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일시 : 2021.02.24
2. 누구랑 : 혼자
3. 산행구간 : 천반산휴양림주차장-전망바위-천반산(깃대봉)-망바위-말바위-천반산(산성)-전망대-천반산훈련터-송판서굴-뜀바위-구량천합수점-천반산휴양림(원점 차량회수)-천반산지질명소전망대-죽도
4. 산행 개념도 : 생략
5. 산행소감
아름다운 명산으로 전북 진안에 천반산이 있다. 산 주변은 깎아지른 듯한 낭떨어지이며 정상에 쟁반 같이 넓은 평지가 있다고 하여 천반산이다. 천반산은 남덕유산의 긴 산줄기에서 흘러내려 온 물을 모두 담아내는 구량천이 주변으로 흐르고, 남쪽 전북 장수군 신무산 아래 수분령에 있는 뜸봉샘과 팔공산에서 부터 시작한 장수천 물줄기가 장수 천천면을 지나 구량천을 만나면서 금강이라는 제법 큰 강의 규모를 만들어 유유히 흐르는 위치에 있다. 9천만년전(백악기중기)에 형성된 감입곡류 하천이 만들어낸 한반도를 뒤짚어 놓은 모양의 비경이다. 구량천이 금강과 만나면서 산중의 섬이라는 죽도를 만들고 합수지점에서 만들어낸 기암절벽은 최고의 비경이다. 천혜의 요새인 천반산에는 조선 선조 때 1000명의 인재들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의 중심 인물인 정여립의 한이 서려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지질, 역사, 문화가 어울어진 한국의 아름다운 명산 천반산을 오른다.
6. 산행 추억
6-1. 천반산휴양림주차장-전망 바위 구간
천반산을 오르면서 내내 정여립, 선조, 정철, 송익필 등 1000여명의 인재가 희생당한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테리 역모아닌 역모사건인 기축옥사와 관련한 인물들을 생각한다.
정여립은 역모자인가? 혁명가인가? 아니면 시대의 풍운아인가?
선조는 왜 그렇게 정여립의 사건을 모질게 다루었을까?
정철은 어찌하여 그리 악독한 처신을 하였을까?
정철의 처소에 숨어서 비겁한 행동을 한 송익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분에 상관 없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바라보며 무능한 임금과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배만 채우는 데 급급한 중앙 세력들을 쓸어버리고,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요,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꿈을 꾸며 그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을까? 한 그루 소나무는 정여립의 혼이 되어 나에게 선명히 다가온다. 정여립과 대화를 나누느라 한참을 보내다 시간이 너무 갔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게 자리를 일어난다.
6-2. 깃대봉-망바위-말바위 구간
정여립은 어릴 때 부터 아주 명석했고 사리판단 능력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할 정도로 당돌하고 독불장군 식이었다. 정여립은 스물다섯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 평균 급제 나이가 서른 살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급제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인인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였고, 전라도 금구(金溝) 동곡마을로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며 지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당대의 석학 성혼과 이이와 학문적 토론을 할 정도로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으니 이제 막 왕이된 선조 정도는 눈에 차지 않을 정도로 기고 만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너무 똑똑하여 그의 역량을 조선이 못 받아들였다고나 할까! 나의 상상이다. 그의 마음에는 무능한 임금과 허구헛날 학문적 이론에만 매몰되어 갑론을박하면서 자기 같은 새로운 사상을 배척하고 기존 질서만 고집하고 있는 고관 대신들을 갈아치우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조시대 연산군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임금을 함부로 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그 꼴을 못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물러난 이후에도 궁중 예법으로 굳어져서 신하들은 용안을 함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선조시대의 정여립은 임금의 눈을 당당히 바라보면서 얘기하는 신하였다.
정여립은 이이의 슬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이는 말년에 죽기 전 선조에게 정여립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이이가 중심이 된 서인 사람이였지만 나중에는 이이를 비방하면서 동인 사람이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적을 옮긴 철새 정치인이였던 것 같다. 스승인 이이를 비망하면서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기고 임금에게 함부로 대하는 정여립을 선조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더 이상 관직을 주지 않았다. 결국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받고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하였다. 낙향이라고 하지만 팽당한 것이다. 정여립이 동인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아마 성격이 당당하고 독불장군의 혁명가적 성격이였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주장이 센 사람이 아니였나 쉽다. 그의 맘속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선조와 중앙 권력들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정여립의 생각과 행동이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였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어떤 생각이였을까? 낙향 후 그가 한 여러 행동들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혁명의 꿈을 꾸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여립은 당시 시중에 떠돌던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 즉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는 "정감록"에 나오는 참언(讖言: 길흉화복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을 옥판에 새겨 승려 의연에게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춰 두게 한 다음 우연히 자신이 이것을 발견한 것처럼 꾸몄다. 이 참언의 목자는 곧 조선왕조를 세운 이씨이고 전읍(奠邑)은 정(鄭)씨를 이르는 말로서 정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정여립은 승려 의연에게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주의 남문 밖에 있다." 라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6-3. 천반산성-훈련터(돌솥)-전망대 구간
산위가 소반 같이 납작하다고 하여 이름 붙은 천반산은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과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량천이 파자 형으로 굽이쳐 흐르다 한머리 금강으로 거듭나는 것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땅에는 천반, 지반, 인반의 명당 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천반의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이라 지었다 한다. 천반산은 사방이 깍아지르는 듯한 험준한 지세 위에 정상은 약 10,000여평의 평지가 소반처럼 자리한 천혜의 요새이다. 이곳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차별의 분수령이 되며 1,000여명이 참변을 당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1546~1589)의 한이 서린곳이다.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3년(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의 벼슬에 올랐다가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동계를 조직하여 모악산 앞 제비산(현 김제시 금구면)에 머물면서 천반산 앞에 보이는 죽도에 시설을 지어 놓고 이곳 천반산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은 선조 22년 역모로 고변되자 아들과 함께 죽도에 피신하였다가 관군에 쫒기자 이곳에서 아들과 같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천반산에는 성터와 망루로 사용하던 한림대터, 집터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역사의 숨결이 담긴 곳이다. 또한 정여립이 군사를 조련할 때 사용했다는 거대한 돌솥이 뭍혀있다는 설이 있으며 정여립이 훌쩍 훌쩍 날아다녔다는 뜀바위와 단종때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버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판서가 수도를 하였다는 송판서굴 그리고 송판서 부인이 살았다는 할미굴, 정여립이 군사들과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등이 있으며 앞에 보이는 육지속의 섬인 죽도는 강기슭으로부터 100m에 이르는 암봉으로 솟아 있어 그 모양은 절경으로 푸른 송백과 하얀 모래사장의 조화가 한폭의 산수화 같은 곳이다.
정여립은 양반 신분이였지만 양반이든 천민이든 산적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신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받아 들여 차별 없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였다. 정여립이 이곳에서 군사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였을까? 스승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영향을 받아서 앞으로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고자 미리 군사를 키웠는지, 아니면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요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있다는 공화국 세상을 만드는 혁명을 위한 군사 훈련이 였을지? 그것은 모른다. 실제로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 지금의 여수일원)에 침범했을 때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무술을 익한 대동계원들이 힘을 모아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다. 그 뒤 대동계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넓혀 갔다.
정여립이 이곳에서 군사를 키우는 것은 그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뉘어져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했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즉,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 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蠾)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지적한대로,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했다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해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 이것을 고의로 조작했다는 것은 곧 반역이며 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선조는 왜 정여립 사건을 모질게 다루었을까? 선조는 중종 일곱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세째 아들이다. 선조가 왕이 되어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이 되어었다. 중종이후 인종 명종은 후대가 없었다. 그래서 정통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옆가지인 후대에서 왕이 되었다. 선조로는 늘 정통성이 가슴을 짓누르는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당대의 강력한 중앙 대신들인 동인들의 권력 앞에 늘 초람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동인과 서인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왕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가 선조의 고민거리가 아니었을까? '아니되옵이다'로 일관하고 있는 대신들을 누르고 임금의 말에 순종하는 왕권강화를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선조로써는 정여립 모반 사건이 절호의 찬스였는지 모른다. 중앙 권력을 쥐고 왕권마져 우습게 아는 동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절호의 찬스였을 것이다. 그 적임자가 서인인 정철이였다. 더구나 정철은 스스로 이 역모를 다스리겠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는가? 선조로써는 가만히 두고 떡만 먹으면 되는 일이다. 정치 9단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정치 세력을 교모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정철도 세자 책봉으로 문책되어 전라도 담양으로 귀행 보내어졌다. 어쩌면 정여립 모반 사건은 도화선은 정여립이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한 선조와 서인의 영수로 동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을 쥐겠다는 정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더욱 모질게 다루어졌지 않았나 생각한다. 역모사건에 직접 모반한 자는 숙청을 하고 가담자는 멀리 귀양을 보낸 조선의 4대사화에 비하여 역모사건의 실증도 석연치 않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유난히도 크게 다룬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담양에 귀향 온 정철은 송강정을 짓고 사미인곡 등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오늘날 까지 조선 최대의 가사 문인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기축옥사의 중심에 서서 정적 1000여명의 목을 쳐 죽이고 수 없이 많은 억울한 사람을 귀양보내는 악독한 짓을 한 위인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정철의 사미인곡과 성산별곡에 밑줄을 그으면서 그 의미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았던 시간에 그 누구도 정치적 야욕에 눈이 먼 정철을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뒤에는 원한이 숨어 있고 그 원한의 앙갚음에 폭풍이 일고 그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며 억울한 자가 무지기 수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4. 송판서의 굴
송판서굴은 바위굴 2개가 15m 정도 거리를 두고 서북쪽으로 쌍굴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큰굴의 깊이가 약 7m 작은굴은 약 5m 쯤 된다. 큰 굴은 장정 10여명 정도가 쉴 수 있을 정도이며 바위틈에서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루지 않는 샘이 있으며 이 물은 약수로 위장병에 좋다는 전설이 있다. 굴의 주인공인 송보산 선생은 연안 송씨로 아호는 퇴휴재이며 세종 20년(1438년) 도승지에 올랐고 세종31년(1449년) 예조판서에 올랐다. 1456년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현재의 장수군 계남면 방아재로 낙향하여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먼저 낙향한 김남택과 교류하며 살았다. 그는 도학과 제자백가를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1484년에 세상을 떠났다. 송판서는 세상의 죄악을 씻으려고 이곳에서 은거하며 수도하였으며 부인은 같이 입산하여 이곳에서 약 1.5km 쯤 떨어진 할미굴에 기거토록하였다 한다.
또한 송판서가 이굴에서 수도를 할 때 매일 세끼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여인이 식사를 날나오는 것을 보고 송판서가 연유를 물었으나 천리밖에서 왔다고만 말하고 떠나갔다 한다. 송판서의 위폐는 장수 월강사와 진한 마령의 구선사에 모셔져 있다. 또한 이굴은 죽도에 시설을 지어 놓고 죽도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이 대동계원을 거느리고 병마를 훈련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6-5. 뜀바위
다시 정여립을 생각한다. 정여립은 진안에서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여 사람을 모은다. 정여립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자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조정이나 세상에 대한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상을 설파한다. 정여립 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선진적인 공화국의 사상인 것이었다. 그는 신분혁파를 주장하고 인권을 높이 평가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그의 이른바 '천하공물설'은 서양의 사회계약론 보다 더 앞서 나온 계몽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민평등의 계모임인 대동계를 조직하여 조선을 바꾸려고 했다. 정여립은 유교로 뒤덮힌 조선사회에서 보기 드문 혁명가였다. 만약 조선이 왕권국가에서 정여립이 꿈꾸는 공화국 시대가 되었다면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화 정치를 구현한 선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며 전 세계의 문명을 바꾸는 선도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정여립을 아직 조선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여립이 너무 일찍 왔는지? 조선이 정여립을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했는지? 아무튼 아쉽다. 역사는 늘 그렇게 흐르지 않는가?
조선 4대사화라고 하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희생자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낳은 조선 최대의 역모아닌 역모사건으로 알려진 정여립사건은 결국 전라도 인재가 조정에서 배척이 되고, 반역향으로 낙인찍어 호남 차별의 시발이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사상이 싹트고 저항 의식이 자라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을 것 같다. 정여립은 과연 역모의 주인공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풍운아였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기축옥사의 진실은 과연 밝혀 질 것인가? 산행 내내 나의 머리를 맴돌고 있는 의문이다.
6-6. 산중의 섬 죽도 풍광
6-7. 마지막 하산 구간
6-8. 금강과 구량천의 합수부 풍광
6-9. 천반산 지질명소 전망대
6-10. 정여립의 한이 서려 있는 산중의 섬 죽도
정여립이 군사를 일으켜 한강을 넘어 조정으로 쳐들어온다는 고변이 황해도에서 선조에게로 날아 들였다. 역모로 고발 된 것이다. 전북 김제에 있던 정여립은 이곳 죽도로 아들과 함께 급히 피신하였고 관군에 맞서 저항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알고 이곳에서 아들의 가슴에 칼을 꼿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아들은 칼을 맞았지만 살아 80여명의 대동계원들과 함께 관군에 잡혀가 선조가 친히 한 국문에서 갖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정여립이 모반하였다고 말하고 죽었다. 정여립은 죽고 그의 아들 입에서 역모를 시인하는 말이 나왔으니 선조나 정철에게는 확실한 역모사건이 되었다. 지금 같으면 증거는 없고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다. 따라서 지금도 정여립 모반 사건은 정철이 조작했다는 조작설과 실제로 모반이 있었다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이 정여립 역모 사건을 엄히 다루었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箚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양식의 상소문)를 올려 정언신이 동인으로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그해 11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추궁하였다.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여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얼마나 억울하였을까? 이처럼 억울하게 역모에 얼켜서 죽임을 당하고 귀양을 간 당시의 죽음이 수천이고 그들의 억울함 앞에 나는 숨이 막힐 만큼 숙연한 마음이 든다.
정철은 독하게 정여립 역모를 다루었다. 역모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는 자결하여 없으니, 역모 사건은 어떤 이유든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였다.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누리던 정치 권력을 서인이 되찾는 계기로 삼았다. 천인공노할 피의 숙청이 3년동안 있었다. 관련이 있든 없든 숙청하고자 한 정적인 동인은 모조리 정여립 사건과 관려지어 없엤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인재 1,000여명이 숙청 되었다. 조정에는 인재라고는 씨를 말릴 지경에 이른다. 이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 간 사람이 수천이다. 그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두가 조정을 외면했다. 왕과 서인에 대한 원한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서인은 나중에 세자 책봉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갈라져 당파싸움에만 몰두하였다. 조선은 그로 부터 몇년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환란을 맞았다.
율곡 이이는 이미 수십년 전에 조정 대신들이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국난을 예측했는지 모른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꿈적도 않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며 하세월을 보내는 동안 국력은 쇄퇴하고 인재는 말라 없어지고 백성은 굶주림에 거리를 헤멨다. 그러는 동안 토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륙을 치겠다는 명문으로 조선에 쳐들어 온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나라에 인제가 없으니 나라를 지키질 못하고 속수 무책으로 조정이 함략되고 무능한 임금 선조는 저만 살겠다고 의주로 피신을 가 버렸다. 원균 같은 서인이 수군통수자로 임명되어 전쟁에 나갔지만 우리 수군을 통채로 말아 먹고 겨우 함선 12척만 남기는 패배로 나라는 풍전등화가 되였다. 그나마 조선을 지킨 사람은 이순신과 권률 같은 동인이였으며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킨 사람도 동인이 대부분이였다.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서인들이 양란이 끝나고 집권세력으로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과 청을 섬기는 유교 사대부가 되어 왜정 때는 친일파로 해방 후 미군정 시절 기득권을 유지한 채 지금도 토착왜구가 되어 그 맥을 이어오면서 사사건건 기득권 유지에 나라를 흔들고 있다. 아직도 그들의 반대에 부딪쳐 친일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4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기축옥화 당시 국문을 지휘한 추국청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인 정철이었는지, 동인 류성룡이었는지를 두고도 광해군 때부터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인 정철과 동인 류성룡 두 사람 중 추국청의 위관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정여립 모반사건이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문제로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었으면 서인과 동인 간의 당쟁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은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이 크게 의심되고, 동인 류성룡이 위관이었으면 진짜 역모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당시는 왜인 토벌을 위해 조직됐던 대동계와 정여립의 자살로 정여립의 모반은 기정사실화됐다.
역적의 땅으로 낙인 찍혀 수년간 돌아보지도 않은 땅 죽도!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다 실패한 조선 혁명의 풍운아 정여립이 한을 안고 자결한 땅! 죽도를 걸으면서 내 심장이 터질듯이 요동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고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있다는 공화정치를 꿈꾸었던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한 혁명가 정여립의 피가 내 핏줄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늘이 부여한 고귀한 인권을 갖고 태어나며 이 인권보다 더 고귀한 가치는 없으며 모든 인간은 차별 받지 않고 자기 능력 껏 세상을 당당히 살아갈 권리를 누려야 한다. 그런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다. 나는 이런 정의로운 세상을 희망한다. 남은 여생을 조금이나마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리라!
"선비 천명 죽은 '기축옥사', 조선시대 '광주학살'...역모아닌 혁명이었다"-역사 재조명(1) < 특별기획 < 연재/특별기획 < 기사본문 - 전북의소리 -http://www.jb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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