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0.12.29.(화)
2. 누구랑 : 2명(하여백, 하여간)
3. 산행구간 : 쌍치주유소사거리-채일봉-박씨봉-운암산-육경봉-목골산-국사봉-옥좌봉-선녀봉-국사봉-계룡산-피노리
4. 산행개념도(하여 회장님 제작)
5. 산행 소감
순창 쌍치를 가다보면 녹두장군 전봉준관이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 온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늘 내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기존 질서에 대항하여 일어난 농민봉기의 선봉에 섰던 전봉준! 그는 과연 어떤 분일까?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느냐만,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라는 절명시 '운명'을 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봉준! 그 애타는 절규가 쌍치를 넘어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듯하다. 내 마음속 일렁이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존경, 그리고 이 시대에 차별 철패와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전봉준 장군 앞에 귀한 향을 피운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4.19와 5.18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초들의 대동세상 불꽃은 차별 없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활활 타오리라! 나는 그 한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하나? 작은 불씨 하나라도 지펴야 할텐데, 정의를 세우고자 한 전봉준의 피가 정의를 부여 잡고 오늘도 국사봉을 오른 내 핏줄에서 함께 춤을 춘다.
믿었던 옛 부하의 밀고와 같은 민족의 몽둥이에 잡혀 왜군에게 넘겨진 혁명가 전봉준의 꿈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피체지가 피노리에 있다. 순창 쌍치면의 진산 국사봉을 산행하고 피체지를 둘러보기로 하고 하여백 회장님과 오붓한 산행을 시작한다. 골짜기마다 안개가 자욱하여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는 풍광을 만나는 것은 오늘 산행의 행운이다. 풍수지리상의 임금과 신하가 조회를 하고 있는 군신봉조 형국의 국사봉과 철쭉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런 곳을 산행할 수 있어 행운이다. 내년 5월 철쭉이 한창 필때 철쭉 축제를 하면 꼭 다시 한번 올라 보고 싶은 구간이다. 잘 자란 소나무 숲길은 솔향 가득한 힐링 산길이다. 더구나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 녹두장군 전봉준이 잡힌 피체지가 있는 피노리 녹두장군 전봉준관을 둘러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하루이다. 귀한 산행지를 안내 해주고 동행해 주신 하여 형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6. 산행추억
순창군 쌍치면의 진산 국사봉(665m)은 풍수지리상 임금과 신하가 조회하는 군신봉조 형상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국사봉을 정점으로 좌측엔 삼태봉이 연이어져 삼정승이 좌정한 형상이요. 우측엔 육경봉이 나열해 육판서가 도열한 형상이다. 전면에는 내전을 뜻하는 내동마을이 있고, 후면에는 옥촉을 밝히는 옥촉봉이 솟구쳤다. 게다가 섬진강의 상류이자 쌍치의 젓줄인 추령천이 고을 앞을 흐르고 있으니, 풍수지리에 최고의 형상을 모두 갖춘 길지가 아닐 수 없다. 쌍치 국사봉은 군신봉조의 풍수지리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삼정승과 육판서는 세자를 어진 임금이 되도록 가르치는 스승이기 때문에 '국사봉'으로 불렀다.
부패한 정부와 탐학한 관리에 맞선 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하여 사회변혁을 도모하였다. 농민군은 신분제를 철폐하고 과중한 세금을 폐지하며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농민이 살기 좋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힘을 모았다. 전라도를 위시한 한반도 전역에서 농민들의 함성은 메아리 쳤고, 이에 당황한 조선의 통치권자들은 외세를 끌여들여 농민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침략 야욕이 앞선 일본군은 신식무기를 앞세워 무고한 양민까지 살해하였고 1894년 11월 나라를 구하고자 서울로 진격하던 수십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처절히 패배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농민군의 염원이 좌절되어 전봉준 장군은 쫓기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품고 정읍을 거쳐 순창 피노리로 몸을 숨겼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이는 12월 전봉준 장군은 옛부하 정읍 출신 경경천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지만, 현상금과 포상에 현혹된 김경천은 한신현, 김영철, 정창욱 등과 함께 주막을 에워싼다.
수상한 분위기를 직감한 전봉준 장군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담장을 뛰어 넘었고, 그 순간 내려치는 몽둥이에 전봉준 장군은 쓰러지고 말았다.
농민이 주인되는 평등한 세상을 열망했던 혁명의 지도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었지만 오늘 우리는 이곳 피노리에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전봉준 장군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느냐만,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라는 절명시 '운명'을 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전봉준! 그 애타는 절규가 쌍치를 넘어 온 세상에 울려퍼지는 듯하다. 내 마음속 일렁이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존경, 그리고 이 시대에 차별 철패와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전봉준 장군 앞에 귀한 향을 피운다.
전봉준 장군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갑오년 3월 창의문이 선포되고 보국안민과 제촉구민의 함성은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퍼저나갔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으로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하였고, 11월 정읍 입암산성으로 몸을 숨긴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전봉준 장군은 백양사로 거쳐를 옮기고 다시 김개남 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 피노리에 피신 중 당시 고분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12월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3월 29일 순화중, 최경선 장군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새로운 역사를 열고자 했던 혁명의 중심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항거한 전봉준 장군의 뜻을 기리고자 삼가 비를 세운다. 서기 2005년 5월 4일 순창 군수 강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