산성 · 남한산성과 짝을 이룬다.한양도성은 처음 축조된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겪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이러한 개보수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군데군데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어 한양도성은 그 자체로 현장 박물관 (On-Site Museum)이라 할 수 있다.

 

 태조 때의 도성 축조(1396)

 

1396년 1월과 8월, 두 차례 공사를 통해 축성을 마무리하였다.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다.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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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 때의 도성축조(1422)

    1422년 1월, 도성을 재정비하였다. 이때에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성돌은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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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 때의 도성 축조(1704~)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 쌓았다. 성돌 크기를 가로·세로 40~45cm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였다. 이로써 성벽은 이전보다 더 견고해졌다.
  •  순조 때의 도성 축조(1800~)

    가로·세로 60cm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올렸다. 각자성석은 여장에 있다(현재 학술연구가 진행 중이다.)

한양도성은 자연과 한몸이 된 특별한 인공 구조물이다. 자연의 선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성을 쌓았으니, 자연을 존중하는 것은 옛날부터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이렇게 쌓은 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일부로 자리 잡았으며 문학과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었다. 천만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옛 성곽이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비록 훼손된 구간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다.

 

◎ 오늘 트레킹 구간은 남산 구간 중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 인왕구간 - 백악구간 이다.

 

◎ 서울 숭례문(국보)

 

 

서울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그 후 세종 30년(1448), 성종10년(1479)과 고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에 크게 수리하였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일제가 왼쪽과 오른쪽에 있던 성곽을 철거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에는 응급 복구 작업을 했고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는 전면 해체 보수 작업을 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건물 전체가 크게 훼손되어 2013년 4월까지 복구 작업을 하였다. 이때 왼쪽과 오른쪽 성곽도 함께 복원하였다. 

조선 시대 한양의 출입문으로 매일 밤 인정(10시쯤)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 날 아침 파루(새벽 4시쯤)에 문을 열었는데, 문루*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여기서 몸소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나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제를 치냈다.

숭례문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도한 석축 위에 세워진 중층 누각은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 구조가 견실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문루 : 궁문, 성문 따위의 위에 지은 다락집

 

 

 

◎ 남지터

 

 

남지터에서 바라 본 숭례문

 

한양 도성길은 대한상공회의소 옆을 지난다.

 

대한상공회의소 담벽이 한양도성 이다.

 

현위치

 

성벽 안쪽

 

 

옛 도성과 복원 후 성벽

 

부분 부분 옛성벽이 남아 있다.

 

기념 한장 남기고

 

◎ 소의문 터

 

한양도성의 4소문 중 하나로, 서남족에 있어 서소문으로 불린 소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1396년 태조 5년 건립할 당시에는 소덕문이라고 했으나, 1744년 영조20 소의문으로 바꿨다. 1914년 일제가 철거했다.

 

소의문 터 현위치

 

한양도성길 걷기는 한양 도성 순성길 표지를 다라 가면 된다.

 

길 바닦엔 이렇게 한양도성 순성길이 밖혀 있다.

 

현위치

 

한양도성은 노란색을 따라 건설 되었지만 한양도성길은 하얀 점선을 따라 걷는다.

 

 

◎ 아펜젤러 기념공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1858~1902)는 펜실버니아에서 1858년 2월 6일 출생하여 프랭클린 마샬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회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첫번째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아내 엘라 닷지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이곳 정동에서 1885년 8월 3일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을 시작하였고 이에 고종황제는  '배재학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성경말씀에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는 교훈아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배재학당은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성장하여 한국근현대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복음전파를 위해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여 이 땅에 빛과 생명을 전하였으며, 삼문출판사를 통해 독립신문, 협성회보, 천로역정, 매일신문 그리고 성서와교과서 등을 출판하여 당시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 주었다.

 

 

아펜젤러는 조선의 근대화와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17년 동안 교육, 선교, 의료, 출판사업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을 위해 목포로 가던 중 어청도 부근 해역에서 선박사고가 발생하였고 동행하던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44살의 젊은 나이에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학교법인 배재학당에서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숭교한 정신과 삶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아펠젤러 선교사 탄생 160주년을 맞이하여 '아펜젤러 기념 공원' 을 조성하였다.

 

 

배재어린이 공원을 지나

 

 

◎ 러시아대사관 내 한양도성 성벽 유적

 

 

담장 바로 안쪽은 현재 러시아대사관이 사용하고 있다. 1999년 현재의 러시아 대사관 건물을 세우면서 발국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한양도성 성벽과 기초가 확인되었다. 당시 발굴 부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성벽 성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었다. 조사 범위가 당시 대사관 부지 담장 안쪽으로 제한되어 한양도성의 바깥 체성을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지형이 2m 이상 깎여 있는 것을 볼 때, 바깥 성벽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러시아대사관 내 한양도성 성벽 유적 현위치

 

배재학당어린이공원을 지나 그 끝트머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걸어야 하지만 

 

잠시 발걸음을 옮겨 배재학당인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쪽 건물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다시 돌와와 돈의문 터 방향으로 직전하려다가 

 

 

배재어린이공원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동상이 있다.

 

자세히 보니 당시에 호롱불 아래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어머니와 소녀의 모습이다. 정동제일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서언서를 등사하는 모습이다. 

 

대한독립선언서와 한쪽 모서리에 '안사람 의병가(1895)'  

 

 

안사람 의병가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의사(1860년~1935년)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안사람의병 노래

 

 

윤희순 영전

아 얼마나 감동적인가? 이보다 더 절절한 독립투쟁은 없을것이다.

나는 안사람 의병가 앞에서 최초의 윤희순의병장을 생각하며 당시의 조선 여인들이 어떠했는지? 한없이 전율을 느끼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져 오는 것이 아니였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고개 숙요 깊은 추념을 하였다.

 

이 동상은 그냥 지나칠 수 있기 쉽다. 혹시라도 배재어린이 공원에 있는 독립선언서와 '안사람 의병가' 동상에 꼭 초념을 하길 바란다.

 

◎ 정동제일 교회

 

  

 

격변의 시대, 청년들의 교육과 독립운동 중심지

 

정동제일교회는 배재학당의 교장이었던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 서재필 박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주시경 선생 등 한국 개화기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예배를 보며 미래를 준비했다.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에는 1918년 한국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3.1운동 당시에 오르간 뒤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초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열렸으며, 1920년 이화여고생이였던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를 지나면 덕수궁이 있는 로타리를 만나고 

 

순성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동제일교회를 끼고 진행한다.

 

국립정동극장

 

돈의문 터를 향하여

 

◎ 구 신아일보사 별관(등록문화재 제402호)

 

 

1930년대에 미국 싱거미싱회사 사옥으로 쓰였다. 지하 1층, 지상2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붉은 벽돌 치장 쌓기로 지어졌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을 보급해 의복 문화에 영향을 준 싱거미싱사는 일제 강점 말기에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추방되었으며, 건물은 적산으로 분류되었다. 8.15광복 후 건물은 다시 싱거미싱사가 사용하다가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었다. 1975년 3, 4층을 증축하여 신문사 별관으로 사용하다가 1980년 5공화국의 언론기관 통폐합 조치로 신문사는 경향신문에 강제 통합, 폐간되었고 건물은 신아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30년대까지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관공서를 지을 때 사용하였는데, 이 건물은 민간 건축이면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적용하였다. 1층 중앙 출입구의 돌출부와 계단, 그 위의 발코니에서 건립 초기 이 건물이 정동 거리에서 자아냈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내부의 기둥과 바닥 구조, 벽난로 등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어 건축 기술사적 으로도 가치가 있다.

 

서울에 이런 돌담길이 있나? 돌담길이 고풍스럽다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백주년기념관

 

손탁호텔터/이화여고 바로 앞에 손탁호텔 터 안내 판이 있다.

 

 

이화 사주문

이화 사주문은 지붕이 양 옆 담장보다 높게 솟아있는 솟을대문으로, 이화의 예 대문이다. 1923년경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일본풍으로 교란되었던 양식을 1999년에 대들보, 망와, 상도리 등 원래의 부재를 재 사용하여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원학원을 지나

 

구 벨기에 영사관 터

 

벨기에 영사관은 1901년 조선과 벨기에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이곳에 개설되었다. 1905년 중구 회현동에 있는 현 우리은행 본점 자리로 신축 이전한 후 이곳은 1920년대 이화학당 음악관을 거쳐 하남 호텔로 이용되었다. 2007년 하남호텔을 철거한 자리에 캐나다 대사관이 세워졌고, 현재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건물이 회현동의 벨기에 영사관을 1983년 벽돌 단위로 완전히 해체해 이축한 결과물이다.

 

창덕여자중학교 정문

 

 

프랑스공사관 터

 

1886년 조선과 수교한 프랑스는 종로구 관수동 소재 한옥에 공사관을 개설했다가 1889년 이곳으로 이전해왔다. 1896년 신축된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본체와 5층 규모 옥탑을 둔 묽은 벽돌의 프렌치 르네상스 양식으로 서울에 있는 외교 공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산 외곤으로 부목 받았다. 을사늑약으로공사관에서 영사관으로 성격이 바뀌며 1910년 서대문 합동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총독부 산하 기관이 이곳을 사용하다가 1935년 서대문ㅅ학교를 세우면서 철거되었다. 1973년 이래 창덕여중이 자리하고있다.

 

관립법어학교터

 

근대유산 1번지 정동/ 정동회화나무

 

정동캐나다 대사관앞에는 회화나무 한구루가 서있다. 수령 500년이 넘는 높이 17m, 높이 5.16m의 거목으로, 1976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캐내다 대사관의 노력으로 정동회하나무는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있다.

 

보호수 수령 520년

 

캐나다 대사관

 

국토발전 전시관

 

한성교회

 

경향신문

 

정동근대역사길 역사보행 탐방로는 언제 다시 찾아 보리라

 

돈의문 터에서 바라본 돈의문 박물관

 

이제부터는 돈이문터에서 창의문까지 인왕구간 이다.

 

◎ 인왕구간

 

구간 : 돈의문 터 ~ 창의문
거리 : 4.0km
소요시간 : 약 2시간30분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해발 339m인 인왕산은 풍수상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었다.


■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월암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인왕산 순성 안내쉼터-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 돈의문 터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대문으로 지금의 정동 사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1915년 일본은 도로확장을 위해 돈의문을 철거하고 건축자재용으로 일반에 매각하였다. 최초의 돈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 건설과 함께 지어졌다. 그러나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1413년(태종13)에 서전문이 만들어지면서 성문의 기능을 넘겨주었다가 1422년(세종4)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으로 불렀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돈의문 터 현위치

 

돈의문 터에서 바라본 돈의문박물관마을

 

건널목을 따라 

 

건너서

 

돈의문박물관마을 앞을 지나 서울시교육청 방향으로 향한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5월 라일락 향이 진동한다.

 

 

 

◎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호>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1946년까지 사실상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된 곳으로, 국무위원회 개최 및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또한 주석 김구가 약 4년간(1945~1949) 거주하다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거 이후 60년간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병원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3월 김구 거주 당시의 임시정부 활동공간으로 복원하여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 한옥체험장 

 

학생들이 참으로 많이 체험장을 찾는다. 좋은 일이다.

 

5월 파란 하늘에 조팝나무가 활짝 피었다. 

 

서울시교육청을 향하여

 

서울특별식육청 정문을 지나서

 

서울시민대학/국립기장박물관 앞을 지나면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한양도성이 시작된다.

 

홍난파 가옥을 향해서 오른다.

 

인왕산지역에는 이런 표지가 숫자로 새겨져 있다. 위치를 나타낸다.

 

인왕산 한양도성이 시작되는 월암근린공원 입구

 

한양도성 현위치 : 월암근린공원

 

◎ 서울 한양도성의 흔적들(월암공원 일대)

 

 

월암공원을 따라 최근에 성벽을 새로 쌓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서울시 복지재단(구 기상청 건물)의 담장 축대 아래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가 드러났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부근 연립주택 건물 주차장 뒤편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어니스트 베델 집터

 

 

1904년 조선에 온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은 이해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활동을 힘껏 지원하였다. 이곳은 그가 조선에 와서 정착해 사망할 때가지 가족과 함께 산 한옥 터이다.

 

◎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제90호> ‘봉선화’, ‘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1898~1941)가 살던 집.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1930년대 서양식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시 도성길은 연립주택 단지를 지나간다.

 

 

인왕산 구간 한양도성 순성길 현위치 : 사직터널

 

◎ 딜쿠샤(테일러 가옥)

 


딜쿠샤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서울특파원을 겸하면서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권율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에 보호수인 은행나무

 

 

 

인왕산로1길을 만나고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는 한양도성을 따라 오른다.

 

 

 

◎ 사직근린공원 부근 성곽


한양도성 전 구간 중 성 안과 성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성벽 안쪽의 넓은 길에서는 도심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편히 걸을 수 있고, 바깥쪽 오솔길에서는 담쟁이넝쿨과 고풍스러운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경 및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밤에 보는 성벽의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인왕산 정상이 보이고

 

5월 아카시아 꽃이 활짝피어 향기로운 길이다.

 

아카시아

 

붉은 병꽃도 활짝 피고

 

 

◎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 동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량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통일로18나길을 지나

 

보격적인 인와산 산행이 시작된다.

 

길목에 핀 애기동풀/ 서울 한양 도성 주변에 흐르러지게 피었다.

 

인왕봉이 손에 잡히고 많은이들이 인왕봉을 오른다.

 

◎ 인왕산 성곽초소 이야기

 

 

1968년 북한의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목적으로 1970년부터 2006년까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등에 30개소 이상의 경계 시설물(경계초소, 소초 등)을 설치하였다.

인왕산은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인왕산 탐방로가 제한적으로 개방되었고, 2002년 '노무현정부' 출범 후 성벽 주변의 철조망 등을 철거하면서 개방의 폭을 넓혀갔다. 2018년부터 "인왕산을 시민의 품으로 환원" 하겠다는 취지로 인왕산 전 구역에 대한 경계시설물(경계초소, 고가초소, 철조망, 실내사격연습장 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한양도성 성벽에 설치한 경계초소 20개소 중 17개소를 철거하고 성벽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 10월 공사를 완료하였으며, 3개소(52T, 63-1T, 64-2T)는 훼철과 복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을 위하여 남겨두었다.

 

 

◎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조선 태조 때 남산에 세운 국가 신당이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헐자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던 무속인들이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옮기고 사설 무속 신당으로 바꾸었다. 국사당 위쪽에 있는 선바위는 고깔 쓰고 장삼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의 바위이다. 불교를 배척했던 정도전이 한양도성의 경계를 정하면서 일부러 선바위 있는 곳을 제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상촌 上村, 우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도시형 한옥이 다수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촌(上村), 우대 등으로 불렸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왕족, 고관대작의 집과 별장도 도처에 있었지만, 주로 말단관리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살았다. 상촌인이라는 말은 경아전(京衙前)과 동의어였다. 조선 말기에는 중인 지식인들의 시회(詩會) 장소로 자주 이용되어 여항(閭巷) 문학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시인 이상과 윤동주 · 화가 노천명 · 이중섭 · 천경자 · 이상범 등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다시 인왕산 산행길로 돌아와서

 

칠래꽃도 피고

 

인왕산으로 오르는 한양도성

 

인왕산 범바위를 향해서

 

인왕산 범바위에서

 

인왕산 범바위에서 남산 방향 지나온 한양 도성 순성길

 

 

인왕산 범바위에서 북악산 청와대 방향 서울 시가지

 

범바위에서 바라 본 홍제동 방향

 

◎ 인왕산 순성길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울수록 험준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큰 바위들과 어우러져 끊어질 듯 이어진 성벽은 한양도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인왕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무악재와 안산(무악)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곳이 있는데 이런 지형을 활용하여 곡성(曲城)을 쌓았다. 곡성이란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벽을 지형에 따라 길고 둥글게 내밀어 쌓은 성을 말한다. 인왕산 곡성은 현재에도 군사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 옥개석

이 돌은 한양도성의 일부로 성곽의 최상단에 놓이는 옥개석이다. 옥개석은 여잠위에 지붕틀로, 빗물이 체섬으로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고 유사 시 지붕돌을 밀어 서위로 올라오는 적병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 인왕산 정상

 

인왕봉 정상에는 큰 바위가 우뚝 서 있다. 내 눈에는 활이 처럼 보인다. ㅋㅋ 너무 나갔나?

 

인왕산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우 백호 산이다. 실제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우 백호에서 유래 된 둣하다. 청와대와 경북궁을 지키는 호랑이/인왕산에 호랑이가 돌아 왔다.

 

인왕산 호랑이 상

 

인왕봉 정상 인증

 

종로구와 서대문구 경계점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북궁

 

가야할 창의문 방향 한양도성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 본 북악산과 청와대

 

인왕봉 정상에서 바라 본 남산

 

인왕봉 정상 인증 줄

 

인왕봉 정상에서 바라 본 경북궁

 

이제 인왕산 정상에서 창의문을 향하여

 

◎ 인앙산 치마 바위

 

 

인왕산의 치마바위에는 조선왕조의 애타는 사랑이야기가 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은 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에 연산군 처남의 딸인 단경왕후신씨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연산군의 위협에 벗어났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의 자리에 중종이 앉지만 7일만에 왕비는 연산군과의 관계로 쫒겨나고 이후 단경왕후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 치마바위 근처에 붉은 치마를 51년간 걸어두어 중종이 경희루에서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조선시대에 왕의 권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이야기이다.

 

 

북악산은 정도전이 한양의 진산이라 주창하여 우백호인 인왕산이 호랑이로 유명해졌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하자고 했으나 정도전에 밀렸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안산이 우백호 호랑이 산이 되었을 것이다.

 

◎ 인앙산 기차 바위

 

기차바위

 

보현산과 향로봉 라인

 

북악산과 보현산

 

보현산과 향로봉 라인

 

북악산 아래 청운중학교

 

이제 인왕산에서 하산길로 접어들고

 

한양도성 순성길 현위치

 

 

◎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어어져 마치 한 나무 처럼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 라고 한다.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주는 연리지는 예로부터 귀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연리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한다.

 

한양도성 병풍 삼아

인왕산 순성길에 푸른 옷 입고

한 몸 된 연리지

깊고 깊은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 한양도성 각자성석

 

 

 

 

중간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청운중학교

 

한양도성 현위치

 

◎ 축성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인왕산 구간에서도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면 탕춘대성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부터는 성 안팎으로 길이 나 있다. 성 바깥 길을 걸으며 성돌의 모습을 눈여겨보자. 태조 · 세종 · 숙종 · 순조, 그리고 그 이후에 쌓은 성돌이 공존하는 구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갈림길을 지나서 

 

한양도성 순성길은 마지막 끝에서 윤동주문학관쪽으로 우틀한다.

 

인왕산로를 건너서

 

서시정

 

한양도성 현위치 : 서시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했는데,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다. 가까이에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서울 한양도성 현위치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창의문으로 향한 한양도성길

 

한양도성 순성길 현위치

 

◎ 최규식 동상/청계천 발원지

 


창의문 앞 길가에 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동상이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백악이 각각 다시 개방되었다.
*청계천 발원지 표석 :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에서 약 150미터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적혀있다.

 

◎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1881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렀왔다.

 

 

태종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북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9년(1617)에는 궁궐 보수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영조 17년(1741년)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 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이 세겨 놓은 현판이 결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단장에 매력을 더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문의 무지개 모양의 월단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내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 넣은 것이라고 한다.

 

◎ 백악구간 (창의문 ~ 혜화문, 4.7km)

 

 

창의문-창의문 안내소(폐쇄)-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폐쇄)-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북악산, 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 창의문~백악마루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로 이어지는 구간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성곽을 쌓았는데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으뜸가는 절경이라 할 만하다. 이 구간의 순성길은 안전을 위해 모두 계단으로 조성해 놓았는데, 운동량은 많지만 등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에서는 숨을 고르며 수려한 풍경을 감상해도 좋다.

 

◎ 자북정도( 紫北正道)

 

 

 ‘紫北正道’(자북정도) 표지석이 눈을 끈다. ‘자하문과 북악산의 바른 길’이라는 뜻인 듯싶다. 인생에 있어서 바른길, 정의(正義)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선(善)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악(惡)이 될 수 있다. 정의는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思無邪, 성정을 올바르게 하고, 간사하고 악독한 마음이 없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일을 처리하면 이것이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紫北正道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이며, 장세동이 이곳 부대장이었을 때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하면 한일회담과 삼선개현, 유신현법이 떠오르지만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로 우리가 잘살게 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공과는 있기 마련이다. 

 

◎ 북악의 식생

 

경북궁의 진산인 북악은 높이 342m에 이르며 화강암이 주를 이룬 돌산으로,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성곽 주위로 수목이 가꾸어져 있다. 특별히 소나무는 조선 개국 초부터 특별 보호 대책을 세워 관리되었다. 조선조 내내 잘 보존되어 온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 이후 숲이 방치되면서 능선 주위에만 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북악산은 근 40년간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은 덕분에 식물들이 잘 보존된 천연의 공간이 되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식물은 208종류이고 그 중 나무는 81종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키 큰 나무(교목류)로는 소나무, 팔배나무, 때죽나무, 산벗나무 등이 있고 키 작은 나무(관목류)로는 진달래, 철쭉, 쥐똥나무, 국수나무 등이 있다. 바늘잎나무로는 소나무가 대부분이며 넓은잎나무는 참나무 등 여러 종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그 외 성곽 주변에 아까시아나무, 은수원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하여 심은 나무와 최근 조경수로 심은 스트로브잣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팔배나무 군락은 숙정문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북악 특유의 식생이다. 팔배나무를 비롯한 새 먹이가 될 수종이 많기 때문에 야생동물로는 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 백악 돌고래 쉼터

 

돌고래 쉼터 현위치

 

 

◎백악쉼터

 

백악마루로 오르는 순성길은 참으로 급경사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다 보면 이마 송글 송글 땀 방울이 맺히고, 다리가 아파올 때 쯤 백악 쉼터을 만난다.

 

백악 쉼터 현위치

 

백악쉼터에서 잠시 물 한 모금 하고

 

다시 백악 마루를 향한다.

 

◎ 백악마루

 

드디어 백악산 정상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天), 끝나는 구간은 조(弔)였다. 이곳이 바로 천(天) 구간에 해당한다.

 

 

 

이성개가 조선건국과 함께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이성계의 뜻에 따라 정도전이 경북궁을 중심으로 궁궐을 설계할 때 북악산을 중심(주산)으로 오른쪽에는 인왕산이 백호인 흰호랑이 형상이요, 왼쪽으로는 낙산이 푸른 용처럼 경북궁을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 안산과 남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아방궁처럼 빙둘러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임에 명당 중에 명당으로 궁궐을 지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바위는 조선의 중심이였다. 참 좋은 순간이다.

 

 

백악산(백악산) 흰 바위산이다. 서울을 빙 둘러 있는 산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흰색을 띈다. 호남의 월출산과 충청의 속리산과 강원 설악산을 비롯하여 서울의 북한산과 관악산 등은 화강암으로 흰색을 띄고 있다. 돌이 흰색이여서 이름 붙여졌겠지만 백악이란 이름은  단순히 흰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깨끗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숭고한 정신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백악이란 명칭을 붙인 것은 이곳이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우리는 이곳을 북악산이라고 한다. 

 

 

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폐쇄)-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 1·21 사태 소나무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1·21 사태 소나무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이곳에서 성 바깥을 바라보면 북한산과 백악 사이에 자리 잡은 평창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창동이라는 지명은 선혜청의 부속 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 한양도성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4년(1804년) 10월 오재만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 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 청운대

 

청운대 정상석

 

현위치

 

청운대

푸른 빛 구름은 어떤 구름일까?  "청운에 푸른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한다."라고 할 때 청운의 푸른 꿈은 높은 이상과 사회적 성공을 일컷는 말이다. 해발 293m 청운대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경복궁, 광화문, 세종로를 볼 수 있고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볼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인다. 

 

북악산 청운대는 북한산 백운대와 어떤 연이 있을까? 푸른 빛 구름인 청운(靑雲)은 높은 지위나 벼슬을 의미하며, 백운(白雲)은 흰 구름이니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산수를 찾아 안빈낙도를 즐기는 것이리라. 젊어서는 청운이 좋고 늙어지면 백운도 좋다. 어쩌면 짙은 안개가 서울 시가지를 덮고 흰 운해가 쫙 깔리면 정말로 푸른 구름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청운의 풍광이 연출되리라!

 

청운대 주변

 

청운대에서 바라 본 보현산- 라인

 

 

 

 

◎ 청운대 쉼터

 

 

백악산 조명 명소에서 바라본 좌 청룡 용트림의 와룡공원 산줄기이다.

 

 

2022년 청와대 방문을 끝내고 북악산을 향해 올랐던 추억의 갈림길을 지나

 

이제부터 숙정문을 향해 순성길을 걷는다.

 

◎ 백악 곡성


곡성(曲城)은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것을 말하는데 인왕산과 백악에 하나씩 있다. 이 중 백악 곡성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서울의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꼽힌다

 

백악곡성을 향해 오르고

 

 

 

◇ 치

성곽 중 일부분을 돌출시켜 성벽에 기어로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

 

 

 

◇ 여장

성곽 위의 담장을 여장 도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이 잦아지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1개의 여장을 1타라고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 1개가 가운데에 있고 양옆에는 먼 데를 쏘는 원총안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백악 곡성에서 바라본 보현산 

 

 

◎ 암문 밖 순성길


조선시대 도성 안과 밖에는 각각 군사들이 순찰을 도는 순성길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의 세 군문이 각각 8패씩을 내어 도성 주변을 순찰했다.

 

 

◎ 숙정문을 향하여

 

 

 

◎ 백악 촛대바위를 보러 잠시 내려 갔다 온다.

 

촛대바위를 향하여

 

촛대바위

 

촛대바위에서 부터 소나무가 잘 자라고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잘 관리되어 있다.

 

 

◎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이 각자성석에는 철종 2년(1851) 9월 정인○이 공사를 감독하고 고석표가 공사를 돌보았으며, 석공 김진성이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소나무 보호 군락지

 

 

◎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숙정문에서 인증 한장 남기고

 

 

이제 말바위 안내소를 향하여 순성길을 걷는다.

 

북악 팔각정과 그 이래 삼청각을 조망 하면서

 

성북동 방향 

 

삼청각

 

◎ 말바위 안내소와 우수조망명소

 

말바위는 삼청공원 안에 있는 바위로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백악의 끝자락에 있는 바위여서 말(末)바위라 하였다고도 하고,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전에 이 바위에 말을 매어 두어 말(馬)바위가 되었다고도 한다. 동쪽 능선을 따라 백악에 오를 때 갑자기 경사가 급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을 매어 두는 바위라는 설이 유력하다. 

 

 

현위치

 

◇ 우수조망명소

 

우수조망명소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에서는 성북구 방향이, 다른 한 곳에서는 종로구 방향이 보인다. 우수조망명소는 숙정문 안내소 · 말바위 안내소 · 삼청공원 ·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들이 갈라지는 분기점이기 때문에 안내표지판을 잘 확인해야 한다. 창의문·숙정문·말바위 안내소와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와불공원 갈림길

 

이곳에서 잠시 한양도성과헤어지고 와룡공원 쪽으로 가야 한다.

 

우수조망명소에서

 

바라본

 

성북동 방향 조망

 

와룡공원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가면

 

이런 편할 길도 만나고

 

다시 또 계단을 내려 간다.

 

계단 중간 쯤에서 우틀하여 와룡공원으로 향한다.

 

와룡공원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서

 

한양도성 순성길 방향으로

 

와룡공원으로 오르면

 

성 밖을 다라 걷는다.

 

와룡공원으로 가는 방향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성곽의 형태가 다른 구간이 나온다. 아마 보수 시기에 따라 성곽을 쌓은 기술이 달랐나 보다.

 

한양도성 현위치

 

 

 

이 각자성석은 세종 4년(1422)에 경기도의 남양현(지금의 화성시 남양읍)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작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이들이 어느 지방 사람인지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에 와서 다시 쌓게 했다.

 

아름다운 성곽 

 

혜화문 쪽으로 성문을 지나서

 

◎ 북촌한옥마을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던 옛 이름으로 현재의 재동 · 가회동 · 계동 · 삼청동 일대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종친(宗親)과 고관(高官)들이 다수 거주했던 곳이라 집의 규모도 컸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말기 건축물로는 안국동 윤보선가(家)가 유일하고, 한상룡가(家), 김성수가(家) 등 1910~2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도 일부 있으나 나머지 한옥들은 모두 1930년 이후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다.

 

 

◎ 북정마을

 

 

와룡공원 옆으로 도성 안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성북동으로 빠지는 암문이 나온다. 문 밖에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이 바로 북정마을이다. 북정마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심우장’과 '성북동 비둘기'를 지은 김광섭 시인의 집이 있었다. 성벽 밑에 5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1960~70년대 서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위치

 

시멘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와룡공원을 만나게 된다.

 

현위치

 

◎ 서울 한양도성의 흔적들


경신고등학교 뒷길에서 혜화문까지 이어지는 골목길. 성벽이 심하게 훼손되어 군데군데 흔적만 남은 길이다. 경신고등학교 뒷길 초입에서는 성벽이 학교 담장으로 쓰인다. 경신중·고등학교를 지나면 ‘ㄱ자’ 모양으로 꺾인 주택 담장 아래에서 축대로 사용된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혜성교회 계단 길 양쪽에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끊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100m 정도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가 두산빌라 건물 앞에서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서부터 구 서울시장공관 담장까지 150m 가량 성벽이 이어진다.

 

 

 

 

 

 

 

 

 

 

 

 

 

◎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 본래 자리보다 북쪽에 새로 지었다.

 

 

 

 

 

 

 

현위치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옛 시장공관)


혜화동 옛 시장공관은 다양한 서울시의 정책이 논의되는 일터이자, 서울시장이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집이였다. 공관은 국내외의 손님이 초대되는 행사장 이였으며 1981년 박영수 시장부터 2013년까지 역대 서울시장이 거주했다. 한양도성의 성벽을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어 철거 논란이 있었으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하기로 결정하여 한양도성 순성길의 쉼터이자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전시실에는 순성놀이 기록, 혜화동 주변 모형지도, 지도로 보는 한양도성과 역대 시장의 영상 및 기증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