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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명산

2022.09.18. 서울 북악산 산행

by 하여간하여간 2022. 9. 19.

1. 일자 : 2022.09.18.(일)

2. 누구랑 : 광주원산우회

3. 산행 구간 : 칠궁-백악정-만세동방-청운대전망대-청운대쉼터-청운대-1.21소나무-북악산(백악산)-돌고래쉼터-창의문-윤동주문학관-무궁화동산

 

 

4. 산행소감

북악산을 올랐다. 코스모스가 피고 하늘이 점점 높아가고 있기에 가을이 온 줄 알았는데 북악산에는 바람 한점 없이 습한 기온에 산꾼을 지치게 한다. 아마 다른 곳도 그렀겠지? 지친 몸을 짊어지고 어렵게 오른 산행은 청운대에서 확 바뀌었다. 하늘이 청명하고 파란다. 시원한 북한산과 문수봉 능선이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장쾌하게 연출된다. 서울 하늘이 맑다. 예전의 미세먼지 자욱한 서울 하늘이 아니다. 참으로 맑고 깨끗한 파란 하늘 속에 흰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마음이 뻥 뚫린다. 지친 몸에 새롭운 활력을 넣어준다. 북악산의 정상엔 백악산(백악산)이란 정상석이 있다. 청운대와 백악산 등 맑고 깨끗한 지명들이다. 백악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저멀리 북한산 능선과 가까이 인왕산 바로 앞에는 남산 그리고 또 저 멀리 관악산 등이 죽~ 사방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 아래 한양 도성이 이어진다. 이곳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한양으로 서울로 우리나라 행정과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부분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이 불과 반세기 만에 이렇게 거대한 도시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온 걸까? 참으로 아름다운 서울이다. 앞으로 서울의 아름다운 산들을 올라보리라. 한양도성은 인상적이다. 한양도성길도 조성되었다. 언젠가 이 도성길을 따라 한양을 한바퀴 걸어서 돌아보리라. 인왕산까지 산행계획이였지만 지치고 힘들어 북악산 산행으로 마무리한다.

  

 

5. 산행 추억

칠궁앞에서 산행 준비하고

 

 

◎ 칠궁이란

칠궁의 첫 번째 주인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다. 1718년(숙종 44년) 숙빈 최씨가 죽고 나서 7년 후인 1725년에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했다. 영조는 즉위년에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마련하여 ‘숙빈묘(淑嬪廟)’라 했고,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이름을 올렸다.

고종 때에 흩어져 있는 후궁들의 사당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870년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 · 숙종의 간택후궁 영빈 김씨 · 정조의 간택후궁 화빈 윤씨의 사당은 경우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 · 진종(효장세자)을 낳은 정빈 이씨 ·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 ·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의 사당은 육상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영빈 김씨와 인빈 김씨의 이봉은 취소된다.

1878년에는 육상궁에 화재가 나서 고쳐 지었으며, 1882년에 다시 화재로 신주가 타버려 다음 해에 육상궁을 개건했다. 1887년에는 대빈궁의 신위(희빈 장씨)가 옛 사당 자리로 돌아갔다. 1896년 선희궁(영빈 이씨)의 신위를 육상궁 별묘로 옮기고, 다음 해 다시 옛 선희궁으로 이전하여 육상궁 별묘에는 연호궁(정빈 이씨)과 의빈궁(의빈 성씨) 신위만 남게 되었다.

순종은 1908년에 제사 제도 개정안인 ‘향사이정에 관한 건’을 반포했다. 이때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영빈 김씨 · 화빈 윤씨 · 의빈 성씨의 신위는 땅에 묻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저경궁 · 대빈궁 · 연호궁 · 선희궁 ·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내로 합사(合祀)하여 육궁(六宮)이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오면서 ‘칠궁(七宮)’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육상궁과 연호궁의 신주

 

저경궁의 신주

 

대빈궁의 신주

 

덕안궁의 신주

 

선희궁과 경우궁의 신주

 

수빈 박씨 신주의 신주

 

1966년 3월 22일에는 육상궁을 사적 제149호로 지정했다. 일반적으로 칠궁으로 불리어 오던 육상궁은 2011년 7월 28일 ‘서울 육상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여기에서는 원래의 칠궁 구역에 있던 육상궁과 연호궁만 알아보고, 나머지 궁은 따로 단락을 나누었다.

 

주인 남편 아들
저경궁 인빈 김씨 순강원 선조 원종(정원군, 추존왕-인조의 생부)
대빈궁 희빈 장씨 대빈묘 숙종 경종
육상궁 숙빈 최씨 소령원 숙종 영조
연호궁 정빈 이씨 수길원 영조 진종(효장세자, 추존왕-정조의 양부)
선희궁 영빈 이씨 수경원 영조 장조(사도세자, 추존왕-정조의 생부)
경우궁 수빈 박씨 휘경원 정조 순조
덕안궁 엄황귀비 영휘원 고종 영친왕

 

◎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육상궁

 

영조의 어머니 최씨는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했다. 무수리라고도 하고 침방나인이라고도 하는데, 궁궐의 온갖 궂은일을 다 거쳤다.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다가 이곳을 지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어 종4품 ‘숙원’이 되었다.

첫째 아들 영수를 낳고 종2품 ‘숙의’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종1품 ‘귀인’이 되었다. 이처럼 숙종은 최씨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를 올려주었고, 1699년에 단종 복위가 이루어진 경사로 ‘숙빈’으로 승급되었다. 숙빈 최씨가 낮은 계급의 궁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숙원이 되고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가 숙빈이 되었으니, 그 과정을 보더라도 당시 왕실에서 왕자의 출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의 권세 속에서도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는 것도, 왕위에 오르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숙빈 최씨의 출산 전후 과정은 호산청에서 기록한 《최숙원방 호산청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일기에는 ‘숙원’으로 첫째 아들을 낳았고, ‘숙의’로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귀인’으로 셋째 아들을 낳았다고 쓰여 있다.

 

《최숙원방 호산청일기》 숙빈 최씨의 출산 전후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모두 3책으로 제1책은 영수의〈계유구월일 최숙원방 호산청 일기〉, 제2책은 영조의〈무술팔월일 최숙의방 호산청 일기〉, 제3책은 일찍 죽은 셋째 아들의〈무인칠월일 최귀인방호산청 일기〉로 출산의 전후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왕실에서는 왕의 자손을 임신하면 출산을 돕기 위해 왕비의 경우 출산 예정 3개월 전에 산실청(産室廳)을, 후궁인 경우 출산 예정 1개월 전에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했다.

 

영조는 즉위한 뒤 생모의 사당을 잠저인 창의궁에 건립하기를 원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경복궁의 북쪽(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건립했다. 1725년 건립 당시 묘호를 ‘숙빈묘’라 했다가 1744년에 ‘육상묘(毓詳廟)’로 고쳤으며, 재위 29년째 되던 해인 1753년에 다시 ‘육상궁’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전자은어사묘(全慈恩於斯廟)’라는 현판을 직접 내렸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영조는 틈날 때마다 거둥하여 어머님의 명복을 빌었고, 재실인 냉천정에는 자신의 어진을 걸어 봉안했다. 어진을 사당 앞 재실에 걸어두고 밤낮으로 생모를 모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리라. 이 어진을 모사한 것이 현재 남아 있는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이다.

육상궁의 모습은 정선이 그린 〈정선필육상묘도(鄭敾筆毓祥廟圖)〉(보물 제873호)와 〈장안연우(長安烟雨)〉에 잘 나타나 있다. 1739년에 그려진 〈정선필육상묘도〉에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인 숙빈묘일 때의 모습으로, 초가집의 형태와 홍살문이 보인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연우〉에는 숙빈묘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다. 숙빈묘는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바뀌었고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화재로 다시 지어졌을 것이다.

 

전자은어사묘
<영조 어진> 영조는 &lsquo;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rsquo;이라는 뜻의 &lsquo;전자은어사묘&rsquo; 현판을 육상궁에 직접 내리고 틈날 때마다 거둥하여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영조대왕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때 왜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잡았을까?

 

왕견이 고려를 통일 할 때 후삼국의 세력들인 토속 세력이 강하여 많은 왕비들을 두어 그들과 외척 관계를 만들고 중앙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잡고 국가를 경영하였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모든 백성이 다 도를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매우 어려운 종교이기에 보통 사람이 도를 깨닫는 것은 어불 성설이고 특별한 천재적 머리를 갖고 태어난 몇 몇 스님들만이 그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는 초기에는 백성을 중히 여기는 국가였으며 중앙권력이 강하기 보다는 어느정도 중앙과 지방이 상생하는 민주적인 통치 개념이 있어 왔던 국가였다. 그러나 고려말에 즈음하여서는 중앙 왕권이 강화되고 지배 세력 내부의 갈등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극심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특히 지배층은 원-명 교체기를 맞아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특히 중국이 원에서 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명은 철령 이북 땅을 자기들의 땅이라고 규정하고 요동부에 귀속 시킨다고 하였다. 이에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다는 명분하에 이성계와 조민수로 하여금 요동정벌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가지 요동정벌 불가를 주장하고 요동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압록강 하구인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고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이 때 조선은 통치 이념으로 중국(명나라)의 유교를 받아들인다.  유교는 어떤 철학인가? 중앙권력인 왕권을 강화하고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양반의 철저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통치이념이다. 임금은 만 백성의 어버이기에 하늘같이 받들고 어버이를 내 목숨같이 모시길 바라는 철학이다. 어쩌면 조선은 그런 통치 이념으로 가장 확실하게 중앙 권력인 왕권을 강화했는지 모른다. 태어 나면서 부터 양반 계급의 철저한 질서 속에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인간적 권리는 없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생각해 보면 만 백성이 왕이기에 백성을 하늘 같이 받들고 어버이를 내 목숨같이 모시되 어버이도 자식들을 왕처럼 귀히 여기고 존중과 사랑으로 대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조선이 물려준 관습 즉 효사상은 길이 길이 이어 받아 후손에게 물려 줄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조대왕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우리들이 길이 길이 존경할 일이다. 오늘날 부모님을 헌 신짝 버리 듯 천시하고 무시하는 세태는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없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받느는 것은 천고에 진리이다.

 

다시 돌아와서

 

산행 초입 북악산 산행 안내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북악산 한양도성 안내가 나오고

 

기념한장

 

청와대가 개방되기 전 경비 철조망인가 보다

 

청와대 전망대 방향으로 오름길을 오른다. 서서히~

 

오름길엔 잘 자란 소나무가 반긴다.

 

청와대전망대로 오른다는 이정표

 

 

철조망이 이중 삼중으로 쳐저 있다. 김신조 습격이 있고 난 후 청와대 경비가 더욱 철저해졌나 보다.

 

급경사 오름길도 있다.

 

오름길엔 가을을 부르는 하얀 코스모스가 예쁘가 피었다.

 

백악정 바로 앞에 코스모스 군락을 만들어 놓았다. 언제 보아도 반가운 코스모스다. 

 

코스모스 군락 뒤에 바로 백악정이 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 기념식수(2001. 4. 12)

김대중이란 이름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는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갖은 정치적 핍박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두환 군부독재로 부터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모두를 용서하고 화해와 평화의 손을 내밀었다. IMF를 극복한 그의 리더쉽은 정적을 용서하고 화해와 평화로 국민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한 리더쉽이 아닐까?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죄악이다." 라고 하면서 "정말로 정적들의 고통스런 회유 앞에 무릎 꿇고 싶었지만, 함께한 동지들을 생각하며 차마 불의에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그의 정치적 고뇌가 얼마나 크고 숭고했는지? 민주 인권 평화 정의 남북 호혜 평등 등 이시대의 정치적 이슈들을 몸소 실천한 대통령 김대중! 다시 한번 그리운 대통령 김대중을 생각한다.

 

  

철책문을 지나서

 

만세동방 방향으로 오른다.

 

 

청와대전망대로 가는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우린 곧바로 진행했다. 만세동방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청와대전망대를 들려와도 결국에는 만세동방으로 가는 길과 만나는 것을 놓쳤다. 청와대전망대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후행자는 이곳에서 청와대전망대를 들려서 만세동방으로 가길 바란다.

 

갈림길 안내 이정표가 어지럽다. 

 

습한 기온으로 무척이나 지친 오름길을 오른다. 바람 한 점 없는 힘든길이다.

 

만세동방에 이른다.

 

 

만세동방 약수터 안내판

 

만세동방 약수터 

만세동방, 성수남극/ 나라의 안녕과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함/ 음용은 불가능

 

이제 한참을 트레킹 길을 걷는다. 청운대 쉼터까지~

 

만세동방길이다. 편안하다. 힐링 산길이다. 

 

중간에 만난 산행 안내판

 

청운대 쉼터를 향해

 

청운대전망대 이정표

 

청운대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잠시 쉼터에서 쉬어 간다.

 

이제 오름길은 끝나고 북악산 능선길을 만난다.

 

북악산 능선길

 

청운대쉼터에서 잠시 쉬어 가면서 막걸리 한잔

 

 

백악산 조망 명소

 

청운대 표지석 앞에서 김석준 고문님과 함께

 

청운대

푸른 빛 구름은 어떤 구름일까?  "청운에 푸른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한다."라고 할 때 청운의 푸른 꿈은 높은 이상과 사회적 성공을 일컷는 말이다. 해발 293m 청운대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경복궁, 광화문, 세종로를 볼 수 있고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볼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인다. 북악산 청운대는 북한산 백운대와 어떤 연이 있을까? 푸른 빛 구름인 청운(靑雲)은 높은 지위나 벼슬을 의미하며, 백운(白雲)은 흰 구름이니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산수를 찾아 안빈낙도를 즐기는 것이리라. 젊어서는 청운이 좋고 늙어지면 백운도 좋다. 어쩌면 짙은 안개가 서울 시가지를 덮고 흰 운해가 쫙 깔리면 정말로 푸른 구름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청운의 풍광이 연출되리라!

 

  

청운대 전망대에서 북악산과 문수봉 라인을 배경으로

 

가슴이 뻥 뚫린다. 시원하다. 청명하다. 예전의 서울 하늘이 아니다. 깨끗하고 청명한 파란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질 줄이야!

 

북한산과 문수봉 라인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운대 위치도

청운대는 한양도성 백악구간(창의문~숙정문) 가운데 쯤 위치한다.

 

한양도성 각자성석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4년(1804년) 10월 오재만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 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북악산 성곽 탐방로 개방 이야기

 

한양도성을 따라 백악산으로

 

1.21사태 소나무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할 때 우리군과 간첩단 사이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생긴 총탄 흔적이 있는 소나무

 

인증

 

백악산(342m) 정상석

 

백악산(백악산) 흰 바위산이다. 서울을 빙 둘러 있는 산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흰색을 띈다. 호남의 월출산과 충청의 속리산과 강원 설악산을 비롯하여 서울의 북한산과 관악산 등은 화강암으로 흰색을 띄고 있다. 돌이 흰색이여서 이름 붙여졌겠지만 백악이란 이름은  단순히 흰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깨끗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숭고한 정신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백악이란 명칭을 붙인 것은 이곳이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우리는 이곳을 북악산이라고 한다. 아마 궁궐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까?  북악산이라고 하고 백악산이라고도 한 이곳을 오르고 싶었다.

 

 

백악산 정상엔 이렇게 큰 바위가 있다. 본능적으로 오른다. 크게 한번 가슴을 펴고 파란 하늘을 본다. 모든 것이 저 파란 하늘처럼 싱싱하고 활기차고 가슴 설렜으면 한다. 

 

 

이성개가 조선건국과 함께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이성계의 뜻에 따라 정도전이 경북궁을 중심으로 궁궐을 설계할 때 북악산을 중심(주산)으로 오른쪽에는 인왕산이 백호인 흰호랑이 형상이요, 왼쪽으로는 낙산이 푸른 용처럼 경북궁을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 안산과 남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아방궁처럼 빙둘러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임에 명당 중에 명당으로 궁궐을 지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바위는 조선의 중심이였다. 참 좋은 순간이다.

 

이제 한양도성을 따라 급경사 하산을 한다. 무수히 많은 데크 계단으로 하산을 한다. 반대로 올라오는 산꾼에겐 참으로 힘든 길이 될 것 같다.

 

내려오는 중간에 조망터에서 다시 한번 북한산과 문수봉 라인을 담는다. 

 

급경사 하산 데크길

 

바로 앞이 인왕산이다. 처음에는 인왕산까지 오르려 하였으나 지치고 힘들어서 오늘은 북악산으로 만족한다.

 

◎ 인앙산 치마 바위

인왕산의 치마바위에는 조선왕조의 애타는 사랑이야기가 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은 늘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에 연산군 처남의 딸인 단경왕후신씨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연산군의 위협에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의 자리에 중종이 앉지만 7일만에 왕비는 연산군과의 관계로 쫒겨나고 이후 단경왕후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 치마바위 근처에 붉은 치마를 51년간 걸어두어 중종이 경희루에서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조선시대에 왕의 권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이야기이다.

북악산은 정도전이 한양의 진산이라 주창하여 우백호인 인왕산이 호랑이로 유명해졌습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하자고 했으나 정도전에 밀렸다.  만약 그리 되었다면 안산이 우백호 호랑이 산이 되었을 것이다.

 

하산 중간지점에 있는 돌고래 쉼터에서 점심을 하고 잠시 커피한잔으로 재 충전을 한다. 나는 너무 지쳐서 점심도 싫다.

막걸리 한잔으로  대신한다.

 

어디를 가나 고향은 좋다. 서울에 살면서 무안을 고향으로 둔 분들을 만났다. 무척이나 반갑다.  

 

 

◎ 자북정도( 紫北正道)

- 어떤이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紫北正道’(자북정도) 표지석이 눈을 끈다. ‘자하문과 북악산의 바른 길’이라는 뜻인 듯싶다. 인생에 있어서 바른길, 정의(正義)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선(善)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악(惡)이 될 수 있다. 정의는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思無邪, 성정을 올바르게 하고, 간사하고 악독한 마음이 없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일을 처리하면 이것이 바른 길이 아니겠는가?

紫北正道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이며, 장세동이 이곳 부대장이었을 때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하면 한일회담과 삼선개현, 유신현법이 떠오르지만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로 우리가 잘살게 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공과는 있기 마련이다. 

 

창의문 안내소를 내려 오면

 

창의문 입구이다.

 

 

◎ 서울 4대문과 4소문 이야기

서울을 둘러싼 한양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도성을 쌓았다.

정도전이 성벽과 성문의 위치를 정하고, 성문의 이름을 지었다.  

유교국가의 통치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맞추어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으나

북문만 숙청문(肅淸門)으로 지었다가 숙정문(肅靖門)으로 바꿨다.

 

4대문 사이에는 4소문을 세웠다.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소의문(서소문),

서대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북소문)

북문과 동대문 사이에 혜화문(동소문),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광희문(남소문)을 지어 문을 만들었다.


태조 때 118,070명을 동원하여 49일 만에 쌓은 성의 총길이는 12.8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쌓은 것을 세종 4년(1422) 322,460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모두 석성으로 개축하여 도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500여년을 지켜온 한양성은 광무 3년(1899) 시내에 전차 노선을 깔면서 동대문, 남대문 주위 성벽을 헐고 도로를 냈으며, 서대문,서소문, 혜화문도 도로를 내며 헐려 나갔다.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 창의문

북소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에 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북서쪽에 세운 문으로, 돌로 쌓은 홍예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으로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현판이 있다.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렀왔다.


태종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북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9년(1617)에는 궁궐 보수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영조 17년(1741년)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 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이 세겨 놓은 현판이 결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단장에 매력을 더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문의 무지개 모양의 월단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내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 넣은 것이라고 한다.

 

 

 

창의문 앞에서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무장을 하고 청와대를 습격할 때 막아서서 현장 지휘를 한 경찰간부이다. 경찰역사 순례길에 두분의 순직비를 세우고 그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정종수경사 순직비

 

고 최규식 경무관 순직비

 

윤동주 문학관을 들렸다.

윤동주시인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이곳 창의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북악산과 인왕산을 자주 산책하였다 하여 이곳에 윤동주 문학학관을 세웠다고 한다. 윤동주는 당시 일본 유학시절 상용이 금지된 우리말로 시를 써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이러한 시 창작을 통한 저항 때문에 1943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하던 중 1945년 2월 2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해 8월에 조국은 해방을 맞는다. 가슴이 멍멍하다.

 

윤동주(1917.12.30. ~ 1945.2.6)는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민족정신이 강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문학에 재능을 드러냈으며, 연희전문대 재학 시절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의 작품을 섰다.

 

윤동주문학관 해설사님으로 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대원들

 

윤동주 문학관 내부

 

윤동주 관련 시집

 

청와대 정문 앞 봉황탑

 

오늘 북악산을 올랐다. 힘들었지만 꼭 오르고 싶었던 산이기에 기분은 좋다. 오랫만에 청명한 서울 공기를 마시며  북악산을 오르고 청와대를 둘러보고 서울 거리를 걸어본다.  앞으로 이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 가을에 또 부르는 산이 있어

조심 조심 귀기울려 보련다.

 

가을 바람에 매밀꽃 흔들리면

멀리 떠난 그리운이 찾아오려나~

사무치게 그리운 눈물

꾸역 꾸역 흘리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