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1.10.23. 탐방
무등산에는 증심사를 비롯하여 문민정사, 원효사, 규봉암, 석굴암, 관음암 등 여러 사찰이나 암자가 즐비하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훌쩍 떠나 이곳 원효사를 찾아 오면 한적하고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와 원효사 카페에서 수제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바라 본 무등산과 원효계곡 그리고 의상봉은 내 마음을 편안하고 차분하고 평화롭게 한다. 그래서 가끔 찾아온 원효사를 오늘 자세히 탐방하고 싶어 찾았다. 늘 궁금한 원효사 동부도를 만날 수 있는 기분 좋은 날이다.
2. 원효대사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해골물 일화를 통해 득도한 신라의 승려.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 신당, 이름은 사례이며 원효는 출가한 뒤의 이름으로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보덕에게 <열반경>, <유마경> 등을 배웠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중 어느 토굴에서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던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 보니 토굴이 아닌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깨달은 뒤 유학을 포기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 현재는 원효대교와 원효로 등으로 이름을 기리고 있다.
원효대사는 661년(문무왕 1년)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어느날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
이 깨달음을 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중불교를 위해 노력하던 원효대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 법흥왕 때,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셨다고 한다. 이에 암자를 개축한 후 원효사·원효암·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3. 무등산 원효사
무등산 원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개축한 뒤부터 원효사·원효당·원효암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의 이름 있는 화엄종승(華嚴宗僧)이 창건한 뒤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 후의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 때 사세(寺勢)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靈圭)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 증심사(證心寺)를 중창한 석경(釋經)이 건물들을 다시 세우고 천왕문을 건립했다. 1636년(인조 14)에는 신원(信元)대사가 중수했고, 이듬해 9월에는 왕견(王堅)대사가 32불을 조성하여 안치했다.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信玉)과 정식(淨式)이 지붕을 고쳤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會雲)이 선방(禪房)을 중창한 후 1802년(순조 2)에 법당을 다시 지었다. 1831년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乃圓)과 의관(義寬)이 각각 중수했으며 1927년에는 원담(圓潭)대사가 계속 중수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광주광역시 당국의 무등산 개발에 힘입어 1954년부터 중창에 착수하였다. 이 때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 선원(禪院)과 요사(寮舍) 등을 중건하였다.
이 공사 때 옛 절터에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하여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고려자기 및 기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든 토기불두(土器佛頭) 140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중 32점은 일괄하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무등산 원효사 이모저모
무등산 원효사 일주문
고즈넉한 숲길을 지나고
범종각 앞을 지나서
생각하는 나무
무등산 원효사는 원효봉을 뒤로하고 원효계곡을 아래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를 바라보는 수려한 경치를 지니고 있다.
무등산 원효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다.
사천왕 대신 두개의 금강역사상이 원효루 입구 양 옆에 배치 되어 있다. 예전에는 대웅전 앞 뜰에 지장보살입상과 같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효루 아래 계단을 올라 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넓은 앞마당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무등산 원효사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한다. 1980년에 새로 신축한 원효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쪽에서 보필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를 상징하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는 사자를 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보현보살은 실천행을 상징하며 하얀 코끼리를 타고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보필한다. 불보살님 뒤로 아미타불 후불탱화가 위치한다. 석가모니불 대웅전 주련은 다음과 같다.
무진겁전조성불(盡墨劫前造成佛) 한없이 오랜 세월 전에 이미 성불하셨건만,
위도중생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 중생제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네.
외외덕상월륜만(巍巍德相月輪滿) 높고 높은 덕스런 모습 보름달처럼 원만하여
어삼계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가운데에서 스승 되시네.
불신원래무배상(佛身元來無背相) 부처님은 본래부터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니
시방내중개대면(十方來衆皆對面) 시방세계에서 모여든 중생들을 모두 다 바라보신다네.
약사전
약사전은 1993년에 건축되었으며, 약사여래불 좌우로 일광 월광 양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약사여래불 탱화는 2009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약사전 내에는 195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성탱화가 약사부처님 기준으로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아마도 칠성각에 모셔지다가, 새로 성산각을 만들면서 일괄적으로 함께 탱화를 조성하면서 여기에 남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약사전의 주련은 다음과 같다.
一念普觀無量劫(일념보관무량겁) : 한 생각으로 널리 무량한 세월 관하니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 :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머무름도 없어라.
如是了知三世事(여시료지삼세사) : 이와 같이 삼세의 일을 요달하여 알면
超諸方便成十力(초제방편성십력) : 모든 방편 뛰어나서 십력 갖춘 부처 되리라.
약사여래불 탱화는 2009년에 조성되었다.
195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성탱화가 약사부처님 기준으로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아마도 칠성각에 모셔지다가, 새로 성산각을 만들면서 일괄적으로 함께 탱화를 조성하면서 여기에 남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약사전 옆 축대에 기대어 쌓아 놓은 석탑(塔), 아마 5층 석탑이 어떤 연휴로 부셔졋는지 알 수 없지만 흔트러져 있는 옛 석조물들에서 원효사의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성산각
삼성각이라고도 하며 독성. 칠성. 산신이 모셔져 있다. 탱화도 각각 모셔져 있는데, 모두 1995년에 조성되었다. 대웅전 좌측에 위치하는 성산각은 전면 3간․측면 2간의 단층 맞배집으로서 대웅전과 같이 2단의 높은 축대위에 놓여 있다.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에는 원형기둥을, 배면에는 방형기둥을 세웠다. 지붕의 측면에는 풍판이 있으며, 겹처마로 연등천정을 둔 5량가이다. 외양으로 보아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로 여겨지는 고졸한 건물이다.
성산각 주련은 칠성을 위주로 하여 쓰여졌는데, 다음과 같다.
古聖興悲作七星 (고성흥비작칠성) : 옛 성인이 자비심으로 칠성이 되어
人間壽福各司同 (인간수복각사동) :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함이라.
隨緣赴感如月印 (수연부감여월인) : 인연따라 감응함이 강물에 비친 달빛처럼
空界循環濟有情 (공계순환제유정) : 허공계에 돌고 도는 유정들을 제도하도다.
명부전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모시고서 돌아가신 영가들을 위한 천도제와 사십구재 등을 하는 이 지장전은 1982년에 건축되었으며, 지장탱화는 1990년에 조성되었다.
정면 3간․측면 2간인 건물로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두었다. 낮은 기단위에 원형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익공식가구를 하고 있다.
내부는 내진간에 고주가 없이 변주인 평주위에 주두와 공포를 포착하여 그 위에 직접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친 다음 판대공을 얹고 그 위에 첨차형 부재를 놓고 장설와 종도리 순으로 가구했다.
명부전의 주련은 다음과 같다.
掌上明珠一顆寒(장상명주일과한) : 손바닥 위 밝은 구슬 한 알 잠잠함이
自然隨色辨來端(자연수색변래단) : 저절로 빛깔 따라 어김이 없어라.
幾會提起親分付(기회제기친분부) : 몇 번이고 들어 보이며 친히 알려주었건만
暗室兒孫向外看(암실아손향외간) : 어리석은 중생들은 밖으로만 찾는구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81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옥동이서를 시초로 윤두서, 윤순, 이광사, 이삼만, 기정진, 모수명, 송운회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호남 서맥을 계승. 선생은 오체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행초에 일가를 이루었고 광주에 서예연구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하여 2004년 3월 20일 무등산 문민정사 앞에 선생의 기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http://www.hanauction.com/htm/>
원효전
원효전에는 원효사의 창건주로 숭상되는 원효성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효성사의 진영은 세가지 형태로 모셔졌는데, 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조성되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원효전 건물은 1990년 5월에 건축되었으며, 이 전각 내에는 1710년 추월산 만수사에서 조성되어졌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원효사에 소장되고 있는 시지정 유형문화재 15호인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鐘)이 있다.
개산조당(현재 원효전)
‘해동화엄초조 원효대사진영(海東華嚴初祖元曉大師之眞影)’이라 쓰여 있습니다.
※ 원효전 외벽 원효대사 일대기
제1. 수하탄생상(樹下誕生相)
불지촌 사라수 나무아래에서 태어난 모습.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 원효성사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내(談㮈) 내말(乃末)이다.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로 또는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속어로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 한다.]
사라수에 관해서는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어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고 창황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워 있었으므로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다. 그 나무의 열매도 보통 나무와는 달랐으므로 지금도 사라밤[裟羅栗]이라고 한다.
예부터 전하기를,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의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다. 종은 관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보았더니 한 개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이름을 율곡이라고 하였다.
성사가 나서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당(幢)은 속어로 털이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곧]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년(丁丑歲)이었다.
제2. 출가수학상(出家修學相)
출가하여 수행 공부하는 모습.
원효성사의 출가와 스승에 대해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고 있으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그가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始末)과 널리 교화를 펼쳤던 크나큰 업적은 ≪당전(唐傳)≫과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성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裟羅)라고 하였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佛地)라고 하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고 하며,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初輝佛日)는 뜻이다. 원효도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으로 그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제3. 심앙문법상(尋仰聞法相)
널리 스승을 찾아 깊이 법을 구하여 듣는 모습.
원효성사는 따로 정해진 스승이 없이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널리 스승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셨습니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소(華嚴疏)를 짓다가 제4 십회향(十廻向) 품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을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었으므로 모두 [그의] 위계(位階)를 초지(初地)라고 하였다.
또 해룡(海龍)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과 시각 두 각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언제나 저자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바라를 치면서 ‘大安 大安’하고 소리치며 노래했으므로 이같은 號가 붙었다.]법사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임을 알고 화창한 것이다.
제4. 석굴수도상(石屈修道相)
석굴에서 수행하는 모습.
원효성사는 석굴에서도 많이 수행하셨습니다. 성사는 34세 때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귀환한 뒤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상당 기간을 팔공산에서 수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굴사 석굴에서 수도한 뒤 오도굴에서 득도했다"는 것이 골간이며, 불굴사 석굴은 원효의 고향인 경산과 가깝습니다. 이외에도 원효성사와 관련된 토굴은 다수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5. 고총오도상(古塚悟道相)
오래된 무덤에서 이치를 깨우치는 모습.
성사께서는 출가한 후, 진덕왕(眞德王) 4년(650) 의상(義湘)과 더불어 당으로 유학코자 길을 떠났는데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잡혀 신라의 첩자로 의심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간신히 풀려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들이 이번에는 바다로 건너가기로 하여 문무왕(文武王) 1년(661) 서해안 항구에서 배편을 기다리던 어느 날, 어둠 속에서 찾은 잠자리가 다음날 깨어보니 헐어빠진 낡은 무덤의 한 귀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갈증에서 달게 목을 축인 바가지의 물이 바로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습니다.
이에 성사는 문득 '모든 것은 오직 내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읊으신 게송이 있는데, 아래의 우리말 번역은 송광사 유나이신 현묵스님께서 하신 현대판 번역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니 모든 것이 생겨나고(心生则種種法生 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쉬어지니 지옥 천당 둘이 아니네(心減则觸麵不二 심멸즉감분불이)
이세상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니(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마음밖에 따로 무엇을 구하리오(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이리하여 마음과 나를 발견한 성사께서는 유학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미련없이 홀로 되돌아와 이후 국내에서 꾸준히 혼자서 공부하셨습니다.
제6. 가두만행상(街頭萬行相)
거리에서 무애무를 추며 교화하는 모습.
한편 성사께서는 거리에서 무애무를 추며 만행을 하시기도 했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성사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 무애인(無㝵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귀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원효는 무애가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이 중생에게 쉽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또한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하였다. 원효는 직접 대중에게 불교를 포교하며 극락에 가고자 하는 미타(彌陀) 신앙을 전개하면서 신라 불교의 새로운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7. 요석춘연상(瑤石春緣相)
요석궁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난 모습.
원효성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는 일찍이 널리 전해져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일찍이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태종(太宗)이 그것을 듣고서 말하기를,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때 요석궁(瑤石宮)[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하는데, 벌써 [그는]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사천(沙川)이나, 세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 하고,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고 한다.]를 지나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니,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제8. 군기참모상(軍機參謀相)
군사 참모로 자문하는 모습.
성사께서는 암호를 풀어 많은 군사를 살리신 적도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만약 총장 무진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아래 글에 보이는 소정방은 오류이다. 만약 정방이라면 연호가 마땅히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니 [고구려에] 와서 평양을 포위한 때이다]에 [신라]나라 사람들이 청병을 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 달라.” 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까지 이르기는 그 형세가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다하여 요청하는데 군량을 보내지 않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나와 아뢰기를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전해 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하고자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와 병천(兵川) 등 두 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犢] 두 가지 물건을 그려 돌려 보내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청해 묻자, [법사가] 이를 해석하여 “속히 병사를 돌이켜라. 송아지와 난새를 각각 그린 것은 두개로 끊어짐을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강(浿江)을 건너려 할 적에 “오늘 뒤에 쳐져서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절반 정도 건넜을 즈음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다음날 유신이 거꾸로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하였다.
제9. 강경경치병상(講經綆治病相)
금강삼매경을 설하여 왕비의 병을 치유하는 모습.
중국 <송고승전>의 원효 전기에는 성사께서 금강삼매경을 설하여 왕비의 병을 치유하셨다고 전합니다. 즉 다음과 같이 <금강삼매경>의 발견 및 그 경전과 원효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비가 병이 났는데 백방으로 애써도 고치지 못하여 다른 나라로 약을 구하러 뱃길로 사신을 보냈더니 가는 도중에 용궁에 가서 용왕을 만났다. 용왕은 용궁에 보관되어 있던 흐트러진 <금강삼매경>을 주면서 왕비의 병을 인연으로 이 경전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라고 하면서, 대안 성자에게 순서를 맞추도록 하고 원효 법사에게 주석서를 써서 강의하도록 한다면 왕비의 병은 반드시 낫는다 하였다. 대안이 경전의 순서를 맞추고 원효가 소의 수레 위에서 주석서 5권을 지었으나 도적을 맞아서 다시 3권으로 주석서를 써서 강의를 하였다. 3권짜리 주석서가 중국에 수입되었는데 나중에 경전 번역하는 삼장법사가 논으로 삼았다.”
제10. 쇄수진화상(灑水鎭火相)
물을 뿌려 불을 끄는 모습.
원효성사께서는 여러 이적도 행하셨는데, 찬영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당나라 성선사(聖善寺)에 화재가 난 것을 신라 고선사(高仙寺)에 있던 성사께서 아시고 서쪽을 향해 물을 뿜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고선사에 원효가 거처하던 방 앞에 있는 작은 연못이 그때 물을 대었던 못이라고 전합니다.
제11. 척반구중상(擲盤求衆相)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는 모습.
또하나의 이적으로는 찬영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당나라의 한 사찰[운제사(雲際寺), 태화사(太和寺), 담운사(淡雲寺) 등이 서로 그 절이라고 주장]에 불사가 열려 1000명의 대중이 운집, 곧 절이 무너져 압사할 위기에 놓여 있음을 원효가 천안통(天眼通)으로 알아 차 소반을 던져 이상히 여긴 대중들이 차 소반을 따라 밖으로 나온 순간 절이 무너져 죽음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때 원효의 도움으로 살아난 천명 대중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12. 분황찬소상(芬皇撰疏相)
분황사에서 저술하는 모습.
성사께서는 대중 교화에 진력하는 한편으로 저술에도 힘을 써 불교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하셨습니다. 그는 현재 전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무려 100여 부 240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그의 독창적인 논리를 담은 저술로, 중국의 고승들이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역시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고 하여 즐겨 인용하였습니다.
원효는 이렇듯 다양한 경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화쟁 사상을 제시하였습니다. 곧 어느 한 경론(經論)에 치우치지 않고 많은 경론을 두루 연구하여 여러 경론이 모순 대립하는 것같이 보이는 점들을 융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중심인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식학파(唯識學派) 사이의 교리적 대립인 공(空)⋅유(有)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융합적인 교학을 성립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공(空)이다”는 중관과 “세상의 모든 현상은 다 식(識)이다”라는 유식을 비판하면서 “세상은 오직 한마음[一心]이다”라고 주창하셨습니다.
원효는 신라 교학의 토대 위에서 당대의 사상적 과제이던 중관과 유식을 융합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분파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 불교를 근원적인 입장에서 종합 정리하여 불교 이해의 기준을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이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거나 전쟁으로 처참해진 백성의 삶을 위로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13. 혈사입적상(穴寺入寂相)
혈사에서 입적하는 모습.
말년의 원효는 이 세상의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고요히 앉아 촛불이 꺼져가듯이 686년 음력 3월 30일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평화롭게 입적하셨습니다. 이 혈사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14. 소상회고상(塑像回顧相)
설총이 인사하자 소상이 돌아보는 모습.
성사의 사후에도 이적이 있었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성사께서]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사모하여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그때 옆에서 예배를 하니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찬하여 말한다.
각승(角乘)은 비로소 삼매경을 열고
표주박 가지고 춤추며 온갖 거리 교화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깊더니
문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모습만 허허롭구나
※ 원효사 여러 전각과 이모 저모
예전엔 대웅전 앞 뜰에 있던 지장보살입상과 금강역사상이 있었는데 지장보살입상을 이곳 한적한 곳에 옮겨 놓았다.
무등선원은 수리중이다.
원효루
원효루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과 원효계곡이 아름답다. 바로 앞에는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같이 유학을 떠났는데 원효대사는 중간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닿고 돌아와 중생을 계도하였다. 무등에는 원효와 의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원효루 아래 카페에는 수제차를 비롯 여러 불교 용품을 파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제차 한 잔을 시켜서 바로 앞 마당 벤치에 앉아 바라본 무등은 참으로 한가롭고 편안하고 정겹다. 누구든 마음이 심난하고 복잡할 때는 만사 제치고 원효사를 찾아 이곳에서 꼭 수제차 한잔으로 마음의 여유를 즐거 보시라! 어머니 같은 넉넉한 무등을 바라보면서~
회암루(현 원효루)
지금은 원효루이지만 예전엔 회암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 때는 1층 현관 출입 계단 얀쪽에 나한상인 금강역사상을 배치하여 보통 다른 절집에 있는 사천왕 역할을 하도록 하였던 것 같다.
※ 원효사 동부도를 찾아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원효사 동부도(元曉寺東浮屠)는 높이 2m이고 4각 지대석(地臺石) 위의 4우(隅)에 신장(神將)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역시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거북·비둘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원효사 동부도를 찾아가는 길
가는 길목에 잘 생긴 멍멍이가 반긴다. 들어갈 때 혹시나 짓지나 않을까? 마음 조렸는데 한없이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괜히 지래 짐작으로 마음조린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철없는 한 중생을 어엿비 바라보고 있다. 도를 터득한 것 같다. 나올 때는 잘 생긴 자세로 '이제 알았느냐? 알았으면 어서 가거라' 라고 한다. 그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긴다. 나는 숙연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안녕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 섰다.
원효사 무등선원 앞마당을 지나면 이렇게 호젓한 산책길이 있다. 깊은 골짜기에 꼭 꼭 숨어 있는 원효사 동부도를 찾아가는 기분은 참으로 좋다.
소재지;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209-13번지 | 시대; 고려시대 | 관리자; 원효사
【원효사 동부도】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 이 부도는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절에 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유물 가운데 하나.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을 마련한 후, 탑신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바닥돌과 기단의 일부를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 윗면에 연꽃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숫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 가운데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누어 조각, 윗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하여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조각 대신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
통일신라의 8각양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부분 일부에서 4각을 보이고 있고, 지붕돌의 동물조각 등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 문화재청>
원효사 동부도를 자세히 담았다. 여러 각도에서 담아보았다. 부분 부분도 세심히 담아 본다. 보고 또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정성으로 잘 조성된 부도이다. 그러나 이 부도가 누구 부도 인지를 모른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보고 싶은 원효사 동부도를 보고 나오는 마음은 흐뭇하다. 늘 궁금했던 동부도는 원효사 오른쪽 깊은 골짜기에 꼭꼭 숨어 있었다. 원효사 무등선원을 지나 100m 쯤 돌아가야 한다.
원효사 동부도를 살펴보고 나오는데 무등산 정상과 원효계곡이 한눈에 들어 온다. 편안하다, 참으로 좋다.
△ 『원효사 출토 유물 (元曉寺 出土 遺物)』, <사진; 문화재청>
종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8호 |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기타 / 기타 | 수량; 32점 | 지정일; 1987. 12. 31. | 시대; 통일신라
【원효사 출토 유물】 …… 원효사 대웅전을 신축하던 중 발견된 유물들. 수 백점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금동·청동불상 12점, 소조불상 18점, 청동거울 2점이 문화재로 지정. 근래에 8∼9세기의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높이는 단서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파편들이 다수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동·청동불상들은 대부분 부식상태가 심하여, 다른 불상이 가지고 있는 몸 뒤의 광채 즉, 광배와 받침인 좌대를 잃어 버렸다. 불상들은 10㎝ 내외의 서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만들었다. 보살상과 동자 2점을 제외한 모든 불상이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왼쪽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쪽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원효사의 발굴유물 대부분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상들로 100여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비교적 원래 모습에 가까운 18점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머리모양 수법이 비슷하다. 발굴 당시의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결과 머리높이 10.5㎝, 상체 10㎝, 하체 6.5㎝로 전체 높이 27㎝ 가량의 불상들로 밝혀졌다. 이들 소조불의 발견으로 원래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 중 2마리 용이 새겨진 거울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중심에는 2겹으로 된 연꽃을 새겼고, 그 밖으로 2마리의 용을, 외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있는 2마리 용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꿈틀 거리는 모습이며, 예리한 발톱을 가지고 있고 여의주로 보이는 2개의 구슬이 돋아나게 새겼다. 또 다른 백색의 거울은 무늬가 없으며 별 특징이 없다. 이 2점의 거울은 고려시대 공예 조각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다시 원효사 범종 앞을 지나서 나오는 길에 암석에 세겨진 이름들이다. 무엇인가 원효사와 관련있는 분들이겠지?
돌탑을 지나고
응담화상 기념탑을 지난다.
조금 내려 오면 원효사 부도탑이 있다.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
지민당 부도탑
회운당 부도탑과 원효국사 부도탑이다.
회운당 부도탑
원효국사 부도탑
진성당 부도탑
원담화상탑
원효사 탐방을 마무리 하고 나오면 원효사 입구에 첫새벽이란 고즈넉한 찻집이 있다. 첫새벽은 향언으로 당시 사람들이 원효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대개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도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그를 첫새벽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수제차 한잔을 주문하여 놓고 그윽한 차향을 맡으며 바라본 무등산은 참으로 아름답다. 덩달아 내 마음도 차분하고 편안하고 한가로워 좋다. 가끔은 이렇게 혼자 절집을 찾고 차분한 시간을 갖는 것도 남은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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