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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명산

2024.12.01. 해남 두륜산 -대흥사 단풍산행

by 하여간하여간 2024. 12. 2.

2024.12.01.

해남 두륜산 - 대흥사 단풍산행

 

광주지오트래킹(대장 김명수)에서 해남 두륜산-대흥사 단풍산행을 하기에 함께 한다. 

 

대흥사 단풍이 이제야 절정이다. 참 곱고 아름다운 단풍이다. 올해는 단풍도 한 달 이상 늦어진다. 아마 기후 변화에 따른 고온 현상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 될 것 같다.  

 

두륜산을 2주 전에 올랐는데 만일재에서 하산하는 바람에 두륜봉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두륜산은 해남 대흥사에서 바라보면 부처님이 누워 깊은 삼매에 들어 있는 모습이다. 두륜봉은 부처님 머리에 해당된다. 오늘은 꼭 두륜봉을 올라봐야지~ 그리고 남미륵암과 일지암도 둘러보고 싶었다.

 

두륜산은 백두대간 정기가 호남정맥을 타고 흐르다가 땅끝지맥을 만나 마지막으로 솟구치는 암산으로 그 기개가 하늘을 찌르며 월출산과 함께 남녁의 산군을 거드리는 명산 중에 명산이다.

 

해남 오소재에 도착하여 준비 운동을 하고 

 

단체 인증 후 오심재로 향한다. 

 

추억과 기억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나 보다. 두륜산 산행은 이번이 처음인가요? 물었더니 오래 전에 두륜산을 올랐다고 한다. 언제인가요? 했더니 그러니까 8년 전 2017년 2월 11일 함께 걸었던 추억을 되살린다. 세상에 그 때 걸었던 길을 이제 다시 추억으로 소환하니 그 감개가 얼마나 무량한가? 박○○ 산우님이 인생에서 처음 산행을 할 때 흰 눈이 발목까지 덮인 두륜산을 처음 올랐다고 한다.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때 앞에서 산행을 리딩하느라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늘 함께한 동호인이려니 하고 지나갔는데~ 그 때 조금 더 따스하게 배려를 할 걸~ 많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8년이 지나 이렇게 새로운 인연으로 산행을 할 수 있어 그나마 참 다행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많은 분들과의 인연이 또 먼 훗날 추억으로 되살아 날지 모른다. 모든이에게 좀 더 배려하고 따스하게 친절하게 대하자. 

 

오심재에 올랐다. 여전히 노승봉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다시 보니 반갑다. 사람만 인연이 아니다. 산과 들과 바람과 물줄기도 모두 인연의 한 줄기다. 살아가면서 만나고 느끼는 모든 것이 소중한 인연의 연속이 아니던가? 모두 모두 소중히 여기자 

 

우리나라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하여 통용되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금호남정맥, 호남정맥으로 이어지고, 다시 화순 국사봉 바람재에서 한반도 최남단 땅끝으로 연속되는 산줄기를 땅끝기맥이라 한다.

 

두륜산은 백두산 두(頭) , 중국 곤륜산에서 륜() 을 빌려서 두륜산(頭輪山) 이라고 하며, 큰산, 큰 언덕의 순 한글인 한듬, 한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대둔산으로 불렀다. 

 

두륜산은 해남군 삼산면, 옥천면, 북일면, 북평면, 현산면, 5개 면에 걸쳐 있으며, 주요 봉우리로는 가련봉, 노승봉, 도솔봉, 고계봉, 두륜봉, 연화봉, 투구봉, 향로봉, 혈망봉 등 아홉 봉우리를 거늘고 있다.

 

두륜산도립공원은 난대림의 보고로서, 한라산이 자생지로 알려진 왕벚나무(천연기념물 173호)를 비롯해 동백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차나무 등 11과 837종의 식물자원이 분포하고 있다. 동백나무를 비롯한 난대성 상록 활엽수림의 경관이 뛰어나 1979년 12월 26일 두륜산도립공원으로 지정도;었으며, 면적은 32,910㎢이다.

 

두륜산 내에 위치한 천년고찰 대흥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제되었으며, 가련봉 아래 만일암터에 위치한 천년수 느티나무는 2018년 3월 21일 전라남도 정도천년을 상징하는 천년나무로 지정되었다. 

 

두륜산도립공원 내에는 대흥사를 비롯한 북미륵암, 남미륵암, 일지암, 진불암 등 유명한 산내암자와 북미륵암 마에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명동종(보물 제 88호),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47호), 서산대사행초정산기록(보물 제1667호)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두륜산 노승봉(685m)에 오르면 해남과 진도일대와 완도 강진만 일대의 다도해 아름다운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저 아래 대흥사가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온다.

    

노승봉에서 해남 북평 들녁과 완도 고금 그리고 강진 마량과 강진만 다도해 풍광을 바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확 열리고 일상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가련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가련봉은 두륜산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두륜산 정상 역할을 한다. 두륜산의 정상은 두륜봉이여야 함에도 가련봉이 높아 100대 명산 인증도 가련봉에서 한다. 대흥사에서 바라보면 가련봉과 노승봉은 부처님 몸체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다. 

 

가련봉에서 어렵게 인증 한장 남기고

 

가련봉(703m) 정상이다. 노승봉과 대흥사가 아늑하고 저기 하늘 아래 펼쳐지는 해남 현산, 화산, 황산면 들녁 풍광이 아름답다. 골짜기 마다 옹기 종기 질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남녁의 땅이다. 해남 물고구마가 유명하지만 요글래는 배추가 유명하다. 황토흙에서 자란 고구마와 해풍을 맞고 자란 배추는 김장하기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한양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먼 곳이여서 늘 귀양지로 지정 받았던 곳이고 또 제주로 귀양을 떠나는 험한 뱃길을 배웅하는 눈물과 한의 땅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해바다를 지킴으로써 일본군 군량미 조달 계획을 차단시켜 결국은 조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리더쉽을 따라 온갖 희생을 다 치루면서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백성들이 숨 쉬는 땅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국란 시기와 한말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갈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의로운 백성들이 살아가는 땅이다. 오늘날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위대한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풍요로움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자욱한 가스가 온 산하를 덮고 있지만 아늑한 땅끝기맥은 도솔봉을 지나 달마산으로 줄다름치고 있다.

 

4월 진달래가 암릉사이로 활짝 필 때면 참으로 아름다운 진달래 꽃밭이 되련만 12월 산야는 이미 겨울채비를 마치고 깊은 동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가련봉 암릉사이로 다가온 대흥사는 마치 두륜산 안방에 자리잡고 있는 것 처럼 아늑하게 느껴진다. 두륜산은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로 산세 자체가 그 어떤 외침에도 끄떡 않고 굳건히 방어할 수 있는 명당 중에 명당이다. 

 

두륜산은 투구봉을 포함 9개의 큰 봉우리로 이어진 진산인데 두륜봉에서 투구봉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와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의 투구봉이 바로 앞 완도 청해진을 향해 해양 왜구들을 지키는 형국이다. 

 

가련봉에서 만일재로 하산 잠시 쉬었다가 두륜봉으로 향한다.

 

만일재에서 잠시 쉬면서 늦은 억새밭 낭만을 만끽하고

 

오늘의 하일라이트 두륜봉을 향해 오른다.

 

◎ 두륜산 두륜봉 무지개 다리

 

굽이 굽이 돌고 돌아 두륜봉 아래 무지개다리를 향해 급경사 오름계단을 오른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구름다리는 참으로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암릉굴이 만들어지고 무지개 다리가 만들어졌을까?

 

두륜산 무지개다리 인증 한 장

 

두륜봉 

 

두륜봉(630m) 정상석

 

두륜봉(630m)은 가련봉(703m)과 함께 두륜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로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흥사 해탈문에서 바라보면 두륜봉은 와불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두륜봉 정상에 오르면 두륜산의 최고봉인 가련봉(703m)과 노승봉(688m), 고계봉(638m), 향로봉(469m), 연화봉(613m), 혈망봉(379m), 도솔봉(671m), 투구봉(533m)이 우뚝 솟아 있고 강진만, 완도, 진도 일대의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임상문 동생과 동하나라님 나 이렇게 맘 편한 사람들이 뭉쳤다. 늘 안산하고 건강하고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함께 하자고~

 

대원님들과 두륜봉에서 아름다운 추억 한 장을 남긴다. 모두들 건강하길 바란다.

 

두륜봉에서 바라 본 완도 다도해 아름다운 풍광

 

두륜봉에서 바라 본 해남 북평면 들녁과 완도 고금과 강진 마량 일대 다도해 풍광

 

두륜봉을 하산하면서 마치 한 마리 어미 거북과 새끼 거북이 소풍나온 모양의 거북바위를 담았본다.

 

두륜봉 거북바위와 헤어지고 이제 남미륵암으로 향한다.

 

◎ 남미륵암

두륜봉에서 하산길에 남미륵암을 둘러보려고 조심 조심 산길을 살폈지만 남미륵암 초입을 찾지를 못했다. 여러번 올때마다 남미륵암 입구를 찾았지만 찾지 못해 아쉽다. 여기 소개한 내용은 어떤이의 블로그에서 담아 온 내용을 소개한다. 

 

두륜봉 아래에 있는 남미륵암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고, 다만 전훤선사가 중수했다는 사실만 「대둔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수도처로 이용되는 조그마한 건물과 음각의 마애불상이 남아 있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데, 미륵불은 전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남미륵은 조성 당시부터 보호 전각이 없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이 남미륵은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미륵불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남미륵암 불상의 조각 수법은 음각이 형태를 취했는데, 북미륵이 양각임에 비해 남미륵이 음각이란 점에서 아마도 미륵불은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조성한 듯 하다.

 

북미륵이 양각임에 대하여 남미륵이 음각이란 점에서 남북 음양 두 미륵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즉,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하였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제석천의 화신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인데, 음각과 양각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고 하며, 제석천이 두 미륵을 조성할 때 해가 빨리 넘어가므로 천동천녀가 해를 가지 못하게 매었다고 하여 만일암이라는 암자가 생겼다고 전하는데, 이 만일암 터는 남북 미륵의 중간 지점에 있다.

 

남미륵에서는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납석으로 만든 여래좌상 1기가 발견되어 봉안되었다.

 

◎ 진불암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630년(인조8) 극현이 덕호와 함께 중건하였고, 1693년(숙종19) 이흥록이 덕탄과 더물어 중건하였으며, 1740년(영조 16) 온곡대사가 우일과 함께 중수하였다. 그 뒤 1750년(영조 26)에 위일이, 1791년(정조 15)에 정능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응진당, 향적당, 요사채 등이 있다. 응진당은 정면 3칸의 조그마한 전각이며, 그 옆으로 약 50년 전에 건립된 요사채가 있다.

 

응진당 안에는 석가모니부처와 28나한상과 문관상이 있다. 탱화는 낭월 고재석 스님이 그리셨다는 삼세후불탱화이다. 

 

조선 초기의 목조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특이하다. 이 나한상은 50m 상방에 위치했던 고진불암에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강진에 살던 서씨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나라의 배를 만났는데, 그 배 안에 16나한상이 실려 있었으므로 두륜산방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진불암 응진당 앞 벚나무 사이에서 추억 한 장 - 동화나라님이 담아 주셨다. 감사하다.

 

또한 1709년에 조성한 범종이 있었으나 암자가 폐허화될 때 대흥사 옆에 있는 청신암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현재의 규모는 작으나 영곡, 영파, 만화, 운당, 이암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암자이다.

 

진불암 담장 너머로 연화봉이 라인이 아늑하게 다가 온다.

 

진불암을 지나 일지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거대한 보호수가 자리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 일지암과 자우홍련사

 

대표적인 차 문화 유적인 일지암은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해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1786~1866)가 1826년부터 40년 동안 머문곳이다. 

 

선사는 39세가 되던 1824년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중국 당나라의 시승 한산의 시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에 살아도 편안하다."에서 '일지'를 따와 "일지암"이라 불렀다.

 

자우홍련사(자우산방)는 초의선사의 살림채로, 연못에 네 개의 둘기둥을 쌓아 만든 누마루 건물이다.

 

현재의 초가 건물은 선사가 입적한 후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로 방치되던 것을 1979년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끓어져 가던 우리의 차문화를 일으켜 다선일체 사상을 확립하며 《동다송》, 《다신전》 등의 명제를 남겼다. 

 

특히 시,서,화에 능했던 그는 남종화의 거장인 소치 허련을 가르쳐 추사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일지암을 살펴보고 이제 하산하자. 일지암에서 바라본 녹차밭과 단풍이 붉게 물들고 있는 두륜산 줄기가 아름답다.

 

대흥사 하산길에 예쁜 단풍이 마중한다. 올해 대흥사 단풍을 마지막으로 단풍 산행을 마무리 한다.

 

해남 대흥사 절집과 서산대사 영전을 모신 표충사는 조선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우리나라 몇 안되는 특이한 곳이다.

 

나의 이번 대흥사 탐방 관심사는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면서 근 천년의 뿌리를 내렸던 불교 문화를 조선의 건국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성리학의 유교 문화로 어떻게 개혁해 나갔는가?" 이다. 더구나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는 과정에 두 문화가 크게 충돌하지 않고 유교 국가로 변화한 것이 궁금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대의 기독교 문화가 번성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참 특이하고도 독특한 한국 사람들의 문화 흡수력에 관심이 간다. 

 

◎ 해남 대흥사

해남 대흥사는 워낙 유명한 절집이라 별도로 작성한 나의 블로그로 대신한다. 아래 블로그를 누르면 대흥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2020.12.21.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 표충사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서 조선시대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과 교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 편액이 내려졌다. 

 

호국문과 예제문을 지나가면 표충사와 표충비각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견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표충사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 편액이 하사되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유정 스님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조선 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으로는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대흥사의 '표충사'와 1794년 조선 정조 18년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사 보현사의 '수충사'가 있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1743년 조선 영조 19년에 편액을 하사한 밀양 '표충사'가 있다.

 

◎ 해남 대흥사 단풍길을 걸으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치면서 근 천년의 뿌리를 내렸던 불교 문화를 조선의 건국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성리학의 유교 문화로 어떻게 개혁해 나갔는가?를 생각해 본다. 종교적 교리의 차이를 논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유, 불, 선, 기독, 기타 등의 문화를 통해 일반 백성의 삶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 하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상식적인 생각일 뿐이다. 혹여 전문가가 볼 때 완전히 틀린 내용일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것을 전제한다.

 

1392년 이전 그러니까 조선이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세우기 이전인 삼국시대와 고려때 까지는 백성들의 삶의 전부에는 불교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까지는 제사도 없었고 결혼식이나 장례 등 모든 예식은 절에서 불교식으로 치루었다. 불교외에는 다른 의식이 없었다. 국가의 통치 이념이나 백성의 삶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차별도 없었고 모든 백성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이 지배한 참 좋은 시대였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 권력에 의한 통치라기 보다는 절집을 중심으로 스님의 가르침에 의한 지방의 호족과 마을 중심의 자치로서 어쩌면 조금 느슨한 사회였던 것 같다. 고려 때 수나라나 당나라가 그 많은 군사를 앞세워 쳐들어 왔지만 강력한 국가 군대도 없으면서 싸움마다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려고 전장에 나가고 목숨을 바쳐 싸웠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태어나고 살면서 병들고 죽는 것이 모두 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다고 믿었던 고려 사람들은 당연히 나라가 어려울 때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치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고려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스님들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서 왕권을 능멸하고 부패가 만연하여 사회 질서가 어지럽게 되다 보니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이성개 장군이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세운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은 불교를 배제하고 강력한 중앙 통치 권력인 왕권을 세우고 국가 질서를 바로 잡아 백성의 삶을 향상하고자 당시 중국에서 새로 유행하고 있던 성리학인 유교를 받아들였다. 불교와 유교는 그 문화가 뿌리부터 다르다.  불교는 백성들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유교는 강력한 왕의 지배에 따르고 왕을 하늘로 삼아 충과 효, 인의예지 등 주로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어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약을 만들고 배우고 실천하는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생각을 묻는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뽑고 권력을 향유하다 보니 새로운 선비들이 생겨나고 조선 사회는 서서히 유교 문화로 바꿔가게 되었다. 

 

고려의 불교 국가에서 조선의 유교 국가로의 변화는 일반 백성에게 크나 큰 변화이며 이루 말할 수없는 저항을 가져왔을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고 싶지만 일반 백성은 근 천여년을 향유한 문화가 그렇게 싶게 바꾸어질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은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이였겠는가? 

 

조선의 왕은 사직을 만들고 종묘를 만들어 종묘사직을 왕권을 상징하는 국가로 만들었고, 고을마다 사당을 지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을 모시고 제사 지내면서 숭배하도록 사회제도를 고쳐나갔다. 일반 백성들은 집안마다 제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 조상을 섬기도록 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변화의 소용돌이였겠는가? 

 

조선은 이런 일련의 사회을 개혁을 해 가면서 탄압하거나 일시에 강요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백성들 스스로 변하도록 했다는 것이 조선이 유교 국가로 변하는 성공의 요인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일정 부분 불교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왕족들 사이에서도 승려가 된 사례가 많고 불교의 씨를 말리기 보다는 새로운 유교 문화를 뿌리내리는데 더 힘을 쏟았던 것이다.

 

유교가 조선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시기는 적어도 성종 대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의 경국대전은 국가 운영과 민형사상의 여러 가지 규정을 담은 기본 법전으로 이, 호, 예, 병, 형, 공전의 6개 법전으로 구성돼 있으며, 고려 말부터 100년가량 다듬고 고쳐 정리한 성문 법전으로, 중국 법과 구별되는 조선의 법 체계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아들딸이 동등하게 유산을 상속한다거나 사유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등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만의 법 개념이 반영돼 있다. 그러나 국왕을 규제하는 법 규정이 없고, 노비에 대한 규정은 형전(형법)에만 두어 모든 노비를 예비 범죄자 취급하는 등 조선의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도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편 500년동안 불교는 서서히 사그라들고 어느 왕조에서는 절집을 모두 폐가 시켜버렸으니 얼마나 혹독한 개혁이였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첫 뿌리가 불교에서 시작하였듯이 가지와 꽃은 꺽여 매말라 갔지만 그 뿌리까지 완전히 도려내지 못해서 근근히 살아남아 이제는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불교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에는 불교인 절집과 유교인 표충사 사당이 동시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당보다는 절집이 더 번성하고 있다. 그 오랜시간 개혁을 했지만 유교의 뿌리는 쇠퇴해가지만 다시 불교는 부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재는 유교 대신 기독교가 들어와 교회를 짓고 예배를 드리는 신흥 종교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다. 기독교는 외세 종교이며 이 땅의 종교가 아니다. 조상대대로 이어오는 문화가 아니며 우리의 핏줄에 흐르고 있는 불교와 유교의 피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유교로 변화는 강력한 중앙 왕권으로 밀어부쳤지만 유교에서 기독교로 변화는 일반 시민들에 의해 변화해가고 있다. 백성들 스스로 교회를 짓고 교회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고 결혼과 생사고락을 교회식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에 대하여 적대적 감정이 없으며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상황은 기독교의 확장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불교가 이조때 그렇게 억누르고 피패해져가도 그 뿌리를 도려내지 못 했듯이 기독교도 불교나 유교의 뿌리를 도려내지는 못 할 것이다. 유교도 중국의 성리학을 도입했고 기독교도 서양의 종교를 도입했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민족 태동때 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불교 의식과 이조 500년의 유교 문화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와 서로 공존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런 시대에는 서로의 종교적 이념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상책이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각 종교의 파벌도 마찬가지고 또 다른 군소 종교 문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니 싸움이 없다. 서로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집단을 이루며 스스로 잘 살아가면 되기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니 그 많은 집단들이 공존하면서 서로 다투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세계 모든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인정한다면 지구상에는 전쟁이 없을 것이고 백성의 삶은 풍요로워질 것 이다. 

 

미천하고 잡다한 한 중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려 주어서 감사한다. 아름다운 대흥사 단풍길을 걸으며 평소 '왜 절집에 표충사라는 사당이 있을까?' 하고 늘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본 것이다. 한국불교는 토속신앙인 산신을 포용하고 유교와도 공존하며 백성의 참 모습이 곧 부처임을 깨우치도록 가르치고 있기에 이 아름다운 단풍길 만큼이나 아름다운 문화를 꽃 피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