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둘레길,트레킹길/지리산둘레길

2023.06.25. 산청 남명 조식선생(남명 기념관-산천재-덕천서원) 경의 사상을 따라 걷는다.

by 하여간하여간 2023. 6. 29.

◎ 남명 조식 처사를 만나는 소감

 

남명 조식선생을 만날 수 있어 가슴이 뛴다.

 

학창시절 남명 조식선생에 대하여 어렴풋이 들었다.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훌륭한 선비이다' 정도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가르친 산천재를 여러번 들렸지만 그냥 지나갔을 뿐 깊이 있게 들여다 보지 못했다. 이번에 지리산 둘레길 9코스를 걸으면서 다시 남명 조식 선생님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들여다 보면 볼 수록 깊이가 한이 없고 우러려 본받아야 할 덕목이 헤아릴 수 없어, 내 나이 6학년 중반을 넘어서 이런 훌륭한 분을 만난 것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시대에 사셨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울림이 크다.

 

경은 내 안에 있는 순수한 정신을 찾아가는 수양 방법이다.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하여 마음을 한결 같이 함으로써 사사롭거나 사악한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공부가 경이다.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고 나와 남의 불의함을 제거하는 공부가 의이다. 의로운 마음으로 의로운 언행에 집중하여 사심을 없애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므로 경과 의는 둘로 분리되지 않는다.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 사상은 나의 정수리를 친다.

 

남명은 매일매일 사람들이 살가는 일상이 학문 연구와 실천의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일상에서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몸소 실천해야 하며, 이것에 충분히 익숙해진 이후에 형이상학적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을 하학상달 즉 아래로는 인사를 배우고 위로는 천리에 통달하는 공부라고 하는데, 남명은 그 순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소학의 가르침인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 조차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이상학 연구에 몰두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은 이때문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실천을 우선 가르쳤고, 당대의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하려는 학풍을 조성하였다.

 

작금의 한국 교육에 경종을 울리는 청둥소리이다. 자기방 청소하나 못하면서 고시를 합격해 무엇하리오? 실천을 강조한 남명 조식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크게 와 닿는다. 떨린 마음으로 그의 행적을 한 올 한 올 펼쳐본다.

 

 

남명기념관 - 산천재 - 조식선생 묘소 - 덕천서원 순이다.

 

◎ 남명 조식 선생 

 

◎  산청 조식 유적

 

산청 조식 유적은 조선시대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사적지이다.

 

남명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 아버지 조인형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30세가 되어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고, 48세부터는 고향인 합천 삼가에 뇌룡정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그 명성이 알려져 조정에서 수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여 그 명성이 더더욱 높아졌는데, 특히 명종 10년(1555)에 내려진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통해 정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산동(현재 지리산 시천면)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인재 양성에 힘쓰며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72세에 생을 마감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 추증 : 관리의 사후에 품계나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   

 

산청 조식 유적은 사리와 원리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리에는 산천재와 선생의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이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정구, 김우옹, 곽재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후 이곳은 남명 문집을 간행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산천재 건너편의 남명 기념관 경내에 신도비**가 있고 기념관 우측에는 덕천서원과 별도로 문중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여재실이 있으며 그 뒷산에 묘소가 있다.

덕천서원은 선조9년(1576) 남명의 학덕을 기르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고종 7년(1870)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1920년대에 복원 하였다. 서원안에는 강당인 강의당과 사당인 숭덕사가 있다. 서원 남쪽 강가에 있는 세심정은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여가를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 신도비 : 임금이나 이품 이상 벼슬을 한 고위관료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하여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비석

 

1. 남명기념관

 

성성문

 

남명 기념관 

 

남명 기념관 입구

 

 

◎ 남명 조식

 

남명조식(南冥曺植)


용신용근(庸信庸謹) :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한사존성(閑邪存誠) : 사악함을 막고 진실함을 보존하라
악립연충(岳立淵冲) :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엽엽춘영(燁燁春榮) : 움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 신명사도

 

신명사도

 

경천왕도

내명자경

외단자의

 

「신명사도」는 곽내·곽외·하단으로 되어 있다.

그 요지는 미발시의 경(敬)을 통한 존양(存養), 이발시의 의(義)를 척도로 하는 성찰(省察),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석에서 물리치는 극치(克治), 이렇게 삼단계 수양론을 통해 지선(至善)에 이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곽내는 인간의 신체를 의미하는데, 주재자인 태일군이 머무는 집이 신명사이다. 그의 정사는 천덕과 왕도이며, 사직과 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에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 5자를 표기하였다. 곽내는 조정의 일로 총재가 관장하는데, 경을 통한 존양이 근본이므로 그 이름을 ‘경(敬)’이라 했다.

 

곽외는 신체 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 이발시에는 마음의 기미를 잘 살펴야 하는데, 입·귀·눈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관문으로 표기하여 성찰을 강조했다. 그 담당자가 백규(百揆)이기 때문에 그 옆에 ‘치찰(致察)’이라 써 넣었다.

 

세 관문에는 대장기(大壯旂)가 펄럭이며 ‘심기(審幾)’라 표기해 놓았는데, 기미를 엄정하게 살피는 것을 말한다. 그 옆에 병기한 ‘극치(克治)’는 사욕의 기미가 발견되면 즉시 극복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대사구(大司寇)다.

 

하면은 경을 통해 존양하고, 의를 척도로 성찰하고, 사욕을 극복해 물리치고 나면 지선의 경지에 이르러 머문다는 뜻이다.

 

◎ 남명 학맥도

남명 학맥도

 

◎ 한눈에 보는 남명이 삶

 

 

◇ 1501년

한 줄기 빛이 내린다 

 

6월 26일 경남 합천군 토종에서 부친 조인형 (승문원판교) 모친 인천이씨 사이의 삼남 오녀 중 이남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가 판현에 있었고 토동은 선생의 외가이다. 선생의 자는 건중이고 호는 남명이다. 

 

◇ 1518년

뜻을 세워 굳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다

 

부친을 따라 서울 창의동으로 이주했다.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밤을 세우고 허리에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정신을 맑게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수양 방법을 스스로 마련해 실천하였다. 이웃에 살던 대곡 정운과 교류하고 청송 정주침 등의 친구들과도 사귀었다.

 

◇ 1519년

사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인생의 행로를 바꾸다

 

1519 (중종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남곤 홍경주등 권신 정치가들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시류들이 숙청 당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남명은 가문의 재건을 바라던 어머니의 권유도 불구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관직을 얻어 출세하는 데 목표를 두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인격완성이라는 학문 본연의 목표에 부합하는 공부에 몰두한다.

 

◇ 1525년

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하고 학문에 정진하다

 

산사에서 성리대전을 읽다가 노재 허형의 "이윤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의 학문을 배워서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처럼 해야할 것이니, 벼슬에 나가서는 하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는 지키는 바가 없의면 뜻한 것과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는 구절을 읽고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육경 사서와 주성장주의 학문에 전념했다.

 

◇ 1530년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기상을 기르면서 당대의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다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했다. 산해정을 지어 거주하면서 태산에 올라 사해를 굽어 보는 기상을 길렀으니 한사조성 악립인충 하는 인격을 닦았다. 이렇게 형성된 남명의 우뚝한 기상은 "가을날 서릿발 같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같았으며 천길 낭떨러지 같았다 " 고 평가 되었다. 대곡 성운, 청양단 이원, 황강 이희안, 송계 신계성 등 명유들이 모여 함께 학문을 토론하면서 침체한 선비의 기상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 1548년

고향 삼가로 내려와 배움을 실천하다

 

1545년 모친을 여의자 삼가에 안장하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학문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모여들자 계부당과 뇌룡사를 지어 자신과 제자들의 거처로 삼고 강학하였다. 중년에 들어 헌릉 참봉, 진생서 주부, 단성 현감 등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1555년 (명종10) 단성 현감 임명을 사양하는 상소(을묘사직소)는 조야를 놀라게 했다. 불의에 맞서는 재야 지식인 남명의 모습이 우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1561년

산천재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다

 

지리산 아래 덕산 사륜동으로 옮겼다. 산천재를 세워 거처와 강학 장소로 삼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 1566년

벼슬을 사양하면서 조정에 진언하다


66세에 포의로 왕과 독대하고는 치국의 방책과 학문의 요체를 진언했다. 선조가 즉위하여 여러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던 그는 이때 한번 나가서 할 말을 다 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번 상소를 올려 개혁안을 건의 하였고 건의한 계책들을 속히 실행해 주길 촉구하기도 히였다.

 

◇ 1572년

경의 사상을 남기고, 처사성이 빛을 잃다

1월 옥계 노진, 내암 정인홍, 동강 김우용 등의 제자들이 찾아와 문병하였다. 자신이 죽은 후 칭호를 처사로 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한 남명은 2월 8일 산천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경의를 역설하였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 임금은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벼슬을 추증했다. 뒤에 다시 영의정을 추증하였고 문정 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예관을 보내 영전에 제사 지냈다.

◇ 1592년

임진왜란 남명의 제자들이 나라를 구하다

남명은 학문이란 세상을 조감하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는 일이며,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한 몸 한 가정의 안위보다는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 선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발발초기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곳이 경상우도이며 의병장 중에는 남명의 제자가 가장 많았다.

 

 

◎ 남명사상의 기틀

◇ 깨달음을 얻은 정진의 방향

 

성리대전을 읽던 남명은 원나라 학자 노재 허형의 "이윤의 뜻을 뜻으로 하고 안연의 학문을 배워서,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처럼 해야할 것이니, 벼슬에 나가서는 하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는 지키는 바가 없으면, 뜻한 것과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는 대목을 읽고, 관직을 얻어 입신양면하기 위한 과거공부보다 더 원대한 공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육경과 사서 및 송시대의 대학자들이 남긴 글들을 공부하였다.

 

 

◇ 남명사상의 기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에는 이기론 등 관념적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남명은 성현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인격완성이 학문의 근본 목적임을 깨닫고 가르친 남명은 정신 내면을 단련하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공부에 정진하였다. 공자, 주렴계, 정명도, 주자 4성현을 모범으로 삼고자 한 남명은 이들의 초상화를 병풍에 그려 감실에 모셔놓고 아침마다 우러러 절하였다.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극진한 정성을 기울였다.

 

◎ 처사의 삶

천왕봉 처럼 우뚝솟은 재야의 선비

 

 

남명은 과거를 포기한 후 관직을 제수받아도 벼슬에 나가지 않는 재야의 선비로 일관하였다. 외척의 국정 농단이 난무하는 정치 현상에 절망하고, 공직기강의 해이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을 가슴 아파하여, 달 밝은 밤 잠 못 이루면서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사 거부는 무도한 정치가 행해지던 시대에 대한 저항자의 의로움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그런데도 세상과 사람을 버리지 않는 남명은 상소를 통해 국정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대비를 "깊은 궁궐 속의 한 과부", "국왕 명종을 "선왕의 고아"라고 묘사한 을묘사직소, 서리망국론을 개진한 무진봉사는 대표적인 상소문이다.

 

◎ 남명의 자취

 

 

◎ 경의 사상

경을 통한 내적 성찰, 의에 준한 외적 극기

 

경과 의를 해와 달처럼 소중하게 여긴 남명은 경의의 실천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다.

경과 의가 그 남명 사상의 정수이다. 경은 내 안에 있는 순수한 정신을 찾아가는 수양 방법이다.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하여 마음을 한결 같이 함으로써 사사롭거나 사악한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공부가 경이다.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고 나와 남의 불의함을 제거 하는 공부가 의이다.

의로운 마음으로 의로운 언행에 집중하여 사심을 없애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므로 경과 의는 둘로 분리 되지 않는다. 남명은 경의의 공부를 위해 '성성자' 라는 방울과 '경의 검'이라는 칼을 찼다. 

 

 

 

패검명

내명자경 :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외단자의 :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

 

혁대명

살자설 : 혀는 내는 것이요

혁자결 : 가죽은 묶는 것이니

박생룡 : 살아 있는 용을 묶어서

장막충 : 깊은 곳에 감추어 두라

 

 

◎ 성성자 와 경의겸

 

 

성성자(惺惺子) : 남명 선생이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삼던 방울
경의검(敬義劍) : 남명 선생이 평소에 마음을 수양하기 위하여 차고 다니던 칼

 

 

◎ 문무를 함께 중시

경과 의의 사상을 제자들과 함께 행동으로 실천

 

남명은 관리들의 뇌물 수수, 서리의 회포 등 정치적 부패를 날카롭게 지적하였고, 왜구의 침탈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중심에는 경의 사상이 있었는데, 자신이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가르쳐 인격 함양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후일 정승을 지내게 되는 제자 약포 정탁이 진주향교 교수를 이임하면서 인사차 찾아오자 남명은 뒤뜰에 있던 소를 타고 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성격이 급한 제자를 훈계하는 것이니, 그가 추구한 학문의 목적은 타고난 기질을 변화시켜 인격을 완성하는데 있었다.

 

 

◎ 문장에 담긴 큰 뜻

남명의 위대한 사상과 이념은 시, 상소문, 편지 등과 후일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남명집」과 「학기유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 남명집

 

남명의 시와 문을 모은 문집이다. 남명은 별다른 수식이나 화려한 장식 없이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장을 선호하였다. 말보다는 실천에, 외양보다는 진심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의 정신은 문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남명은 몸과 마음을 바꾸는 수양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학문함의 본령이라고 강조하였다.

 

 

◇ 학기유편

 

남명은 평소 글을 읽을 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구절들을 수시로 기록하여 두었다. 이것을 책자로 만든 것이 「학기」인데 일종의 비망록이다. 남명은 번거로운 주석이나 논쟁보다는 선현들의 언행 가운데 요점만을 집약하여 실천에 대비하였다. 이 「학기」를  「근사록」의 체제에 맞추어 후학들이 편집한 책이 「학기유편」이다. 「남명선생학기유편」이라고 불린다.

 

 

◎ 의로움의 실천

임진왜란 때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켜 그 빛을 발했다.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난 남명은 의를 중시하고 실천을 강조하였다. 기상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성리학 뿐만아니라 노장, 천문, 병법, 등 백가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학습을 통해 얻은 실질적인 요점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의병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등인데, 모두 50여 명에 이른다.

 

◎ 뜻을 함께한 사귐

 

 

◇ 남명과 퇴계 이황(1501~1570)

16세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었던 남명과 퇴계.

두 거유는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서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 퇴계는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섰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은 없으나, 서로 존경하며 서신으로 깊이 교우하였다.

 

 

 

◎ 문무를 아우르는 교육자

깊이 성찰하여 답을 구하고 직접 실행에 옮기다.

 

 

◇ 하학상달

 

남명은 매일매일 사람들이 살가는 일상이 학문 연구와 실천의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일상에서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몸소 실천해야 하며, 이것에 충분히 익숙해진 이후에 형이상학적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을 하학상달 즉 아래로는 인사를 배우고 위로는 천리에 통달하는 공부라고 하는데, 남명은 그 순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소학의 가르침인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 조차 실천하지 않으면서 형이상학 연구에 몰두하는 현상을 비판한 것은 이때문이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실천을 우선 가르쳤고, 당대의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하려는 학풍을 조성하였다. 

 

 

 

◎ 남명의 재 조명

 

 

 

◎ 남명 정신의 계승

 

 

◎ 덕천서원

 

 

◎ 문인들의 의병활동 문무병중

 

남명의 경의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어져 경상우도의 학풍이 되었다. 이에 더해 남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문무병중의 교육을 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항쟁을 벌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제자들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 섬으로써 선비정신을 실천하였다.

 

 

 

신도비, 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 상소문 비석

 

남명기념관 정원에 오른쪽에 세원진 남명 조식 선생 동상과 신도비

 

 

2. 산천재

산천재 (국가 문화재 사적 제 305호)

 

서북쪽으로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 그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과 삼장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양당에서 다시 만나 덕산을 이룬다. 덕산에 위치한 산천재는 바로 조선중기의 큰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이 61세 부터 돌아가실때 까지 평생 동안 갈고 닭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화생들에 의해 계승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효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게 되었다.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유학의 종사로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사뭇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천문, 지리, 의약, 국방, 음양, 도류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돈이, 소웅, 장재, 정이 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 원시유학으로 돌이가 공자와 안자의 고풍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선생의 경의정신 (敬義精神) 과 실천 유학은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저 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를 살았다. 이같은 시대를 맞아 선생은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학을 통감하면서 직설적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을 외면 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횡포, 조정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닥지 않은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 이였다. 특히 선생이 올린 을묘사직소나 무진봉사 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가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생의 명명과 은연 중에 형성된 재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선생을 벼슬로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나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평가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한 기상으로 만품을 굽어 보고, 추상연일 같은 위엄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셨다. 선생의 이같은 기상과 위엄, 출처와 학문은 만세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였으며, 그 문도들은 이를 스스로가 본 받고 또한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서원을 짓고 강학 활동을 벌였다.

 

국가문화제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산천재 일원은 바로 이같은 일련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현제 사적지 안에는 남명선생이 당시 문도들을 가르치던 산천재, 영면하고 계시는 묘소, 위패를 모신 여재실, 선생의 학덕을 기르기 위해 세운 신도비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강우유림의 본산으로 선생을 봉향한 덕천서원이 있다. 이 서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가 있어 봄과 가을로 향사를 올리며 매년 가을에는 선생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비문화축제의 일환으로 남명제가 열린다. 또한 경내에는 남명기념관이 새롭게 조성되어 남명 선생의 삶과 사상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선조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 새긴 비석

 

남명 선생 시비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

請看千石鍾  천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爭似頭流山  어떻게 해야만 두륜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이 시는 남명 선생께서 예순한 살 때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인 시로써

남명 선생의 정신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산천재로 들어가는 문

 

남명매가 반갑게 맞이 한다.

 

산천재와 남명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듯 품격 높은 고매(古梅), 남명매. 

남명이 산천재를 지을 당시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는데 이 나무가 바로 남명매. 

 

산천재 앞 남명매와 지리산 천왕봉

 

남명은 이곳에 산천재를 세우면서 매화 나무를 심었다. 아마 제자들에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제일 먼저 꽃을 핀 매화처럼 자신의 몸가짐을 항상 바르게 하고 경에 의한 인격완성을 개을리 하지말며, 의에 의한 실천을 하도록 하는 가르침의 이였을 것이다.

 

건강하게 자란 남명매

 

시천 산천재 남명매와 예담촌 원정매(홍매) 그리고 단속사지 정당매를 산청 3매라고 한다.

 

 

산천재 (山天齋)의  산천(山天)이란 주역 대축괘(大畜卦)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산천재의 주련

 

 德山卜居)(덕산에 터를 잡고)

春山底處無芳草 봄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只愛天王近帝居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이 좋아서 왔네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까 하지만
銀河十里喫有餘 은하 십리 흐르는(덕천강) 물 마시고도 남으리.

 

 

 

산천재

 

입구에 있는 2동의 건물.

한채는 거주를 할수 있는 작은 방이 있고, 그 옆 건물은 남명문집의 목판고

 

산천재 서북쪽으로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

특히 남명 조식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하생들에 의해 계승되어,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효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고 있다.

 

 

산천재 아래 덕천강변에서 바라 본 지리산 천왕봉

 

3. 남명 조식의 묘소

남명 조식의 묘소는 산천재에서 둘레길을 따라 오다 보면 큰길 오른쪽으로 남명조식 묘소 가는 길 표지가 있다. 이곳도 반드시 둘러볼 곳이지만 시간 관계상 둘러보지 못하고 어떤 분의 블로그 내용을 여기 소개 한다.

 

아래쪽이 숙부인 은진 송씨 부인의 묘이고, 뒷편 윗쪽이 남명 조식 선생의 묘이다.

 

은진 송씨 부인은 남명 조식 선생의 두번째 부인이시며, 남명 조식 선생과 3남1녀를 두었다.

 

여기서 잠깐 첫번째 부인은 어디에 계실까?

 

산해정(김해 신산서원)

남명 조식 선생의 첫번째 부인은 정경부인 남평 조씨인데, 1남1녀를 두었고, 고향인 김해에 묻혔다.

남명 조식 선생이 서울에 있다가 낙향하여 처가인 김해에서 오래 사셨다. 그곳이 김해 산해정이다.

 

남명 조식 선생과 남평 조씨 부인의 첫아들 차산(次山)은 영특하여 그의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박명하여 9살에 세상을 떠나 김해의 뒷산에 묻혔다.

남명 조식 선생과 남평 조씨 부인이 많이 상심하셨다.

 

 뇌룡정(합천 삼가 통동)

 

남명 조식 선생은 이후

김해를 떠나 고향인 합천 삼가 토동으로 돌아가서 뇌룡정을 짓고 정착하는데,

두분 사이가 원만치 못했는지 부인은 김해에 남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남명 조식 선생이 또 세월이 지나 61세 되어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들어와 마지막으로 자리잡은 곳이

이 묘소가 있는 산 아래 산천재(山天齋)다.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은 이곳에서 그의 뒷바라지를 하던 은진 송씨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은진 송씨 부인은 이때 18세였다. 나이차이가 엄청 난다.

 

남명 조식 선생과 숙부인 은진 송씨는 원만했는지 3남1녀를 두었고, 은진 송씨는 1610년에 80세 가까운

나이까지 장수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같이 묻혔다.

 

묘소 옆에 남명 조식 선생의 묘갈명 비문

 

"徵士 增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文貞公 南冥 曺先生之墓"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 지묘

평소 묘비에 적히길 바랬던 처사(處士)가 아니라 징사(徵士)라는 낯선 단어가 적힌 것이 의외다.

징사의 뜻이 궁금하다.

 

학식과 덕행(德行) 혹은 절행(節行)이 뛰어난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천거(薦擧)어 조정에

나아가는 것. 또는 그 선비를 말함.

남명 조식 선생께서 벼슬을 거부하고, 묻혀 살면서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지고, 돌아가신 후에 정1품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래도 남명 조식 선생이 바랬던 대로 처사(處士)라 했으면 더 좋아하셨을 것 같다.

 

 

4. 덕천서원

덕천서원은 지리산 둘레길 9코스 중에서 반드시 둘러보아야 하는 곳인데 선두와 시간 차이가 많이 나 둘러보지 못했다. 대신 여기 여러분들의 블로그 내용을 담아서 정리하였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조선 중기 대표적 산림처사(山林處士)였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그의 제자들이 세웠으며, 그 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다시 중건(重建)되었고, 1608년(광해군 원년) 선생에게 영의정(領議政)이 추증(追贈)되고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사액(賜額)되어 크게 확장(擴張)되었다.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는 홍살문

 

솟을삼문으로 된 덕천서원의 정문(正門)인 시정문(時靜門) / 오른쪽 문으로 들어간다

 

덕천서원 경의당

 

1576년(선조 9) 남명 조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1609년(광해군 1) 덕천(德川)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으며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강학영역(講學領域)이 마주한다. 강학영역은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배치되어 있다.

 

 

학문을 토론하고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던 정면 5칸의 경의당(敬義堂).

 

 

경의당 편액

경의(敬義)는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義)를 중요시하는 남명의 가르침을 따르자는 의미다.

 

 

동재인 진덕재(進德齋)

 

진덕재 편액

 

수업재(修業齋) 현판이 걸린 서재

 

한국 서원의 전형적인 건축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강당(講堂)을 앞에 두고 사당(祠堂)을 뒤에 배치하는 구조이므로, 제향영역(祭享領域)인 숭덕사(崇德祠)는 강학영역(講學領域)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의 뒤쪽에 자리한다.

 

경의 당 뒷편의 내삼문과 숭덕사

 

내삼문을 들어서면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제례(祭禮)를 드리는 숭덕사(崇德祠)가 자리한다.

 

숭덕사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숭덕사(崇德祠)에는 남명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현재도 봄과 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追慕)하는 남명제(南冥祭)를 지내고 있다.

 

 

서원을 다시 둘러보려니 배롱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남명 사상을 배우고자 한 후학들이 만개한 붉은 배롱나무 아래에서 고고한 시간을 보내을 것이다.

 

장판각

 

숭덕사의 서쪽 담장 너머로 서적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보인다.

 

 

5. 세심정

 

시천천변에 세워진 세심정

 

 

세심정 옆에는 남명 선생의 시비(詩碑)가 있다.


<욕천(浴川)-냇물에 목욕하다>
전신사십년전루(全身四十年前累)-온 몸에 쌓인 사십년 간의 허물
천곡청연세진후(千斛淸淵洗盡後)-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진토상여생오내(塵土倘餘生五內)-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직금고복부귀류(直今刳腹付歸流)-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시비와 세심정

 

 

 

시천천물이 맑다. 어쩌면 저 맑은 물이 남명 선생의 기상과 의로움을 품고 유유히 흐른지 모른다. 오늘 따라 더욱 시천천의 맑은 물이 깨끗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