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 : 2023.03.01.(수)
2. 누구랑 : 서울사는 고향 지인들
3. 산행구간 : 북한산우이역 - 우이분소 - 봉황각 - 백운대2지킴터 - 백운대공원지킴터에서 올라 온 길과 만남 - 하루재 - 북한산특수산악구조대 - 백운봉암문(위문) - 백운대 - 백운봉암문(위문) - 용암문 - 북한산 대피소 - 동장대 - 대동문 - 소천계곡 갈림길 - 운가시 갈림길 - 진달래능선사거리 - 소귀천계곡길 - 북한산우이역 (원점)
4. 산행소감
3월 1일 삼일절 국경일 뜻 깊은 날, 서울 북한산 백운대를 올랐다. 서울 북한산 백운대는 매년 오르고자 한 10대 명산 중에 하나다. 그래서 내게는 오늘 북한산 백운대를 오른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배낭을 매고 지하철을 탔다. 북한산우이역으로 향한다. 북한산 백운대는 몇 번 오른적이 있다. 인수봉과 만경대의 거대한 암봉과 더불어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암봉이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많다. 우수가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서 북한산 백운대에는 아직 따스함보다는 쌀쌀한 바람이 차갑다. 그러나 손이 시리거나 귀가 얼얼하지는 않는다. 백운대에 올라 바라본 조망은 참으로 압권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이 북한산과 남쪽의 한강 등 풍수리적인 면을 고려하여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북한산은 100대 명산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산이기도 하다. 북한산 백운대는 단지 100대 명산을 오른다는 의미를 넘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북한산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백운대를 비롯한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영봉, 사패산, 오봉,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서울의 중요한 산자락을 모두 조망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였다.
5. 산행추억
북한산국립공원 표지
북한산국립공원 표지석
소귀천 계곡과 대동문으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
용암문 갈림길 이정표.
백운대 탐방지원센터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서 하루재로 향한다.
하루재를 넘어
인수봉의 위용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재에서 내려오면서 더욱 가까워진 인수봉
인수암
다른 곳은 봄이 오고 있는데 백운대 가는 계곡은 북쪽으로 아직 깊은 겨울잠 속이다. 계곡은 꽁꽁 얼었다.
오늘 함께한 고향 지인들
북한산특수산악구조대 백운의 혼 탑
산장벽에 걸려 있는 이상한 이정표
백운대가 눈에 들어오고
이곳 산장에는 예전엔 노 부부가 음료나 긴급 식량 등을 팔았으나 지금은 없고 북한산특수산악구조대가 활용하고 있다.
북한산성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길이는 11.6km, 내부 면적은 5.3㎢에 달한다. 북한산성은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고 현재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북한산성을 쌓는 것에 대한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도성의 배후에 산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제 축성은 1711년(숙종37)에 이루어졌다. 논의 과정은 길었지만 성벽을 쌓는데는 단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성벽은 평지, 산지, 봉우리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다. 축성 방법을 살펴보면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그 보다 낮게 쌓거나 여장을 올린 곳도 있다. 봉우리 정상부는 성벽을 쌓지 않았는데 그 길이는 3km이다. 특히 성벽의 높이를 지형에 따라 달리 한점, 성문의 여장을 한 장의 돌로 만든점, 웅성과 포루를 설치하지 않은 점, 성을 이중으로 쌓은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산성의 특징이다. 주요 출입 시설로 대문 6곳, 보조 출입 시설로 암문 8곳, 수문 2곳을 두었다. 성곽지대에는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랑 143곳이 있었다. 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주둔부대가 있던 유영 3곳, 이 유영의 군사 지휘소인 장대 3곳을 두었다. 또한 군량을 비축하였던 창고 7곳,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 사찰 13곳이 있었다.
백운봉 오르는 중간 이정표
봉암문(위문) 앞에 있는 이정표
북한산성의 백운봉암문(위문) 앞에 섰다.
백운대로 이어지는 북한산성
인증 한 장 하고
인수봉의 멋진 모습이 가지 사이로 다가 온다.
백운대으로 이어지는 북한산성
백운대 오르는 중간에 기암에서 바위놀이
앞에 있는 만경대의 황홀함에 혼을 쑥 빼앗기고
기암에 앉아 황홀경에 망중한이다.
참으로 아름답다.
만경대와 저기 하늘금엔 보현봉과 문수봉이 아련하다.
만경대를 바라보며 기암 놀이 인증
백운대 오르는 중간에 만난 얼굴바위 앞에서
먼 곳을 바라 보는 얼굴 바위! 얼굴처럼 보이나요?
백운대 오르면서 중간에 바라본 인수봉의 위용
백운대 오르는 중간에 인수봉을 배경으로 한 장
백운대 바로 아래에서
오늘이 3.1절 뜻 깊은 날!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그날의 의미를 가슴에 새긴다. 일제 침략에 저항해서 온 국민이 항일 조선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3.1 운동 암각문
고양시 향토유적 제32호
이 암각문은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새긴 기록문이다. '경천애인'이란 네 글자와 함께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 만세를 도창했다.' 라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글은 새긴 시기는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각문을 새긴 정재용은 1886년 해주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해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이다.
3.1 운동 암각문
백운대에서 내려다 본 거대한 암릉 풍광
만경대와 노적봉 넘어 보현봉, 문수봉, 의상봉이 하늘금에 아련하다.
백운대 태극기 아래에서
3.1운동의 뜻 깊은 날 3.1운동 암각문이 새겨져 있는 백운대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의지를 다시 새기는 순간이다.
고향 친구 이수열님이다. 그는 북한산을 밥먹듯 오른다. 오늘 북한산 안내 뿐만아니라 사진 포인트 마다 멋진 사진을 찍어주는 수고로움을 마다 하지 않았다. 고맙고 감사한다. 그는 참으로 성실하고 진실하다. 의리와 순수 그 자체이다. 수정 같은 친구다. 신뢰와 믿음 우정과 사랑의 수정체이다. 늘 존경하고 감사한다.
북한산 백운대 인증하고자 긴 줄을 불평 없이 기다리고 있는 등산인들
북한산 백운대에서 인수봉을 배경으로 살짝 한 장
백운대가 암각이 나오도록 이왕이면 인수봉이 나오도록 각도를 잡아본다.
삼각산
삼각산은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봉(787m)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볼 때 이 봉우리들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삼각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때의 부아악이 삼각산을 말하는 것이다. 삼각산 봉우리는 쥐라기(1억 8천만년 전~ 1억 3천 4백만년 전) 말에 형성된 대보화강암(흑운모화강암, 또는 화강섬록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형상을 달리하는 반구형 형태를 보이며, 산 사면의 경사는 대체로 70˚이상에 달한다.
주봉인 백운대의 정상에는 약 500㎡의 평탄한 공간이 있어 수백명의 사람이 앉아서 탁 트인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으며, 암벽 등반 장소로 유명하다. 동남쪽에 솟은 만경대는 국망봉이라고도 불렀다. 만경대는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으러 순례할 때 백운대로부터 맥을 밟아 만경대에 이루러 서남방향으로 가 비봉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기에 한 석비가 있었는데 "무학이 길을 잘 못 드러 여기에 이른다"라고 적혀 있어 길을 바꾸어 내려가 궁성터(오늘의 경복궁)를 정했다고 한다.
백운봉에 올라
(출처, 연려실기술, 열성어제/ 태조 이성계)
넝쿨 움켜쥐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흰 구름 가운데 암자 하나 걸려 있네
눈에 보이는 곳 우리 땅으로 한다면
오월의 강남 땅도 그 속에 있으련만
삼가 태조대왕의 「등백운암봉」시에 차운함
(출처, 연려실기술, 열성어제/숙종)
귀하신 발걸음 백운봉 높이 오르시어
뭇 봉우리 서광으로 휘감기게 되었네
성조의 덕부가 천지 간에 크기만 크니
땅 끝까지 널리 모두를 포용하리로다
삼각산
(출처, 매월당속집/김시습)
높은 삼각산 봉우리 하늘을 찌를 듯
그 위에 오르면 북두칠성도 딸 수 있어
비구름을 불러일으키는 저 봉우리
왕실을 만세토록 평안케 하리로다
백운대를 내려오면서 보았다. 거대한 독수리 바위! 독수리 한 마리가 창공으로 금방이라도 날아 갈 듯 그 기세가 대단하다.
오리바위도 보았다. 만경대와 오리바위
오리바위와 노적봉 그리고 하늘금엔 보현봉과 문수봉 향로봉 산군들
만경대 아래 거대한 하마 한마리가! 독수리바위와 하마바위
만경대 아래 거대한 바위 군을 당겨본다.
백운봉암문(위문)에 내려와서 다시 하마를 쳐다 보고
백운봉암문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9836m)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인데, 일제강점기부터 위문으로 불렀왔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백운봉암문은 어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봉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로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백운봉암문에서 올려다 본 하마바위 위용
이제 우리는 대동문을 향해 간다.
대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백운대 위용과 주변 암봉군의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난다.
백운대를 배경으로 한 장
백운대와 그 주변 암봉들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한 장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곳을 늘 다니는 분들은 그냥 보일지 모르지만 오랫만에 와본 나로서는 정말이지 말로 다 할수 없는 풍광이다. 강력한 기운을 느낀다. 조선의 기운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강력한 기운 말이다.
대단한 백운대의 위용 앞에 나도 강력히 업된다.
한 발짝 걷고 기념하고 둘 발짝 걷고 기념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 이 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고 힐링되고 기분이 업된다.
오늘 동행한 고향 지인님들과 추억 한 장
노적봉이다.
노적봉을 배경으로 한 장
대동문으로 가는 길목에 올려본 만경대의 거대한 암릉군
대단하다.
나무가지 사이로 백운대 - 만경대 암봉 라인이 하늘을 찌른다.
고개에 노적봉 표지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 용암문으로 향한다.
노적봉(716m) 암릉 및 암벽 코스
한참을 걸었나? 용암문에 도착 인증 한 장
용암문
용암암문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에 지어졌다.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녀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북한산성
지정번호 사적 제162호 / 시대 : 1711년(숙종 37)
이 산성은 1711년(숙종37)에 북한산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격은 뒤 유사시에 대비해 한양 외곽에 성을 쌓자는 논의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산성이다. 당시 완성한 성곽의 길이는 7,620보. 즉 21리 60보이며, 지형에 따라 축성방식을 달리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곽시설로는 군사 지휘소인 장대를 세 곳(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에 만들었고, 성문 6개소(북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암문 6개소, 수문 1개소를 두었다. 성을 쌓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문제로 삼았던 식수 문제는 99개소의 우물을 파서 해결했다. 저수지도 26개나 만들고, 8개소의 창고를 두었다. 성 안에는 승군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을 여러 곳에 두었는데, 승군 총섭이 머물던 중흥사는 규모가 136칸에 달했다. 1712년(숙종38)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 규모의 행궁과 140칸에 이르는 군창을 지었다. 근래 훼손되었던 대서문, 대남문을 보수하였고, 대성문, 대동문, 부국문, 동장대 등은 다시 지었어며, 성곽과 여장 등도 보수 정비하였다.
용암문 앞 이정표
대동문으로 가는 길은 산성을 끼고 걷는다. 아름다운 산성을 끼고 걷는 길은 사뭇 새롭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성일 줄이야
지금은 아름답게 바라보지만 이 산성을 축성할 당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수고로움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랐을까? 당시 이 산성을 축성한 모든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북한산성과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
북한산성과 만경대 인수봉 그리고 산등성이에 살짝 내민 노적봉
한 겨울 하얀 눈이 내리면 산성과 만경대의 아름다움이 더 감동적일 것 같다.
고도를 높일수록 산성과 노적봉-만경대-인수봉이 한폭의 산수화 같다.
옛날 쌓은 산성일까?
동장대에 도착한다.
동장대
동장대는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장대로 1712년(숙종 38년)에 지어졌다. 장대는 장군의 지휘소로 북한산에는 동장대 외에 남장대, 북장대가 있다. 현재 동장대만 남아 있다.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하던 곳으로 장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었다. 장대의 평면은 정방형이며, 중층 구조로 아래층은 벽 없이 트여 있어서 지휘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으며, 위층은 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사용했다. 장대의 구성이나 모습은 수원 화성의 서장대와 거의 같다. 이 장대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하였다.
동장대 이정표
동장대를 뒤로 하고
대동문 이정표
대동문은 문루를 헤체하고 다시 공사중이다.
이왕에 하는 공사라면 원형대로 잘 복원되길 기원한다.
이제 하산길이다. 진달래 능선길로 가다가 소귀천공원지킴터 갈림길을 지나고
진달래 능선길을 걸으며 바라본 만경대 - 인수봉 - 영봉 라인 풍광
인수봉 - 영봉- 오봉 - 사패산 - 도봉산 라인 풍광
오봉- 사패산 - 도봉산 - 수락산 라인 풍광
수락산 - 불암산 라인 풍광
인수봉의 당당한 위용
아~ 용암봉 - 만경대 - 백운대 -인수봉 하늘을 찌른다.
진달래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
용암봉- 만경대 -백운대 - 인수봉
진달래능선길에서 만난 이정표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만경대와 백운대와 인수봉 삼각산이 그림 같이 다가 온다. 아~ 저 아름다운 기게를 어떻게 담을까?
멀리 오봉산과 도봉산이 나무가지 사이로 그 화려한 모습을 드려낸다. 앞으로 가봐야할 산군들이다.
진단래 능선 마지막 출입구이다. 사실상 산행을 마무리 하는 지점이다.
막걸리가 그립다. 북한산우이역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우촌 식당에서 생 막걸리로 갈증을 풀고 두부김치복음 맛이 일품이다. 주인 아줌마의 특별 서비스 묵은 김치는 참으로 맛있다. 앞으로 이집을 단골로 하기로 한다.
오늘 산행은 동참하지 않았지만 하산 술자리에 함께 한 고향 후배 김홍수님이다. 그는 멀리 의정부에서 왔다. 고향 선배가 북한산 올랐다고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왔다. 고맙고 감사하다. 어릴적 아름다운 고향 추억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리는 행복한 호사를 누린다.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새삼 행복하다.
오늘 3.1절 의미있는 날에 올해 오르고자 한 10대명산 중 하나인 서울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고 북한산성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만경대와 인수봉의 위용을 조망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였다. 서울에서 산행 배낭을 짊어진 것도 즐거운 시간이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도봉산, 사패산, 오봉산, 수락산, 불암산, 관악산, 인왕산, 북악산 등 서울 주요 산들을 모두 올라 보리라. 상상만 해도 설레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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