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일자 : 2020.05.23.
2. 누구랑 : 대석님, 담백님, 하여간
3. 산행구간 : 도원마을방문센터-규봉암-석불암-지공너덜-장불재-도원계곡-도원마을방문탐방센터(원점회귀)
4. 산행 개념도 : 생략
5. 산행 추억
늘 가고픈 곳이다. 화순이서쪽에서 무등을 올라 본다.
옛날 김병인(김삿갓)이 오르면서 서석유람기를 쓴 길이기도 하다
연두빛 신록은 생명의 화사함을 맘껏 뽐어내고 있다.
도원마을 탐방센터에서 오른 산길은 조금은 가파르지만 비교적 오르기 쉬운 길이다.
무등산 동족에 자리하고 있는 규봉암과석불암은 늘 와본 곳이지만
오늘은 화순 이서 쪽에서 오르는 새로운 산행길이기에 다소 설레임과 기대를 은근히 품고 오른다.
규봉암
광석대는 무등 3대 주상절리(서석대. 입석대, 광석대)의 하나로 그 규모가 크고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학적으로 큰가치를 갖고 있으며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으로 승인 받은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5.18 기념탑 모형을 광석대에서 보고 디자인을 하였다고 한다.
6. 규봉암 소개
전남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규봉사는 신라 시대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신라 애장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순응 대사(順應大師)가 중창했다고 전해온다. 확인할 유물이나 사적은 없지만 조선 초인 1439년에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역임하던 권극화(權克和)가 지은 「서석 규봉기(瑞石圭峰記)」에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상 창건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 읍지(光州邑誌)』에는 신라 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이곳 은신대(隱身臺)에 앉아서 산세를 살펴 송광사(松廣寺)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절 주변에서 수습된 기와 편 중에는 통일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연화문 수막새 편이 있어서 통일 신라 시기에도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의 기록으로는 명종(明宗) 때 시인 김극기(金克己)가 규봉암에 올라가 본 정취를 읊은 시가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산현(光山縣) 불우조(佛宇條)에 실려 있다. 고려 후기에는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진각 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나옹(懶翁) 혜근(惠懃) 등 고승들이 머물던 수행 도량이었다. 또한 『고려사』에 따르면 1381년(고려 우왕 7) 왜구들이 지리산에서 광주 무등산으로 도망쳐 왔는데 규봉사 인근의 암석에 목책을 세우고 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 김극기가 규봉암에 올라 지은 시
궤상석난명(詭狀石難名)[저 기괴한 돌들 무어라 이름하리]
등임만상평(登臨萬像平)[높이 올라 바라보니 만상이 평화롭다]
석형재금출(石形裁錦出)[바윗돌의 모습은 비단을 잘라 세운 듯]
봉세탁규성(峯勢琢圭成)[봉우리는 쪼아 세운 옥돌일레라]
승천병진적(勝踐屛塵跡)[명승을 밟는 순간 속진이 사라지고]
유첩첨도정(幽捷添道情)[그윽한 이곳에 도의 참뜻 더하여라]
하당포세강(何當抛世綱)[시비 많은 속세 인연 모두 털어버리고]
부좌학무생(趺坐學無生)[가부좌로 성불의 길 찾아보리라]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규봉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상당한 사세를 갖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86년(성종 17) 규봉암에서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潗別行錄節要幷入私記)』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보조 국사 지눌이 1209년에 저술한 것으로 당나라 종밀의 『법집별행록』을 간략하게 줄여서 수록하고 여러 경전과 조사(祖師)들의 어록(語錄)을 인용 비판하면서 참다운 수행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책으로 수행 지침서이다. 이 규봉사본(圭峰寺本)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은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개판한 판본으로 알려져 있어 간행 당시 수행처로서 규봉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조선 중기에 고경명(高敬命)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당시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규봉사가 나타나지 않아 폐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역시 금폐(今廢)라고 기록하고 있어 17~18세기에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세운 것은 1729년(영조 15)으로 동복면 출신의 연경(演瓊)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14년에 진응혜찬(震應慧燦)에 의해 「규봉사 사적기(圭峰寺事蹟記)」가 쓰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또다시 방치되다가 1959년에 주지 이한규가 대웅전과 함께 당우 3동을 새로 지었다. 최근인 1995년에는 주지 정인(正因)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고, 1996년 8월 21일에는 대웅전을 관음전으로 보수·변경하여 낙성식 및 후불 탱화 점안식이 이루어졌다.
규봉사가 자리한 곳은 해발 870m의 무등산 동쪽으로 주변에 은신대(隱身臺)·삼존석(三尊石)·설법대(說法臺) 등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곳이다. 장시간 걸어서 사찰에 와야 하므로 신도들이 같은 시간에 사찰에 출입하는 것이 쉽지 않아 특별한 활동은 없다. 신도들과 등산객 등이 주말에 사찰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규봉사는 2013년 현재 1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500여 명의 재가 신도가 출입하고 있다. 전각으로는 관음전(觀音殿)과 삼성각(三聖閣), 용왕각(龍王閣), 종각(鐘閣), 응향각(凝向閣) 등이 있다. 사찰 뒤쪽 약 100m 지점 암벽 아래에 건물지가 있는데, 산신각 터로 추정되고 있다.
관음전에는 1992년에 제작한 관음보살 독존이 모셔져 있고 아미타 후불탱화와 오백 불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에는 칠성 탱화, 산신 탱화, 독성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7. 석불암 및 석불암 마애여래좌상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석불암에 있는 마애 여래 좌상.
마애불은 자연의 암벽에 부조(浮彫)나 선각(線刻) 등으로 불상을 나타낸 것으로 삼국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 신라의 경주 남산 마애불군 등이 있다.
석불암 마애 여래 좌상은 우측 명문에 1933년 전라남도 담양군 사람인 국영현(鞠榮鉉) 일가의 발원으로 석공 이삼채(李三采)가 참여했다고 하여 정확한 조성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좌측 명문에는 국상현(鞠相鉉) 일가의 발원으로 1935년 소림정사(小林精舍)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이 본래 소림정사였음을 알 수 있다. 소림정사는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석불암 마애 여래 좌상은 현재 석불암 법당 뒤 석조 불감 안에 안치되어 있으며, 크기는 98㎝이다. 2007년 1월 5일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2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석불암 마애 여래 좌상은 법당 뒤 바위에 인공적으로 만든 석조 불감 안에 새겨져 있다. 연화 대좌 위에 길상좌로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크기는 98㎝이다. 머리는 나발로 육계가 솟아 있고 그 밑에 계주가 있다. 법의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이며, 가슴에 내의의 띠 매듭이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 구품인 중 중품 중생인을 맺고 있는데, 오른손 엄지가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해 놓았다. 얼굴은 원만하나 양쪽 볼이 약간 들어간 모습이고, 유난히 큰 귓밥이 어깨 가까이 내려와 있고 목이 짧게 처리되어 삼도는 가슴 부위까지 내려와 있다. 광배 뒤에는 문자 세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불상 오른족 무릎 높이에는 액을 만들고 그 안에 ‘남무산왕위 [南無山王位]’란 글씨를 새겼다. 감실의 좌·우측에 새겨진 음각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감실 좌측의 명문〉
대시주(大施主)
담양읍 천변리거(潭陽邑 天邊里居)
건명 국영현(乾命 鞠榮鉉)
곤명 오씨 정각원(坤命 吳氏 定覺願)
장남 승준(長男 承駿)
자부 조씨(子婦 趙氏)
이남 승학(二男 承學)
삼남 승섭(三男 承燮)
화주 구씨 보현행(化主具氏普賢行)
석공 이삼채(石工 李三采)
불기 이천구백육십년 계유 구월 일(佛紀二千九百六十年癸酉九月 日)
존상시주 증복수(尊像施主增福壽)
친견미타출삼계(親見彌陀出三界)
〈감실 우측의 명문〉
무등산 소림정사 창건 대시주(無等山 小林精舍 創建 大施主)
담양군 담양읍 담주리(潭陽郡 潭陽邑 潭州里)
건명 병신생 국상현(乾命 丙申生 鞠相鉉)
청신녀 계사생 박씨 정진행(淸信女 癸巳生 朴氏 淨眞行)
장자 신해생 국승회(長子 辛亥生 鞠承會)
자부 신해생 정여성(子婦 辛亥生 鄭汝性)
여식 기축생 국승남(女息 己丑生 鞠承南)
주지 이선곡(住持 李禪谷)
화주 구씨 보현행(化主 具氏 普賢行)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 을해 삼월 일(佛紀二千九百六十二年乙亥三月 日)
도원계곡의 폭포 비경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수량이 많을 때 다시 한번 와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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