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중엽 철감선사가 세운 고찰
무등산 증심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입니다.
증심사는 9세기 중엽 통일신라 헌안왕(860) 때 철감선사 도윤스님이 세운 고찰입니다.
고려 선종 11년(1094년) 혜조국사가 중창하였고, 조선 세종 25년(1443) 김방이 삼창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광해군 원년(1609) 석경, 수장, 도광 3대 선사가 4창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근대에 이르러,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4월 22일,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조선 중기의 건축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후1970년대부터 복원 불사가 진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4년 2월 17일, 증심사 일원은 그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광주시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산지가람의 배치특성
증심사의 가람배치는 계곡의 방향을 따라 동↔서의 축선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기울어진 지형을 몇 개의 큰 단으로 나누어서 整地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하 여 산지가람의 배치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웅전에 이르는 계단 왼편에 80년대에 지어진 종각이 있으며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점차 전개되는 대웅전의 광경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전이 있습니다. 이어서 대웅전 뒤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통일신라 시대의 증심사 3층 석탑이 있으며, 탑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오백전이 있고 탑 좌측으로 2m 높이의 축대 위에 비로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오백전 옆으로 석불과 탑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 풀이하면 한 개의 기둥 문이란 뜻이다. 기둥 네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것이 보통의 건물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일직선으로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왜 절로 향한 첫 관문의 이름을 일주문이라 했을까? 그것은 한마음으로 들어서라는 사자후이다. 어리석고 탐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깨달음을 얻겠다는 한마음으로 들어오라는 무언의 설법인 것이다. 절 들머리에 서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문했을 ‘일주문 부처님’ 말씀을 몇이나 간절히 들었을까?
증심사 일주문은 다른 건물들과 같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러던 것을 1980년대 초에 다시 세웠다. 화려한 단청과 우람한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일주문은 ‘무등산 증심사’라는 현판을 달고 이정표 노릇까지 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로 계단을 딛고 올라가는 일주문보다 옆 경사로를 따라 절로 향한다.
그래서 일주문이 그 자리에 들어선 까닭을 거듭하여 되풀이할 겨를 없이 스쳐가는 것 같아 아쉽다.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곳이다. 불탑이 주로 절 안에 있다면 부도는 대부분 절 밖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가 세워지게 된 것은 신라 말에 전해진 선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선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곧 부처이고, 평상심이 도道’라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스님의 죽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죽음과 진배없어 불탑에 준한 부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증심사 들머리 일주문 근처에 비석 17기와 석탑 2기, 그리고 부도 2기가 어우러진 비전碑殿이 있다. 이중 부도 2기는 ‘수월당 부도’ ‘월암당 부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수월당 부도’는 ‘수월당보문’이라 새겨진 글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조각 기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거북모양의 조형물이 파격적이라는 점이다. 한 발 내딛을 것처럼 힘찬 모습의 거북모양이 일반적인데 반해 그 모습을 단순화 시킨데다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꼬아 민화속의 거북이를 보는 듯 해학적인 느낌이다.
‘월암당 부도’는 ‘월암당대사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도로 뒷면에 ‘강희 56년 을미 5월에 세움’이라 쓰여 있다. 조선 숙종 때인 1715년임을 알 수 있다. 이 스님에 대한 정확한 행적은 역시 알 수 없다. 하지만 증심사 유물 가운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하겠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을 들어서기까지 절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앞서 말한 일주문과 천왕문 그리고 불이문(또는 해탈문)이 그것이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래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에 살면서 도리천의 우두머리인 제석천왕을 섬기는 존재이다.
또 절의 사방을 지키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이 그들이다.
사천왕문을 지나 취백루로 가는 돌계단이다. 대부분은 이곳을 마다하고 아스팔트가 되어 있는 차도를 이용하여 취백루를 지난다.
돌계단 양쪽으로 수목이 잘 자라서 고즈넉함을 준다. 이곳을 지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지는 편안함을 준다.
취백루 1층이 천왕문 구실을 했다면 2층은 예불 때 필요한 사물(목어 운판 범종 법고)이 자리한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마루가 깔린 2층 한쪽에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 넓은 공간에 북만 덩그마니 있었을 것 같진 않다. 절이 쇠락하면서 여법하게 행해지던 예불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나머지 의식구들도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전쟁 전의 기록에 따르면 1층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어, 불이문이 따로 없는 증심사에서 대웅전 경내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취백루(翠栢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 팔작지붕 누각(樓閣)으로 하층에는 종무소와 큰방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터서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되었으나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원래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스님이 증심사를 4창하면서 세운 정문 누각이라 한다.
당시에는 아래층에 사천왕을 봉안하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경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된 2층 건물로, 마루가 깔린 2층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취백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취백루가 처음 건립된 시기는 1574년(선조 7)에 쓴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증심사가 4창 되던 1609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증심사의 경우 천왕문 역할을 했던 전각이 바로 취백루이다. 이 취백루는 정유재란(1597년) 때 경내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탈 때 함께 소실되었다. 그 뒤 1609년에 중창을 하여 다시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1951년 한국전쟁 때 또다시 불타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은 1998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6.25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 칸이 좌우 협칸이나 퇴칸보다 2배 정도 크며,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고, 그 아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증심사 대웅전은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1971년 중건한 정면 5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양식의 불전으로 안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협시된 석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기둥 위에는 용두와 주제를 놓았는데 용두를 밖으로 노출시켰으며, 내부에는 용꼬리부분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앞쪽 외진문에 외짝교살창문을 설치했는데 그 옆벽에는 십우도(十牛圖)를 그렸다.
또한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포작을 놓았으며 외삼출목ㆍ 내오출목의 다포양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고주가 없이 평주와 내진주를 연결시켜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량을 얹고, 종량에 수평으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오출목 부분에서 우물천장까지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었으며, 그 뒤에 석가모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왼편에 칠성탱, 오른쪽 벽에는 신중탱을 모셨으며, 그 외에 범종 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상은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문수ㆍ보현보살이 상례지만, 여기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탱화이다.
구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ㆍ보현ㆍ관음ㆍ지장 등 8대 보살과, 범천ㆍ제석천,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등장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배치된 보살과 성문(聲聞)들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의 좌대 아래에는 두 명의 동자가 합장한 채 서있다. 이 탱화는 1997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하였다...
증심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석가여래후불 탱화이고 좌측벽면에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벽면과 후벽면 상단에는 석가모니 관련 벽화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전 신중탱(神衆幀)은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들을 나타낸 탱화로서 중앙의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심으로 화면 가득 104위의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인 신중탱에 등장하는 범천ㆍ제석천ㆍ위태천은 화면 상단의 좌우와 중단에서 각각 연꽃을 들거나 금강저를 들고 있다.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천왕과 팔금강, 천부의 천자, 팔부신중 등 다양한 신중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탱화는 1990년 금어인 조정우(曺廷宇)가 조성한 것이다
대웅전 칠성탱(七星幀)은 중앙의 금륜(金輪)을 든 치성광여래와 좌우 대칭으로 7여래를 배치하였다.
좌측으로 원만세계금색성취여래불(圓滿世界金色成就如來佛), 유리세계약사유리여래불(琉璃世界藥師琉璃如來佛), 정주세계광달지변여래불(淨住世界廣達智辨如來佛), 최승세계운의통증여래불(最勝世界運意通證如來佛)과 상단에 3인의 성군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묘보세계광음자재여래불(妙寶世界光音自在如來佛), 무우세계최승길상여래불(無優世界最勝吉祥如來佛), 법의세계법해유희여래불(法意世界法海遊戱如來佛)과 상단에 역시 3인의 성군을 배치하였다.
치성광여래의 두광(頭光) 좌우측에는 연꽃에 쌓인 듯한 모습의 해와 달이, 무릎 주변에는 3인의 동자ㆍ동녀가 시립해 있다.
우측 하단에는 북두칠성을 표현하고 각각의 별에 성군의 명호(名號)와 부적을 적어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표현하였다.
삼베에 감청색을 바탕색으로 채색하여 밤하늘을 나타내었으며, 하단에 구름과 산을 표현하여 땅과 하늘을 구분하였다.
이 불화는 송광사 방장인 범일보성(梵日普成) 스님의 증명으로 고영을(高永乙)이 2001년에 조성하였다...
증심사 지장전은 두 개의 현판을 달고 있다. 본래 전각 이름 ‘지장전’과 왼 켠 출입문에 걸린 ‘회심당’이 그것이다. ‘지장전’ 이면서 ‘회심당’ 이기도 하는 기이한 두 집 살림의 역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으로 지장전이 불타버리자 새 전각을 짓기 위한 돈이 넉넉하지 않자 취백루 오른쪽에 있던 회심당을 헐어 지장전을 다시 짓게 된 것이다.
절에서 옛 스님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사당은 흔히 볼 수 있으나 수행자가 아닌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은 쉬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증심사에는 그런 사당인 회심당이 있었고, 불타 버린 지장전을 지을 마땅한 방법이 없던 차에 회심당을 헐게 된 것이다. 아마 회심당이 전각이었다면 그리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각마다 제 쓰임이 있으니 하나를 없애거나 둘을 합치는 인위적인 변화는 쉽지 않을 터이다. 대신 회심당은 이미 죽은 이들을 모신 사당이었으니 설령 지장전과 합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증심사 지장전은 회심당과 공간을 나눠 쓰고 있긴 하나 이 전각 본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삶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려는 죽은 이들의 정거장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다. 또한 ‘그래도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말없는 설법을 하고 있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큰 발원을 세우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의 중생을 성불로 이끄는 보살이다. 특히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자처하였다. 이승에서 저지른 죄업을 심판하는 심판관인 시왕을 함께 모셔 ‘시왕전’이라고도 하고 죽음 이후를 다루는 곳이라 ‘명부전’이라고도 한다. 증심사 지장전에는 육도 윤회를 깨뜨릴 수 있는 고리가 6개 달린 지팡이(육환장)를 들고 앉은 지장보살 옆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서 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죽은 자의 죄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그 정도를 심판하는 10명의 시왕이 의자에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다. 우리가 지옥의 왕으로 알고 있는 염라대왕도 10명의 시왕 중 한 분이다. 시왕 앞에 그들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과 녹사가 각 3명, 2명 그리고 시왕을 모시는 동자 7명이 조각되어 있다.
비로전(毘盧殿)은 대웅전 뒤쪽의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이다.
덤벙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에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정면 중앙 칸에는 권창윤(權昌倫)이 쓴 편액을 달았다.
내부구조는 대들보와 종보 위에 마루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가구한 5량집이며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자나후불탱을 봉안하였다. 1986년 영주스님이 중수하였다...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전체 높이는 90cm이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뛰어난 조각수법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증심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1934년 광주시내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원래의 위치는 전남도청 부근으로서, 그곳은 당시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라는 절터였다고도 하고,
지산동 부근이라고도 하는 등 옮겨올 당시의 자료가 전하지 않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가늘게 뜬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 귀는 짧은 편이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 굴곡이 드러나지 않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양 팔에 걸친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된 점이 특이하다..
오백전(五百殿)은 대웅전 뒤편에 세워진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에서 6.25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당우일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막돌허튼 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둥근 기둥 위에 간단한 쇠서를 둔 익공식 건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양측 박공(朴工)에는 풍판(風板)이 없으며, 내부는 천정시설이 따로 없이 서까래만 노출되어 있다. 내부는 앞부분을 조금 남기고 좌우 벽을 연결하는 긴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 중앙에는 연꽃 좌대에 앉은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인 가섭ㆍ아난존자를 배치하였다. 좌우와 뒤쪽에 계단식탁자를 설치, 오백나한을 빽빽하게 배열하였는데, 이들 아라한상은 상호가 우수하며 영험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오백전은 세종25년(1443)에 전라감사 김방(金倣)이 오백나한과 십대제자의 성상(聖像)을 조성ㆍ봉안하고 이 고장의 민안(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실제로 1430년 건립된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과 가구수법 등에서 같은 계통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사찰이 소실되었다가 1609년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분의 스님이 4창(創)하였으므로, 오백전은 이때 건립된 것이거나 이전에 존재하던 법당을 이 시기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퇴락이 심하여 1971년 주지 보성스님이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2001년 재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대들보에서 1971년의 중수기와 함께 1489년(성종 20) 증심사에서 판각한 목판본 금강경이 발견되었다
오백전의 불단은 맨 앞줄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입상으로 협시하고 있다.
다시 그 좌우로 12위씩 전체 24위의 나한이 암석 모양의 좌대에 합장을 하거나 동물들을 희롱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전면에 배치된 이 나한들 뒤로는 13개의 단을 마련하여 소형의 나한상들을 천장 서까래까지 닿도록 배치하였다.
전면에 배치한 석가삼존상과 24위의 나한상이 나무로 조성된 반면, 뒤쪽의 소형 나한상들은 나무와 흙으로 조성된 상들이 섞여 있다.
1443년에 김방이 오백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 10대 제자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존상들이 그 시기에 봉안되었던
상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은 확실하다...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초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 각 부재가 완전한 형태의 3층석탑이다.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하층기단 중석의 네 모서리에 귀기둥을 표시하고, 면마다 2개의 면기둥을 새겼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여 각 면마다 3개씩 배치하였다.
하층기단 갑석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둥근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앙화(仰花)만 남아 장식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 면기둥의 변화, 초층 탑신받침, 옥개석 모서리의 치켜올림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ㆍ복원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으로, 현재 광주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층석탑은고려후기에, 칠층석탑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오층석탑은 1933년 수리 해체하면서 19cm 오층철탑과 철불 2구, 수정 1개 청옥23개,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금동불 2구가 복장유물로 발견되었다. 금동불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엿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복장유물전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칠층석탑은 탑신마다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로 인하여 범자 칠층석탑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5층석탑(五層石塔)과 7층석탑(七層石塔)...
이중기단에 5층으로 된 석탑으로 옥신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3층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기법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1933년 이 탑을 해체ㆍ복원할 때 탑 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 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 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칠층석탑으로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돌로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아 기단부가 생략되었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통상적으로 조각하는 옥개받침을 생략하고 윗면의 물매가 완만하여 매우 납작하다.
각 층의 네 면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동일한 범자를 7층에서 아래로
한 자씩 새겼다. 일반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는 어색한 점이 있으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겨 희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산신각은 누각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전각의 일부를 산허리에 걸치고 있다. 원래 산신각은 현재 보다 위에 소규모 석조 전각으로 지어졌으나 제대로 된 기도공간이 없어 2004년 현재 자리에 지었다. 산신각 주위를 둘러보면 암벽에 음각된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라는 명문을 찾아볼 수 있다. 산을 허물지 않고 알뜰하게 지은 산신각은 후대 증심사의 명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원통전(圓通殿)은 정면과 측면 각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2003년 9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상량하였다..
오백전 옆에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석조보살입상(광주유형문화재 제14호)이 세월의 풍화에 훼손되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으로 신축한 것이다...
석조보살입상이 증심사에 처음 모셔졌을 때 위치는 오백전 왼쪽, 그러니까 7층 석탑의 옆자리였다. 그런데 2003년 오백전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웅전 오른쪽에 새 집을 지어 모셨다. 전각 이름은 원통전(관음전)이다.
이 보살상은 광주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예술성이 빼어난 유물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는 충분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석조보살입상. 어떤 보살을 조각한 것일까? 돌로 만든 서 있는 보살상이라는 말일뿐 구체적으로 어떤 보살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세음보살이다. 이 보살상이 쓰고 있는 관에 새겨진 화불化佛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관무량수경』 ‘관음관’ 편에 보면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마니보주로 된 천관이 있고 그 천관 속에는 화불 한 분이 서 계신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관세음보살이라 짐작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 보살상이 처음부터 증심사에서 조성 되었다면 ‘석조관세음보살상’이라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전에 조성 되어 있던 것이 증심사로 옮겨지다 보니 제 이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진 채 불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관세음보살은 주로 아미타불 곁을 지키는 협시로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증심사 보살상은 독립된 공간의 본존불로서 봉안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밖에도 특이한 것은 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살상이 분명한데 옷차림이 부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으로 중생을 제도할 때 부처 모습으로 나타나 법을 설한다”는 『법화경』 구절을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이 보살상은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조성한 작품으로 보인다. 머리 위에 쓴 관의 양식이나 배가 유난히 튀어나온 점, 그리고 오른손이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점으로 미루어 제작 연대를 그리 짐작하고 있다.
이 보살상이 처음부터 증심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담양의 서봉사와 옛 도청 근처의 대황사에 있던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황사에 있던 것을 증심사로 모셔온 것으로 보인다. 이미 폐사지로 변해버린 서봉사에는 옛 건물터에 주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화강암이 붉은 황토색을 띄고 있어 약간 검은 암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과는 이질감을 준다.
반면에 대황사가 있던 옛 도청 주변에는 지금도 석등과 탑의 옥개석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 화강암이 보살상과 유사한 화강암의 재질과 빛깔을 갖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1930년대 초에 대황사가 폐사지가 되면서 그곳에 있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7층석탑, 그리고 이 보살상까지 증심사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 초까지도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대황사가 어떤 이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오랜 유물로 인해 대황사의 역사는 증심사의 역사와 함께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주1) 삼도: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를 나타내며 혹도惑道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한다. 이를 불상에서는 목에 3개의 선을 음각하는 형식으로 나타낸다.원만하고 광대한 불신佛身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형식으로 불상과 보살상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불상에서부터 나타난다.
부처의 음성 소리 실어나르는
범종소리 울려퍼지고...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보지 못하고,
장중한 소리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소리 듣지 못하는 도다.
이러한 까닭에 가설을 세워 오묘한 이치 보게 하듯이
신종神鍾을 걸어 부처의 음성 깨닫게 하노라.
굳이 ‘성덕대왕신종’의 글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음성이다. 부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의 모습을 빚어놓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그리면 만다라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은 범종의 몸에 실려 사람 사는 골골마다 울려 퍼진다.
열린 귀와 마음만 있으면 범종의 울림 속에 깃든 부처의 생생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절마다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며 범종을 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세상에 깃든 모든 생명들 그 종소리 듣고 거룩한 부처되라는 간절함 싣고 땅속 깊이까지 퍼져나간다. 하루에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두 번 울린다.
수행공간이므로 출입을 금지합니다. 더 이상 갈수가 없어 여기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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