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완연하다. 온천지가 초록으로 변하고 기온이 초여름으로 치닫는다. 들녘엔 모내기가 한창인 때 장성 입암산으로 향한다. 녹음이 짙어가는 5월 중순 근교 산행지로 딱이다. 편안하고 싱그럽고 아늑하기 때문이다. 입암산성에 대한 역사적 흔적도 살피며 입암산 산행의 오랜 추억도 되새겨 볼 겸 지인님들과 배낭을 멘다.

남창주차장에 주차하고 초입 전남대수련원을 지나 몽계폭포 탐방로 갈림길과

내장산국립공원 백암분소 남창탐방지원센터가 있는 현 위치를 지나 조금 오르면 조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 입암산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윤진과 임시득과 의병들을 기리는 위령제단이 나온다.

행소모별장 임후시득 청덕유혜비
"행(行)"은 정품이 아닌 임시/보직 직함을 의미하며, "소모(召募)"는 모집병을, "별장(別將)"은 일반 장군과 구별되는 특수 지휘관을 뜻한다.
정유재란 당시 입암산성을 지키다 순절한 임시득에 대한 공덕비다.
임시득은 종 3품 벼슬을 가진 무관이다. 별장이란 산성을 지키는 장군으로 특별한 관직인데 종 9품이다. 이곳 입암산성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높은 관직을 가진 별장을 배치하였나 보다.

율정 파평윤공 휘 진 순의비
○ 입암산성 별장 윤진
윤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입암산 남문 창의에 참여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가족과 함께 입암산성에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한 뒤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함. 그를 기리는 윤진장군순의비가 입암산성 남창계곡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입암산성 순절제위 위령제단

위령제단
절상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친구인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이듯이 호남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1592년(임진년)부터 1597년(정유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 중 장성현 남문에서는 3차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 왜적에 맞섰다.
정유재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별동군이 진원현과 장성현에서 가옥을 불사르고 2,000여 양민의 코와 귀를 도륙하였다. 이후 입암산성까지 쳐들어오자 장성의 의병들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1597년 9월 16일 산성별장 윤진 장군 이하 모든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누란의 위기 속에 나라를 생각한 선현들의 진충보국 정신을 오늘날까지 귀감으로 삼고자, 이곳에 정성스럽게 향화를 피우고 술잔을 올려 영령의 제위를 위로하고 있다.

장성새재 갈림길
한참을 걸어 오르면 장성새재로 오르는 갈림길을 지나 우리는 곧장 은선동삼거리로 향한다.

장성새재갈림길 이정표

현 위치

계곡 출입금지

은선동삼거리로 오른 남창계곡은 벌써 싱그런 녹음으로 우거져 여름을 부르고 있다.

계곡에도 짙은 녹음이 드리우고

은선동삼거리에서 입암산성 남문으로 향한다.

은선동삼거리 현 위치

입암산성 남문 쪽으로

입암산성
입암산성은 포곡식(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처음 축성된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한시대부터 산성이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정읍과 장성의 경계인 입암산은 지형이 높고 험하기로 유명한데 특히 이 지역은 외부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옛날 선조들은 산성외곽에 차단성, 옹로(유인하는 통로) 등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성은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석성이다. 동쪽으로는 동암문에서 장성새재를 거쳐 정읍 삼성산까지, 서쪽으로는 임압산 등산로를 따라 시루봉을 지나 갈재까지 연결되어 있다.

입암산성으로 가는 길
○ 입암산성 남문

입암산성은 암벽과 가파른 봉우리를 따라 가운데 계곡과 평지지역을 둘러싸듯 축조되었다. 입암산성 남문은 산의 지형상 가장 낮은 지대이므로 산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활용되었다.
남문 성벽은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은 협축식 성벽으로 수직에 가깝게 조성되었다. 성벽의 축성 재료는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화강암, 점판암 등의 석재이며 자연 그대로의 원석과 거칠게 가공한 것을 사용하였다.
남문에는 성문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돌 둔태*가 남아 있으며, 기와 조각들의 발견되어 남문 상부에 문루 등의 건축물이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둔태 : 문장부를 끼우는 구멍

입암산성 남문 추정 입면도와 평면도

남문으로 가는 계단

계단을 오르면 녹음 속에 남문 입암산성이 나타나고

입암산성으로 통하는 자연석문

입암산성 남문

지금은 입암산성 남문이 없어 계곡으로 변해 방치되고 있지만, 언젠가 입안산성이 복원되고 남문도 복원되길 바래본다.

남문으로 향하는 다리를 지나

남문이 있던 자리

입암산성 남문 쉼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입암산성도
○ 입암산성
예부터 전라도를 방어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입암산의 높고 험한 산세와 물이 풍부하여 산성 축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해발 600m 내외에 형성된 포곡식 산성(계곡을 감싸고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이다. 성벽은 협축법(앞 뒤 모두를 돌로 쌓은 형식)으로 쌓았다. 평면 형태는 장축방향(북서-남동쪽)으로 타원형에 가깝다.
처음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 나온다. 고종 43년(1256) 3월 기사에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자 송군비 장군이 입암산성에서 승전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구 침입으로 성의 중요성이 커졌던 듯 여러 문헌에서 위치, 규모, 형태, 수축과정 등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성과 관련된 시설은 치첩(성에 낮게 쌓은 담), 문 2개소(북문, 남문), 장대(장수가 지휘하던 곳) 등이, 성 안에는 진헌(관청), 거안관(숙소), 군기고(무기창고), 군량고(양식 창고), 안국사(절), 우물 10개소 등이 있었다.
성은 별장(무관으로 성의 수장)이 관할했다. 정유재란 때는 이곳에서 별장 윤진(1548~1597)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했다.
2006년 정비, 복원의 고증자료 확보를 위한 남문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 남문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두 번 이상 고쳐 쌓았음을 밝혀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5,200m로 동벽과 북벽 구간이 보존 상태가 좋다. 고려시대 ~ 조선시대에 이르는 전남의 대표적인 입보산성(주변 고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식량과 생활도구를 챙겨 들어가 적이 물러갈 때까지 살면서 방어하는 산성)으로 역사적, 호국적 가치가 높은 호국 유적이다.
○ 황룡강 발원지

영산강의 제1 지루인 황룡강의 발원지가 입암산 아래 계곡에 있다. 입암산성 남문에 황룡강 발원지 표지가 있지만 이 물줄기는 더 올라가면 입암산 아래에서 시작된다.


황룡강 발원지

입암산 남문과 황룡강 발원지에서 잠시 막거리 한잔에 쉬어 간다.

황룡강 발원지 기념

오늘 동행한 지인님들
○ 입암산성 성내시설과 해자(저수보)

입암산성의 성내에는 다양한 시설물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입안산성을 지휘하고 방어하는 관아, 호국의식을 배양하고 유사시 성곽을 보수하였던 사찰, 고창, 담양, 장성, 정읍 등 다양한 곳에서 보내온 무기와 곡식을 저장하였던 창고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소금창고와 된장창고까지 있었다.
선조들은 입암산성의 다양한 시설물들을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환경을 활용 7개의 해자(저수보)를 만들어 사람들의 용수로 사용하는 한편, 전쟁 시 시설물을 보호하는 방어막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 입안산성과 전봉준 장군

입암산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과 그 일행 이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잠시 머문 곳이다. 당시의 입암산성은 별장 이춘선(1845~1896)이 지키고 있었는데, 전봉준 일행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숨겨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다음날 백양사 청류암에서 하룻밤을 지낸 전봉준 일행에게 기별을 보내 관군의 추격을 피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순창 쌍치면 피노리로 피신한 전봉준 일행은 재기를 노렸으나 믿었던 동지의 밀고로 결국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다음 해 3월 처형되었다.

입암산성 가운데에는 너른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 높은 위치에 위치한 임산성성 평지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평지로 주변에 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이다.

이곳 평지는 출입금지구역이다. 허용된 등산로를 걷다 보면 녹음으로 각종 시설물이 가려 있어 볼 수 없으나,
이곳 입암산성 평지는 그 옛날 나라에 외침이 있을 때 백성들이 피신하여 오랫동안 항거할 수 있도록 각종 시설물들이 들어선 곳이다. 짙은 녹음 속으로 역사는 흐르고 세월은 말이 없다.

국립공원 안에 포함되어 입암산성에 대한 개발이 제한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입암산성은 원형을 복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때 선인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 입암산성의 역사
입암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입암산성은 약 5.2km에 이르는 장대한 포곡식 산성이다. 삼한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군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입암산은 왜적의 침입에서 호남을 지킨 중요 요충지이며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한 호국유적이다.

- 삼한시대 : 입암산성 처음 축조
- 삼국시대 :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 고려시대 : 몽골의 6차 침입.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과 싸워 승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 조선시대 : 정유재란 윤진이 입암산성을 수축하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함
- 조선말기 :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태인전투 패배 후 입암산성으로 피신한 후 재기를 노렸으나 순창에서 체포됨
○ 고지도 속 입암산성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을 지나

북문이 자기다.

입암산성 북문 현 위치

만화재 방향 등로

입암산성 북문 현 위치

기념 한 장 남기고

갓바위로 향한다. 갓바위로 향하는 내내 입암산성을 따라 오른다.
○ 거북바위


나뭇가지가 떨어진 가을이나 겨울에는 선명히 거북 머리가 보이지만 벌써 녹음이 짙어져 시야를 가린다.

거북바위를 지나면 처음으로 확 트인 조망이 터진다.

저기 손에 잡힐 듯 갓바위가 보인다. 산 아래 정읍에서 보면 영락없이 갓을 쓴 모양이다.

갓바위 전망대

갓바위전망대에서 오늘 함께한 지인님들

나도 한 장

남창계곡

갓바위에서 바라본 전망


입암산 갓바위 장상석

기념 한 장

갓바위에 올라

뜀박질

이제 하산이다. 하산 도중 만난 바위군

한참을 내려왔다.

남창주차장으로 향한다.

하산길에 편백숲

싱그러운 편백숲 향기에 젖어들고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 산길은 우장이고 의리이다.

오를 때도 그랬지만 하산길에도 짙은 녹음이 싱그럽다.

하산길에 만난 '바위 글씨와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이야기'

글씨가 새겨진 바위
○ 입암산성 산행을 마무리하면서
짙은 녹음으로 치닫는 5월 중순 근교산행으로 장성 남창계곡 입암산을 찾았다. 편안하고 싱그런 계곡 산길을 따라 추억을 되새기며 한가롭게 다녀온 입암산이었다. 여러 번 오른 산행으로 여유롭고 편안한 산길이기에 이번에는 입암산성에 관한 내용에 눈길이 많이 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면 참 애 닮고 슬픈 역사적 흔적이 많다.
특히 고려 몽골의 침략과 조선 임진, 정유년 일본의 침략 그리고 거란의 침략과 일제감점기,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아픔의 흔적들 말이다.
그 처절한 상황에서 이 땅의 민초들이 지켜낸 숙연한 역사의 흔적들을 살피면서 당시 상황에 내가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많은 생각 앞에 머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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