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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무등산둘레길

2024.07.13. 광주 무등산둘레길 2구간(가사문학의 길 : 가사문학관주차장-정곡2리) 11.5km

by 하여간하여간 2024. 7. 16.

1. 일자 : 2024.07.14.(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대원 12명

3. 트레킹구간 : 가사문학관 주차장 - 식영정 - 환벽당 - 취가정- 소쇄원 - 독수정 - 함충재 - 정곡리 (11.5km)

 

 

4. (국가 숲길*) 광주무등산 둘레길을 개척하며

빛고을 광주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의향, 예향, 미향이다. 

 

광주하면 정의의 도시이다 불의에 항거하고 독재에 어제든지 일어나 역사를 바로 잡았던 곳이 광주이다.

광주는 문화예술의 도시이다. 도(충과 효)를 알고 예로 승화사켜 삶의 품격을 항상 높여 가는 도시이다.

광주는 맛의 고장이다. 광주5미를 비롯한 전통 맛집들은 광주가 맛의 고장임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무등산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인, 의, 충이라고 생각한다.

 

 

무등산의 정상이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합치면 인이 된다.

사람이 마당히 지켜야 할 다섯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에서 으뜸이 인이다.

공자는 인은 사랑이라고 했고 맹자는 측은지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인이라고 했다.

다양성의 시대, 상대를 인정해 주는 근본은 인이다.

 

의와 충

 

1592년 임진왜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980년 광주민중항쟁 등 역사적 갈림길에서 의를 의해 목숨을 바친 의인들이 무등산 자락에 누워 있다. 

 

5.18 민주영령을 만나고, 제봉 고경명, 충장공 김덕령, 금남군 정충신을 만나며,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진 실학자 규남 하백원선생을 만나는 길 

 

광주하면 무등산이다. 무등산은 호남정맥의 중심 산이다. 영산강과 섬진강을 품어 안고 호남 들녁의 모든 생명의 물줄기를 적시며 지역의 숱한 역사적 사건을 말없이 지켜보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산이다.

 

이런 무등산을 중심으로 5.18 민주화 운동 정신이 깃들은 국립5.18민주묘지를 비롯한 숱한 역사 유적지와 무등산 주변 정자 문화와 생태, 지질, 영산강과 황룡강의 역사문화 유적들을 고루 포함하는 무등산둘레길(국가 숲길)을 100km 전후하여 국가숲길로 만들어 보고자 한다.

 

* 국가숲길 : 산림생태적,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숲길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해 산림청이 지정 고시하는 제도.

2024년 3월 현재 우리나라는 총 9개로 1,465.6km지정

 

광주 국가 숲길 무등산 둘레길 예정

 

5. 무등산둘레길2구간(가사문학의 길 : 가사문학관 주차장 - 정곡리) 12.5km. 

 

가사문학관 주차장에서 2구간을 시작한다.

 

◎ 한국가사문학관

 

◇ 가사문학이란?

 

가사는 고려 말에 발생하고 조선 초기 사대부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잡아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로 율문 (律文)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형식상 4음보(3·4조)의 연속체인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 가사문학의 발생

 

조선 전기 가사의 주 담당층은 송순·정철·박인로 등으로 대표되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다. 그들은 생활의 체험과 흥취 및 신념을 노래했는데 특히 두드러진 것은 '강호(江湖) 가사'이다. 이 작품들에는 혼탁한 세상의 고단함과 갈등으로 부터 떨어져 나와 자연에 묻혀 심성을 수양하며 살아가는 유학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작품은 자연 (우주적 질서)과 자아의 조화로운 합일을 추구하는 높은 정조를 띠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정적 정조는 이 시기 가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 으로는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이 있다.

 

시가정


조선 후기 가사는 박인로, 김인겸, 정학유 등과 평민 및 부녀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시기의 가사 창작에 평민과 부녀자층이 등장한 것은 시조에서 작자층이 확대되었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음풍농월하던 서정 중심에서 벗어 나 실생활에서 제재를 구하고 서사적, 교술적 내용이 가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형식적으로도 장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박인로의 '태평사', '선상탄', '누항사', 김인겸의 기행가사인 '일동장유가', 정학유의 '농가월령 가' 등이 있으며, 평민가사로는 '우부가(愚夫歌)', '용부가(傭婦歌)' 등이 있고, 내방 가사로는 '규중행실가', '원한가' 등이 있다.

 

 


개화기에 제작, 발표된 한국 시가의 한 양식을 개화가사라 한다. 그 내용에는 개항과 함께 한국사회의 한 과제가 된 문명개화와 진보·발전·부국강병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형태면에서 보면 고전 시가의 한 양식인 가사의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4·4조 또는 3·4조의 자수율에 의거한다. 그리고 그 분량이 상당하여 긴 연형체 시가이다. 시기적으로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창가나 신체시 보다 앞서 제작, 발표되었다. 따라서, 개화가사는 한국시가사상 최초로 형성된 근대적 양식이다. 다만, 이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그 선구성 때문에 과도기적인 단면도 강하게 지닌다. 개화가사의 어투는 대게 직설적이다. 이것은 근대시가 정서적인 언어를 써야 한다는 공리에 어긋난다. 개화가사의 또다른 과도기성은 작자의 비전문성으로도 나타난다.

 

 

 

 

 700년 가사문학의 향기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 많은 문화유산을 보존, 전승해 온 유서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 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 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무등산 정기 어린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 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 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담양군에서는 이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은 호남 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있게 하고 있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전국에 두개가 있다. 하나는 강원도 영월에 독 같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 식영정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가사문학로 859

명승 제57호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의 정자이다. 조선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가 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108개의 개단을 오르면

 

석천은 이곳에서 '식영정20영'을 지었는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차운하였으며, 이들 네명(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을 '식영정사선' 이라 불렀다.

 

 

이런 이유로 식영정을 '사선정' 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철은 이곳 승경을 무대로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시가를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식영정은 197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 조대(釣臺) · 노자암(鸕鹚巖) · 방초주(芳草洲) · 서석대(瑞石臺) 등의 승경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두가 물 속에 잠겨버리고, 정자 옆에 세워진 「성산별곡」의 시비(詩碑)만이 정철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 식영정 주변 풍광

 

 

◎ 성산사

 

식영정 경내에는 서하당과 석천을 주향으로 모셨던 성산사가 있는데 그간 없어진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성산사

 

 

 

◎ 부용당

 

 

◎ 누가정

 

 

만서각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환벽당으로 향한다.

 

◎ 환벽당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이다.

 

 

* 사촌 김윤제 : 본관이 광산으로,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교리 겸 춘추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서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다라는 의미이다. 환벽당은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 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이 지었으며, 벽간당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이다.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제액이 걸려있고, 석천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환벽당에 관한 시는 정철이 지은 2수가 있는데, 송강속집과 광주목지에 실려 있다.

 

 

환벽당에는 정철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김윤제가 이곳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보니 미역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외손녀를 이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소년이 뒤에 정치가로서 또한 문호로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 한다.

 

 

환벽당 아래는 김윤제와 정철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와 용소가 있다. 창계천 동북쪽으로 250m쯤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이 있으며, 환벽당 바로 곁에는 취가정이 있다. 인근에는 독수정과 소쇄원이 자리 잡고 있어 바로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 지역임을 알 수 있다.

 

 

 

◎ 취가정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이 자신의 꿈에서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해 읊은 〈취시가〉에서 유래한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과 권필의 애끓는 사연이 녹아있고, 많은 선비들이 시문을 남기는 인문학적 배경과,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과 함께 경관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김덕령장군의 죽음은 너무나도 억울함이 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 그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과 함께 구금 되었지만 김덕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곧 풀려났지만 유독 김덕령만 혹독하게 다루었다. 결국은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사를 했으니, 그 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왜 그랬을까?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음부터 동인 사람들의 활약과 의병들의 활약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의주로 피신할 때 백성으로부터 돌팔매를 당하는 수모를 어떻게든 반전시키기 위해 자신이 명나라에 요청하여 명군이 왔고, 그 명이 참전하였기에 명과 왜가 협상하여 왜적이 물렀갔다고 하면서 임진왜란의 공은 자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한다. 따라서 이순신 같은 훌륭한 동인 사람들의 혁혁한 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심한 왕의 모습이다. 의주로 피신할 때 자신을 호위한 사람들을 전장에서 목숨을 바쳐 왜적을 물리친 사람보다 높은 공신을 적용하였다. 김덕령의 혁혁한 공이 그렇찮아도 눈에 까시인데 잘 됐다 싶어 이몽학의 난과 연루하여 결국 옥사시켰다. 이런 놈이 왕을 했으니 나라 꼴이 어떠했겠는가? 이순신장군이 전장에서 전사했기 망정이지 만약 살아 돌아 왔으면 어떠 했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 억울한 죽음을 시 한편에 담았다. 

 

 

 

春山曲(봄 산을 노래하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 다 핀 곶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잇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충장공 김덕령

 

 

◎ 다시 지방도 887번으로 돌아와 소쇄원으로 향한다.

 

지실마을 앞 버스 도로변에 핀 백일홍과 능수화! 여름꽃의 상징이다.

 

 지실마을

 

북산방향

 

무등산 원효계곡 방향

 

증암천 물주기가 시원스럽다.

 

◇ 그림이 있는 방앗간

 

아름답고 포근하고 아늑한 찻집이다. 옛날 이곳은 방앗간이였나 보다. 세상이 변하고 농사보다는 관광지가 되다 보니 방앗간에서 찻집으로 변했다. 박옥현 노무현재단 공동대표님 지인분이 운영한신단다. 

 

 

인사도 할 겸 들렸다. 주인님의 소박한 웃음 속에 우리를 참으로 포근히 맞아 주신다. 시원한 수박 주스와 아메리카노 커피 한장으로 피로를 푼다. 물론 찻값은 박옥현 공동대표님께서 기분 좋게 쏘셨다. 앞으로 꼭 이곳을 지나가면 들려보리라.

 

평촌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서

 

증암천 개울물을 거슬러 올라 소쇄원으로 향한다.

 

◎ 한국 최고의 원림 소쇄원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중종조. 중종의 신임 속에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추진했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전라도 능주로 유배당하자 그를 따르던 젊은 학자들은 모두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당시 17세였던 젊은 제자 양산보(梁山甫)는 유배지까지 따라와 그를 모신다.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사망했는데 이때 큰 충격을 받은 양산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현세에서의 공명과 현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를 짓고 은거생활을 시작한다.

 



배롱나무 꽃이 개울가에 빨갛게 군무를 이루고 있는 자미탄을 따라 창암촌에 다다르면 소쇄공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을 만날 수 있다. 자미탄은 무등산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담양군 고서면을 지나 광주로 흘러가는 개울이 배롱나무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붙여진 증암천의 별칭이다. 지금은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만수 때 소쇄원 아래까지 물이 차올라 배롱나무 핀 여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광주호의 상류에 창암촌이 있는데, 이 마을이 양산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그는 15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519년 17세에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창암촌 옆의 산간 계곡을 택하여 조성한 별서가 바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정원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림 자료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정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원의 설계도, 혹은 준공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소쇄원도(瀟灑園圖)〉가 현존해 있다. 〈소쇄원도〉는 1755년에 제작된 목판화로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이라는 소쇄원의 경관을 노래한 시가 상단에 각자되어 있으며, 계류를 중심으로 조영된 정원의 시설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다.

 

소쇄원도

 

1755년에 목판화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 별서정원인 소쇄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곡문을 통해 흘러드는 계류를 중심으로 건물과 연못, 담장, 석축, 수목 등의 입면을 사방으로 눕혀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했다.

 

대나무 숲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대숲은 정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숲을 지날 때 바람소리가 적막과 고요를 깨는 소슬함을 느끼게 하여 지나는 이를 전율케 한다. 소쇄원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인 이곳을 통과해야 비로소 은일자의 성역인 선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대숲은 소쇄원의 내외를 구분짓는 요소이자 신선의 경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입구다. 이곳을 지나야만 내원으로 진입할 수 있어 소쇄원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소쇄원의 내원은 광풍각과 제월당을 중심으로 대봉대, 연못, 애양단 담장, 계류, 화계를 비롯해 나무 홈대(飛溝), 물레방아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광풍각

 

광풍각은 소쇄원의 가장 주된 건물로 후면의 단 위에 지은 제월당과 짝을 이루고 있다. 두 건물의 이름은 송나라 때 명필로 이름난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 이야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에 해가 뜨면서 부는 청량한 바람(光風)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霽月)과도 같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은일생활을 하는 양산보가 스스로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을 뜻하고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제월당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다.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봉대

 

광풍각의 건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쪽에 초정으로 지어진 대봉대(待鳳臺)가 자리하고 있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정자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이름의 대봉대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를 심었다.

 

 

소쇄원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전통적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담장을 만든 오곡문은 매우 세련된 조경기법이라 할 수 있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자연과 더불어 지어지는 별서정원은 담장 안으로 한정된 일본이나 중국의 정원과 달리 한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이다. 소쇄원은 이러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내원조차 크게 수식을 가하지 않고 조영하기 때문에 전혀 화려하지도 인공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별서정원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모두 구성 요소로 차경(借景), 거대한 정원으로 구성하고는 이 모두를 신선이 살고 있는 정원인 동천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소쇄원의 외원은 후간장(帿竿場), 오암(鰲巖)과 오암정(鰲巖井), 지석리(支石里), 자죽총(紫竹叢), 바리봉(鉢裏峰), 황금정(黃金亭), 창암동(蒼巖洞), 고암동(鼓巖洞), 옹정봉(瓮井峰), 가재등(加資嶝), 장자담(莊子潭), 죽림사(竹林寺), 산리동(酸梨洞), 장목등(長木嶝), 한벽산(寒碧山) 등 내원과 바로 곁에 있는 것에서부터 멀리 무등산의 안산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별서정원의 깊고 그윽한 맛은 이러한 정원의 의미와 상징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다.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 원림이다.

한국 민간원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명승 40호로 지정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 다시 돌아와 증암천을 따라 독수정으로 향한다.

 

다시 돌아와 증암천을 거슬러 올라 독수정으로 향한다.

 

청정하고 맑은 증암천 물소리를 벗삼아 오손 도손 둘레길을 걷는다.

 

평온하고 아늑한 무등산 자락의 풍광이 정겹다.

 

무등산 자락 구석 구석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이 부럽다.

 

다소 지루한 둘레길이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걷는 길은 행복하다.

 

증암천 수풀이 무성히도 자랐다. 건강한 생태이다.

 

반석마을

 

반석마을 입구 표지석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꺽어 천변을 걷는다.

 

에델바이스와 남면교회가 아름답게 보이는 가사문학면사무소 

 

싱그런 벼가 잘 자라고 있는 논을  배경 삼아 가사문학면을 담았다.

 

독수정으로 오르는 산음교 입구에서

 

산음교에서 바라 본 증암천 상류방향

 

전신민 유공비

 

독수정으로 오르는 숲길

 

전신민 기단비

 

◎ 독수정 원림

 

 

전라남도 기념물 제61호

 

독수정은 고려 공민왕 때에 북도 안무사 겸 병마 원수를 거쳐 병부 상서* 를 지낸 전신민이 세운 정자이다. 독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에서 따온 것인데, 은거하여 살아가는 선비의 높은 절개를 나타낸다. 전신민은 고려가 망한 후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독수정은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전신민이 아침마다 고려의 도읍인 송도(지금 개성)를 향해 절을 하며 충절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독수정 주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살구나무, 매화 등이 심어져 있어 고려시대 산수 원림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병부 상서 : 고려시대 정 3품 관직으로 오늘날 국방장관에 해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중앙에 방이 있는 팔각지붕의 건물이다.

 

 

 

◇ 서은 전신민

 

전신민은 고려말의 공민와 대에 병부의 으뜸 벼슬인 병부상서를 역임하였으나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무등산으로 내려왔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렀으나 벼슬길 나아가지 않고 고려 수도 송도를 향해 북향으로 독수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살았다. 전신민이 살던 이곳은 산음동이라 불리는데 북향마을의 특징을 할 수 있는 산그늘이 지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그분의 충절을 기리며 이 마을에 살고 있다.

 

 

◎ 의병 전적지

 

 

 

일시 : 1908년 4월 5일

장소 : 담양군 남면 연천리

 

당시 창평군 내남면 연천동에서 의병 40여 명이 왜병 32명과 약 한시간 동안 치열한 접전 끝에 7명의 의병이 전사한 전적지이다.

 

 담양군 향토문화연구회

 

여휴~ 숨차. 독수정에서 급경사 오름길을 가파르게 올라 함충재에 도달했다.  

 

함충재에서 잠시 쉬어 간다.

 

정곡리 하산길은 편안하고 울창한 숲길이다.

 

어느 펜션

 

정곡리로 접어 들고

 

정곡리 골목길

 

정곡리 경로당 

 

정곡리 마을 입구 느티나무

 

정곡리 경로당

 

마을의 수호신 느티나무를 지나서

 

정곡리 마을 표지석

 

정곡리 버스정류소가 있는 도로 887번을 향하여

 

정곡리 보호수 왕버들나무

 

이곳에 정곡리 보호수인 왕버들나무에서 2구간을 마무리한다.

 

◎ 담양 시내버스 승강장으로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 개인 주택을 지나

 

정곡리 입구 표지석도 보고

 

아름다운 황토 돌담을 돌아

 

정곡리 무등산국립공원동부사무소 담양분소 앞을 지난다.

 

정곡리 노인회관을 지나서

 

유둔재 방향

 

정곡2구 버스정류장에서 석곡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다음 3구간인 경상마을 방향

 

정곡2구 버스정류장에서 기념 한 장

 

오늘 오후는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 가사문학면을 주로 걸었다. 식영정 - 환벽당 - 취가정 - 소쇄원 - 독수정의 정자와 원림을 둘러보면서 역사적 사실을 더듬어 보고 선현들의 올곧은 삶을 살펴보았다.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바쳐 충성하는 의와 충의 정신을 배워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