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 화성
수원 화성(사적 제 3호)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조선 22대 정조대왕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 공심돈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을 갖춘 4대문과 행궁,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이다.
수원화성 옹성 출입부
◎ 축조과학
수원 화성은 그 계획부터가 새로웠다. 정약용은 화성을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지이면서도 견고한 성을 쌓았다.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과 ‘十’자로 잘 뻗은 신작로는 인적 · 물적 교류가 활발한 상업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성벽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게 옹성, 장대, 봉수대, 포루, 각루 등 성벽을 따라 40여개의 방어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또 당시의 전투는 화력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성벽위의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곳곳에 총구멍(총안)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었다.
정약용
당시 화성 건설에서 근대적 과학정신이 표현된 것은 거중기이다. 거중기는 정약용의 독창적인 설계로 만든 것으로 무거운 물건을 작은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든 기계장치이다.
거중기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개발했는데, 정약용의 거중기는 중국의 것보다 4배 정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로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수원화성 창룡문
성벽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과 석회를 섞어 성벽을 쌓으면 화포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어 당시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에서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에 화성 축조이후,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수원화성 각자 성돌
수원화성은 간간히 둘러 보았지만 온전히 둘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각 구조물들의 명칭부터 생소하고 숫자가 많고 비슷 비슷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 시간에 쫓겨 급하게 둘러보았다. 트레킹 후기를 정리하면서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보니 매우 과학적이고 계획적으로 건설한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지형의 여건을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군사적 방어와 공격을 위한 각종 기능을 쫌쫌히 설계하고 거대하게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조상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여기 부족하나마 사진과 설명 자료를 참고하여 후기를 정리한다.
◎ 수원화성
세계유산 화성은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의 행정구인 읍치를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 대포를 둔 포루, 요충지에 세운 누각인 각루, 군사 지휘소인 장대 등을 두루 갖추었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은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묘와 방어 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례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 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 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 교류를 보여 주는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 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됐다.
화성은 성곽뿐만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 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 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은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오전에 화성행궁을 탐방하고 오후에는 화성을 탐방한다.
◎ 수원화성 탐방로
서3치 - 서남암문 - 남포루 - 남치 - (남은구) - (남서석대) - 팔달문(남쪽) - (남동적대) - (남암문) - (남공심돈) - 남수문 - 동남각루 - 동3치 - 동2포루 - (봉돈) - 동2치 - 동포루 - 동1치 - 동1포루 - 창룡문(동쪽) - 동북노대 - 동북공심돈 - 동장대 - 동암문 - 동북포루 - 북암문 - 동북각루 - 북수문 - 북동포루 - 북동치 - 북 동적대 - 장안문(북쪽) - 북서적대 - 북서포루 - (북은구) - 북포루 - 서북공심돈 - 화서문(서쪽) - 서북각루 - 서1치 - 서포루 - 서2치 - 서노대 - 서장대 - 서암문 - 서포루 - 서3치(원점)
수원화성은 동서남북에 4대문(팔달문 : 남쪽, 창룡문: 동쪽, 장안문: 북쪽, 화서문 : 서쪽)을 두었고,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에 2개의 수문 (북수문 - 남수문)을 두었다. 그리고 치, 포루, 노대, 공심돈, 암문, 장대, 각루, 은구 등을 두어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였고 군사들의 쉼터와 군사물자 저장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축성되었다.
화성행궁에서 서3치로 가는 오름길에 성신사가 있다. 지나가면서 성신사를 담았다.
◎ 성신사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완료될 무렵 성신사를 설치할 것을 명령하고 축문을 지어 내렸다. 1796년 9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신주를 봉안한 후,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성신사를 지나서
성신사 정당은 정면 3칸인데 앞쪽이 개방되어 있어 제사를 지내기에 적절한 구조다. 정문 좌우에는 행랑을 두어 남쪽은 음식을 준비하는 진사청으로 쓰고, 북쪽은 제관이 머물며 준비하는 재실로 이용했다.
성신사 전경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되고 건물도 사라졌으나 2009년에 '화성성역의궤'와 발굴유구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성신사가 있던 옛 터는 지형이 높아져서 제 위치에 복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남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겼지었다. 발굴된 유구는 흙으로 덮어 보존했다.
성신사에서 화성 오름길에 만난 야생화를 만나고
본격적인 화성 탐방을 시작한다.
화성 탐방 시작점
화성의 모든 구조물은 방향을 나타내는 동서남북이 이름 앞에 붙는다. 이는 4대문인 팔달문,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위치와 방향을 나타낸다.
◎ 서3치
서3치는 서포루와 서남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3치 바깥은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팔달산에 설치한 다른 치성에 비해 길이가 길다. 치성 안쪽으로는 여장에서 1m 정도 돌출한 담을 쌓고 가운데 출입구를 냈다. 적대*와 비슷한 구조는 서3치와 남치에서만 볼 수 있다.
*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 치 :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하는 시설이다.
* 서3치 : 서쪽에 있는 3번째 '치' 라는 의미이다.
서3치 사진을 담지 못해 아쉽다.
◎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시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문(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오성지 : 다섯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지나서 ▷ 남포루로 향한다.
남포루부터 남수문까지의 모든 구조물은 '남' 자로 시작한다. 화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 남포루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였다. 그 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 포루 :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남포루
남포루를 지나서 ▷ 남치로 향한다.
남포루를 지나서 남치로 향하는 중간에 홍난파 노래비가 있다.
◎ 홍난파 노래비
이 노래비는 난파 홍영수(1898~1941)가 태어난 지 70년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1968년 건립되었다. 명문에는 화홍문화제가 열린 10월 15일 '수원 시민의 날'이 건립일자로 되어 있으나 제막식은 23일에 있었다. 앞면에는 이원수 작사 홍남파 작곡의 고향의 봄 악보가, 뒷면에는 건립 내력이 새겨져 있다.
홍난파는 일본 관립 도쿄음악학교, 도쿄고등음악학원, 미국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를 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으며, 1937년 11월 이후에는 경성중앙 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봉선화, 고향의 봄, 애수의 조선 등이 있고, 조선 동요백곡집을 남겼다.
미국 유학 도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8월석방된 뒤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순정의 꽃장사 등을 작곡하고 지휘자로서 방송을 통해 국군가요를 보급하는 한편, 조선총독부의 관변단체인 조선문예회와 조선음악협회,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 가담하여 일제의 전쟁동원과 황국신민화정책을 선전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일제하의 친일반민족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소속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이름과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남치를 향해 가는 길은 급경사 내림계단길이다.
◎ 남치
남치는 남포루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화성 에는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서3치와 마찬가지로 치성 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하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 있다.
*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남치 사진을 담지 못해 아쉽다.
남치에서 ▷ 남수문을 향해 간다.
수원화성 안내 센터 앞이다,
◎ 미복원 서쪽 성벽
수원화성은 팔달문을 기준으로 좌우 성벽이 단절되어 있다. 이곳은 팔달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성벽이 팔달문과 이어지는 구간으로 120m 남서적대와 남은구가 있었다. 남서적대는 팔달문에서 서쪽으로 약 49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남동적대와 함께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도로를 넓히기 위해 팔달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사라졌다.
남은구는 남서적대에서 서쪽으로 약 48m 떨어진곳에 이었다. 팔달산에서 시작된 물길이 성안의 남지 연못을 거쳐 성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 수문으로 성벽 아래에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들었다. 성안에는 5곳의 연못과 2곳의 은구가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지 않았다.
미복원 수원성터에서 팔달문으로 향하는 가는 길은 일반시가지를 지난다.
시가지 길목을 지나서 팔달문을 향해 간다.
◎ 팔달문(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화성 4대문 중 남쪽 대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문이며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위해 통과한 문이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의 의미이며 축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의 바깥에는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팔달문 로타리를 지나는 큰 길은 정조대로로 팔달문과 장안문을 지나는 화성의 남북을 잇는 길이다.
팔달문 시장 입구를 지나고
팔달문 로타리를 돌아서
팔달문과 지동교 사이는 '남동적대 - 남암문 - 남공심돈' 이 있는데 찾지를 못하고 바로 지동교를 향한다.
지동교를 건너서
◎ 남수문
수원천이 화성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어서 북쪽에 있는 수문은 북수문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수문은 남수문이라 한다.
남수문을 바라 보고
이제 남수문에서 ▷ 동남각루를 거쳐 창룡문으로 향한다.
동남각루로 향하는 성곽 바깥 모습
기념 한장 남기고
동남각루로 향하는 성곽 안쪽 오름 계단
동남각루를 오르면서 바라 본 남수문과 팔달문 방향 풍광
◎ 동남각루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풍수에서 안산에 해당하는데, 봉우리가 일자 모양처럼 평평하여 일자문성이라고 불렀다. 서북각루와 같은 구조로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판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이제 창룡문을 향해 간다.
높이가 일정한 성곽을 따라 걷는다.
싸리나무?
화창한 봄날 수원화성을 걸으며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을 만난다.
벗꽃이 활짝 핀 쉼터에서 임진택 산우님과 추억 한장 남기고
경치에 취해 정신없이 걷다보니 동3치와 동2포루 그리고 (봉돈)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동2치에 도달하였네
◎ 동2치
동2치는 동포루와 봉돈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동2치는 1979년에 화성을 복원하면서 다시 쌓았다. 본래 성돌이 붉은 색을 띤 반면 새로 쌓은 곳은 가지런히 다듬은 흰색 돌로 만들어져 있다. 치성 좌우에 있는 옛 성돌에서 돌을 뜨기 위해 정을 박은 흔적을 볼 수 있다.
*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쌓인 통로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 동포루
동포루는 동1치와 동2치 사이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보통 평지에서는 규모를 키우고 경사지에서는 규모를 줄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균일하게 설치되어 있지만 지형과 주변 여건에 따라 규모와 각 층의 높이를 달리 만든 것이다.
동포루는 산상 동성구간에서 비교적 평평한 곳에 있지만 주변 성벽이 높지 않아 작게 만들었다. 남포루와 마찬가지로 1층과 2층은 낮고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했다.
◎ 동1치
동1치는 동1포루와 동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사히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치는 뀡을 말하는데, 뀡이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를 잘하는 특성이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동1치는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을 조망하기 위해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 쌓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암각루에 이르는 길
동1치 사진을 담지 못했다. 아쉽다.
동1포루를 향해 간다.
◎ 동1포루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하였다.
이제 창룡문을 향해 간다.
◎ 창룡문
창룡문을 지나
동북노대를 향해 간다.
동북노대 가는 길목에 수양 벗꽃이 활짝 피었다.
◎ 동북노대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동북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같다고 표현했다.
이제 동북공심돈을 향한다.
동북노대를 지나면서 바란 본 창룡대로와 수원화성안의 풍광
◎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는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빙글빙글 올라가면서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리각' 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재공은 동북공심도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 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 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동장대(연무대)를 향해 간다.
연무대(동장대)가 보이고
성곽을 이리 저리 자연지형을 살려 아름답게 쌓았다.
맞은편 창룡문을 담았다. 창룡문 설명판은 용도 아래에 있었는데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 연무대(동장대)
동장대는 장수가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 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이 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 산상동성
산상동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중에 완만한 경사지를 낀 동쪽 성곽이다. 네 구간 중에 길이가 가장 길다. 동문인 창룡문을 중심으로 북쪽은 동북노대에서 동북각루(방화수류정)까지, 남쪽은 동1포루에서 동남각루까지 모두 16개의 시설물을 아우른다. 이곳은 지형이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다가 동북공심돈에서 가장 높아지는데, 특히 창룡문에서 동남각루 사이는 일(ㅡ)자에 가까워 풍수에서 '일자문성' 이라 불린다.
동성 구간에서 눈여겨 볼 시설은 벽돌로 쌓은 원통형의 동북공심돈과 동북쪽 성 안쪽 평탄한 곳에 자리 잡은 동장대, 용두 위에 우뚝 서 있는 동북각루(방화수류정)와 봉화를 피워 주변과 통신을 하던 봉돈이다.
◎ 동암문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구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이제 동북포루로 행해 간다.
◎ 동북포루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동북포루는 지붕의 모습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이란 모자와 비슷해 보여서 각건대 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동북포루는 다른 포루에 없는 시설을 갖췄다. 여장과 건물사이를 벽돌로 채워서 벽등이라는 단을 만들고, 누각의 계단도 벽돌로 만들었다. 지붕 양 끝에 올린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 역시 동북포루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포루의 특징을 살려 2019년에 다시 복원했다.
이제 북암문으로 향해 간다.
◎ 북암문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사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이제 보물 제 1709호인 동북각루(방화수류정)으로 향한다.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보물 제1709호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 별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읍치를 옮긴 당 유친을 가리키는 뜻 이라고 풀이 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조선 정조 21년 정월, 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옲은 시를 지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이제 북수문을 향해 간다.
◎ 북수문(화홍문)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 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홍예문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막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전회'를 주축으로 수원주민이 힘을 모아 10년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 평지북성
평지북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가운데 평지로 이루어진 북쪽 성곽이다. 북문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북동적대 부터 북수문(화홍문)까지, 서쪽은 북서적대부터 서북공심돈까지 모두 10개 시설물이 있다. 이 일대는 지형이 평탄한 편이여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다른 곳보다 성벽을 높게 쌓았다.
장안문 주변은 성벽이 약간 바깥으로 나온 편이다. 북성 구간에서 눈 여겨 볼 곳은 성문 양쪽에 적대를 세운 장안문, 수원천과 누각이 조화를 이룬 화홍문, 빼어난 군사 시설인 서북공심돈을 들 수 있다.
이제 북동포루를 향해 간다.
◎ 북동포루
북동포루는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죽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수 있도록 만들었고 상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제도를 두루 살펴 화성에 발전된 형태의 포루를 설계했는데, 그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제 북동치를 향해 가지만 북동치를 사진 담지를 못했다. 아쉽다.
북동치를 지나 북동적대로 향한다.
◎ 북동적대
북동적대는 장안문 동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안쪽은 성벽과 같은 높이로 대를 쌓아 군사들이 지키고, 바깥쪽에는 현안이라고 하는 세로 방향의 긴 홈을 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 장안문
장안문 설명판은 용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미처 몰라 지나쳤다. 아쉽다.
장안문에서 쉬고 있는 관광객들
장안문을 기념하고
◎ 북옹성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 모양으로 샇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홍성 한가운데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ㅇ[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북옹성 사진은 담지 못해 아쉽다.
이제 북서적대를 향해 간다.
◎ 북서적대
북서적대는 장안문 서쪽에서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방어 시설이다. 화성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좌우에 적대를 설치했는데 현재 장안문에만 남아 있다. 장안문 좌우 적대에는 현안* 세 줄을 설치한 반면 팔달문 적대에는 두 줄을 설치했다.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의 동향을 살피고 동시에 공격도 가능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적대는 우리나라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다.
*현안 : 성벽의 바깥에 위에서 아래로 낸 홈
이제 북서포루를 향해간다.
긴 성곽이 아름답다.
◎ 북서포루
북서포루는 장안문 서쪽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이제 북포루를 향해 간다.
북포루를 가는 중에 (북은구)를 보아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아쉽다.
북포루가 보이고
◎ 북포루
북포루는 북서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사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군포루'라고도 불렀다.
이제 서북공심돈으로 향한다.
◎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서북공심돈 설명판을 놓쳤다. 아쉽다.
◎ 화서문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 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다.
화서문을 지나 잠시 쉬어 간다.
다시 서북각루를 향해서 간다.
◎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에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져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이제 서1차를 향한다.
◎ 서1치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 5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꺽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이다.
*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긴 화성 성곽을 담았다. 벗꽃이 활짝피어 더욱 아름다운 성곽이다.
서포루를 향해 가는 길은 약간의 오름길이다, 팔달산을 향해 서서히 오름길이 계속된다.
◎ 서포루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가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서2치를 향해 가는 길은 약간 심한 오름길이다.
◎ 서2치
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2치는 팔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급한 경사지에 있어 규모가 작다. 붉은 빛을 띤 다양한 크기의 성돌이 잘 남아 있는데, 평지 성벽보다 규모가 큰 장방형 석재를 하부에 설치하여 하중을 지탱하도록 했다.
* 용도 :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로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길
이제 서2치를 지나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노대와 서장대를 만나러 급한 오름길을 오른다.
팔달산 정상을 향한 급한 오름길
◎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서노대
서장대 설명판을 놓쳤다. 아쉽다.
◎ 서노대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주휘소인 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인다.
화상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하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사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깍아 마감하였다.
이제 서암문 - 서포루를 향해 간다.
◎ 서암문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은 모든 이에게 효성심을 심어줌은 물론 가족의 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수원 시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종이다. 누구나 종을 칠 때에는 뭄가지을 바르게 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을 되새겨 보는 값진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서포루를 향해서 간다.
◎ 서포루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 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 세계문화유산 화성 표지석
세계문화유산 화성 표지석을 지나서
이제 화성 트레킹 원점으로 돌아와서 수원화성을 탐방을 마무리 한다.
제법 저녁 햇살에 그림자가 길다. 귀가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내려온 수원행궁
◎ 여민각
수원화성광장 앞을 가로지르는 정조대왕 대로를 지나 바로 앞에 여민각이라는 종각이 있다. 백성의 평안과 안녕을 늘 기원하는 종각이다. 여기 있는 종소리를 듣고 수원시민들과 수원시 관리자들이 서로 한마음로 뭉쳐 행복하고 평안하고 살기 좋은 고을을 만들기를 기원한다.
여민각과 종
수원화성 탐방을 마치고 이제 귀가할 시간이다. 팔달산과 그 아래 아늑히 자리 잡고 있는 화성행궁 그리고 수원화성광장을 바라본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적지다. 어느 외국에 비해 손색이 없는 역사관광지다. 수원화성을 쌓은 정조대왕과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진 화성을 다시 복원하는 수원 시민의 위대함이 가슴 깊이 스며 든다. 반만년의 우리 역사에 시대 마다 기억해야 할 사실들이 지역마다 수도 없이 많다. 수원화성 처럼 수원시민 처럼 복원하고 관리하고 잘 보관하여 국제적 관광지로 만드는 것은 오늘을 사는 지역민들의 몫이다. 수원 화성탐방을 마치고 드는 생각은 '수원이 부럽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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