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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1.11.20. 천년고찰 화순 쌍봉사 대웅전(보물163호), 철감선사탑(국보57호)과 철감선사탑비(보물170호)를 찾아서

by 하여간하여간 2021. 11. 21.

□ 천년고찰 화순 쌍봉사를 찾아서

화순 쌍봉사는 국보가 있는 절이다. 천년고찰이면서도 아늑하고 정비가 잘 되어있는 절이다. 고등학교시절 친구를 따라 이절을 찾는 것이 처음이다. 그러니까 1978년쯤 될까? 암튼 지금의 대웅전이 아닌 소실되기 전 대웅전을 기억한다. 나중에 쌍봉사 대웅전이 소실되고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로 오래전에 쌍봉사를 찾은 적이 있다. 그 때는 국보 철감선사 부도탑과 보물 철감선사 부도탑비가 인상적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오늘 화순 쌍봉사를 다시 찾았다. 추억도 추억이지만 국보급 보물인 철감선사부도탑을 보고 싶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화순 쌍봉사도 절집답게 규모가 잘 갖추어지고 깔끔하게 군더더기없이 정비되어 있었다. 일주문, 천왕전, 대웅전, 극락전, 지장전, 나한전, 범종, 요사채 등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한가하면서도 청아한 깊이가 온몸을 감싼다. 더구나 철감선사 부도탑과 탑비는 신라 최고의 도공이 만든 걸작이기에 화순 쌍봉사는 나에게 남다른 절이다. 

 

고3 때 보았던 쌍봉사 대웅전 옛 모습이다.

  

□ 천년고찰 화순 쌍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쌍봉사 창건은 신라 신무왕 원년(839)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해는 신라 장보고가 청해진 장군으로 임명된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신라말기로 왕권이 약화되고 어지러운 정국이었다. 나말여초기에는 견훤 세력을 후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최씨무신정권 3대 집권자인 최항이 주지를 지냈다는 점으로 볼 때 사세가 대단했을 것 같다.(위키백과)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사세가 꺾여 갔고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과 재산이 소실되는 수난을 당했다니. 일본의 만행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현재는 많은 보수와 정비가 이루어져 편안하고 수려한 느낌을 준다. 쌍봉사에는 국보와 보물이 한 점씩 있다.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가 그것이다. (위키백과)

 

 

일주문/쌍봉사자문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의 땅을 면세해 주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에 중건하였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왕문

 

창건주인 철감선사의 호를 따라 쌍봉사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철감선사는 847년(문성왕 9)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868년(경문왕8년) 이 절을 창건하여 신라 선종구산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후 점차 퇴락한 것을 1081년(문종 35) 혜소국사가 중건했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였던 김방이 시주하여 중창한 바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28년(인조 6)에 중건했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건했다.(다음백과)

 

 

증장천왕과 광목천왕
다문천왕과 지국천왕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었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대웅전은 1628년(인조 6)에 중건되었고, 1690년, 1724년에 중창이 있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웅전은 1984년에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1986년에 복원되었다.

 

1984년 화재로 소실된 쌍봉사 대웅전

3층의 정방형 단칸집으로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지닌 탑파형 건물이었다. 3층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으므로 커다란 자연석 주초 위에 투박하게 마름질한 굵은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로 1층은 토벽, 2·3층은 판벽으로 처리했다. 2·3층으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체감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고층건물이 주는 불안감과 위압감 대신에 안정감을 주고 건물 수명을 늘리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으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붕의 무게로 인해 추녀머리가 숙여지지 않도록 건물 중앙에 굵은 찰주를 세웠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화순 쌍봉사 지장전

 

 

화순 쌍봉사 극락전

 

 

화순 쌍봉사 나한전

 

 

화순쌍봉사 호성전

 

 

 

화순 쌍봉사 부도탑가는 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제57호. 높이 230cm. 신라 석조부도의 일반형인 8각원당형으로 화강암제이며 기단부 위에 탑신과 옥개석이 있으나 상륜부는 없어졌다. 옥개석의 기왓골과 가구 수법 등의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했다. 기단부와 탑신부에는 사자·가릉빈가·사천왕·비천 등을 조각했는데 각 상의 구성이 안정되어 있고 조각수법도 훌륭한 편이다

 

8각의 지대석은 현재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며, 하대석에는 모두 구름무늬를 양각하고, 구름 사이로 쌍룡이 서로 마주보는 형상을 조각했다. 하대석 상단에는 각 면마다 다양한 자세를 취한 사자를 1구씩 안치했고, 중대석에는 얼굴이 큰 가릉빈가를 새겼다. 상대석 탑신 굄대의 8면에는 안상을 깊이 음각하고 그 안에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를 1구씩 양각했다.

 

탑신부 귀퉁이는 배흘림이 현저한 원형기둥으로 8면을 구획하고 4면에는 사천왕상을, 2면에는 공양비천상을, 전면과 후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했다. 낙수면이 평박한 옥개석 위로 유려한 선의 기왓골을 표시하고 그 아랫면에는 비천·향로·꽃무늬를 조식했다. 부도의 건립연대는 철감선사가 입적한 868년(경문왕 8)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보물 제 170호)

 

 

화순 쌍봉사 부도탑 모습

 

 

화순 쌍봉사 부도탑 탐방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화순 쌍봉사 범종각

 

 

화순 쌍봉사 이모저모

 

 

화순 쌍봉사 여러 요사채

 

 

화순 쌍봉사 탐방을 마치고

 

 

옛 쌍봉사 대웅전과 극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