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1.05.19(수)
2. 누구랑 : 4인(대석님, 산산해님, 오드리님, 하여간님)
3.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인월-금계, 20.5km)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구간. 지리산의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넓게 펼쳐진 다랑논과 6개의 산촌 마을을 지나 엄천강으로 이어지며 제방길, 농로, 차도, 임도, 숲길등이 전 구간에 골고루 섞여있다.
4. 트레킹 구간
5. 산행 소감
지리산둘레길 3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22구간 중 가장 긴 거리이며 많은 사람이 찾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지리산 주 능선과 지리산 북쪽 능선과 계곡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부처님 오신날(5월 19일, 음 4월8일) 요며칠간 흐린 날씨가 다행이 청명하여 산행 내내 상쾌하면서도 싱그런 기운을 받고 지리산 주 능선과 달궁계곡, 삼정계곡, 백무동계곡, 한신계곡, 칠선계곡과 그 계곡들을 가르는 산줄기 등을 바라보면서 파란 하늘과 생명의 녹음이 펼쳐진 환상적인 지리산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어 행복한 산행이였지만 한편으론 전북과 경남을 가르는 등구재가 있고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지리 빨치산들의 수많은 죽음이 지리산 북쪽 어느 골짝에 뭍혀 있는지 아직 수습되지 않은채 울려온 원혼들의 통곡이 들려오는 구간이기도 하다. 싱그런 녹음과 들려오는 물소리가 시원하여 긴 둘레길을 대원들과 오손도손 걸으면서 나눈 대화가 편하고 좋아 힐링이 되는 시간이였다. 지리산은 어디를 가나 나에겐 늘 깊은 사색의 강으로 빠져 들게하고 그 깊은 사색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어 새롭고 설렌다. 오늘도 그랬다.
6. 산행 추억
◎ 중군마을 유래
1380년(고려 우왕 6년) 삼남지역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정벌하기위해 삼도 도원수 이성계장군은 황산에 본진을 두고 이곳에 중군을 상우에 소군, 서무, 동무에 척후복병, 사창, 창몰에 군수창을 주둔시켰다. 그는 황산에서 영남을 거쳐 북진 중인 왜장 아지발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지발도가 팔랑제를 넘어와 대처했다. 이성계장군은 신궁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활솜씨가 뛰어나 아지발도를 활로 제압하려는 작전을 마련하였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믐날 밤 밝은 달을 떠오르게 하여주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한 덕분에 환한 달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출 때를 놓치지 않고 왜장 아지발도의 목에 화살을 명중하여 죽게 함으로써 큰 승리를 이루었다. 이 전쟁을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올렸다 하여 인월이라는 지명이 전해졌으며, 이곳 중군리는 중군이 주둔하였다 하여 중군리가 되었다.
고려 군대의 기본편성은 중, 전, 후, 좌, 우군의 오군으로 중군은 그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한 부대이며 고려 오군 중 중군이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지금이야 사통팔달로 길이 잘 나있지만, 고려말 당시의 사정으로 예측하여 본다면 람천을 따라 호남의 남원과 영남의 마천을 연결하는 길이 유일하게 이 길이였을 것이고, 이곳 중군리가 가장 전략적으로 요충지대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내륙에서 영호남을 통과하려면 지리적으로 좌우에 덕두산과 삼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이곳이야 말로 영호남의 관문이기도 하다.
◎ 행복한 삶을 위한 생각
행복한 삶이라고 해도 좋고 건강한 삶이라고 해도 좋다. 살아보니 마음이 편해야 한다. 마음이 편할려면 자유로와야 한다. 육신이 건강하고 정신이 자유로우면 마음이 편하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아야 한다. 사물을 포함한, 개인간이나, 국가간, 공동체간에 평화로와야 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자연을 포함한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아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또한 공동체의 일부이기에 공동체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서 서로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절대 권리인 인권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인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화합이되고 평화로워 진다. 상대를 인정하고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환경과 생각이 다른 그 어떤것을 자기 기준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거기에는 화합은 커녕 갈등과 분열로 모두가 상처만 남는다. 오늘날 중동의 전쟁이 그렇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전쟁을 하는 것은 전쟁을 하지 않는 약소국 보다 못하다. 전쟁은 피아가 모두 희생을 불러오고 인권이 유린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으면 다소 굼주리더라도 함께 격려하며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 다소 부족할지라도 희생과 인권 유린은 없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0여년이 지나가는 지금에도 휴전상태에서 서로를 적대시 하고 있어 세계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총부리를 직접 겨누고 서로 죽이고 원수가 되어 살아온 세대의 원한이 어찌 없어지고 잊을 수 있게냐마는 더 큰 행복한 삶을 위해 이제는 상대를 인정하고 종전을 선언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3만달러 이상의 인구 5천명의 세계7대 선진국이 되었지만 우린 아직 행복하지 않다. 자유와 평화가 늘 위협 받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고 인권이 살아 있어 서로 차별없이 화합하는 통일된 국가를 만들었으면 한다. 개인간의 소득차가 최소화되고 모두가 노후를 보장 받는 복지 국가에서 개인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피로 얼룩진 산마루에 잎이 피고
초연이 흐르던 골짜기에 눈이 내리고
그렇게 천 백 해를 거듭할 때까지
지리산아 다시금 새겨라.
천 백 배의 적과 맞서 굴복할 줄 모르던 용사들의 이름을...
- 어느 빨치산의 시,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들>
지리산의 골짜기에 서면 어디선가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지리산에서는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을 합쳐 2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동포였고, 우리 모두의 가족이었다.
◎ 지리 빨치산(지리산 유격대)
겨울날 매운 삭풍에 가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지리 빨치산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다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수습되지 않은 육신과 고혼은 아직도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고 어느 산자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흐르는 계곡물소리에서도, 산자락을 휘감는 바람 속에서도 그들의 절망적인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당시 너무 많은 청춘들이 지리산에서, 또 다른 산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죽어 갔다.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이 땅의 역사에서 그들은 단지 ‘빨갱이’로, 그들과 피붙이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에게는 연좌제란 이름의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려진 그들은 ‘지리산 유격대’로 알려진, 일명 빨치산(partizan)이다. 전쟁 후에는 ‘남부군‘으로 불리던 좌익 게릴라가 그들이다.
한국전쟁 전후 사살당하거나 생포된 빨치산의 숫자는 무려 21,000여 명(*보고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의 수가 9만여 명가량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토벌된 빨치산의 수가 2만여 명을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은 왜 산으로 갔던 것일까?
해방 후 우리나라 빨치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이 세 사건은 1948년에 연이어 발생하는데,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 투쟁이었던 ’2·8투쟁‘, 제주도의 ’4·3사건‘과 ’여순사건‘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지리산 유격대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10월 20일 당시 하사관이던 지창수의 주도로,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등지를 무력으로 점거한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여순사건은 사병 중심의 우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초기의 그 위세와는 달리, 단 5일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하지만 투항을 거부한 1,000여 명의 반란군은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등지의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지리산 유격대의 효시가 된다. 특히 남로당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이들 반란 세력들을 조직화할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 1949년 8월, 뒷날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명해지는 이현상(李鉉相)을 파견한다. 공식적인 ’지리산 유격대‘의 탄생이다.
처형당하는 빨치산들
당시 소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교전 횟수는 무려 1만여 회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 전투로 군경 토벌대는 6천여 명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빨치산의 희생자(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시 엄청나 토벌대 희생자의 2배에 이르는 대략 1만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라고 한다. 일례로 게릴라 혁명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기간 동안 치른 가장 큰 전투가 80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60여 명의 정부군과 벌인 전투였다고 하니, 남한 빨치산이 감당한 유격전의 규모는 과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이 성장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해방 이후 폐허 위에 선 사람들은 생활의 고통과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어떤 구원이 필요했고, 그 희망을 실현시켜줄 세력으로 좌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산당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이념적 요인들은 알 수도 없었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4년간 토벌대를 이끌고 빨치산을 소탕했던 차일혁 총경 역시 그의 자서전에서 그들에게 이념은 애당초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말한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사실 그들에게 이념이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더란 말인가. 그들에게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그들이 산으로 간 가장 큰 이유는 ‘한(恨)’이었다고 말한다. 빈곤에 대한 한(恨),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괄시, 당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발, 특히 일부 우익 청년 단체와 공권력의 초법적인 횡포에 대한 분노가 반사적으로 좌익 동조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미군정과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적 고리를 통해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결탁함으로써, 국내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던 때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반(反)이승만은 곧 빨갱이‘이라는 등식 아래 일부 야당이나 반정부세력조차도 빨갱이로 낙인찍음으로써, 이에 반하는 제 세력들이 좌익화했던 것이다.
우린 이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미군정이 이승만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 스스로 나라를 세우도록 가만히 두면서 소련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도왔다면 민족주의 여운형이나 김구선생 같은분이 민족 분단없이 하나의 나라로 독립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충분히 그런 역량을 우리 지도자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 우익 청년 단체, 특히 서북청년단과 같은 백색테러집단이 정권의 비호 아래 행했던 온갖 불법적이고 무도한 행위들은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좌익으로 이끄는 아주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그들의 초법적인 폭력 행위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되었으며, 이들 피해자들은 불만세력이 되고, 뒤이어 자연스럽게 좌익 동조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한 대 맞고 나온 젊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 번 당한 젊은이는 진짜 ‘빨갱이’가 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익단체의 폭력성은 악명이 높았다. 단순한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제주 4·3 사건’이 서북청년단을 위시한 우익집단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섬 전체를 전쟁터로 만드는 실마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봉건 질서의 붕괴로 인한 갈등 상황이었다.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 주인과 머슴으로 맺어졌던 신분제의 붕괴는 하위 계층의 한(恨)에 방아쇠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이 두 집단 간의 갈등관계는 결국 필연적 약자이자 대항자였던 하위 계층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하대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소작농과 머슴들이 산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역시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내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산에서 죽어갔다. 1만 하고도 수천 명의 그들은 ‘인민 해방’이라는 꿈을 품었으나,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시간에, 그 땅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이렇게 세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세 번 죽을 각오를 하고서도, 결국엔 그들이 각오했던 그 이유대로 죽어갔다.
지리산 저 산자락마다에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수많은 넋들이 잠들어 있다.
어느 빨치산이 묻는다. “나는 여기에 왜 있을까? 이 깊은 밤, 낯선 산마을 논두렁 위에 무슨 까닭으로... 그리고 저기 오늘 뿌려진 피와 생명에서 무슨 뜻을 찾아야 옳은가?”
빨치산은 죽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들의 흔적은 아직도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다.
지리산의 어느 골짜기에서 산화해 간 그들의 삶이 그러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던 그들에게 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인가? 어떤 작은 이유로 그들은 산으로 갔고, 그 산에서 죽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고군분투했을 뿐이었다.
어느 밤 산골짜기 위에 흩뿌려진 피와 생명과 흔적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의 희생이 상징하는 바는, 시대적 모순 앞에서 선택지가 없었던 기층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이었을 것이다.
이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원혼이 지리산 구천을 떠돌지 않도록 그들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남북이 하나되어 매년 향불을 피우고 제를 올려야 하는 것이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 등구재
등구재를 넘으면 길은 숲을 따라 이어진다.
엄천강을 따라 이어지는 60번 지방도가 놓이기 전에는 이 등구재를 넘어 경상도인 마천의 마을 주민들은 전라도의 인월장으로 오고 갔던 것이다. 팔 물건을 이고 지고 가서 산 물건을 또 이고 지고 넘던 고개가 이 등구재였다. 등구재 외에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오도(吾道)재, 제안재, 팔량치(八良峙) 등이 있다.
'둘레길,트레킹길 > 지리산둘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09.19.(일) 지리산둘레길 6구간(수철리-성심원) (0) | 2021.09.19 |
---|---|
2021.06.20. 지리산 둘레길 5구간(동강~수철) 12.1km 트레킹 산행 (0) | 2021.06.24 |
2021.06.13. 지리산 둘레길 4구간(금계~동강)12.7km 트레킹 (0) | 2021.06.14 |
2021.05.09.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트레킹 (0) | 2021.05.10 |
2021.04.25. 지리산 둘레길 1구간(주천-운봉) 트레킹 (0) | 202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