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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0.10.09. 무등산 규봉암과 석불암

by 하여간하여간 2020. 10. 11.

1. 방문일자 : 2020.10.09.

 

2. 규봉암(해발 950m) 소개

 

규봉암에 대한 기록은 신라 시대에 의상 대사가 서석과 규봉을 보고 정사(精舍)를 세웠다고 한 것이 최초이다. 조선 초기 문신 권극화는 광산(光山)의 진산을 무등산 혹은 서석산이라고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모든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겹겹이 서 있는데 [중략] 옛날 의상 대사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웠고, 계속하여 보조와 진각이 공부하여 도를 얻어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삼존석(三尊石)과 십이대(十二臺)를 보면 대개 이를 생각할 수가 있다.” 라고 하면서 무등산에 대한 아름다움과 규봉암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후 제대로 절의 모습을 갖추어 창건하기는 798(신라 원성왕 14)에 당에서 귀국한 순응 대사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말의 도선(道詵, 827~898)국사는 이 절의 은신대에 앉아서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의 절터를 잡았다고 하며, 고려 후기의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은 절 주변의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도 이곳에서 수도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규봉암은 신라· 고려시대의 고승들과 관련된 유서 깊은 수행도량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3. 규봉암 주련

규봉암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화순이서 황금들녁
규봉암 가는 이정표

 

규봉암 입구
돌계단을 지나서
성벽이 웅장하고
규봉암 일주문이 보이고

 

참배객이 지켜야 할 안내문
무등산 규봉암 일주문

 

무등산 규봉암 일주문 주련

 

入此門來莫存知解  입차문래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

無解空器大道成滿  무해공기대도성만  빈 그릇에 큰 도(道)가 가득 차리라

 

문 너머로 들어서게 되면 속세(俗世)가 아닌

진리는 성(聖)의 영역임에 들어섬을 나타낸다.

“이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지식과 분별)를 없애도록 하라”

진리는 불립문자 즉 인간의 언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게 아니다.

※ 불립문자(不立文字) : 문자로는 세울 수 없다. 진리는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다.

선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법을 말한다.

 

무등산 규봉암 규봉(문바위)/문바위 는 김덕령 장군이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고 한다/국립5.18민주묘지 광주민주항쟁추모기념탑을 이 바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518광주민중항쟁추모기념탑/ 높이 40m의 추모탑은 5·18정신이 삼라만상과 우주를 꿰뚫어 범우주적 존재로 승화하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규봉암 범종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가리키며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도록 하거나, 모든 이들에게 때를 알려주는 종으로, 그 소리가 아주 신묘하여 예경이나 의식에도 쓰이게 되었다. 범종 소리는 우리의 마음속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자비하신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어 줍니다.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위해 소리를 낸다고 한다. 

 

 큰 종을 종루나 종각을 짓고 달아두며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종의 맨 윗부분은 용의 머리처럼 만들어 소리내는 음통과 거는 역할을 하는 용두(龍頭)가 있다. 상부에는 젖꼭지 모양의 유곽(乳郭)이 둘러싸 있고 아랫부분에 양편으로 상대해서 두개의 당좌(撞座)가 연꽃 무늬로 있게 되는데 종을 칠 때는 이 곳을 쳐야 한다

 

몸통에는 사보살상이나 아름다운 천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천상(飛天像)이 아름답게 새겨진다. 중생이 종소리만 들어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고,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하여서 중생을 제도하게 될 것이다 하는 축원을 곁들이게 되었다. 과연 이 종소리로 하여금 듣는 자로 하여금 듣는 자의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직전에 절에서 울려 퍼지는 그 우렁차고도 은은한 종소리는 중생의 혼미한 잠을 깨워주고 열띤 머리를 식혀주며,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힘이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규봉암 관음전

규봉암(圭峰庵)은 높이 약 850m에 위치하며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산 897번지 무등산(無等山) 동쪽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절 주변은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솟아 있어 명승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은신대· 삼존석· 십이대· 광석대· 풍혈대· 설법대 등의 기암괴석은 신라와 고려의 고승들이 수도했던 자리하고 전해진다

 

 

절의 창건연대는 문헌에 보이지 않으나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절에 전하는 설화에는 전생에 이곳을 찾은 적 있는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금생에 이곳에 와 바위 틈에서 흐르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음을 기이하게 여겨 절을 지었다고 한다.

 

 

무등산 규봉암 관음전 주련

 

一葉紅蓮在海中 (일엽홍련재해중한떨기 붉은 연꽃 바다 위에 떠 있더니

碧波深處現神通 (벽파심처현신통푸른 물결 깊은 곳에 신통으로 나타나시듯

昨夜寶陀觀自在 (작야보타관자재지난 밤에 보타산에 계시던 관자재보살님

今日降赴道場中 (금일강부도량중오늘은 이 도량 가운데 내려 오셨네

 

규봉암 관음전 관세음보살좌상

관음전 안 관세음보살좌상

관세음보살좌상은 1992년에 조성한 것으로 규봉암 관음전의 정면에 있는 보살좌상이며, 보관은 화려하고 중앙에 화불이 있다얼굴은 장방형에 가까우며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에 영락이 드리워져 있고 승각기를 입고 있다연화대좌 위에 오른발을 위로 올리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버들잎을 잡고 있다왼손은 무릎 위에 올린 채 정병을 들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화려한 양식을 보인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 관세음자재라고도 번역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부른다법화경이나 관무량수경, 화엄경 등에 설해지고 있듯이 관세음보살은 늘 세간의 소리를 관하면서 중생들의 발원이 있으면 어느 곳이든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며, 선업을 많이 닦은 이의 임종시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찾아와 극락으로 인도해가는 분이다중생들의 온갖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시무외자(施無畏者), 대자대비를 근본으로 한다는 뜻에서 대비성자(大悲聖者)라고도 하며세상을 구제하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 후불탱화

관세음보살 후불탱화

관세음보살 후불탱화는 전체적으로 붉은 색에 금색으로 그렸으며, 1996년 작품으로 크기는 170cm× 230cm이다.

 

규봉암 관음전 오백불화

규봉암 관음전 내 오백불화

 

오백불화는 관음전 내 관세음보살의 향우측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붉은 바탕에 금니로 그렸다... 좌우대칭형 화면구도로, 화면의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배치하고 그 주위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포함하여 4분이 시립하여 있다그 주위로 오백 분의 석가여래좌상을 표현하였으며, 화기에는 조성연대와 시주자, 금어 등이 나와 있다. 금(金魚)는 곽철홍(郭哲弘)이며, 1999년에 그려진 것이다...

 

규봉암 관음전 신중탱

대웅전 내에 모셔진 것으로 검정바탕에 금니(金泥)로 선묘(線描)하여 얼굴만 밝게 채색한 신중탱이다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이라 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인다신중탱은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한다화기에는 조성연대와 시주자, 금어 등이 나와 있는데, 금어(金魚)는 곽철홍(郭哲弘)이며, 1995년에 그려진 것이다..

 

규봉암 삼성각

 

규보암 삼성각 주련

 

靈通廣大慧鑑明(​영통광대혜감명)  신령스런 신통력과 광대한 지혜로 거울처럼 밝아

​住在空中映無方(주재공중영무방)  허공중에 머물면서 비추지 않는 곳 없도다

​羅列碧天臨刹土(나열벽천임찰토)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 강림하시어

​周天人世壽算長(주천인세수산장)  하늘과 인간세계 사람들의 수명을 늘리는 구나

 

규봉암 삼성각 내 불단

 

광석대 주상절리대

광석대(규봉 주상절리대)

광석대는 서석대, 입석대와 함께 무등산을 대표하는 3대 주상절리대로서 해발 고도는 약 850m에 위치합니다. 광석대는 북서쪽에 위치한 지공너덜과 함께 문화재 명승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찰인 규봉암을 중심으로 늘어선 주상절리대의 높이는 약 30~40m이며 최대 넓이는 약 7m에 이릅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볼 수 없는 규모이고, 구성 암석은 '무등산응회암'이라고 불리는 화산암입니다.

 

규봉암 종무소

 

규봉암 종무소 주련(정면)

 

 

규봉암 종무소 주련(측면)

 

虛空可量風可繫(허공가량풍가계) 허공에다 바람을 묶어서 메달을 수는 있어도

無能盡說佛功德(무능진설불공덕)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써는 도저히 다할 수는 없다네 

 

규봉암 감로수

 

용왕각

규봉암 용왕각 주련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千江 물에는 모두 달이 비추는데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萬里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구나.

 

천강에 물마다 달 비추고

만리 하늘에 구름 없으니 만리 까지 비추네.

 

규봉암 용왕각에는 일천 대신 하늘천을 쓰고 있을 유자 대신 흐를 유자를 쓴것이 흥미롭다

 

규봉암 용왕각은 바위틈에서 나는 석수를 받아 놓은 물통을 모신 제각으로 산중에 용왕님을 모신 제각이다.



규봉(문바위)에는 옛날 이곳을 찾은 관직을 갖은 분들의 이름이 수 없이 많이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세속적인 욕심이 안스럽기만 하다.
무등산 규봉암 전체를 담아 본다

조선시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규봉암이라고 하지 않고규봉사라고 적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조선 중기의 고경명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쓴 현판이 전해왔다고 한다. 그 뒤 언제인가 폐허가 되어버린 절을 1729(영조 15) 320일 이 지방 내서면 경산마을 출신인 연경(演瓊) 스님이 3년 동안 불사를 하여 사찰을 중건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10년 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어 폐사가 되었다가 1957년에 주지 이한규가 대웅전과 함께 3동을 새로 지었다. 최근에는 정인(正因) 스님이 주석하면서 1995년에 대웅전이 중건되었고, 1996821일에는 관음전 낙성식 및 후불탱화 점안식이 송광사 법흥(法興) 큰스님을 증명사로 하여 이루어졌다.

 

광석대의 아름다운 풍광과 규봉암

규봉 일대의 서석은 입석대, 서석대로 대표되는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이다.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은 암괴가 크고 장엄하며, 암괴가 층층이 단을 이루어 마치 병풍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그 중에 규봉암은 다양한 주상 절리대가 주변의 식생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계절마다 그 색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권극화가 언급한 규봉암은 암자와 함께 있는 서석(瑞石)을 통틀어 이야기 하고 있다. 규봉에 있는 암자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창건되고, 폐사되었다가 재건되고,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규봉암의 서석은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규봉암은 옛부터 9명의 국사등 배출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신라말의 도선(道詵, 827~898)국사는 이 절의 은신대에 앉아서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의 절터를 잡았다고 하며, 고려 후기의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은 절 주변의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도 이곳에서 수도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규봉암은 신라· 고려시대의 고승들과 관련된 유서 깊은 수행도량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규봉암을키키고 있는 광석대주상절리대와 명품소나무

 

5. 석불암 소개

석불암 가는 길 이정표

 

 

석불암 일주문
석불암 생수

 

석불암
석불암에 최근 오신 관묵스님께서 돌탑을 쌓고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석불암 뒤 암벽 앞에 내가 심은 주목이다.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 반가웠다.
석불암 마애여래좌상

석불암 마애여래좌상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29(2007.01.05.)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도원길 40-28(영평리 산 88-1)

 

무등산 석불암 법당뒤 바위에 인공적으로 만든 불감 안에 새겨져 있으며, 현재는 불감 앞쪽에 전각을 붙여 출입문을 만들었다1933년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아미타여래상이다.

 

연화좌대 위에 길상좌로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크기는 98cm이다. 광배는 쪼아서 음각하였고 두광위에는 문자 세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속아 있고 그 밑에 중간 계주를 표현하였다법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이며, 가슴의 내의의 띠 모습이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 구품인 중 중품 중생인을 맺고 있는데, 오른손 엄지가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해 놓았다얼굴은 원만하나 양 볼이 약간 들어간 모습이고, 유난히 큰 귓밥이 어깨 가까이 내려와 있고 목은 짧게 처리되어 삼도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불상 오른쪽 무릎 높이에는 액을 만들고 그 안에 남무산왕위(南無山王位)란 글씨를 새겼다.

 

2018년 12월 석불암 마애여래좌상/지금과 사뭇 다른다./불상 오른쪽에 남무산왕위 라고 새겨저 있다.

우측 명문에 1933년 전라남도 담양읍 사람인 국영현 일가의 발원으로 석공 이삼채가 참여했다고 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도한 좌측 명문에는 국영현 일가의 발원으로 1935(불기 2960년 계유 9월 일) 소림정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이 본래 소림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림정사는 6.25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돌아본 석불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