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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0.12.21.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by 하여간하여간 2020. 12. 25.

1. 탐방일자 : 2020.12.21(월)

 

2. 탐방소감

대흥사 하면 서산대사와 초의선사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불교의 종통을 이어오는 승보사찰로 유명하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해남 두륜산이다. 두륜이란 말에 왠지 어마 어마하게 크고 넓은 세상일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리 두자에 바퀴 륜이다. 백두산의 두자도 머리 두자로 으뜸이다는 의미이다. 나는 왠지 백두산 두자와 두륜산 두자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기운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호남정맥을 거처 땅끝기맥을 타고 오다 한반도 남쪽 가장 남단에 높이 솟은 큰 산, 두륜산에 머물다 다시 땅끝으로 그 기운을 밀고 내려가는 듯하다. 두륜!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래고 가슴이 뛴다. 그 두륜산의 품안에 인간 세상과 진리의 세계를 연결하여 하나가 되는 우리나라 불교 최대의 사찰인 해남 대흥사가 자리잡고 있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를 방문했다. 옛날부터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천년고찰이기도 하지만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차 문화 교류, 추사 김정희와 이광사 간에 얽힌 이야기 등 그리고 서산대사의 흔적 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두륜산 등산을 하면서 몇 번을 들렀지만 외관만 둘러보고 왔기에 대흥사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코로나로 건물만 보고 내부는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대흥사가 거느린 암자가 많다. 건물 내부와 여러 암자는 나중에 다시 한번 방문하기로 하고 오늘은 해남 대흥사 가람 배치와 보물 및 문화재를 집중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 방문은 평일 혼자다. 퇴임을 하고 혼자 어디를 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무척 주저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을씨년스럽지 않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괜히 남 보기에 초라하지는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감히 혼자 나서지를 못하고 여러 날을 보냈다. 이번에 큰 맘먹고, 한번 떠나보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 어떤 감을 줄지 사뭇 기대 반 염려 반 해남을 향했다.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고 동백숲을 지나는 동안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상쾌하다. 싱그럽다. 편안하다. 혼자 걷는 숲길이 그렇게 외롭다기보다 편안하고 포근했다. 더 여유롭고 간편하다. 어쩌면 이런 맛에 혼자 여행을 하는 걸까? 앞으로 더욱 혼자 하는 여행에 길들여질 것 같다. 차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세히 대흥사를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3. 대흥사 소개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강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4. 대흥사 이곳 저곳

 

◎ 두륜산 대둔사 산문

 

두륜산 대둔사 산문

 

대흥사 산문은 양쪽으로 기둥이 두개씩으로 채색이 참으로 아름답다.

 

◎ 대흥사 비로문

 

대흥사 산문 뒤쪽 비로문

 

◎ 대흥사로 가는 길

 

대흥사로 가는 길목에 아직 놓기가 아쉬운 단풍이 이 겨울, 계절의 끝을 부여 잡고 있다.

 

대흥사 동백 힐링 숲을 걷는다. 중생의 온갖 망념에 빠지고 그러다가 문득 아니다~ 이 사치스런 망념에서 벗어나야지~  하늘을 본다. 푸른 동백 숲이 시원하다. 

 

편백 숲도 울창하고

 

대흥사에서 적어도 여기 기록된 곳은 꼭 봐야 한다.

 

◎ 두륜산 대흥사 석주

 

이곳부터 대흥사 영역이 시작된다.

 

대흥사 입구에 세워진 두륜산 대흥사 석주

 

입구에서 만난 대장군/잡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려나?

 

 

◎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 두륜산 대흥사 부도탑

 

서산대사의 부도를 비롯한 13대종사와 13대강사 그리고 대사님들의 부도들

 

◎ 대흥사 13대종사 석주

 

13대종사도량 석주/ 대흥사가 얼마나 유명한 스님들의 도량이었는지 알 수 있다.

 

◎ 두륜산대흥사 편액

 

두륜산 대흥사와 해탈문/보통 절집은 사천왕문이 있는데, 대흥사는 해탈문이 있다. 해탈문 안에는 양 옆으로 동자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 편액이다. 한말 의정부참정과 탁지부대신을 지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선생은 서재필 박사의 외숙부이기도 한데, 해사는 당대 명필로 “두륜산대흥사”, “팔공산동화사”, "부산 범어사 일주문" 등 여러 곳에 현판과 필적이 전한다.

 

◎ 대흥사 해탈문

해탈문을 지나면 부처님이 계신 선경에 들어 오는 것 같이 확트인 두륜산과 대흥사 넓은 공간이 나오고 청전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님을 친견할 수있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扁額)

 

◎ 원교 이광사가 쓴 해탈문 편액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해탈문(解脫門) 편액(扁額). 원교 이광사는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하고, 동국진체를 이룩한 조선시대 대표적 서예가 중에 한 사람이다. 원교는 나주괘서사건(1755년, 영조 31년에 소론 일파가 역모를 꾀한 사건)에 연류되어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 살다가 1762년 전라도 완도의 신지도로 이배되었다. 1777년 8월 26일 73세로 신지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 대흥사 해탈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

 

대흥사 해탈문에는 특이하게도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를 봉안하고 있다.

 

문수동자는 석가모니의 지혜를 상징한다. 오른손으로 연꽃을 쥐고 있고 왼손으로는 연꽃 줄기를 잡았으며,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보현동자는 석가모니의 수행과 행원을 상징한다. 오른손으로는 연꽃 봉오리를 쥔 모습이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즉,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이 지닌 대표적인 두 힘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

 

문수동자는 석가모니의 지혜를 상징한다. 오른손으로 연꽃을 쥐고 있고 왼손으로는 연꽃 줄기를 잡았으며, 청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

 

보현동자는 석가모니의 수행과 행원을 상징한다. 오른손으로는 연꽃 봉오리를 쥔 모습이고,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 대흥사 무염지

 

해탈문을 지나 들어서면 대흥사 앞 마당은 참으로 넓다. 저 멀리 두륜산 정상에 누워 있는 비로자나 와불의 진리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무염지

 

무염지(無染池)

초의선사가 조성한 무염지(無染池)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의 연못,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시 물 공급지의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절묘한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 (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 대흥사 범종루

 

대흥사 범종루
대흥사 범종루에는 범종만 있다. 다른 곳에는 법고, 목어, 운판 등의 사물이 같이 있는 것과 비교 된다.

 

대흥사 범종

 

보호수/연리근

 

 

◎ 대흥사 북원구역

 

이곳은 침계루 앞의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차하고 있어서 북원이라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응진당 앞 삼층석탑이 있으며 사찰에서 가장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가 쓴 편액과 해사 김성근이 쓴 백설당 편액이 걸려 있어서 조선후기 명필의 필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1899년(대한제국 광무5년) 북원 일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삼층석탑,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 대흥사 심진교

 

심진교

 

 

침계루

◎ 대흥사 침계루

북원 출입문으로 금당천을 가로지르는 심진교와 이어지는 2층 누각 건물이다. 누각의 앞뒤에 원교 이광사가 쓴 침계루 편액과 원종대가람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2층 누각에는 법고, 목어, 운판 등의 사물과 함께 대흥사의 사적과 격을 알 수 있는 수십개의 현판이 사면에 걸려 있다.

 

원교 이광사가 쓴 침계루 편액
원교 이광사가 쓴 원종대가람 편액

◎ 대흥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대웅보전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는 1901년 대한제국 광무 5년에 조성한 것이다. 이 건물은 1667년 조선 현종 8년에 중건된 적이 있지만 1899년 대한제국광무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 장식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계단석 소맷돌 양쪽에 조각된 사자머리 한 쌍은 전각 수호의 뜻을 담고 있다.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

목조삼세불이 없다.  왜일까?

 

 

◎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원교 이광사 글씨)

 

대웅보전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40년 제주로 귀양 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걸었다. 하지만 그 후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때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

 

 

대웅보전 주련

 

불섭난명수마능(佛葉難鳴樹摩能)-부처님, 가섭, 아난, 마명, 용수, 달마, 혜능

위광편조시방중(威光徧照十方中)-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월인천강일체동(月印千江一體同)-일천 강에 달이 비치어도 모두가 하나이다.

사지원명제성사(四智圓明諸聖士)-네 가지 지혜  두루 밝히신 여러 성인들

분림법회리군생(賁臨法會利群生)-분연히 법회에 임하여 군생을 이롭게 하시네.

화아방반법열주(華阿方般法涅呪)-화엄경, 아함경, 반야경, 방등경, 법화경, 열반경과 주문

 

◎ 대흥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대흥사 홈피 자료)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과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

 

삼세불(중앙)

 

삼세불(우)

삼세불(좌)

 

◎ 대흥사 대웅보전 태화(대흥사 홈피 자료)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ㆍ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삼장탱

 

신중탱

 

칠성탱

 

감로탱 

 

◎ 대흥사 명부전

 

해사 김성근 선생이 쓴 명부전 편액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모셔진 법당으로 대웅보전 서쪽에서 동향하고 있다. 지장후불탱화는 1901년에 조성되었는데 당시 지장보살과 시왕, 명부권속들도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 주련

장상명주광섭대천(掌上明珠光攝大千) 손바닥 위 밝은 구슬은 대천세계를 비추시고

​수중금석진개왕문(手中金錫振開王門) 손안의 금장으로 지옥문을 떨쳐 여시도다

상휘혜검단멸죄근(常揮慧劍斷滅罪根) 항상 빛나는 지혜의 칼로 죄의 뿌리를 잘라 없애시고

업경대전시전조율(業鏡臺前十殿調律) 업경대 앞 시전에서 중생 공덕을 증명해주시는도다

 

명부전에 모신 지장보살

 

◎ 대흥사 무량수전과 백설당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과 해사 김성근이 쓴 백설당 편액

백설당은 대흥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며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편액과 구 한말 명필로 유명했던 해사 김성근이 쓴 백설당이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 대흥사 윤장대

 

윤장대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권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세가지 악이 있다.

첫째는 마음이 약해서 착한 말을 듣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항상 남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남이 자기 보다 나은 것을 알면서도 수치스럽게 여겨 바른 가르침을 묻지 않는 것이다.

 

- 대법계 다리니경 -

 

 

◎ 대흥사 응진당과 삼신각

 

해사 김성근의 글씨 응진당과 초의선사가 쓴 산신각 편액

대웅보전에서 왼편에 있는 이 건물은 응진당=산신각을 한채에 연이어 수용한 점이 특이하다. 응진은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를 뜻하며, 산신은 전통신앙의 대상을 차지하는 신으로 불교에 습합되어 가람과 산을 수호하고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 역할을 한다.

 

 

대흥사 응진당 편액은 해사 김성근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산신각 편액은 초의선사의 글씨이다.

 

응진당 내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들

 

산신당 내 가람과 산을 수호하고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

 

◎ 대흥사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대흥사 삼층석탑 보물제 320호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지장율사께서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 진시사리를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1967년 1월에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12cm 높이의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301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대흥사 청운당

 

청운당

 

북원 일곽의 산신각 좌측에 자리한 청운당(靑雲堂)은 스님 및 재가 종무원들의 대중방으로, 현재 요사체 및 스님들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 맞배건물로 건물 전후에 툇마루를 가설하였다. 건물 외부는 2ㆍ3분합의 띠살문을 단장하고 외부 단청으로 장엄하였으며, 어칸 상부에는 흑지에 백서로 양각된 ‘청운당(靑雲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감실형의 불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선방으로서의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운당 일곽에는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세면실 휴게실이 갖추어져 있다.

 

◎ 대흥사 대향각

 

대향각

 

북원의 침계루에 들어서면 우측편에 있는 전각입니다

 

 

◎ 대흥사 남원 구역

두륜산의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으로 전각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있는 정형화된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전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한 공간 구성이 특징이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오고 청전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님을 친견할 수있다. 정면에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이 금당천의 남쪽에 해당하는 남원구역이다.

남원에는 중심 법당인 천불전이 있고,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 대흥사 가허루

 

가허루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駕虛樓)’라는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다.  

 

 

남원의 출입문 가허루를 지나면 천불전이 한 눈에 들어 온다.

 

◎ 대흥사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에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즉, 언제 어느 곳에서나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전각이라고 할 수있다. 이 건물은 1811년 조선 순조 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서 전형적인 조선후기 건물이다.

 

천불전 주련

世尊座道場(세존좌도량) 세존께서 도량에 앉으시니,​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맑디맑고 크디큰 대광명이,​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천개해가 솟구쳐 밝혀주듯,​

照耀大千界(대조요대천) 대천세계 드넓게 비쳐주네.

 

편액의 글씨는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 대흥사 천불전 목조 석가삼존상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 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천불상(전남유형문하재 제52호)이 봉안되어 있다. 

 

◎ 대흥사 천불전 석조 여래좌상(보물  1807 호)

 

천불전 석조여래좌상(천불상)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 대흥사 용화당

 

용화당

대흥사 천불전 서쪽에 있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로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건축한 자연 친화적인 건물이다.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건물 남쪽 부분은 'ㄱ'로 꺾여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순조 11년 1811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1758~1826)가 1813년에 준공하였다. 그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편액의글씨는 구한말 서예가로 유명한 성당 김돈희(1871~1936)가 썼다.

 

 

◎ 대흥사 봉향각

 

봉향각

 

◎ 대흥사 관음 33 응신전

 

관음 33 응신전

관음33응신전 주련

 

觀音妙智力(관음묘지력)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은

能救世間苦(능구세간고)  능히 세상의 고통을 소멸하신다.

具足神通力(구족신통력)  신통력이 구족하시고

廣修智方便(광수지방편)  지혜의 방편을 모두 갖추시었도다.

十方諸國土(시방지국토)  이 세상 어디에도

無刹不現身(무찰불현신)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으시다.

 

관음 33 응신전 내부

관세음보살상과 천수천안도

 

관세음보살상 뒤에는 천 개의 손과 눈으로 중생을 살피고 구제하는 관세음보살님의 원력을 의미하는 천수천안도가 모셔져 있다. 

 

 

◎ 대흥사 적묵당

 

적묵당

동다실과 용화당 사이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적묵당을 중심으로 정진당과 세심당이 한눈에 들어 온다. 적묵당은 본래 서산대사의 유물을 보관했던 곳이였다. 단충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 대흥사 정진당

 

대흥사 남원 영역의 세심당 맞은편에 위치한 정진당입니다. 정진당은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다.

 

정진당

정진당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세심당 맞은편에 있으며 정면 5칸 맞배지붕 건물로 튓마루가 있다. 출가 수행자에게는 쉬는 공간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먹고 자는 그자리가 바로 수행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진당이라고 하였다.

 

 

◎ 대흥사 세심당

세심당은 재가자들의 숙소로 쓰고 있다.

 

세심당

사찰을 찾아온 재가자들의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이다. 정진당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5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편액의 의미처럼 튓마루에 걸터 앉아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 내기에 좋은 곳이다.

 

◎ 대흥사 만월당

 

만월당

 

만월당

 

◎ 대흥사 신검당

 

심검당

 

심검당 편액

 

◎ 대흥사 보현전

보현전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보현전.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조성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안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보현전과 그 앞마당에서는 학술강연, 산중총회, 연수교육, 작은 음악회, 녹차관련 행사, 수련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대흥사 문수전

 

문수전

대흥사의 남원(南院) 쪽,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문수전이다.

 

 

◎ 대흥사 사리탑

 

사리탑

 

◎ 대광명전 구역

 

선원의 요사체인 수심당을 들어서면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동국선원, 벽안당, 요사체가 있다. 이곳은 대흥사에서 선원에 해당하는 구역이므로 특별히 정숙해야 한다. 그래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와 교류하면서 여러 편액 글씨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동국선원이라는 글이 남아 있다. 당시 대흥사는 선과 교의 종원으로 자부하였으므로 동국 최고의 선원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 대흥사 대광명전

 

대광명전

대광명전은 법신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흔히 부처님은 법신, 보신, 화신으로 표현되는데, 법신은 진리 그 자체의 모습이고, 보신은 수행의 결과로 한량없는 공덕의 몸을 받은 부처님이며, 화신은 중생의 부름에 대답하여 출현하신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이 전각에 들어가는 이들은 모두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들어가 진리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건물은 1841년 조선 현종 7년에 초의선사(1786~1866)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방면을 기도하기 위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였던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1810~1888)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아한 맞배지붕 양식이다.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했다고 하는데 단청 무늬가 화려하고 특색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도와 선을 분리하지 않는 '다선일체'를 실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대광명전 주련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부처님 몸 온 법계에 가득하니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일체중생 앞에 모두 나타나시었다.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부주) 인연因緣 따라 가지 않는 데 없지만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언제나 보리좌에 항상 계신다.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의 글씨다.

 

◎ 대흥사 동국선원

 

동국선원

동국선원

선원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곳이며, '동국선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추사는 초의선사가 자신의 방면을 위해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훗날 동국선원이라는 글씨를 써준 것 같다.

 

동국선원 주련(서산대사 선시)

十年端座擁心城 (십년단좌옹심성) 십 년 동안 오롯하게 마음하나 끼고 앉았더니

慣得深林鳥不驚 (관득심림조불경) 넉넉해져 숲속의 새들도 놀라지 않는구나.

昨夜松潭風雨惡 (작야송담풍우악) 지난 밤 송담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는데

魚生一角鶴三聲 (어생일각학삼성) 고기들은 한쪽 모퉁이에 우글거리고 학은 두세 번 우는구나.

 

 

추사 김정희가 쓴 동국선 편액

 

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와 교류하면서 여러 편액 글씨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동국선원' 이라는 글이 남아 있다. 당시 대흥사는 선과 교의 종원으로 자부하였으므로 동국 최고의 선원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 대흥사 벽안당

 

벽안당

 

 

◎ 표충사 구역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서 조선시대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과 교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 편액이 내려졌다. 호국문과 예제문을 지나가면 표충사와 표충비각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견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표충사

표충사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 편액이 하사되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 스님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조선 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으로는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와 1794년 조선 정조 18년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사 보현사의 '수충사'가 있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1743년 조선 영조 19년에 편액을 하사한 밀양 '표충사'가 있다.

 

 

조선 정조대왕이 직접 써서 하사한 표충사 편액이다. 어서각'이라는 것은 임금님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 스님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 대흥사 표충사 호국문

 

호국문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선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되었다.
서산대사는 어려서 고아로 자란 후, 출가하여 선가의 법을 체득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조 도총섭이 되어 유정, 처영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호국문 현판

 

이 건물은 조선 정조12년(1778년)에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친히 사액을 내리고, 직접 정조대왕이 표충사라는 현판 글씨까지 썼으며,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받았다.
이후 관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암사, 송광사와 견줄만한 지위로 향상되었다.
한편, 서산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 발우와 정조 임금이 하사한 금병풍 등이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대흥사 표충사구역 예제문

 

예제문

 

◎ 대흥사 표충사구역 보련각

 

보련각

초의선사가 1852년(조선 철종 3년)에 역대 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1562~1649) 스님과 편양언기(1581~1644) 스님의 법손들이 두문파의 선사 22위의 진영을 보련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건물이 퇴락하여 1944년 중수하였다. 본래는 대광명전 뒤에 위치하였던 건물인데 200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 대흥사 표충사구역 의중당

 

의중당

 

의중당(義重堂)
표충사 일곽의 삼문인 호국문을 지나 맨 먼저 마주치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건물이다.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 6군의 군수가 봄ㆍ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이다.

 

 

 

◎ 대흥사 표충사 강례제와 화장법해 

 

강례제(표충사)
강례제는 현재 대흥사 삼직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세워져 있다. 주심포계 민도리집으로 전면에는 양각된 ‘강례제(講禮齋)’ㆍ‘화장법해(華藏法海)’라는 두 기의 편액이 흑지에 백서로 단장되어 있고, 배면에는 좌우측 협칸에 판장문을 단 헛간이 가설되어 있다.

 

 

◎ 대흥사 표충사 조사전

 

 

조사전

천불전 일곽의 돌담길을 따라 표충사 영역에 들어서면 표충사당 좌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ㆍ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다.

 

 

◎ 대흥사 표충사 표충비각

표충비각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

서산대사의 이름은 휴정, 속성은 최씨 호를 청허자라 하며 묘향산에 있었으므로 또 서산이라 하였다. 1520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양친을 여의였다. 이때 불교의 경전을 읽고 삶과 죽음에 대한 학설에 감동되어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가서 1540년에 일선화상에게서 계를 받았고 뒤에 영관대사의 문하에 들어 갔다. 30세에 선과에 합격하여 대선에서 양종판사까지의 승직을 받았으나 곧 이를 사임하고 산으로 들어 갔다.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어떤자가 대사가 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선조는 그의 억울함을 알고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고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이 대를 그리고 거기에 시까지 지어서 써주는 영광을 얻었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에 피란 했다함을 듣고 대사는 칼을 짚고 왕을 가서 뵙옵고 승려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자청하여 왕은 곧 대사를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곧 제자인 유정, 처영과 승병을 모집하여 5천여명을 얻고 순한 법흥사에서 첫 모임을 갖고 명군을 도와 싸워서 모란봉에서 승리를 거두고 평양과 개성을 수복하고 용사 7백명을 뽑아서 왕을 호위하여 한양에 환도하였다. 이때에 대사는 왕에게 이제는 늙어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사오니 이 군대사무를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하여달라고 청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의 칭호를 내렸다. 대사는 한국의 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제자가 천여명이며 그 가운데는 불교의 영수급에 해당되는 인물이 4~5명에 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선가귀감 외에 몇가지 단행본과 청허집이 있다. 그는 죽기에 앞서 유언으로 그의 유물을 해남 대둔사에 보관하라 하며 이곳은 남에 달마산, 북에 월출산, 동에 천관산, 서에 선운산이 있어 자기가 마음으로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후 185년인 1788년에 그의 7세손 천접 등이 대둔사 남쪽에 사당을 짓고 대사의 화상을 모시기 위하여 임금에게 진정을 올렸고 호조판서 서유린이 왕에게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나라에서 사당을 짓고 대사의 칭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대사가 임진왜란에 세운 공적을 생각하여 특별히 표충이라는 명칭을 내리고 대사의 직계 더 높이 추중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예조의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앞서 경상도 밀양에 유정을 모신 사당으로 표충사가 있었는데 이제 대사의 사당도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을 바친 것을 나타내는 영애로운 특전이였다. 서유린이 지어 1791년에 비를 세웠다. 

 

 

◎ 초의대선사상

초의선사상

초의선사의 발자취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선과 차를 통하여 민족정신문화의 향기를 심어준 초의 스님(1786~1866)과 만나고 있습니다. 초의 의순 스님이 태어나신 조선 정조 때는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이루고자 했던 중요한 시기로 스님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새로운 정신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사회사상가로서 초의스님은 우리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했던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1천4백여 년의 역사속에 담긴 심오한 불교사상과 실학사상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불교와 실학사상의 만남은 조선시대의 가장 활발한 민족문화의 표출이자 사회변혁 운동이였던 실학사상이 꽃을 피울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한 사람의 차인으로서 조선의 유교문화와 중국 차에 밀려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한국차를 오늘까지 이어지게 한 다도 중흥조라는 점입니다. 초의스님은 대둔사와 그 부속암자인 일지암에 머무시면서 한국차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동다송'을 편찬하여 우리 차문화의 역사와 우수성을 복원해 내셨습니다. 초의스님은 또 단순한 역사의 복원뿐만아니라 차를  손수 만들어 당대 사상가들에게 한국차의 정신과 맛을 알게 했습니다. 선과 차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스님의 다선일미의 정신과 맛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출한 예술인으로써 초의스님은 글, 글씨, 그림에도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셧습니다. 세속의 티를 벗어난 스님의 시문은 군더더기 없이 심오한 세계를 맑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글씨에도 탁월하여 초의스님은 법서는 모든 서예가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성필을 간직했습니다. 또한 스님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소치허유는 초의스님 문하에서 시와 그림을 배워 오늘날 남도 남종화의 큰 맥을 이루어냈습니다.

초의스님은 또 숭유억불의 가혹한 탄압으로 쇄락해 가는 조선 불교계의 맥을 오늘에 되살린 불교계의 큰 스승이셨습니다. 특히 백화선사의 선사상을 논박한 '선문사변만여'는 19세기 선사상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저술로서 당시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스님은 자신의 사상을 담은 몇 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현존하는 저술을 살펴 보면 여러 문사들과 교류하며 주고 받은 시를 묶어 놓은 '일지암시고'와 스님이 지은 소, 기, 서, 발, 문 이 함께 수록된 '일지암 문집' 을 비롯하여, '동다송', '다신전' '문자반야집' 등이 있습니다. 이같은 저술은 하나 같이 당시대 불교사상과 사회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중요한 저서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쌓아 올린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는 이렇게 천리와 만리를 가고 시공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대둔사와 일지암은 그 분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곳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분이 남긴 향기와 맛을 느껴보십시오. 불기 2543년 10월 29일 대둔사 주지 보선 글짓고, 한국제다 대표 서양원 세움

 

◎ 대흥사 성보박물관

 

성보 박물관/ 코로나로 출입문이 닿혔다.

 

성보문화재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보물제1667호)

 

◎ 대흥사 동다송비

 

동다송/학정 이돈흥이 쓰다

◎ 대흥사 동다실

동다실에서는 차 뿐만 아니라 기념품, 다구, 법복 등을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