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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섬산행

2020.10.18. 거금도 적대봉(592.2m) 100대 명섬 - 남해안에서 두번째로 높은 거금도 적대봉에 올라 고흥 반도 남해안 쪽빛 풍광에 빠지고, 이순신장군의 '잊힌 승전' 절이도 해전의 역사현장을 조망..

by 하여간하여간 2020. 10. 18.

1. 일시 : 2020.10.18(일)

2. 누구랑 : 원산우회

3. 산행구간 : 파성재-샘터-마당목재-적대봉-마당목재-돌탑봉- 마당목재-파성재 (T자 산행)

 

보통은 오천리-적대봉-마당목재-돌탑봉-금산 남초교 코스나 오천리-적대봉-마당목재-파상재-송광암-용두봉-김일기념관코스로 산행을 하지만 오늘은 코로나 19로 버스를 마을로 들어가지 않기 위한 산행이사님의 세심한 배려로 파상재에서 T자형 산행을 하기로 한다.

 

4. 산행 개념도

 

5. 거금도(금산) 적대봉 소개

 

고흥반도의 끝자락 거금도 한가운데 솟아있는 적대봉(積台峰 592.2m)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등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에 솟은 산이면서도 고흥에서 팔영산(608.6m) 다음으로 높아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 정상에 서면 바다건너 북쪽으로 고흥반도 천등산과 마복산, 서쪽으로 천관산과 마주본다. 또한 서쪽은 완도 금당도를 비롯한 생일도와 평일도 등,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올망졸망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적대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적대봉 기슭은 또한 조선 때 목장성(牧場城)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록도, 절제도, 시산도, 나로도와 함께 도양목장에 속한 속장의 하나였던 거금도는 적대봉을 중심으로 30리 길이의 성을 쌓아 말 116마리를 키웠던 세납(稅納)목장으로 전한다.

 

적대봉 주변의 해안 경관도 뛰어나 섬의 동쪽 오천리는 해안선을 따라 조약돌이 널려있는 등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또한, 섬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익금해수욕장은 수심 2∼3m 속의 해산물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을 뿐 아니라 울창한 방풍림을 배경으로 길게 뻗은 은빛 백사장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산 아래를 흐르는 물만내는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 받고 있다.

 

우리나라 10번째 큰섬인 거금도는 고흥반도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소록도 바로 아래 위치한 섬이다. 큰 금맥이 있어 거억금도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최고점은 적대봉이며, 400m 내외의 산지가 많으나 서쪽과 북쪽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다.

 

총사업비 2,733억원을 들여 2002년 착공, 2011년12월16일 개통한 거금대교는 총연장 2,028m로 중앙부분에 167m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주탑 2개가 케이블로 연결된 번들형 5경관 연속 사장교로 만들어져 독특한 모양만큼이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해상교량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1층은 자전거 및 보행도로이며, 2층은 차량이 통행하는 복합 와렌트런스 교량이다. 여기에 해안도로가 일품인 거금도와 거금대교가 또 하나의 관광축으로 연결된 셈이다.  

 

 

6. 적대봉 산행소감

 

거금도(금산) 적대봉은 여러번 올랐다. 이번에 원산우회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에서 정기산행을 시작하면서 비교적 청정한 고흥 반도 거금도 적대봉을 오르기로 하여 함께 오른다. 적대봉은 고향 금당에서도 늘 보아왔던 산이고 남해안에서 가거도 독실산(639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오른다.

 

이번 산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산행이사님의 거금대교 조망을 추천하여 늘 스쳐 지나가던 거금도 휴게소를 들러 거금대교를 조망하기전, 절이도 해전 승전탑 앞에서, 나는 이제야 알게된 귀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임진왜란 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거금도(절이도) 앞 바다에서 일본 수군과 해전을 하여 대승을 하였다는 사실을 절이도 승전탑 게시 자료를 보고 이제야 알았다. 앞으로 절이도 해전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7. 적대봉 산행 추억

 

파상재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행 시작
적대봉 등산 안내도/ 보통은 오천리-적대봉-마당목재-돌탑봉-금산 남초교 코스나 오천리-적대봉-마당목재-파상재-송광암-용두봉-김일기념관코스로 산행을 하지만 오늘은 코로나 19로 버스를 마을로 들어가지 않기 위한 산행이사님의 세심한 배려로 파상재에서 T자형 산행을 하기로 한다.

 

적대봉을 향하여 오르쪽으로 잡아 들어야 한다.

 

오르다 보면 샘물이 나온다. 산꾼들의 목을 적셔주기에 알맞은 양으로 바위틈에서 졸졸 나온 청량수다. 
비교적 편안한 경사도의 산행길
누군가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 같은 소망탑
가파르게 오른 구간을 지나면 마당목재를 만난다. 이제 가파른 오름길은 마자막이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마당목제에서 보면 적대봉이 저멀리 보이지만 지금부터는 편안하면서도 고흥반도 남해 쪽빛바다, 청명한 하늘을 감상하는 꿈같은 산길이다.
오손 도손 이야기 꽃을 피우며 우정을 나누는 산길은 다정하기만 하다
적대봉 인증

 

적대봉 봉수대에 올라 여수 화양면 쪽 쪽빛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적대봉 봉수대에서 추억 한장
적대봉 봉수대에서 바라본 고흥 반도의  도양면 황금 들녁! 건물군이 보이는 곳이 녹동항이다.
녹동항 바로 앞이 소록도이며 소록도에서 금산으로 연결하는 거금대교가 아련히 보인다. 

 

거금도 서쪽 방향으로 김일기념관이 있는 황금 들녁 넘어 조그만한 섬이 지붕없는 미술관 연홍도이다.  그 푸른 바다 한가운데 둥실 떠 있는 섬이 내 고향 금당도이다. 

 

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다에서 조선시대 정유재란 1598년 음 7월 19일 금당도에서 경야를 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녹동항에서 출동한 일본 수군 100척과 맞붙어 화포로 학익전을 펼쳐 일본수군 50척을 대파시키며 대승을 거두는 절이도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 멀지도 않는 역사의 현장을 이제야 바라본다.

 

적대봉에서 당시의 해전 상황을 상상하며 무능한 조정과 중상모략으로 외교정세를 오판한 고관대작들의 안이한 생각에 의한 나라의 위기와 민초들의 희생,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왕을 비롯해 고관대작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동안 이 땅에 삶의 뿌리를 두고 살아간 민초들이 이 땅을 지키고자 죽창을 들고 의병을 일으키고 목숨을 내 놓은 전장에 스스로 적극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한 일이 어디 여기 절이도 해전뿐이랴! 호남의병이 나라를 지켰고, 전라좌수영 이순신장군이 지휘한 명량해전과 노량진 대첩까지 수 많은 해전에 참여한 민초들이 나라를 살렸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이라 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란 말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과정에서 호남 민초들의 역할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말이다. 이러한 민초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함께 참여하도록 한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리더십을 잠시나마 마음에 새긴다.

 

최근 고광섭 목포해양대 교수(해군사관학부)는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지에 ‘절이도 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2009041627421#csidxbddbd0c0fcea6e4ab0b90b7e75a4717

 

적대봉 남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남해안 다도해 섬들은 아마도 청산쪽이 아닐까? 한다
저 아래 오천리 몽돌해안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누구든 거금도에 오면 저 몽돌해안에서 사랑과 낭만을 나누기 바란다.

 

북쪽으로 고흥 천등산과 여수 화양면 일대가 조망되는 남해 쪽빛 바다는 아름답기만 하다. 
하산길에 활짝 핀 억새군락지 사이로 남해 푸른 쪽빛 바다와 청명한 가을 하늘이 산꾼의 발목을 잡는다. 
돌탑봉 가는 길목에서 남해바다를 배경으로 한 장

 

오늘의 미션은 남해 쪽빛 바다와 다도해 섬들 그리고 청명한 파란 하늘!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돌탑봉에서 바라본 남해 다도해 아름다운 풍광/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일행이 없다면 한없이 오래 기다려 해질녁 은빛 햇살에 빛나는 은빛 물결 바다와 붉게 물든 저녁노을 갈망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요사이는 어디나 산에 돌탑이 많다. 누군가 간절한 염원으로 정성스레 탑을 쌓았으리라! 우리 모두 이루고자 한 소망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래도 이제는 하산해야 할 시간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시간에 없어 송광암은 들리지 못했다. 전에 한번 들러본 송광암이만 조만간 천년고찰 송광암에 들러 보리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돌아가는 길에 거금대교와 절이도해전 승전탑을 들러 본다. 

 

거금해양공원에서 바라본 거금대교
거금도 해양공원

 

 

8. 절이도 해전 승전

 

이번 산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산행이사님의 거금 대교 조망을 추천하여 늘 스쳐 지나가던 거금도 휴게소를 들러 거금대교를 조망하면서, 해양공원에 세워진 절이도 승전탑 자료를 보면서 이제야 알게된 귀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임진왜란 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거금도(절이도)에서 일본 수군과 해전을 하여 승전하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 내용을 고흥군에서 제작한 절이도 해전 승전탑에 있는 기록과 위키백과 자료 그리고 목포해양대학교 고광섭교수님의 연구 논문 기사 자료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본다.

 

흥미로운 것은 명군의 수장 진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절이도 해전에 관한 기록이 누락되어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두 상반된 사실을 함께 여기 정리하여 훗날 역사적 사실을 더욱 뚜렷이 하도록 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튼 내고향 금당도에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경야 했다는 사실과 절이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아군의 사상자 없이 왜군 100척 중 50척을 대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노량진해전까지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감동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앞으로도 절이도 해전에 대하여 더 살펴보리라.

 

8-1. 고흥군에서 세운 절이도 해전 승전탑 자료

 

 

위키 백과 자료

 

8-1.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

1598년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수급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 해전이다.[1]

 

1598년 음력 7월 18일 명나라 수군이 도착한 지 2일째 날, 드디어 적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 곳에서 경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는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오는지라 이순신 함대와 거금도 북방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천병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선조 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 보면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따라서 나머지 50여 척도 대파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순신자령수군(舜臣自領水軍 :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돌입적중 발화포(突入賊中 發火砲 :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소오십여척 적축환(燒五十餘隻 賊逐還 :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가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와서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국의 원군(援軍)이 참전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해도 천군(天軍)으로 대접받는 판이었다.

 

이 해전을 절이도(거금도)해전이라 하는데, 망국적인 사대·왕조사가들이 왜곡 집필한 「이충무공전서」에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피해없이 적함 50척을 수장시킨 대전과가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식문서에 기록·반영되지 않았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해역을 확대함으로써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분멸한 적전선 50척과 대파 내지 반파된 적전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명이 된다. 물론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 해전이 격전이었으며 엄청난 적군의 인명손실이 있었기에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송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 거금도앞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찼던 것이 틀림없다.

 

1598년 7월 19일 치러진 절이도(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진중이던 100척 규모의 적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적의 요새지인 예교(광양만)까지는 못미치지만 고흥반도까지는 완전 장악하고, 이제 계속 동진하여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을 동원하여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진지인 예교(관음포)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 척의 함선을 분멸시키면, 고니시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고 왕년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 확보함으로써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순신은 골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 공격을 위한 결정적 시기만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간파한 진린이 사전에 방해공작으로 가로막는지라, 이에 이순신은 여러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엉뚱한 처방을 내린 선조의 작태가 더욱 한심하다. 내용인즉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함으로써 수륙합공으로 예교를 점령하자는 고육지책을 구상한 것이다. 이 소식이 진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대노하여 이순신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진린에게 약점만 잡힌 선조는 이 조처를 시행치 못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이 해전이 시작하기 며칠전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김완이 귀국하여 왜 수군 진격 알렸다.

 

 

8-2 절이도 해전의 교전국과 지휘관, 병력피해 규모

정유재란의 일부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이순신(충무공)
권준
이순신(무의공)
배흥립
이영남
우치적
김완
방덕룡
황세득
고득장
손문욱
송여종
송희립
나대용
이언량
이청일
류형
진린
등자룡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판옥선 85척, 병력 1만 7000명,
명 사선 25척, 명 호선 77척, 병력 2만 6000명
아타케부네 100여 척, 병력 20,000여 명
30여명 전사 아타케부네 50여 척 침몰, 16,607명 사망

 

8-3. 고광섭 목포해양대 교수(해군사관학부)는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지에 ‘절이도 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라는 논문에 관한 최근 주간경향(2020.9.14. 제1394호) 윤호우 선임기자님이 취재한 '이순신의 잊힌 승전' 절이도 해전 기사 자료

 

1598년 7월 전남 고흥군 절이도(현 거금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절이도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에서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왜선 50여척을 부순 승리였지만, 당시 기록에서 절이도 해전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기록에서 전투 날짜가 각각 다르고, 전투 상황이 서로 다른 것도 절이도 해전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남 고흥군 거금도(옛이름 절이도)에서 보면 북서쪽 방향으로 작은 섬 우동도가 있다. 우동도의 왼쪽 위쪽이 절이도 해전의 교전 예상 지점이다. / 고광섭 교수 제공


이런 가운데 절이도 해전이 지형학적으로 거금도 북서쪽 바다에서 펼쳐졌고, 이순신 장군이 이 해전에서 학익진을 펼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광섭 목포해양대 교수(해군사관학부)는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지에 ‘절이도 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학회지는 9월 말 발간될 예정이다. 이 논문에서 고 교수는 “절이도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7월 19일 아침 6시께 절이도 북서쪽 1~2km 해역에서 왜 수군 100여척을 상대로 학익진을 펼쳐 적선 50여척을 수장시킨 역사적인 해전”이라고 결론 내렸다. 절이도 해전의 시간, 장소, 전투 방식이 밝혀진 것이다.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2009041627421#csidx07e22eb878c3c4e94df7b19858300fa

 

 

8-5. 1년만에 확 바뀐 조선수군, 절이도 해전서 왜군에 본때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여름, 남해 바다는 폭염과 함께 전쟁 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7월 18일 왜군 군선 100여 척이 전남 고흥의 녹도(鹿島·녹동)로 침범해 왔다. 10개월여 전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남해안 곳곳에 축조한 왜성들에 칩거하며 민간인 약탈과 산발적인 도발로 시간을 끌어오던 왜군이 다시 대규모 침공에 나선 것이다. 녹도는 이순신의 수군 통제영이 설치된 고금도(완도군)와는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지점.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왜군의 의도적인 행동임이 분명했다.

 

원문보기: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71111/87212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