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1.05.09.(일)
2. 누구랑 : 5인(대석님, 오드리님, 찬찬님, 천천님, 하여간)
3. 산행구간 : 서림공원-북천마을-신기마을-비전마을-군화마을-옥계저수지-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마을-구인월교(2구간 : 9.9km)-중군마을(3구간 : 3,km))
4.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9.9km)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구간.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5. 산행소감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은 운봉에서 인월까지 9.9km로 람천을 따라 제방길을 따라 걷는 비교적 편한 트레킹 구간이다. 또 이 길은 운봉 고원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지나면서 북으로는 남원 정령치에서 고리봉-팔랑치-바래봉을 잇는 서북능선과, 남으로는 고남산과 수정봉을 잇는 백두대간을 한눈에 바라보며 걷을 수 있는 트레킹 길이다.
특히나 고려말 우리나라 남해안에 쳐들어와 도적질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지발도가 군산 앞바다에서 최무선의 화표에 패하여 퇴로가 막히자 이곳 운봉을 거점으로 주둔하고 있으면서 바다로 도망갈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이성계 장군이 "밝은 보름달을 밝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 끝에 밝은 달이 떠오른 것을 놓치지 않고 신궁에 가까운 활 솜씨로 아지발도 상투를 떨어뜨리고 옆에 있던 이두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 머리에 화살을 꽂아 사살을 하고 크게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있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 고남산-수정봉의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이곳 운봉과 남원에서 민보군의 박봉양과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려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대파시킨 곳이기도 하다. 탐관오리와 무능한 조정의 권력자들의 횡포에 저항하여 그들을 쓸어버리고 농민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난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에서 패하고 쓰러져간 수 많은 농민군들의 원한이 메아리쳐 울려퍼진 길이기도 하다.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 판소리 고장을 지나는 길로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역사문화탐방길이다. 인월 마을 유래에서 '밝은 달을 비춰어 주십시오' 하는 이성계의 간절한 바램을 읽을 수 있으며, 이곳이 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영토전쟁을 하였는지 궁금증을 풀어가는 역사의 길이기도 하다.
여유와 낭만을 등에 지고 불어오는 람천의 산들바람을 벗삼아 한발 한발 걷는 발걸음은 평화와 생명, 상생과 화합의 숨결을 느끼하는 사랑의길이다. 길을 걷는다. 사랑의 길을 걷는다. 생명의 길을 걷는다. 평화의 길을 걷는다. 상생과 화합의 길을 걷는다. 그런 길을 그냥 걷고 싶어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6. 산행 안내
남원 서천리 당산(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남원 서천리 당산에는 남녀 한 쌍의 돌 장승이 서 있다. 외형상으로는 남녀를 구별하기 쉽지 않은데, 북쪽에 서 있는 장승이 남장승, 남쪽에 서있는 장승이 여장승이라고 전해진다. 각각의 돌장승에는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이다. 두 장승은 모두 수염이 있고 벙거지를 썼는데 남장승인 방어대장군은 귀가 없다. 두 장승이 부부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원 서천리 당산의 돌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갑오토비사적비
갑오년 도적을 토벌한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도적이라? 갑오농민전쟁 때 민보군을 조직한 박봉양이 농민군의 운봉 함양으로의 진출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민보군이란 동학농민군의 위협을 받던 양반과 토착 부호들이 조직한 반동학농민 자위대이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땅에서 시작한 동학농민 항쟁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지도 아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북진을 시도하였지만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은 11월 청주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봉준 또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지고 만다. 한편 남원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경상도 진출을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운봉으로 향하는데, 이 때 박봉양의 민보군과 맞붙어 싸우지만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남원으로 퇴각한다. 박봉양은 이에 멈추지 않고 남원성까지 쫒아가 농민군을 초토화한다. 결국 민보군은 운봉을 지켰냈고 농민군은 사실상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저 비석은 역설적으로 탐관오리와 권력자들의 횡포와 착취로 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꿔온 민초들의 간절한 희망을 허망하게 끝내버린 슬픈 역사인 샘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저 비석이 만들어졌을터다. 탐관오리에겐 수성의 상징물이였을 것이고 박봉양과 민보군에 대한 공로의 찬양이였겠지만, 목숨걸고 항거했던 민중의 패전을 상징하는 원망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가슴이 쓸어 내린다. 누군가 저 비석을 망치로 내리쳐 깨부수고 싶은 심정을 이해한다. 만약 그때 동학농민군이 승리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일본군의 개입만 없었어도 농민군은 승리하여 한양을 함락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을텐데! 역사의 가정앞에 부질없는 생각만 가득담고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 잠깐! 동학농민군과 박봉양의 민보군의 전투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고 가자. 백두대간 여원재에 가면 이런 설명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두대간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 11월 중순 남원의 대 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렸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 수정군 모두가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 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새운다. 2008. 11. 22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여원재! 옛이름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또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94년 9월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하여 기새를 몰아 남원성 남문을 불지르고 남원 동학군을 패주시켰다.
이 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지금의 군산)에서 최무선장군의 화포에 패해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 운봉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했었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도발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도발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 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조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 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 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을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이비는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증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등이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가록되어 있다.
이 어휘각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 여러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럿하였던 그 성적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잠깐! 남원 피바다에 대하여 살펴보고 가자(피바위는 인월쪽에서 람천을 타고 오다보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 송흥록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 우조 진양조 등 가조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전의 옥중가에서 귀곡성 등 많은 곡을 남겨 판소리의 큰 유파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당대의 가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왕 송흥록, 국청 박초월 생가
이곳은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하고 그 시대의 초가형태로 2007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송흥록(1780~1863)은 조선 정조 초기 권삼득의 고수 송첨지의 아들로 테어나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하였고, 철종 10년(1859) 정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조선말기 순조, 헌종, 철종대에 걸친 명창으로 계면조 진영조의 완성, 메다리조 도입과 모든 가사를 집대성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리며 가왕칭호를 받았다.
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이 장기이며, 제자 박만순과 동생 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 만갑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의 소리를 이루었다
박초월(1916.9.17~1983.11.26)은 12세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송만갑지도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전수하였고, 1961년(사)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 취임과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재5호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1988년 68세에 숙환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에 안치되었다가 제자와 국악계의 성원으로 2000년 8월 28일 운봉읍 가산리 산 1-12번지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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