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 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 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 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함양 남계서원 전경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한국의 서원'은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기준(iii)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에 걸쳐 건립된 이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 이 서원들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여 성리학 교육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꼭 맞는 건물을 지어, 성리학 가치가 담긴 독특한 역사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 성리학 : 중국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파
** 사림 : 조선 시대 성리학적 가치를 중시하던 지식인을 일컫는 말
*** 유식공간 : 자연 속에서 수양하고 휴식하는 일을 성리학을 배우는 과정의 하나로 보고, 자연과 더블어 수양할 수 있도록 내외부에 조성한 공간
◇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가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의 서원은 조선의 성리학 교육과 사회적 확산을 주도한 교육기관이자 무형적 역사적 독특성의 탁월한 증거이다. 성리학자들은 교육에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시스템과 물리적 시설을 완성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지역의 인물을 계승함으로써 학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국의 서원을 사회 교화와 정치 등 각종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성리학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다.
함양 남계서원 명성당에서 바라 본 풍영루
▶ 서원의 주요 기능
- 성리학 가치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지식인 양성
- 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
- 지역사회 공론 형성
함양 남계서원 준도문
◇ 한국의 서원 건축물의 조화와 위계
서원은 제향과 강학, 교류와 유식의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각각 사우, 강당, 누마루를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이들 각 영역은 지형, 외부공간, 기단, 담장, 대문 등을 통해 건축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조화를 이루었고, 각각의 건물이 가지는 기능을 중시하여 연속적인 위계*를 부여하였다.
* 위계 : 건물의 우선순위를 중시하여 위쪽에 두거나 중앙에 두는 등의 질서
함양 청계서원
◇ 세계가 주목한 조선의 사립 교육기관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 시대 지방 지식인들에 의해 건립된 사립 성리학 교육기관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670여 개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속유산으로 구성된 9개 서원은 한국의 서원이 하나의 유형으로 정립되는 과정은 물론 성리학이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어 지역적 특색을 가진 사례로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함양 청계서원
성리학자들은 강학과 성리학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였고, 정기적으로 제향을 봉행해 학파의 결집을 도모하였으며, 교류와 유식을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 활동을 주도하였다.
◇ 한국의 서원 공간 구성
서원은 제향 인물의 연고가 있는 지역에 입지하였으며, 성리학자의 전인적 교육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선택하였다. 서원 내부는 제향을 올리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 위치한 제향 영역, 유생들의 공부와 숙식을 위해 지은 건축물이 들어선 강학 영역, 서원 관계자들 모임과 유생들 휴식을 위한 교류 및 유식 영역으로 나뉜다.
함양 남계서원
성리학자들은 지형과 자연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하나의 서원 건축 전형을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9개 서원의 특성
◇ 영주 소수서원
1543년 최초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이다. 한국 서원의 강학, 제향과 관련한 규정을 최초로 제시하여 이후 건립되는 서원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한 문헌 자료도 풍부하다. 소수서원은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 강학, 제향, 교류와 유식 등의 기능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함을 제시하였다.
영주 소수서원
◇ 함양 남계서원
1552년에 건립. 한국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지역 사림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사례이다. 강학 공간의 뒤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고 유식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건축적으로는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이 처음 등장했다. 각각의 주요 영역을 구분하여 하나의 축선상에 배치한 형식은 이후 건립하는 서원의 모범이 되었다.
함양 남계서원 풍영루
◇ 경주 옥산서원
1572년에 건립. 출판과 장서의 중심 기구로서 서원의 역할을 정립하였다. 건축적으로는 서원 영역 내에 교류와 유식 기능을 하는 누마루 형식의 무변루를 건립하였다. 옥산서원 이후 서원에 누마루를 건축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경주 옥산서원
◇ 안동 도산서원
1574년에 건립.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많이 미친 서원으로, 이황의 도산서원을 기반으로 건립되어, 서원이 학문과 학파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강당은 특이하게 4칸 구성이며, 대청 서쪽에만 방을 두어 비대칭을 이룬다. 자연경관이 뛰어나 일대 경관을 묘사한 다양한 작품이 남아 있다.
안동 도산서원
◇ 장성 필암서원
1590년에 건립. 호남지역의 평탄한 지역에 맞추어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예의를 보여준다.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한국의 서원건립이 호남 지역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입증한다. 기록물을 통해 서원의 경제적 운영 방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있다. 이전의 서원들이 경사 지형을 이용하던 것과는 달리, 이곳은 평탄한 지형에 적합한 건축물 배치형식을 적용하였다.
장성 필암서원
◇ 달성 도동서원
1695년에 건립.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특징을 대표한다.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낙동강을 바라보게 건물을 세운 건축배치가 탁월하다.
서원 교육 방식의 구체적인 양상을 입증한다. 경사지를 활용한 서원 건축배치를 탁월하게 구현하였다. 건축물별로 여러 개의 단을 조성하여 외부의 자연경관을 시각적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활용해 서원의 경사지 조성 기법을 잘 보여준다.
달성 도동서원
◇ 안동 병산서원
1613년에 건립. 만대루는 서원 누마루 건축 형태의 탁월한 사례이며, 서원의 역할이 교육기관에서 여론 수렴자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서원을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만인소 등 사림의 공론장으로 확대해 사림 활동 중심지로서 기능을 입증한다. 많은 학자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누마루인 만대루는 자연경관과의 조화가 탁월하다.
안동 병산서원
◇ 정읍 무성서원
1615년에 건립. 지역의 학문 부흥과 성리학 전파에 힘쓴 서원이다. 향악의 바탕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항일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한국 서원의 발전 과정에서 지역 단위의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성리학 이념이 확대된 서원의 양상을 보여준다.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교육을 통해 향촌에 뿌리내리고자 한 흥학처에 설립되었다.
정읍 무성서원
◇ 논산 돈암서원
1634년에 건립.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 논의의 산실이며, 예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강학당인 응도당이 탁월하다.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을 논하던 서원으로, 응도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학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관련 저술이 출판되었다. 응도당은 동아시아 건축 이론을 예학 이념과 결합하여 완성한 건물로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자~ 이제 본격적으로 함양 남계서원을 탐방해 보자.
위치 :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 함양 남계서원
자발적 노력으로 완성한 함양 남계서원 전경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함양 남계서원 종합 안내
이 서원은 소수 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 받은 사액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빛의 노래 서원을 밝히다.
◇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남계서원
▶ 역사적 가치
남계서원은 1552년에 강익을 비롯하여 지역의 유학자들이 일두 정여창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시설이다. 1566년(명종21)에 왕이 '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서액서원이 되었다. 남계는 서원을 흐르는 하천 이름이다. 남계서원은 임진왜란 때 경남 지역의 의병 활동을 주도했으며, 5년 뒤 정유재란 때 함양을 급습한 왜군에 의해 불탔다. 전쟁이 끝난 뒤 인근 나촌으로 옮겨졌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 주요특징
남계서원은 경사지에서 남서향으로 자리해 앞으로 흐르는 강과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정문인 풍영루를 지나면 좌우에 작은 연못이 있고, 이어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양정재와 서재 보인재가 자리한다. 양정재와 보인재보다 한 단 높은 곳에 강당인 명성당이 있고, 그 뒤 경사지에 사당이 있다. 남계서원은 전학후묘, 즉 강당을 앞에,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또 정문에서 사당까지 중요한 건물을 거의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형식은 이후 경사지에 건립한 서원 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 제향 인물 및 의미
사당에는 정여창의 위패를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에 각각 정온과 강익의 위패를 모셨다. 정여창은 남계서원의 북서쪽 수동면 개평리에서 태어나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세자 시절 연산군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유교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인들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했다.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한국의 뛰어난 유학자 다섯분을 일컫는 동방 오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모셔졌다.
문헌공 일두 정여창선생 추모비
남계서원 입구 표지석
남계서원 홍살문
남계서원의 입구인 풍영루
◇ 풍영루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이라고 하는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 라는 증점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 "기수"와 "무수"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출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이 지었다.
옆에서 바라본 풍영루
풍영루를 지나 안에서 풍영루를 바라 보면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걸여있다.
원래 출입문인 준도문에 2층 누마루를 새로 올려 풍영루라고 했다.
풍영루를 지나면 넓은 안 마당이 나오는데 이곳은 유식 공간으로 양쪽에 인공으로 연지을 만들고 연꽃을 길러 강당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잠시 쉴 때 연꽃을 바라보며 시를 짓거나 도덕적 가치를 생각하도록 했다.
◇ 묘정비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지었다.
◇ 강학영역
▶ 건립유래
남계서원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현 소수서원)에 뒤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이 건립되고 9년 뒤인 1552년에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우선 향내의 유생들이 쌀과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하였고, 동시에 당시 함양군수 서구연이 강당 건립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강당을 조성하던 중 서군수가 부친상을 당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559년 부임한 군수 윤학의 지원으로 급진전하여 공사를 재개한지 7년 만인 1559년에 완성하였다. 1561년 모든 시설들을 갖추고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39세의 나이였던 강익이 초대원장이 되었다.
▶ 강당
1566년(명종21)에 조선 명종왕이 '남계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서액서원이 되었다
강당은 경과 논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방은 '거경'이라 하며 '경에 거해서 이를 연구한다.'는 뜻이고, 동쪽 방은 '집의'라고 하며 '호연지기는 도와 짝이 되는 의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 명성당
명성당 현판과 중앙 마루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에서 볼 수 없는 단청을 화려하게 하였다.
▶ 거경재
거경재
거경재 온돌에 불을 지피는 공간이 있다.
▶ 집의재
집의재 온돌에 불을 지피는 공간이다.
▶ 동재 (양정재)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애련헌' 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
▶ 서재(보인재)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영매헌'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 라는 뜻이다.
◇ 경판고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어정오경"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 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재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벽이 있다.
◇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재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뒷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을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원 건축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실제적으로 서원 향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이곳에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여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성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곳이다.
사당 오른쪽 담장 밖에 별사가 있었는데, 서원 건립 후 뇌계 유호인 선생과 송탄 정홍서 선생을 모셨으나 서원 철폐령 때 헐었다.
▶ 내삼문
▶ 사당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숙종1년)에 동계 정온 선생을, 동쪽은 1689년(숙종15년)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선생은 정온선생의 외삼촌이다.
▶ 전사청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전사청은 제향영역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제향영역 밖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진사청이 건립되지 않은 사당은 고직사에서 제향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준비하기도 한다.
◎ 남계서원 이모저모
남계서원 사당에서 바라 본 들녁과 남계천
남계서원의 이름은 서원 앞으로 흐르는 남계천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계서원 사당 앞에 있는 배롱나무에서 조선 시대 옛 유생들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높은 도덕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수양에 힘썼을 것을 생각해 본다. 오랜기간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유교의 성리학적 전통 가치 속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오늘 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세대가 격는 가치관의 혼란을 생각해 본다.
해방 후 서양 문물이 밀물듯이 밀려오고 학문의 중심이 서구 학문을 중심으로 연구 계승하면서 전통적 동양의 학문과 철학, 정치이념 등이 쇄퇴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이 땅에 맞게 깊이 연구되고 뿌리 깊게 형성되어 온 전통 문화와 학문, 철학 등이 송두리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세대 간, 중앙과 지역 간, 남녀 노소 간, 자본과 노동 간 등 양극화가 심하게 나타나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정말 올바른 사회인가? 라는 심각한 물음 앞에 서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 헌법적 가치를 높이 받들면서, 무한 경쟁이 아닌 적절한 통제속에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민 전체가 추구해야 하는 건강한 삶의 가치를 유교에 기반한 전통 성리학적에 가치에서 찾아 추구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가야할 방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변 자연 환경에 순응하면서 환경을 깨끗히 하고 적절한 생산과 소비, 기술발전의 적절한 제한, 이웃 간에 평화에 기반한 전쟁이 없는 국제질서, 조상을 숭배하고 어른을 존경하며 개인 간에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중앙과 지역이 상호 보완적 관계를 적절히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 사회가 되길 바라고 그런 가치를 삶 중심으로 교육하는 세상이 되길 바래 본다.
관리사 영역으로 내려와 사당 방향을 바라보며 성리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조선 사회를 생각한다. 중국의 공자 유학을 송나라 때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통해 고도의 높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한 선비 사상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실천하고자 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한 당시의 서원에 대해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풍영루 앞 광장에서 기념 한 장을 남기고 남계서원 탐방을 마무리한다.
남계서원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계서원 표지판
남계서원 주차장과 관리동
남계 서원 탐방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청계서원을 둘러보자
청계서원은 남계서원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서원의 공간 구성도 남계서원과 매우 비슷하다. 강학영역과 제향영역, 유식영역을 고루 갖춘 서원으로 남계서원 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어느 한 곳도 부족함이 없는 참 아늑하고 아름다운 서원이다. 조선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류된 탁영 김일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강당인 애락당 앞 소나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정원 소나무 중에서 가장 기품있고 아름다운 소나무 같다. 이런 서원이 이곳에 두 군데나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 영남지역에 성리학이 얼마나 널리 펴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중앙 권력을 잡기 위해 영남 사림들의 몸부림도 같이 느낄 수 있어 한편으론 대견하고 또 한편으론 씁슬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서원은 오늘날 사립학교에 해당되며 공립학교는 향교가 있었다.
◎ 함양 청계서원
청계서원 입구 표지석
청계서원은 이 땅에 역사의 준엄함과 사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 탁영 김일손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이곳은 탁영선생이 1495년 청계정사를 창건하고 수학하던 곳이였으나 1498년 선생이 무오사화에 연류되어 그 해 7월 5일 이곳에서 피체되어 참형을 당하신 후 폐사 되었다.
청계서원 표지판
청계서원 전경
그러나 선생을 추모하는 영남 유림들과 관찰사 조민희 등이 발의하여 1906년 정사의 재건을 숙의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남계서원으로 부터 본 대지를 기증 받아 묘우를 비롯하여 강당과 부속건물 그리고 유적비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현액하였으며,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받드니 사후 416년 만에 비로소 선생의 확고한 사관과 유지가 찬연하게 빛을 발하게 되었다.
청계서원 홍살문
1947년에 중수공사가 있었으며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1986년 문화관광부에서 묘우를 중수하고 1987년 함양군에서 비각을 중수하였으며 묘우와 내삼문 및 경내 조경 사업을 실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서원은 1906년, 조선 성종(1457~1494) 때 사림파를 대표하던 탁영 김일손이 한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던 청계정사 옛 터에다 유림에서 세운 것이다.
생전에 김일손은 청빈함을 요구하는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1476~1506) 때 조의제문 사건에 휘말려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현재 청계서원에서는 김일손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의 중앙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태의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뒤쪽 높은 지대에 사당인 청계사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의 거처로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다. 서원 구역 안에는 '탁영 김선생 유허비'와 네모난 연못이 있다.
◇ 취도문
청계서원의 외삼문인 취도문을 들어서면
◇ 청계서원 유식공간
청계서원 전경
너른 마당이 나오고 양 옆으로 인공 연지를 만난다.
청계서원 전경
◇ 탁영 김선생(김일손) 유허비
탁영 김선생(김일손) 유허비
탁영 김선생(김일손) 유허비는 청계서원 유식공간 한쪽에 세워져 있다.
▶ 탁영 김일손
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파의 중앙진출이 활발했을 때 언론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주로 언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를 하고 주서·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김일손 글씨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권오복·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소훈윤씨(昭訓尹氏)에게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이 가로챘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세조와 계유정난 공신인 훈구파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은 사형을 면치 못했으니, 세상이 원망스럽고 정의는 언제 살아날 것인가?
◇ 청계서원 강학영역
청계서원의 강학영역의 아름다운 전경
▶ 강당
청계서원 애락당
청계서원의 강당 공간 구성은 남계서원의 강당 공간 구성과 거의 유사하다.
청계서원 애락당과 동덕재와 병의재
애락당은 강연을 하는 중앙 마루이고 동덕재와 병의재는 온돌방이다.
동덕재
병의재
▶ 청계서원의 동재
구경재
▶ 서재
◇ 제향영역
▶ 청계서원의 청계사
청계사
청계사는 탁영 김일손 선생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 청계서원의 이모저모
사당인 청계사에서 내려다 본 강당과 청계서원 앞 들녁
자연과 어울러진 청계서원의 아름다움
청계서원 애락당 앞에 서 있는 소나무의 품격
청계서원 아름다운 소나무 풍광
청계서원 애락당 툇마루에 앉아
청계서원 마당에 잔디와 잡초 그리고 네잎크로바가 무성히 자라고 있어 잠시 쉬어 간다.
청계서원 전경
조선 성리학의 산실인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인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을 둘러보았다. 조선시대 사회 질서 유지와 높은 도덕적 삶의 가치를 성리학을 통해 구현하고자 노력한 중심에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이 있었다. 향교는 나라에서 세운 공립이고 서원은 지방 사림들이 세운 사립이다. 지방 사림들이 사립고등교육기관을 자발적인 노력으로 세웠다는 것이 놀랄만 한 일이며 그들이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한 성리학적 역할은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는 동네는 언제 어디서나 시대에 상관없이 부정 부패가 판을 치고 상대방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부정적인 역할도 서원이 일정 부분 했으리라 생각한다. 옳고 그름은 늘 상존하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며, 미래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몰려주어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는 탐방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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