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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명산

2020.12.09. 뜻밖에 만난 보물 순창 백방산(668m)에서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과 용추봉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과 반야봉 등 지리능선을 조망한 행복한 하루입니다.

by 하여간하여간 2020. 12. 9.

1. 산행일자 : 2020.12.09(수)

2. 누구랑 : 하여백, 하여간 2명

3. 산행구간 : 중리마을회관 주차장- 창등지-싸리재-백방산-소백산-옥녀봉-낙덕정-가인 김병로선생생가터-중리마을회관 주차장(차량회수)-석보교-둔전교-중만교-훈몽재

4. 산행지도

 

5. 산행 소감

뜻밖의 보물이였다. 순창 백방산에서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치재산과 용추봉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과 병풍산과 불태산 그리고 무등산과 모후산, 조개산, 백아산 등을 조망하면서 또  만복대, 반야봉, 천왕봉 등 지리산 능선을 조망한 이 행복이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순창 백방산은 비등로 숨겨진 옥석 중이 옥석인 산이다. 전국 비등 산꾼들 중 그 유명하다는 신경수부부의 시그널을 만나는 비등 중에 비중이다. 암릉과 산죽밭을 헤치고 오르는 희열, 희미한 산길을 헤치고 알 수 없는 비등을 오르는 산꾼의 기질, 그것은 먹이를 앞에 두고 달려드는 사자의 야성 바로 그것이다. 산행 내내 비등로 산행의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상한 성취감을 안겨준다. 비록 짧은 산길이지만 백방산의 조망은 가히 천하 일품이였다.

 

6. 산행 추억

중리마을 회관에 주차하고 백방산으로/ 저기 보이는 산이 백방산

 

싸리재에서 급하게 오르다보면 첫 조망터가 나오는데 추령천이 휘돌아 흐르는 풍광이 산꾼의 피로를 확 날려 보낸다

 

어디나 산죽이 있다.  

산꾼에겐 산죽이 반갑기도하고 버겁기도 한다. 오늘도 산죽은 길을 막고 오름길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으로 산죽을 헤치고 한 걸음 한 걸음 구도의 길을 걷는다. 

 

백방산 오름길엔 제법 오르기 어려운 암릉이 있다. 

조심스레 오르면 그만큼의 아름다운 조망을 선사한다. 겨울산은 낙엽이 떨어져 산야의 속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기막힌 조망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잠시 빠져 본다.

 

 

오르면 오를수록 멋진 조망이 펄쳐진다. 환상적인 조망에 혼이 쑥 빠지고~
올라왔던 경사길을 배경으로 한장

 

백방산 정산에서 바라본 조망/ 병풍산과 불태산 하늘금 그리고 추월산 위로 뽀쪽 얼굴을 내민 친구가 무등산이네요  
오늘의 조망의 하이라이트/ 백방산에서 멀리 지리산 반야봉과 천왕봉이 조망 된다. 줌으로 당겨서 담았다.

 

백방산 정상 인증

 

순창 백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을 동영상에 담았습니다. 환상의 조망입니다. 이런 조망을 할 수 있어 행복한 하루입니다.

백방산 하산길에 만난 암릉 위에서 한장
하산길 암릉에서 
하산길 암릉에서 다시 한장
돌아본 백방산
순창 소백산 인증
옥녀봉으로 오르는 길은 희미하다. 가시덤블과 나무가지를 헤치고 올라야 한다,

 

옥녀봉 오르기는 매우 힘들었다.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산해서 바라본 옥녀봉의 암릉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옥녀봉 정상 바로 아래에서 암릉이 멋지다. 추월산을 배경으로 한장

 

힘든 옥녀봉을 올랐다.     

누군가 쉼의자를 마련해 놓았다. 잠시 고마운 마음으로 한숨을 고른다. 언제부턴가 얼굴엔 깊은 주름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의 흔적인가, 가야할 먼길! 함께 가야할 그 길을 편암함으로 여우롭게 가야지!   

 

참 좋다! 참 아름답다!  

이 땅에 저 산하는 그 자리 그대로 변함없이 있는데~, 봄에 아름다운 꽃과 새삭을 피우면서도 우쭐거리지 않고, 여름의 짙은 녹음으로 시원함을 선사하면서도 바라지 않고, 철이 되어 가을 낙엽으로 훌훌 떨쳐버리면서도 아쉬워 하지 않고, 추운 겨울 칼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광대무량의 덕목으로 그냥 그대로 그자리에~, 우리네 삶도 저렇게 아름답게 살아야할 진데~, 망중한이다 

 

오늘 이 숨겨진 보물 백방산을 안내해준 하여백 형님께서 애써 남겨주신 암릉 한장
또 한장 
손을 들어보라하면서 남겨준 형님께 감사한다.
옥녀봉 하산길엔 아름다운 암릉이 숨어 있다. 전국의 비등 전문가인 신경수 부부 시그널도 보고 
힘들었지만 행복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낙덕정

낙덕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

낙덕정은 김노수가 조상 김인후를 기르기 위해 1900년에 낙덕암 위에 지은 정자이다. 김인후는 조선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자 뛰어난 학자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훈몽재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그는 물과 숲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낙덕정은 20세기 초반에 지은 정자로는 보기 드물게 팔각 단층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이 어린 시절 이 정자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낙덕암은 추령천이 휘돌아가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소나무와 조화가 잘 된 절벽이다

 

낙덕암과 추령천을 배경으로 한장

 

대한민국 초대 대밥원장을 지내신 가인 김병로 선생의 생가

가인 김병로 선생(1887~1964) 선생 생가터 

조선중기의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손인 김병로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냈으며, 변호사 시절에는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료 변론활동과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셨으며, 1948년 대한민국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가로써 우리나라 사법부 역사상 법조 3성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법조인들로부터 가장 추앙받고 있다. 가인 생가는 6.25한국전쟁 때 손실되었으나 2014년 5월 순창군에서 후손들의 고증으로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명애롭기 때문이다  -퇴임식에서(1957.12.16)-
법관으로서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 될 때는 사법부의 위신을 떠나야 한다. -  전국법원수석부장판사회의에서(1954.10)-
세상 사람들이 다 부정에 빠져간다 할지라도 우리 법관 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하여야 할 것이다. -법관훈련회동 강의에서(1954.3.)-

 

가인 김병로 선생의 올곧은 법조인으로써 청렴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한 굳은 결개를 느끼게 한다. 오늘날 출세와 권력욕에 사로잡힌 법조인은 새겨 들어야할 말이다.

 

삼연정

하서 선생이 산,수,인 삼자연을 노래한 자연가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하서 선생은 일찍이 인종의 세자시절 사부로서 도학과 왕도로 보도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뒷날 당우(중국의 요순 임금을 가리킴)의 정치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큰 꿈이 무너지자 산수간에 은거하면서 부귀공명을 초월하여 자연과 동화하였다. 이 삼연정은 선생의 자연관을 기르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자연가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 산도 절로 절로 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간이란 절로 절로 늙사오리

대학암에서한장
대학암

대학암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백병산 아래 추령천변에 위치하여 현재도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8)의 친필 '대학암'이 암각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에게 대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소년시절에 훈몽재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인근 석보 마을 앞 뜰에 정철배미(현재는 친정배미로 불림) 라고 불리는 논이 있는데 이는 정철의 공부답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뒷날 단암 민진원이 도백우로서 필마로 자연당 김시서 선생을 찾아와 대학암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상국께서 수학한 바윗돌을 매만지니 / 두 노웅이 남긴 향기 영원히 흠양되네

 

양정관

 

훈몽제

훈몽재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이 인종의 스승으로서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삼대정치의 큰 꿈이 좌절되자, 명종 3년에 순창 점암촌에 은거하면서 백병산 자락(현재위치)에 지은 강학당으로 정조가 친히 존립여부를 물었을 정도로 유학을 창도한 곳이였으며, 정치가이자 가사문화의 대가이기도 한 송강 정철을 비롯한 조희문, 양자강, 기효간, 변성온 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해동유학 발전의 산실이었다. 하서 선생은 퇴계 이황선생과 쌍벽으로서 해동염계요 호남수사였으며, 1796년 정조에 의해 호남 출신 유현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서 선생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제자들에게 보여주며 훈도하였다

하늘과 땅 그 중간에 두 사람이 계시나니 / 중니(공자)는 원기라면 자양(주자)은 참이로세 / 마음을 가라 앉혀 딴 길로 가지 말고 / 좌잘한 병든 몸을 위안해 주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