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일자 : 2024.11.17(일)
2. 누구랑 : 광주원산우회
3. 산행구간 : 상가리-남연군묘-저수지-가야산-석문봉-일락산-402-개심사-주차장(11km)
◎ 가야산을 향하여
늘 그랬던 것 처럼 오늘도 산꾼은 배냥을 메고 집을 나선다. 어딘가 새로운 사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안고 서산으로 향한다. 매주 하루는 이렇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소풍은 즐겁다. 다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기에 무엇이라 말 할 수없지만 나는 주 5일은 열심히 사회를 위하여 일하고, 하루는 가족과 함께 보내고, 하루를 나를 위해 온전히 쓸 수 있길 바라면서 살아 왔다.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참 좋은 시간이다' 라고 말 한다. 무엇이 그리 좋아서 허구헛날 산으로만 가냐? 라고 물으면 '그냥 산이 좋다.'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산은 차별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고, 내가 무엇이라 해도 다 들어주고, 고함을 쳐도 노래를 불러도 깔깔거리며 소갈머리 없이 떠들어도 소리 없이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기에 마음이 편한다. 산에서는 거들먹 거리지 않아도 되고, 근엄하지 않아도 되고, 잘 났다고 애써 힘쓰지 않아도 되고, 남의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생긴대로 보면 되니 그 모습이 그대로 순백하고 정직하고 청순하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산을 올라도 지루하지 않고 매주 산을 오른지 모른다.
산에서 만난 친구들은 한결 같이 착하고 순박하고 정겹고 서로 이해하고 들어주고 격려하고 함께 고행의 길을 걷는 동지이기에 별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인간적인 우대감을 찐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그저 안부를 묻고 만나면 반갑고 하루를 즐겁게 함께 보내다가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순수 청백의 하얀 나그네여서 좋다. 오늘도 그런 친구들과 가야산을 오른다. 가야산은 금북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먼 옛날 2005년 11월 20일 그러니까 꼭 19년전 내 나이 40대 때 금북정맥 할 때 정신없이 걸었던 산줄기이기에 더욱 아련한 추억이 서린곳이다.
광주에서 아침부터 7시에 출발하여 2시간 30분의 긴 시간 걸려 내린 곳이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주차장이다. 기온이 갑자기 추워졌다. 패딩을 가져오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차가운 기온에 낭패를 볼 뻔 했다. 산은 늘 이렇게 예측 불허의 상황이 있다. 늘 준비를 잘 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곳에는 남연군 묘가 있어 유명하다. 내포 문화숲길 1코스(내포불교순례길 : 내포예찬문화숲길센터 - 수덕사, 14.4km)의 시작점이다.
남연군 묘를 찾아서 가는 길에 예쁜 노오란 옷을 입고 있는 상가리 은행나무 단풍이 반긴다. 노오란 은행나무 단풍은 이맘때 참으로 예쁘다. 은행나무에 걸려 있을 때도 예쁘지만 땅에 떨어져도 어찌나 당당하고 고운지 다른 낙엽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늘 사람은 젊은 날 잘 나갈 때도 잘해야 하지만 나이 먹어 누구나 그져 그럴때 추하지 않아야 한다. 저 은행나무 낙엽처럼 당당하고 고운 자태를 유지해야 할텐데~ 내 삶은 어떠한가?
상가리 마을회관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오늘 따라 유난히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나의 괜스런 상념 때문일까? 나도 저렇게 늙으막에 당당하고 고운 모습이였으면 좋겠다.
가야사 표지판을 지나고
◎ 가야산 가야사(伽倻山 伽倻寺 : 한국불교법륜종(韓國佛敎法輪宗)
- 가야사는 들리지 않았다. 가야사는 가야사지와 남연군 묘와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있어 여기 참고자료로 정리한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伽耶山)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었다.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전하지 않으나 한때는 수덕사(修德寺)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1177년(명종 7) 3월에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천민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켜 이 절과 황리현(黃驪縣: 지금의 여주)·진주(鎭州: 지금의 진천) 등을 빼앗았다.
또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절터는 예로부터 유명한 명당으로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온다고 알려져 왔다.
이를 믿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44년(헌종 10) 절을 불사르고 자신의 부친 이구(李球: 1788∼1836)의 묘를 썼다.
이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남연군(南延君) 묘이고 마침내 1863년 자신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니 바로 고종(高宗)이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죄책감에 가야산 동쪽에 절을 짓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
- 다시 돌아와
오랜만에 본 매리골드이다. 초등학교 때 학교 꽃밭에 유난히도 하려하게 피었던 예쁜 꽃이다. 초등학교 내 짝궁은 유난히도 매리골드를 좋아했다. 어쩌면 짝궁 때문에 매리골드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매리골드 한송이를 꺽어 짝궁에게 주면서 왜 그리 떨었는지 모른다. 혹시나 받아 주지 않거나 싫어 하면 어쩌나 괜한 노파심으로 불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짝궁이 어느날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무척이나 그립고 보고픈 내 짝궁 얼굴이 연기처럼 일었다 사라진다. 먼 하늘 나라에서라도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남연군 비가 눈에 띤다. 남들은 관심이 없지만 나는 남연군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은 어떤 사람이였을까? 그의 아들 이하응 흥선대원군의 역할이 조선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우리 민족의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언젠가 흥선 대원군에 대하여 한번 살펴 볼 수 있길 바라지만 그에 앞서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 가지고 남연군 신도비를 찾아 간다.
◎ 남연군 신도비
남연군 묘에서 약 700m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흥성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웠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두 개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높은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놓았다. 대좌의 높이 134cm와 비신의 길이 186cm를 합쳐서 전체 높이는 320cm가 된다. 비신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지붕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 큰 글씨로 남연군충정 이라고 쓰여져 있고, 4면을 돌아가며 작은 글씨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남연군 묘역으로 가는 길은 왼쪽길이다. 가야산 방향과 같은 방향이여서 다행이다. 석문봉과 옥양봉으로 오르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고 우리는 남연군 묘를 둘러보고 가야산으로 가야하기에 왼쪽으로 간다.
◎ 가야사지 발굴지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하며, 고려시대부터 존속해 있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패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적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가야사지(충남도 기념물 제150호), 남연군묘(충남 지정 기념물 제 8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남연군묘 아래 넓은 공간은 예산 가야사지 7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산군에서는 가야시지의 보수 및 복원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조사결과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석조불상 8점, 청동불두 1점, '가량갑(사)' 명 명문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시지에 대한 건물배치 및 사명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차 발굴조사를 통해 남연군의 제각시설이 확인되었다. 제각은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조성되어 남연군 이장에 대한 기록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 남연군의 묘
남연군은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의 부친으로 원래는 왕족이 아니였지만 정조의 이복 동생이자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종친이 되었다. 이 양자 입적으로 제법 빵빵한 인맥을 얻었다. 은신군의 부인이자 남연군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의 5촌 조카이자, 추사 김정희의 양어머니의 자매였다. 즉, 김정희와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상 이종사촌이 되었다.
남연군 본인은 살아 있을 때 정치적으로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냈다거나 주목을 받지는 못한 듯하며,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냥 조용하고 무난하게 살다 간 인물로 보인다.
남연군 묘는 처음에는 경기도 연천군에 묻혔지만 뒷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의 현 위치로 이장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야사가 있다. 지금의 남연군묘 자리에는 원래 절('가야사'라고 전해진다)이 있었으나, 실력 있는 지관 하나가 이하응에게 천하의 명당 자리라고 그 절을 소개하여 "이 터는 천하의 명당으로 천자가 두 분 나올 땅(二代天子之地)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은 화를 얻을 것이며 나라 역시 화를 입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하응은 "어쨌든 천자가 나올 자리인데 둘이면 어떤가?"라며 지관을 데리고 그 절을 둘러보았고, 가산을 팔아 그 절 주지에게 값을 치르고 절을 철거한 뒤,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고 전한다. 뒷날 고종은 이 덕에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며 남연군의 묘가 있는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고 한다. 영화 《명당》이 이 야사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이다.
그런데 남연군 묘는 손자가 왕위에 오른 후 수난을 겪었다. 바로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다만 지금 자리에 묘를 쓸 때 도굴에 대비해 튼튼한 석곽을 마련한 덕에 관까지 파헤쳐지지는 않았다. 살아 생전보다는 죽은 후에 그야말로 영욕을 모두 누린 셈이다.
남연군 묘에서
◇ 오패르트 도굴사건(참고자료)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제목 그대로 독일상인인 오페르트가 도굴을 한 사건으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을 말합니다. 독일상인 오페르트는 1852년부터 중국에서 상업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1860년도에 두번에 거쳐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였지만 거절 당하였으며 1868년도에 구만포에 와 군청을 습격, 그리고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했다. 하지만 묘지가 생각보다 튼튼해 도굴에 실패하고 그대로 돌아갔는대 흥선대원군은 이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계기로 하여 외적에 더욱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7년 묘소 및 주변 토지를, 소유권자인 운현궁 사손 이청이 관할 지자체에 기증했다고 한다.
◎ 남은들 상여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했다고 전하는 중중식 상여이다. 장강 위에 구름 차일을 친 용봉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노랑, 흰색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대원군은 종실 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으로 옮겼다. 시신을 넣은 관을 운반하는 데에는 500리 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노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불렀졌다고 한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 보관중에 있으며, 이곳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국가유산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 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 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국가무형유산 언홍수대목장이, 유소는 무형유산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다.
◎ 가야산 산행 시작
이제 본격적으로 가야산 산행을 시작한다. 이정표에 있는 가야봉을 따라 오른다. 2.4km 거리이다.
날씨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11월 중순이 지나도 여름같이 더웠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져 체감 온도가 0℃이다. 몸은 움츠려 들어도 마음만은 활짝 핀다. 본격적인 단풍이 온산을 붉게 태우고 있다. 평년보다 약 20일 정도 늦었지만 그동안 아쉬었던 단풍산행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반갑다.
상가저수지 수면에 비친 가야산 그림자와 붉게 물든 가야산 단풍이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상가저수지 뚝방에서 석문봉을 배경으로
가야산과 상가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장
하늘이 가뜩이나 찌뿌린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고 바람이 세차다. 산행이든 여행이든 날씨가 한몫 하는데 오늘은 화창하지를 않다. 그러나 날씨가 뭐 그리 대수냐? 비가 오면 오는대로 눈이 오면 오는대로 바람불면 부는대로 그저 자연이 주는대로 따라서 즐겁게 보내면 되는 거지? 날씨 탓하지 마라. 즐겁게 오른다.
완만하게 오르는 가야산 산길에는 예쁜 단풍이 붉게 물들고 우리들 마음은 한없이 설레고 가볍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산길에는 이야기가 있고 낭만이 있고 사연이 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붉은 단풍이 늦가을 햇빛에 더욱 아름답다. 그 본연의 모습으로 빛난다.
사실 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기존 잎파리를 버리는 작업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추운 겨울을 견디려고 싱싱한 자기 잎파리를 버리는 고통의 시간이다. 녹색 엽록소가 잎파리에서 빠져나가면 이렇게 빨간 색깔의 잎파리가 남는다.노오란 단풍도 마찬가지이다.
오름길에서 기쁨을 함께한 대원님들
엽록소가 빠져나간 단풍은 고유의 색깔로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매말라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무 가지에서 뚝 떨어진다. 바람결에 스치면서~ 그 순간 나무는 어떤 느낌일까? 자신의 일부를 떠나 보내는 아픈 마음이 우주 저 창공을 넘어 메아리친지 모른다.
굽이 굽이 단풍이 물들고
그러나 또 한편으론 자연순환 법칙에 순응하는지도 모른다. 딩구는 낙엽이 다시 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거대한 자연순환 법칙 말이다. 내년 새 봄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는 아픔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야산 오르는 산꾼들의 마음도 붉게 물든다.
아~ 위대한 아픔이여! 새로운 생명은 이런 아픔을 통해서만 탄생하나보다. 생명이나 환희나 무엇이든 고통 없이 오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보면 고통은 고통이 아니며 기쁨은 기쁨이 아니다. 고통과 기쁨은 따로가 아니고 하나인지 모른다. 기쁨이 고통이고 고통이 기쁨인가?
소나무와 잘 어울리며 붉게 물든 가야산 단풍
소나무와 단풍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산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마음 또한 센티해지고 아쉽지만 이 낙엽이 지나면 긴 겨울을 거쳐 새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새봄의 희망을 고요히 꿈꾸고 사푼 사푼 발걸음을 옮긴다.
이른 아침 차가운 공기에 두껍게 입은 겉옷을 벗고 땀이 삐죽삐죽 나는 오름길을 격하게 오를 것이다.
오손도손 걷는 산길에는 해맑은 미소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삶에 지친 힘듬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이 순간만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저런 세상사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산길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급경사 오름길이 시작되고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감싸주는 산길은 따뜻하고 즐겁고 인간적이다.
수북히 쌓인 낙엽은 왜 이리 마음을 심난하게 하는지~
가야봉 정상이 가까올 수록 아주 심한 급경사 오름길이다. 최악의 오름길은 돌계단과 험난한 돌길이다.
휴 다 올랐네~ 한참을 급경사 오름길을 올라 가야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에 도달하였다. 이런 장난도 하며 무거운 산길을 쉬어간다. 가야봉 아래 50m 지점이다.
가야산 능선길에 올라 서니 상가리 방향 하늘이 열린다. 저 멀리 하늘금에는 안면도와 서해바다가 아스름히 조망되고
마지막 가야산 정상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오른다.
◎ 가야산(伽倻山)
가야산은 충청남도 북부지방을 북-남 방향으로 뻗어 있는 금북정맥에 속하며,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이다.
가야산의 높이는 678m이고,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605m), 석문봉(石門峰, 653m), 옥양봉(玉洋峰, 593m) 등의 봉우리가 있다.
신라 때는 가야산사를 짓고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 가을로 고을 관원을 시켜 제를 올렸던 곳으로, 능선을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와 억새풀 등 경치가 수려하다.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제 때 상왕산(象王山)이라 불렀는데, 신라통일 후 이 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
가야산은 북쪽으로는 일락산(日樂山, 521m) - 상왕산(象王山, 307m) - 아미산(峨嵋山, 350m), 남쪽으로는 삼준산(三峻山, 490m) - 결봉산(202m)에 이어진다.
편마암으로 구성된 가야산맥은 충청남도의 서북부를 남북으로 달리면서 내포(內浦)와 태안반도(泰安半島)의 경계를 이룬다.
동사면을 흘러내리는 물길은 삽교천(揷橋川)을 통하여 삽교호로 흘러가고 서사면의 물길은 천수만(淺水灣)으로 흘러간다.
가야산 정상의 북측은 2∼3m 크기의 토어(tor)와 3∼4m 크기의 암주들이 발달하여 있고, 가야산 정상 남측 급사면에는 35m 규모의 암벽(岩壁)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2m 내외의 토어들이 집단적으로 나타난다.
가야산에서 석문봉에 이르는 능선은 대부분 두꺼운 토양층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차별침식 및 풍화에 비교적 저항력이 강한 암석들이 토양층 위로 노출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20m 정도의 높이와 폭으로 된 암석단애들이 발달하였으며, 단애의 상층부에는 절리의 형태에 따라 각진 모습의 토어들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봉우리로, 가야산 쪽으로는 암릉을 이루고 서남쪽은 단애를 형성하였다.
편서풍을 타고 서해를 스쳐온 기류가 가야연봉에 부딪치는 상승기류를 타고 자주 지형운이 형성되는데, 이때 가야연봉은 운해를 이루어 그 운해 속에 뒤덮인 저녁의 설경의 가야산 경관 중 최고로 손꼽힌다.
능선에서의 조망은 서해 쪽으로는 서산과 태안, 천수만과 서해가 보이고, 내륙 쪽으로는 예당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가야산과 서원산(書院山, 473m) 사이인 덕산면 상가리에는 조선조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1989년 지정)가 있는데,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아산만을 거쳐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도굴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가야산에는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1989년 지정)을 비롯한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국보1점, 보물6점, 기타 국가유산 4점 등을 비롯한 각종 국가유산이 산재해 있어 내포문화권의 핵심지역이다.
유서 깊은 문화유적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을 찾아 매년 오십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부근에 장항선과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서해안고속도로의 해미I.C에서 빠져나와 45번 국도를 이용하면 접근이 용이하다.
◎ 거북바위
영락없이 거북이다. 거북이가 먹이를 먹으려고 고개를 쭉 빼는 모양이다.
나도 같이 기념 한 장
거북바위를 지나 조망이 좋은 곳에서 지나온 가야봉을 배경으로 추억 한 장
가야산 서해 쪽으로는 서산과 태안, 천수만과 서해의 조망이 압권이다.
가야봉에서 석문봉까지 사이는 제법 암릉길이다. 암릉길을 만나면 왠지 산꾼들은 기분이 상기되고 활력이 넘쳐난다.
왜일까? 강한 기운을 받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렇다. 바위 위를 걷고 있노라면 강한 기운을 받는 기분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조심 조심 암릉길을 걷는다.
대원님들과 잠시
서산 - 태안 - 천수만 - 안면도 풍광이 광활히 펼쳐지고 나는 이 풍광속에 푹 빠져 잠시 쉬어 간다.
◎ 소원 바위
소원바위이다. 소원을 빌어 본다. 마음속 소원이 무엇일까? 아이들 건강하고 가정에 행복이 가장 절실한 소원이다.
국가를 위해 소원 한번, 가족을 위해 소원 한번, 친구를 위해 소원 한번, 나를 위해 소원 한번
계속된 암릉에서 대원님들
나도 오르고
지나온 산길을 바라보며 한 장
가야할 산길 / 저기 산봉우리가 석문봉이다.
◎ 사자바위
사자바위는 그 위용으로 서해를 지키고 있다.
사자 바위에서 동화나라님
사자바위 현위치
사자바위에서 바라 본 지나온 산길
지나온 산길을 배경으로
석문봉 가는 길에 옥양봉으로 뻗는 산줄기가 장쾌하다. 저기 옥양봉 아래에 상가리에 남연군 묘가 있다.
저기 산아래 들녁은 해미 들녁이 아닐까? 들녁 저편 뽀쪽 오른 산이 도비산(352.8m)일 것 같다. 바다는 천수만 간월호와 아련히 안면도가 조망되고
석문봉이 손에 잡힐 듯
석문봉을 담아 본다.
가야산과 석문봉까지의 서사면에 펼쳐진 광활한 서산 - 태안 - 천수만 - 안면도를 파노라마로 잡았다. 화면을 누르면 크게 확대 됨
가야산 석문봉 인증
가야산 석문봉
19년 전 2005.11.20. 금북정맥 4구간 할 때 모습/ 그때는 참 젊었다.
19년전 태극기 휘날리는 석문봉의 추억
석문봉 돌탑을 지나
한참을 걸어서 임도에 도착
임도에서
임도에서 학 조형물
임도에서 일락산을 향해 가는 산길은 잘 자란 소나무 숲길이다.
소나무 숲길에서 대원님들
나도 한장
지나온 산길
마가목 빨간 열매가 깊은 가을 부르고 있다.
일락산 정상/ 정상석은 없고 쉼터만 덜렁 서 있다.
일락산 정상에서/하필이면 그 순간 눈을 감았는가?
일락산 정상에서 대원님들
개심사를 향해서
국립용현자연휴양림 안내 현위치
개심사 갈림길을 향하여
개심사 갈림길
서산 아라매길 안내도 현위치
개심사를 향해서 하산
◎ 개심사 산신각
개심사 산신각
산신각은 산악숭배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에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보통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 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졌다.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 등으로 불린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이라 하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이다.
◎ 개심사
상왕산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충정왕때 처능대사가 중창하고 조선 성종 1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개심사 단풍
코끼리의 왕이라는 뜻의 상왕산은 부처님을 상징하며 '무아경"을 설한 인도의 산 이름이기도 한다.
개심사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대웅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영상회상도, 달마대사관심론 목판, 목자리혹론 목판 등의 보물 14종과 도지전문화재 명부전, 심검당 등이 있다.
1960~70년에는 비구니스님들이 경정을 공부하는 강원으로 이름이 났었고 구부러진 소나무 기둥이 아름다운 개심사 범종각도 이때 건립되었다.
특히 이 범종은 일제때 사찰의 쇠붙이를 약탈해간 것을 참회하기 위해 일본인이 설판시주하여 세워져 그 뜻이 깊다.
개심사의 암자로는 영구암, 백련암, 동전, 부도전, 양수암, 남전, 중암, 은선대, 묘련암 등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영구암터만을 참선수행하는 '보현선원'으로 복원하여 해마다 수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봄이면 기와집을 매경으로 청벚꽃 왕벚꽃이 하사하게 피어나고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이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개심사 청벚꽃나무
청벚꽃 기념
◎ 개심사 팔상전
팔상전은 명부전 북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 개심사 명부전
개심사 명부전은 지잘보살과 시왕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저승세계의 명부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명세한 보살이고, 시왕은 저승세계에서 죽은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이다.
개심사 명부전은 인조24년에 지어진 건물로, 안쪽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어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는 대웅전과 비슷한 양식이다.
불단 가운데에는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양옆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서 있다. 무독귀왕은 사람들의 약한 마음을 없애 준다는 왕이다. 도명존자는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이승에 들어와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린 왕으로, 젊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단 양옆에는 시왕상과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상 및 실무관인 녹사의 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이 서 있다. 출입문 좌우에는 사람과 같은 크기의 사자상이 서 있다.
◎ 개심사 대웅보전 (보물 제143호)
서산 개심사는 의자왕 14년(654년)에 백제의 승려 혜감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개심사 대웅전은 개심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불에 타 없어져 성종 15년(1484)에 새로 지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심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를 공포라 하는데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 주심포라고 하고,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것을 다포라고 한다. 개심사 대웅전은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절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지만, 개심사 대웅전에는 아미타불(보물 제1619호)과 그 양옆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함께 모셨다.
◎ 개심사 심검당
개심사 심검당은 스님들이 생활하며 수행하는 건물로, ' 참선을 통해 문수보살이 들고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개심사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심사가 성종 6년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성종 15년에 중창하였다는 '성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심검당도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영조 7년에 고쳐지었고, 1974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원래의 건물은 심검당 현판이 걸려 있는 오른쪽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었으나, 왼쪽에 지붕이 살짝 낮은 'ㄱ' 자형 건물을 덧붙여서 규모를 늘렸다. 지붕의 앞부분은 겹치마, 뒷부분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며, 기단석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이 가미된 기둥을 세워 자연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건물에서 발견된 상랑문에는 시주자의 이름과 박시동이라는 목수 이름까지 있어 건축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무량수각
대웅보전 앞 5층 석탑
안양루
범종각
코끼리 국화 . 개심사에는 국화 춪게가 열렸다. 이 가을 고즉넉한 단풍이 절집과 잘 어울리련만 개심사는 국화를 온 절집에 꾸며 놓았다. 국향이 그윽하다. 아마 국향으로 이 가을 맞이하나 보다.
상왕산 개심사
세심동과 개심사입구 표지석
내포문화숲길 종합 안내
상왕산 개심사 일주문
전통사찰 제 38호 개심사 안내
오늘 충남 서산 가야산과 일락산을 오르고 천년고찰 개심사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연군 묘를 탐방하는 소중한 시간으 보냈다. 개인적으론 19년만의 금북정맥 추억이 떠오르는 시간이였다. 산을 헤멘지 벌써 20여년이 흐른 지금 나와 자연,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군상을 생각하는 시간이였다. 어쩌면 오늘 붉게 타고 있는 단풍처럼 우리네 삶도 이렇게 익어가는 지도 모른다. 초연하게 다가오는 시간들을 받아들이고 하루라도 즐겁게 보람되게보내야 할텐데~ 적어도 내 생명을 부여해준 조상님이나 그 어떤 절대자에게 욕되지 않게 잘 보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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