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4.03.24.(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3. 산행구간 : 지리산둘레길 19코스 : 난동마을 - 구만리저수지 - 광의면 사무소 - 지리산둘레길 구례 안내센터 - 용호정 - 곡전재 - 오미리
4. 지리산둘레길 19코스
지리산 둘레길 19코스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서 시작하여 광의면 난동마을에서 마무리 한다. 오늘은 난동마을에서 오미리로 역방향 트레킹이다.
구만리 저수지를 거쳐 구례읍내를 가로지르는 서시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서시천 주변 벗나무에는 벗꽃이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 붉은 애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일주일 후쯤이면 벗꽃이 만개 할 것 같다. 참으로 환상적인 벗꽃 길이 되겠다.
오늘 걷는 지리산 둘레길 19코스 역방향 트레킹길은 왼쪽에 노고단을 중심으로 지리산 산자락을 끼고 오른쪽으론 견두산과 천마산을 잇는 견두지맥을 바라보며 서시천을 따라 구례 들녁의 풍요로움을 느끼며 걷는 구간이다. 구례읍을 지나고 섬진강과 만나는 합수점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 걷는 포근한 트레킹 길이다. 일제 침략의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이곳 선비들이 시계를 조직하고 시를 짓고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유서 깊은 용호정을 지난다. 오미리의 금환락지 명당인 운조루에서 타인능해의 가진자의 배려를 배우는 길이다.
오늘 구간은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길과 한국전쟁 전후를 통해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여순민중항쟁과 지리 빨치 이현상과 구례경찰서장 차일혁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5. 트레킹 이모저모
지리산 둘레길 19코스 역방향 시작점은 난동마을에서 부터 시작한다.
난동에서 출발하여 구만저수지댐까지 구간(점선 참고)
그러나 우리는 난동마을에서 점선을 따라 온동저수지를 거쳐 우리밀밭풍경펜션과 농촌체험교육관이 있는 구만저수지댐 까지(4.1km)의 지리산둘레길 19코스는 걷지 않았다. 지방도로 2차선 찻길로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에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대신 구만저수지 지리산호수공원 주차장에서 구만저수지 댐까지 걸었다. 이 부분 추억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사람에게 헛갈린 정보를 제공할 여지가 있어 후기 마무리 부분에 정리하였다.
지리산 둘레길 19구간을 걷고자 한 사람은 난동마을에서 구만저수지댐까지 4.1km를 조심스럽게 걷길 바란다.
참고로
여기 난동마을에 있는 오미 - 난동 시종점은 작년 2023년 3월 24일 걸었던 지리산둘레길 22구간 중에 담은 오미 - 난동 시종점 이정표이다.
오미-난동 시종점
오미-난동 시종점 인증
방광에서 출발한 지리산 둘레길 22코스 중에 난동마을에서 오미로 출발하는 둘레길 19코스는 여기서 출발한다.
다시 구만저수지 댐으로 돌아와
여기서 부터 본격적인 지리산 둘레길 19구간을 트레킹한다.
구만저수지 댐 근처에 있는 농촌체험교육관 부터 지리산 둘레길로 접어 든다.
매화도 활짝피고
구만저수지 댐 아래 수로를 따라 내려 걷는다.
수로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구만저수지발전소 쪽으로 둘레길은 접어 들지만 우리는 곧장 구만교를 향해 걸었다. 후발자는 수력발전소를 지나 구만교를 거쳐 걷길 바란다.
구만저수지 수력발전소
이곳에서 구만저수지 수력발전소를 향하여 가야하는데 그냥 편하게 배수로를 따라 구만교로 향한다.
구만교를 지나고
구례순환 040 오미 14.9km, 난동 4.1km 이정목을 구만교 바로 앞에서 만났다.
서시천을 따라 벗나무가 울창한 천변을 걷는다. 벗꽃이 피었으면 참으로 환상적일 것 같다.
구만마을, 구례순환 039 오미 14.6km, 난동 4.4km 이정목,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겹친다. 우리는 역방향으로 걷는다.
구만마을 앞 서시천 강둑을 따라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벗꽃길을 걷는다. 싱그럽다.
한참을 걷다보면 지하 수로에서 깨끗한 물줄기가 서시천으로 흘러 내린다. 아마 온동저수지에서 내려온 물줄기 같다.
구례 순환 038 오미 14.2km, 난동 4.8km 이정목
지리산 둘레길에는 구간 구간 이정목이 잘 정비되어 있다. 길이 헛갈리거나 거리가 궁금하며는 이정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순방향은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역방향은 검정색으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역방향으로 걷는다.
구례 순환 037 오미 14.0km, 난동 5.0km 이정목을 지나고
복사꽃
복사꽃 꽃망울
곧 터질듯 예쁜 꽃망울을 피우려 붉은 애를 쓰고 있는 저 모습은 생명 잉태의 간절함인가? 산모의 진통인가? 아름답다.
강변엔 지난 가을 억새가 그대로 이지만 강둑엔 벌써 초록이 새록 새록 새봄을 부른다.
구례 순환 036 오미 13.3km, 난동 5.3km 이정목
지리산 노고단은 구름속에 뭍히고 구례 광의면 들녁엔 보리가 봄 맞이 새싹을 틔우느라 오늘도 바쁘다.
서시천은 유유히 아름답게 흐르고
걷다보니 광의면사무소 근처까지 언제 훌쩍 와버렸다.
구례 순환 035 오미 13.2km, 난동 5.8km 이정목
광의면사무소 앞에 있는 450년 된 보호수
우리나라 어느 마을이나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를 심고 보호하여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 정자를 세워 마을의 쉼과 소통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오래된 보호수는 마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도 한다.
광의면사무소, 구례 순환 034 오미 13.1km, 난동 5.9km 이정목
지리산둘레길 인증 스템프도 찍고
광의면사무소에서 잠시 쉬어 간다.
잠시 쉬어가는 동안 동호인 가객의 멋진 키타 연주로 대원들의 마음은 즐겁다.
◎ 남도 이순신 길 백의종군로에서 이순신과 호남 백성과 의병들을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은 남해안을 지키며 한산도 대첩 등 왜군과 해전에서 백전 백승을 거두었지만, 선조는 백성들로 부터 신망을 두텁게 받은 이순신을 시기하여 이순신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터에 원균의 중상 모락으로 이순신은 1597년 2월 6일 관직을 박탈당하고 3월 4일 감옥에 갇혔다. 4월 1일 옥중생활을 마치고 4월 2일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 지시를 받고 내려가던 중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다.
선조가 믿은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거우 군함 12척을 남기며 처참히 참패하였고, 선조가 그렇게 신뢰했던 신립 마져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대패하니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결국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로 임명한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받은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함선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비장한 각오로 진주에서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 장흥 - 강진 - 완도 - 해남 - 진도 - 우수영 까지 남해안 백성과 군사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도움으로 조선 함선 13척을 이끌고 진도 우수영에서 일본 수군 133척을 상대로 맞서 싸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그 후 절이포 해전, 노량진 해전 등을 승리로 이끌면서 조선을 구했다.
'남도 이순신 백의 종군길과 조선수군재건로' 은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여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을 받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걸었던 길로 진주에서 부터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 장흥 - 강진 - 완도 - 해남 - 진도 - 우수영에 이르는 남도 500km 를 걸으면서 군사와 무기, 전쟁 물자와 군량미를 준비하였던 길이다.
구례군 내의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1구간부터 6구간 까지 조성되어 있다.
이순신은 이 길을 걸으면서 만난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희생 그리고 헌신으로 정유재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그 후 노량해전 등 일본 수군과 해전에서 백전 백승을 함으로써 조선을 구하였다. 일본은 결국 조선을 침략하였지만 호남을 침략하지 못했기에, 특히 호남에서 군량미를 보급하려던 작전이 이순신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임진왜란 육로로 깊숙히 들어간 왜군에게 군량미를 보급하지 못한 일본군은 남쪽 각지에서 들불처럼 들고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독안에 든 쥐 형국에 되어 겁을 먹고 결국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후퇴하면서 마지막으로 호남 진출을 시도한 2차 진주성 싸움마저도 호남의 최경회, 김천일 의병장과 수많은 호남의병들의 목숨을 바친 끈질긴 전투로 일본은 결국 호남을 침략하지 못한 째 조선에서 퇴각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실패로 끝이났다. 어떤이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지만 조선은 침략당하지 않았으며 호남 백성과 의병들에 의해 조선은 지켜졌고 일본은 조선 침략전쟁에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의 조선 침략의 실패로 인해서 풍신수길이 사망하고 7년 전쟁은 끝이났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조선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이순신 장군은 말씀하셨다. 그만큼 조선에서 호남은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호남의 의로운 정신이 오늘날까지 의향으로써 그 명성이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광의면사무소 옆을 흐르는 천은천에 비친 활짝 핀 개나리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벗꽃이 아름답다.
광용교, 구례 순환 032 오미 12.9km, 난동 6.1km 이정목
광용교
광용교를 지나서
선월마을을 지난다.
◎ 선월 마을
1820년경 안동권씨 31세손 권덕일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갱변가라 하여(갱번촌) 즉 강변촌이라 부르다가 1930년 여수 삼일면 강을용씨 께서 입주하여 이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마을 지형이 배와 달 모양 같다고 하여 1938년도에 선월이라 개칭하였다. 2012년 현재까지 농가호수는 36호이다.
선월마을/구례 순환 031 오미 11.1km, 난동 7.9km 이정목
서시 2교까지 긴 서시천변을 걷는다.
서시2교 밑을 지나
구례 순환 027 오미 11.1km, 난동 7.9km 이정목
구례 순환 025 오미 9.9km, 난동 9.1km 이정목
지리산둘레길 구례순환 024 이정목
구례 순환 022 오미 8.4km, 난동 10.6km 이정목
구례 순환 021-2 이정목
광의교, 구례 순환 021-2 이정목
광의대교 다리 밑을 90도 꺽여 다시 뚝방으로 오른다.
광의 대교를 지나서
구례 순환 021 오미 7.6km, 난동 11.4km 이정목
지리산둘레길 구례 센터
구례읍내
구례종합운동장 공원
2024년도 안전기원제
다시 걷는 둘레길
힘차게 오후를 걷는다.
서시교
서시교를 건너고
지리산둘레길 이정목
서시교를 건너는 대원들
섬진강과 합수지점이 가까이 다가 온다.
오산이 손에 잡힐듯하고
섬진강에 서시천이 잠기는 합수지점이다. 저기 멀리 다리가 보이고 고려말 우왕 11년(1385) 왜구가 이 강 하구로 대거 침입하여 이 일대를 지나갈 때 수십만 마리 두꺼비 때가 나타나 울어댔다.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로 인하여 이 강을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넉넉한 섬진강 물줄기다.
인증 한 장 남기고
오산을 끼고 섬진강 물줄기가 넉넉히 굽히 돌아 흐른다.
섬진강
아~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한 이름이여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수 영취산에서 분기되어 금호남정맥을 이루고 남쪽으로 흐를 때, 임실 오수의 물줄기들이 모여 옥정호에 잠시 머물다가 섬진강 물줄기로 굽이 굽이 흘러서 남원을 거쳐 온 또 하나의 물줄기 요천을 순창에서 만나 하나가 되고 곡성을 지나면서 옥과천을 품어 안고 구례 압록에서 보성강을 만나니 그 장엄한 물줄기는 호남 동부지역 심장을 굽이 적시며 섬진강변에 옹기종기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어머니 젖줄처럼 넉넉한 물줄기가 되어 하동으로 흐른다.
하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풀섬에는 여러 갈레 습지가 생겨 생태가 살아 숨쉬고
비오는 둑방길
구례 순환 011 오미 3.7km, 난동 15.3km 이정목
노고단 아래 코지를 지나 흘러내린 화엄사 계곡물이 화엄사를 거쳐 마산면을 지나면서 마산천이 되어 이곳으로 흘러 내린다. 이른 봄 연록색 생명이 부슬 부슬 내리는 보슬비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습지 보존 데크길이 잘 정비되어 운치가 더한다.
새 봄 파릇 파릇 피어난 생명과 지난 가을 억새 추억이 데크길과 어울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지나온 언덕과 푸르른 새 봄 기운이 또 한 장의 수채화를 그리고
지난 가을 억새 향연을 간직한 그리움을 지나
언덕배기 넘어 용호정으로 들어선다.
용호정과 섬진강길을 향해서
구례 순환 010 오미 1.7km, 난동 17.3km 이정목
용호정에 지리산둘레길 인증 스탬프를 찍고
용호정을 둘러 본다.
◎ 용호정 (향토문화유산(유형) 제3호)
이 정각은 1910년 경술국치 후 군내 뜻 있는 유림인사들이 수차 모임을 갖고 항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여 시계를 조직하고 1917년 오두선외 73인이 당시 1,350원을 거출하여 건립하였다.
일제의 압박에도 이곳에서는 선현의 우국 유지를 추모하고 후진을 계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주입하며 내심 국치의 한을 시 창작으로 달래며 민족 혼을 길러온 정자로써, 현재는 용호정시계회 주관으로 매년 10월 중에 시계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정각은 1930년 김택균와 45인의 출연금, 1945년 노태현의 32인의 출연금으로 보수하였으며 1992년과 2001년에는 출연금과 군비지원으로 보수하였다.
참으로 아담하게 좋은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일제 침략기에 울분을 참지 못한 지역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계를 조직하고 만나 시를 짓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교육과 독립사상을 고취한 장소이다.
용호정에서 바라 본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선현들의 마음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구례 순환 9-2 이정목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당하여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 무기, 군량, 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하였다.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 한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받고 조선수군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을 이끈 이순신이 전라도 백성과 함께한 총 연장 500여 km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경남 진주에서 하동을 거쳐 구례에서 곡성, 순천, 보성, 장흥, 강진, 완도, 해남, 진도와 우수영에 이른 길이다. 당시 풍전등화 나라의 운명이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가 된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길이다. 탄식과 설움에 겨운 울음소리와 함께 남도의 많은 전쟁터에서 여러 형태로 구국의 길을 걸었던 남도인들의 의로운 투쟁의 흔적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길이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 수 많은 남도인의 의로운 정신을 생각하며
긴 데크길을 지나면
구례 순환 9-1 이정목
오늘 걸어야 할 마지막 구간인 섬진강변길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섬진강변길을 걸으면서
이곳이 섬진강 수달서식지 생태, 경관 보전 지역으로 영산강환경청에서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구역이다.
섬진강 습지가 잘 발달 된 곳으로 구례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자락의 풍부한 수달 먹이 사슬이 형성되어 있어 건강하고 살아 있는 생태이다. 편안하고 건강한 둑방길을 걷는다.
저기 보이는 골짜기가 지리산 문수골이다.
노고단에서 뻗어내린 형제봉 산줄기와 왕시루봉 산줄기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지리산 문수골이다.
문수골과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여수민중항쟁,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의 대장 이현상의 죽음과 차일혁 구례경찰서장 간의 아름다운 영웅적 리더쉽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
◎ 문수골과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여수민중항쟁
조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선봉에 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 경상, 황해, 강원에 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가며 백성이 주인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혁명의 햇불을 들고 관군과 맞서 싸웠다. 특히 전라도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고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향해 올라가던 동학군은 충남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그 세력이 꺽여서 후퇴하다가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쫒기고 담양 금성산성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여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이 났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관련된 많은 전라도 백성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화전민이 되어 근근히 살아가게 되었다. 특히 문수골에 많이 모여 살았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만약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동학농민군에 의해 왕권은 무너지고 백성이 주인이되는 새로운 세상을 세웠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하였을 것이고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처럼 우리 스스로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런 역량이 우리 민족에게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저기 산능선이 움푹패인 곳이 송치재이다. 순천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지방도 865번이 지나는 곳이다.
구례 순환 009 오미 2.6km, 난동 16.4km 이정목
일본의 개입이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개입으로 우리 역사는 많은 부분 왜곡되고 뒤틀려 어렵게 흘러간 경우 무지기 수이다. 우리 민족은 단 한번도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끓임없이 우리 민족을 괴롭혔고 결국에는 우리를 지배하기도 한 강패 사무라이 집단이다. 앞으로도 일본은 기회가 되면 주변국을 괴롭힐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침략과 지배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일본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지금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버젓이 교과서 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일본인들의 감춰진 야욕을 잘 살펴야 한다. 일본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된다. 일본을 모든 분야에서 반드시 이기야 한다. 작금의 일본에게 속수무책으로 이용 당하는 나라 꼴이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그나마 국민이 깨어 있어 다행이다.
해방이 되고 남북이 정치적 이념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싸울 때,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이승만 세력에 의해 주도된 5.10 선거를 거부하며,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면서 유독 제주도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소위 제주 4.3 민중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5.10 선거로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 민중항쟁을 '제주 4.3 폭동' 으로 규정하고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제주 4.3을 수습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은 파견 명령에 반발해 봉기했다.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군인들이 항거한 사건이 여수민중항쟁이다. 군인들의 항거인 여순사건이 민중항쟁으로 번진 것은 이 부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고 아무 영문도 모르고 수 많은 피해를 당한 민중들이 하나 둘 모여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면서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 피해를 당하는 여순민중항쟁이 벌어졌다. 여수 여천을 무대로 항거한 군인들이 순천을 점령하고 광주 보성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호남정맥 송치재를 넘어 구례 간전을 넘고자 했지만 송치재에서 몰상 당하고 패잔병이 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구례 간전을 통해 섬진강을 건너 숨어들어간 곳이 문수골이다. 이들은 기존 동학농민항쟁 후손의 도움으로 생활하면서 한국전쟁 전후에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한 지리 빨치산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부군 총 사령관 이현상을 중심으로 지리 빨치산들은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마다하고 계속하여 지리산에 남아 무장 투쟁을 하였다. 열악한 무기와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 누가 봐도 희망이 없는 지리산 무장 투쟁을 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지리산에서 무장 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면 북한 인민 해방군이 남한을 정복하고 해방 세상이 올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까?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3년이 지나도 이현상 남부군이 지리산 빨치 활동을 하고 있는 한 한국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 이승만 정권은 지리 빨치산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지리 빨치산 대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이 때 차일혁은 1953년 5월 24일 경감에서 총경으로 진급하여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에 보임되면서 호남지역의 빨치산 소탕 작전에 주력하였다.
오봉산 줄기가 섬진강과어울려 한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추석을 며칠 앞둔 지리산 빨치산들은 두고 온 고향과 그리운 부모 형제들을 그리워 지리산 대성골로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대회를 열고 있을 때, 토벌대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 집중적인 대포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큰 손실을 입었다. 그로 인하여 지리산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은 김일성의 남로당 간부 숙청과 맞물려 남부군 총사령관 직위를 박탈당하고 평범한 빨치산이 되어 여수에 사는 부인을 찾아 밤을 틈타 지리산 의신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인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이 하산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구례경찰서장 차일혁 경찰부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지구 벽소령 아래 너널지구에서 이현상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현상이 어둠을 틈타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집중포화를 가해 현장에서 사살하였다.
이현상을 수습하여 서울로 보내졌고 유진상 등 이현상 고창보고 친구들이 이현상의 수습을 확인하면서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이제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이현상 시신은 서울 창경원에서 20일간 '공비 두목의 죽음'으로 전시되어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구례 순환 008 오미 1.7km, 난동 18.3km 이정목
누구도 이현상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비록 총부리를 마주한 적장이지만 '그의 죽음을 수습할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한다' 라고 차일혁 구례경찰서장이 1953년 10월 8일 징계를 감수하고 이현상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한 뼈를 직접 철모에 넣고 M1 개머리판으로 빻은 유골을 예포 3발의 총성과 함께 섬진강에 뿌려 화장시켜 줬다.
"나는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그에 대한 마지막 가는 길에 부치는 나의 조사였다.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 많은 영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기원하는 나의 외침이기도 했다." 차일혁의 '진중기록' 중에서
얼마나 멋진 보습인가.
이제 강변길에서 오미리를 향하여 둘레길은 90도 왼쪽으로 꺽여 보리 밭길을 걷는다.
이 일로 차일혁은 토벌대 측으로 부터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 고 비난을 받았고, 경찰내부에서도 어떻게 빨치산의 장례를 치러 줄 수 있냐며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현상을 사살한 전공으로 인해 차일혁의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세 개나 주어졌으나 정작 부대장인 차일혁은 이현상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한 개도 못받았다. 이현상을 수습하면 당연히 불리할 줄 알면서도 인간적인 자신의 가치관 때문에 적장의 죽음을 수습하고 섬진강에 뿌려 화장을 해 준 그 아름다운 모습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할 수없는 위대한 영웅적 리더쉽이다. 그래서 오늘날 경찰에서는 대한민국 경찰 영웅 1호 차일혁경무관으로 추앙하고 있다
오미리를 향하여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끝나고 보리밭길을 걸어서 원내마을로 향한다.
구례 순환 007 이정목
오미리 보리밭 들녁
원내마을에 도착, 구례 순환 006 오미 1.1km, 난동 17.9km 이정목을 지나
구례순환 006 오미 1.1km, 난동 17.9km 이정목
매화도 반기고
수선화도 반긴다.
원내마을 이정목
원내마을
원내마을을 통과하여
추운 겨울을 이겨낸 싱싱한 마늘 밭도 지나고
오미리 들녁을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보리밭 들녁 바라보며 걷다보면
둘레길은 국도 19번 도로를 만나고
조심스럽게 국도 19번 도로를 건넌다.
구례 순환 002 오미 0.5km, 난동 18.5km 이정목
곡전재 입구 안내
곡전재를 둘러보러 곡전재로 향한다.
◎ 곡전재(구례군향토문화유산 9호)
이 건물은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호 곡전)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목조 건축양식의 주택으로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당시 영 호남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민간형식 주택으로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ㅡ자형으로 배치되었으며 25m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을 금환의 개념을 도입한 점 등이 독창적이며 학술적가치가 인정되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곡전재 대문을 지나
곡전재 안으로 들어오면 한국의 정원 문화가 가득한 아늑한 정원을 만난다. 마음이 참으로 포근하다.
삼락당
예쁜 꽃 문늬가 그려진 기와
정원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이 아늑하고
곡전재
안채
대한민국 명품고택 인증패
곡전재 담벼락엔 담쟁이 넝굴이 넘친다. 한 여름 담쟁이 잎이 무성할 때 또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겠지~
다시 돌레길로 돌아나와 오미마을 이정목을 만난다.
곡전재 이정목
곡전재, 구례 순환 001 오미 0.5km, 난동 18.5km 이정목
지리산 둘레길 구례순환 19코스 시작과 20코스 시작 이정목
이곳 토지면 오미리에서 난동까지 19.0km 는 19코스 이고, 방광까지는 12.3km는 20코스이다. 오늘은 난동에서 오미까지 19.0km를 역방향으로 걸었다.
구례 60 오미 0.0km, 방광 12.3km, 송정 10.4km, 오미14.2km 이정목
지리산 둘레길 오미-난동 시종점에서 인증하고
지리산 둘레길 19구간(난동 - 오미, 역방향) 19km 를 마무리 한다. 지리산 둘레길 19구간을 순방향으로 걷고자 한 사람은 이곳 오미리에서 시작하여 곡전재를 거치고 섬진강 강변길 수달 서식지를 지나 용호정과 마산천을 구례 서시천을 걷길 바란다. 서시천 강둑엔 벗꽃이 활짝 필 때 환상적인 트레킹 길이 될 것 같다.
◎ 이어서 금환락지 오미마을 운조루의 타인능해 가진자의 배려를 배운다.
◎ 오미마을
영조52년(1776년)에 문화 류씨 류이주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환락지에 운조루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렀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 하여 오미리라 불리고 있다.
오미리 마을 입구
◎ 운조루
운조루
운조루 표지석
◎ 운조루 고택(국가민족문화재 제8호)
구례 운조루 고택은 영조 52년(1776)에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것으로,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의 대표 건물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금환락지 형세로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라고 한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ㅡ' 자 형이나 'ㄱ'자 형 안채가 많은데, 이와 달리 운조루 고택은 'ㄷ' 자 형의 안채와 ' T ' 자형 사랑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트인 'ㅁ' 자 형식이다. 이 형식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운조루를 세우기 시작한 해는 1771년으로 유이주가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고 살았던 집의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운조루는 7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을 거쳐 1776년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의 초기 모습은 180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 통해서 알 수 있다.
운조루 안채, 99칸의 한옥이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
운조루는 1776년 건립되었는데 창건 당시의 설계도와 같은 <전라구례오미동가도(家圖)>라는 그림이 남아 있어 그 원형을 살필 수 잇다.
중요민속문화제 지정서와 명품고택 운조루 지정
◎ 타인능해 쌀둑
이곳 주인이 [타인능해]라는 배품을 실천하는 곳이다. 배고픈 사람이 언제라도 쌀을 가져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타인능해]라는 쌀독을 마련해 놓았다. 부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스를 실천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북 이념 갈등으로 부자들이 많은 수난을 당할 때, 이 집만은 구례에서 백성들로 부터 보호를 받았던 유명한 집이다. 배품의 상징이고 교육의 현장이다.
운조루 앞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집 앞에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은 아마 수기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산은 양이요 물은 음이기에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조상들의 토속적 풍수지리 개념이 적용되었으리라?
운조루와 왕시루봉
오미마을 앞 넓은 터에는 구례군 관광안내가 잘 되어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리라?
이 길은 이순신 장군이 백의 종군하는 길이기도 하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마을 안내도
오미리 버스 정류장-디자인이 참 세련됐다.
금환락지 남한 3대 명당인 오미리 들녁에 아침 기운이 감돈다.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
◎ 구만리 저수지와 지리산치즈랜드
구만리 저수지 지리산 호수 공원 주차장에 도착 하여 준비운동과 트레킹 준비를 하고 지리산 치즈랜드의 이국적인 풍광을 바라보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구만저수지 댐이 있는 곳까지는 지리산 둘레길 구간이 아니다. 난동에서 구만저수지 댐까지 지리산둘레길 4.1km 구간은 2차선 찻길이여서 많은 대원들이 이동하는데 위험이 따르고,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초입 4.1km는 걷지 않고 코스를 변경하여 구만저수지 수변을 따라 걷기로 한다. 후 발자는 난동에서 출발하길 바란다.
구만저수지 지리산 호수공원 주차장에서 바라 본 구만저수지에 비치는 지초봉과 까치절산의 데칼코마니가 참으로 아름답다.
공기도 상큼하고 기분은 만땅이다. 시작부터 아름답다.
준비운동 하고
구만제 다리를 향해서 출발
수상레저를 지나 구만제 수변길을 걷는다.
지리산 호수공원 오토 캠핑장도 지나고
지리산 치즈랜드를 멀리 바라보며
치즈랜드 언덕에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었다.
봄을 맞이한 동심과 여심은 추억 담기에 바쁘다.
아름다운 풍광 몇 장(박옥현 노무현재단 공동대표님 작)
구만저수지
구만저수지 다리
다리를 건너고
구만 저수지에 비치는 견두지맥이 아름답다.
이 길은 백의종군로 남도 이순신길이다.
구만저수지 안내
길가에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개나리도 활짝피었다. 지난주 만 하드라도 꽃망울이였는데 이번 주는 완전히 봄이다.
오늘 지리산 둘레길 구례순환 19코스인 난동에서 오미리까지 19km를 걸었다. 비교적 평평한 길이다. 구례읍을 관통하는 서시천변을 따라 걷는 동안 구례 지역의 역사와 삶과 자연 풍광을 만났다. 한결 같이 아름답고 고귀한 흔적들이다. 구례는 미래의 땅이라고 한다. 지리산 자락의 깊고 아름다운 삶의 뿌리가 잘 보전되어 있고, 공기가 맑고 사통팔달 교통이 뚫려 이제는 오지에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서시천과 섬진강변 벗나무가 일품이다. 벗꽃은 만개 직전이다. 활짝 핀 벗꽃을 만났으면 정말로 환상적인 트레킹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구례 순환 지리산 둘레길 19코스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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