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도진 병은 좀체로 잡기 힘들다. 기운이 다 빠지고 끝장이 나야 나을병인 줄은 진즉부터 안다. 이번엔 백두대간을 타고 오르면서 속리산에 꽃힌다. 백두대간 10대 명산을 오르는 병이다. 네번째다. 꼭두새벽에 광주를 출발한다. 바같 온도가 -17도를 오르 내리는 날씨로 무척 차갑다. 이 추운 새벽에 미치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출발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그래도 눈 덮인 속리산 정상에서 그리도 보고픈 천왕봉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미친 듯이 마음은 설레고 갈 길은 바쁘다. 몸은 차가와도 내 어딘지 숨겨진 뜨거운 열정이 솟구친다. 긴 시간을 지나 도착한 법주사 입구 주차장엔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예년 같으면 이 시간 많은 이들이 속리산을 오르려고 북적일텐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로 거의 정지한 상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개인방역을 철저히 하면서 속리산을 오른다.
속리산 천왕봉은 여러번 올랐다. 그러나 눈 덮인 겨울 산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속리산 천왕봉은 개인적으로 마음의 산이다. 한강 낙동강 금강의 물줄기가 퍼져 나가는 삼파수 봉우리이기도 하여 마치 온 대지를 적시는 어머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산이기 때문이다. 천왕봉 정상은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봉우리에 서면 한없이 편안하고 마치 고향집 어머님이 계신 튓마루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기분이다. 눈 덮인 칼바람이 불어도 마음은 어찌나 포근한지 늘 마음에 어른거린 어머님을 뵙는 기분이다. 오늘은 파란 하늘이 더 없이 청명하다. 속리산은 천왕봉 정상에서 문장대까지 펼쳐지는 장쾌한 산줄기도 장엄하지만 산줄기 곳곳에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기암들이 장관이다. 남도의 월출산, 서울 북한산과 강원 설악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암릉으로 기암을 품은 산이다.
6. 산행 추억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욕심과 탐욕, 집착 등 세상의 온갖 5욕 7정을 버리고, 마음에 찌꺼기를 다 비우고 감정에 치우침이 없는 평온한 상태로 수없는 번뇌와 고통을 이겨내고 도달하는 극치의 순수한 상태일까? 속리산을 오른 내내 이 화두를 안고 오른다. 하늘은 파란다가도 금방 흐려지고, 꽃은 피었다가 지고, 푸르른 녹음은 어느새 낙엽되어 지고 나면 이렇게 꽁꽁 얼어 붙어 한 겨울을 지나도 온 천지는 말없이 그냥 잘도 돌아가고 있지 않는가?
현상은 그대로 인데 그것을 보고 느끼는 나의 감정이 여러가지로 춤을 추고 그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깨우친단 말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될 것을? 현상과 생각, 느낌과 감정은 따로 따로 인가? 연관되어 있는가? 극도의 고통속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가? 극도의 추위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가? 극도의 공포속에서도 용서와 연민을 갖을 수있는가? 욕심과 탐욕, 집착속에서도 무심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있다면 그것이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닐까? 세속과 이별한다는 속리산을 오르면서 드디어 나는 한마리 새가 되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거침 없이 세상을 훨훨 날아 속세를 떠난다. 속리산 창공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