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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1.10.29. 천불 천탑 전남 화순 운주사

by 하여간하여간 2021. 11. 2.

1. 2021.10.29. 탐방

 

농경사회가 주를 이룬 호남에는 유난히 절집이 많다.

 

태어나면서 부터 노비로 태어나 죽도록 고생의 멍에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민초들에게는 하늘을 우러러 그 긴 고역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했을 것이다. 그 염원이 당시에는 부처님이 아니였나 싶다. 민초들은 나를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부처만이 극락이며 부처의 세계에서 비로소 내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를 맘속에 안고 고통의 나날을 이겨냈을 것이다.

 

부처는 차별이 없는 세상을 가르쳤으며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너와 내가 따로가 아니고 하나임을 알고 모든 생명과 무생명이 다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대하듯 하라 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 민초들이 꿈꾸는 극략정토가 천개의 불상을 세우면 이루어 지리라는 믿음으로 호남 민초들과 석공들과 신도들 그리고 스님들이 한 뜻으로 천개의 석불과 탑을 만들어 세운 절이 화순 운주사이다.

 

화순 운주사 일대는 다행이 천개의 불상을 세우는데 필요한 돌들이 즐비하다. 운주사 주변의 돌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무등산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어리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이다. 운주사 주변에 이 응회암의 판상 돌들이 있었기에 운주사 석불과 석탑이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의 석불과 석탑은 보통의 화강암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납작하고 형태가 뚜렷치 않다.

 

아무튼 화순 운주사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불과 석탑이 많다. 지금은 91기의 석불이 남아 있지만 그 석불들 하나 하나가 숙련된 석공이 만든 것이 아니라 민초들 누구나 함께 만들면서 민초들의 자기 모습을 새겨 놓았기에 운주사 석불은 민초이며 극락정토을 염원한 우리네의 할아버지 할머니인 것이다.

 

운주사를 여러번 왔지만 어디에도 웅장함이란 없다. 그저 친숙하고 포근한 고향집 툇마루에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숨 자고 싶은 그런 곳이다. 편안하다. 그런 천불 천탑 운주사를 이번엔 맘 먹고 둘러 본다.

    

 

2. 화순 운주사(雲柱寺)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 또는 靈龜山)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이다.

 

창건설은 3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1.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

2. 운주(雲住)스님이 주도했다는 설.

3. 마고 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통일신라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천불과 천탑을 세웠다라고 합니다.

 

 

비보裨補사찰이라 함은 ‘돕고 보호한다’는 의미로 강한 곳은 부드럽게하고 허한 곳은 북돋워줌으로서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면서도 호국과 중생들의 이익을 도모한 도선국사의 지혜가 담긴 사찰을 의미합니다.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 혜명(惠明)스님이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스님은 970(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스님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어 운주사가 고려초기에 건립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1481(조선 성종 12)에 처음 편찬되고 중종 25(1530)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조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 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984 ~ 90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늦어도 11세기 초인 고려초기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홍치 8(弘治八年, 1495, 연산군 1) 운주사환은(雲住寺丸恩)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4번째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찰의 이름이 '운주사(運舟寺)' 뿐 아니라, '운주사(雲住寺)'로도 불렸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후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왜적에 의해 폐사되었다가

 

1800년경에 설담 자우(雪潭 自優)스님이 무너진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했으며

1921년에 발간한 도암면지 1918년 불자 16명이 시주하여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사찰 경내에는 조각수법이 정교하지 않고 투박한 80여기의 석불, 21기의 석탑, 173기의 불재 및 탑재관련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조성연대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7 3 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이란 이름으로 천불천탑 운주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최종 등재됐습니다.

 

운주사의 대표적 유물은 운주사 9층 석탑(보물 제796), 석조불감(보물 제797),·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 와형 석조 여래불(전남유형문화재 제273)을 비롯해 총 16건의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3. 화순 운주사 둘러보기

 

 

 

화순 영귀산 운주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고

 

 

 

일주문 가운데 거북이 자리잡고 있는데 무슨 이유일까? 영귀산의 귀자가 거북이나 남생이를 의미한다. 거북 구자로도 읽지만 운주사는 귀자로 읽어서 영귀산이라고 한다. 거북의 영혼이 깃든산이란 의미 일까? 거북은 장수와 복을 의미한다는데~

 

 

고즈넉한 산책길을 지나서

 

 

어느 절집처럼 웅장하거나 숲이 우거지거나 하지 않고 우리 동네 어느 한가한 들녁을 지난 것처럼 편하다.

 

 

연장바위와 석재군 가

이 바위는 운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천 불 천 탑을 하루 만에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하여 석공들과 동자승이 천불 천탑을 하루만에 세우고 있었다. 이 때 일하기를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닭 소래를 내자 석동들이 날이 샌 줄 알고 연장을 이 바위에 두고 갔다고 하여 연장 바위라고 한다. 

 

 

 

연장바위 앞에는 운주사 안 여기저기에 있던 석재 중 원반형 옥개석 1개와 활주초석 1개 등을 모아 놓았다.

 

 

 

 

화순 운주사지

사적 제312호/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천태로 91-44

 

운주사는 석불과 석탑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는 특이한 사찰이다. 

 

 

무등산 산 정상 부근에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분포하고 있는  무등산 주상절리대를 비롯한 무등산을 중심으로 광주, 담양, 화순 등 무등산이 분화하여 이룬 무등산권 분화구에 산재한 각종 지질적 요소와 그 주변 문화적 요소를 종합하여 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운주사도 그 중에 중요한 곳이다.

 

 

 

운주사구층석탑

운주사는 풍수지리상 배형국이라 하고 9층석탑은 돛대 역할을 한다고 전하는데,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며 석탑 옆면의 꽃문양이 이색적입니다.

보물 제796호. 높이 10.7m. 이 석탑은 운주사 석탑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고 높은 것으로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3, 4단의 각형 받침을 조각하고 그 위에 바로 탑신이 놓여 있는 형식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생략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1층 옥신은 6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고 각 면에는 우주와 그 안쪽으로 보조우주가 새겨져 있다. 2, 3, 4층의 옥신은 1층 옥신과는 달리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그 사이로 2중의 마름모꼴 안에 4엽화무늬[四葉花紋]가 장식된 문양이 새겨져 있다. 5층 이상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문양은 마름모꼴 안에 꽃무늬가 있는 경우와 十자 모양이 새겨진 경우가 있다.

 

 

 

 

화순 운주사 칠층석탑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1기로,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198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2차 발굴 당시 석탑 주변을 개토하였을 때 이제까지 묻혀 있던 석괴형 기단(방형 지대석) 밑의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는데, 이때 모습을 보면, 방형 기단은 약 1m내외의 돌로 기단을 받치고, 그 위에 거대한 석괴형 기단을 올린 상태였다. 탑의 총높이는 9.6m이며, 기단 주변에는 납작한 돌로 탑구(塔區)를 돌리고 기단석과 탑구 사이에는 방형 판석을 깔았다. 석괴형 기단은 측면에도 잘 다듬었으며, 상면에는 원형 1단괴임을 조출하여 위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은 4매의 판석인데, H자형 모양으로 결구되었고, 남쪽면의 1면석이 결실되어 내부의 적심석들이 노출되었으나 근년에 보수하면서 끼워 넣었다. 각 면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었다.

 

 

 

2층 탑신도 4매 판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면과 북면에 우주가, 동서면에서는 남북면의 벽석이 우주로 대치되고 면석에 얇은 보조우주가 모각되었다.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1석씩이며,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었다. 옥개석은 각 층이 모두 같은 형태인데, 하면의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이 5단이고, 3층은 6단이며, 4층과 5층은 5단, 6층과 7층은 4단으로 각출되었다. 각 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형이고, 특히 네 귀퉁이의 전각의 반전이 매우 약하게 표현되었다.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이 석탑은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옥개석이 짧고 둔중하며 탑신이 높아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모습이다. 이 탑은 석괴형 기단 위에 조성한 칠층석탑으로 운주사의 석탑 가운데에서는 수위급에 해당되어 고려시대의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화순 운주사 쌍교차문칠층석탑(和順雲住寺雙交叉紋七層石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1기로,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총높이는 7.75m이며, 높고 큼직한 1석의 방형 기단석 위에 1단의 방형 괴임대를 조출하고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다. 초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짜여져 있는데, 전후 2면에는 쌍교차문을 두껍게 양각하고 좌우 양면에는 양 귀퉁이에 우주를 모각하였으며, 중간에 탱주 1주를 마련하였다. 

 

 

 

2층 탑신도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고 전후면에는 쌍교차문을 가늘게 음각하고, 탑신 좌우로는 마름모꼴을 하나씩 음각으로 장식하였다. 3층 탑신은 1석씩이며, 각 면에는 2층 탑신의 전후면과 같이 쌍교차문이 교차되었다. 4층 탑신은 특이하게도 판석으로 짜 맞추었으며, 역시 전후면에 쌍교차문이 음각되고 좌우로는 마름모꼴을 장식하였다. 5층 이상의 탑신은 각 1석씩으로 조성하고 각 면에는 쌍교차문을 표출하였다. 옥개석은 각 층 1석씩이며 하면에는 옥개받침을 각출하였는데, 1층·2층·3층은 5단이고, 4층은 4단, 5층·6층·7층은 3단씩으로 줄었다. 상륜부는 1단의 높은 괴임대 위에 조그마한 네모꼴의 석재가 올려져 있다. 각 층의 옥개석 처마의 단면이 사선으로 처리되었으며 전각의 반전 또한 경쾌하다.

 

 

이 석탑의 외형을 보면 신라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 층 탑신석에 특이한 교차문(쌍 X자문)과 측면의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하는 등 국내 석탑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칠층석탑이면서도 퍽 안정감을 주는 모습으로, 운주사의 석탑 중에서는 조형미를 갖추고 있는 수준급 작품으로,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화순 운주사 광배석불좌상(和順雲住寺光背石佛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운주사의 석불 가운데 하나로 유일하게 광배가 있어서 광배석불이라고 불린다. 광배와 불신을 하나의 돌로 파서 조각한 것인데 광배 윗부분은 파손되었다. 불상과 광배는 현재 사다리꼴처럼 보이지만 윗부분이 남아있었다면 밑변이 좁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광배 표면에는 선각으로 엉성하게 화염문을 새겼고, 대좌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부좌한 두 다리와 상체를 구분하도록 돌을 깎아서 다리가 마치 대좌처럼 보인다.

 

 

 

 

얼굴은 갸름한 타원형이며 운주사의 다른 불상들처럼 코가 오뚝하게 강조되었고,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눈과 입술은 가는 선으로 윤곽만 간신히 새겼다. 육계가 분명한 머리에 나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서 머리 부분은 통상적인 장승처럼 보인다. 평면적인 신체에는 입체감이나 사실적인 묘사가 없어서 더욱 장승같은 느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설법인(說法印)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마모로 인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른 운주사의 불상처럼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었으며 왼쪽 어깨에 걸쳐진 옷 주름은 일정한 간격의 평행선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주름의 각선은 좁고 얕다. 마치 별개의 석재를 붙인 것처럼 보이는 두 다리는 네모난 덩어리처럼 보이며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다리까지 이어졌으나 선의 흐름은 불안정하다. 왼쪽 무릎 아래로는 상체와 반대 방향으로 옷이 흘러내린 것처럼 주름 선을 새겼다.

 

 

 

딱딱한 블록을 쌓아올린 것 같은 신체 표현, 평면적인 인체와 옷의 처리, 아무런 표정이 없는 갸름한 얼굴, 사실성이 결여된 양감 표현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대형 석불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머리와 신체만 명확하게 구분이 가고 입체감이 없는 장승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충청도, 전라도 일원에서 발달한 장승형 불상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화순 운주사 석조불감앞칠층석탑(和順 雲住寺石造佛龕─七層石塔)

 

운주사 석조불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1기로,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총높이는 7.5m이며, 지대석 자체가 지하에 매몰된 상태여서 불분명하지만, 커다란 네모의 지대석 상면에 높이 5㎝ 정도의 1단괴임을 마련하여 그 위로 탑신을 얹었다. 초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의 양쪽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안쪽으로는 보조우주가 얕게 각출되었다. 그 판석 사이에는 면석만을 끼워 넣어 H자형을 취하였다. 2층 탑신도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초층과 같이 양 모퉁이에 우주와 보조우주가 모각되었다. 역시 4매 판석으로 결구된 3층 탑신도 양 귀퉁이에 우주와 보조우주가 표출되었다. 4층 이상의 탑신은 1석씩이며 각 4면에는 양 귀퉁이에 우주가 모각되었으나 이 우주가 폭이 넓어 다소 투박스러우며, 1층·2층·3층과는 달리 보조우주가 없다. 옥개석은 각층 하면에 옥개받침이 각출되었는데, 초층과 2층은 6단씩이고, 3층은 5단이며, 4층·5층·6층은 4단, 7층은 3단으로 줄어들어 시대적으로 뒤진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방형의 석재가 올려 져 있는데, 이것은 상륜부의 노반이거나 아니면 괴임석으로 생각되나 그 폭이 아래층(7층) 탑신의 폭보다 훨씬 넓어서 상륜부에 속한 부재인지 의심스럽다. 옥개석 낙수면은 급경사가 아니고 모두가 평평하며 처마의 단면이 수직선이고 추녀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부드러운 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의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를 이루고 있는 우동마루(내림마루)가 예리한 각을 이루지 않고 퉁퉁하게 묘사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균제된 상태로서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탑으로,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칠층석탑은 다른 석탑이 석괴형의 큰 방형의 지대석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아주 낮은 지대석 위에 그대로 7층의 탑신부를 구성하여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운주사 내 다른 문화재와 함께 잘 보존되고 있다.

 

 

운주사석조불감

 

보물 제797호. 높이 석조불감 507cm, 남쪽 석불좌상 245cm, 북쪽 석불좌상 264cm. 지대석 위에 5매의 판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1매의 넓은 갑석을 얹은 다음 석조불감이 놓여 있다. 감실은 장방형으로 좌우벽면은 판석으로 막았으나 앞뒷면에는 출입구를 내어 불상이 밖에서 보이도록 했다. 

 

 

 

지붕은 팔작형태로 정상에는 용마루가 수평으로 표현되었고 그 양쪽으로 치미를 장식했다. 감실 안에는 2구의 석불이 가운데 세워진 1매의 판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에 보이는 "雲住寺在千佛山……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불상은 머리 윗부분이 파손된 상태인데 넓고 편평한 얼굴에는 눈썹과 콧등의 일부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지만 목과 어깨부분이 붙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밋밋한 몸체 위로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으며 옷주름 표현은 선각으로 형식화되었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있는 반면 왼손은 어깨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와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어색하다. 광배는 불신과 약간 떨어진 뒤쪽의 판석에 두광과 신광의 구분없이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했는데, 불꽃무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북향한 불상도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두 손은 옷 속에 감싸여 있어 정확한 수인(手印)을 알 수 없다. 특히 옷주름이 어깨 위에서 내려오면서 가슴 앞의 손 부근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매우 도식적이다. 이 불상들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표현이나 밋밋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및 치졸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석조불감 역시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결구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점 등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석재로 만든 거대한 크기의 불감이라는 점이나 감실 안에 2구의 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보기 드문 예라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운주사원형다층석탑

보물 제798호. 높이 571cm. 2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이 놓여진 석탑으로 지대석·기단부·탑신부가 모두 원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 탑신부가 6층까지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그 위에 몇 층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높은 편으로 5매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을 10각으로 깎아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기단갑석은 윗면이 편평하고 측면이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그 표면에는 16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와 옥신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2·3층의 옥신석에는 중앙에 2줄의 음각선이 돌려져 있고 4·5·6층에는 1줄만 있다. 옥개석은 기단갑석과 반대로 아랫면이 편평하고 측면이 호형으로 되어 있다. 1층 옥개 아랫면에는 2줄의 음각선이 얕게 새겨져 있으나 2층 이상에는 1줄뿐이다. 각 층의 원형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옥신석과 함께 완만하게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석탑은 원형으로 된 형태와 구성 등이 모두 일반적인 석탑형식에서 벗어나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한 이형석탑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지혜당(전통 찻집)

 

 

전통 찻집 앞을 지나

 

 

보제루

 

종무소를 지난다.

보통이면 이곳이 천왕문일텐데, 운주사는 사천왕문이 없고 그냥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종무소를 지나면 하늘이 확트이고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가운대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흰 뭉개구름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고즈넉한 운주사엔 한가로움이 깃든다.

 

 

 

운주사 대웅전 앞 다층석탑

 

 

감로수 길을 지나고

 

 

 

화순 운주사 대웅전

 

 

운주사 앞마당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지장전이 있다. 매우 단조롭고 검소하다. 서민적인 절집이다. 옛날 우리네 민초들이 보리 한바가지, 개란 한개, 지푸라기라도 한 잎 들고 이 절집 부처님을 찾았을 것이다. 맘 같아서는 하늘을 다 바치고 싶지만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도 곤궁한 처지에 어찌 맘 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은 이들을 감싸주였고 그들은 부처님 품안에서 잠시나마 인간으로써 따뜻함을 느끼고 새로운 힘을 얻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 절집은 돈이 넘쳐나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각종 전각들이 웅장하고 즐비하며, 부자들의 공적비가 이곳 저곳 도깨비탈을 쓴 귀신처럼 내려다 본 사이를 어찌 기가 죽어 지나갈 수있었으랴? 감히 그런 절에는 가 볼 염두도 못냈을 것이다. 주지스님도 휘황찬란한 승복을 입고 목소리도 근엄하여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는 공적비도 없고 전각도 단순할 뿐만아니라 검소하고 단아하다. 민초들이 시주하고 기도하기에 맘 편한 절집이다. 그래서 나는 운주사에 오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차별받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하기 때문이다. 기죽지 않기 때문이다.

 

 

 

 

화순 운주사 지장전

 

지장전주련

 

掌上明珠一顆寒(장상명주일과한)  손바닥 위 하나의 밝은 투명한 구슬은

自然隨色辦來端(자연수색판래단)  색상에 따라 자연히 바르게 드러나서 판별한다.
幾回提起親分付(기회제기친분부   몇 차례나 친히 일러주었지만

暗室兒孫向外看(암실아손향외간)  캄캄한 방안의 아이와 손자들은 바깥으로만 향하고 있구나!

 

 

 

 

 

화순 운주사 법성료

 

 

 

화순 운주사 법종각

 

 

 

천불 천탑 운주사 탐방로

 

화순 운주사 거북바위 오층석탑

 

 

 

 

 

 

 

 

화순 운주사 거북바위교차문칠층석탑(和順雲住寺─交叉紋七層石塔)

 

화순 운주사의 거북바위로 불리는 자연석 암반 위에 조성한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1기로,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총높이는 7.17m이며, 다소 경사를 이룬 암반을 평평하게 다듬어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부를 구성하였다. 기단부를 겸한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각 면의 양쪽 귀퉁이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부분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다. 이 같은 보조 우주의 예는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가끔 볼 수 있으며 면석에 감실형의 홈을 판 예는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에서 볼 수 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이나, 1층과 2층 탑신만은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그런데 이 칠층석탑 역시 운주사 쌍교차문 칠층석탑과 같이 2층에서 7층 탑신 사면에 교차문을 새겼다.

 

 

 

쌍교차문 칠층석탑에서는 전후면에 쌍교차문(쌍 X자문)이고, 좌우면에는 마름모꼴(◇)을 새긴 것에 반해, 이 교차문 칠층석탑에서는 탑신 4면에 단일 교차문을 장식하였다. 초층 옥개석은 하면의 층급받침이 6단인데, 특이한 것은 옥개석 하면 모서리에 추녀목과 같은 두툼한 폭 9㎝의 돌출부가 각출되었다는 점이다.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도 두툼하게 튀어나오게 하여 백제계 석탑의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하겠다. 옥개석은 각 층이 모두 평박한 편이며, 낙수면도 급경사가 아닌 매우 부드러운 곡선을 유지하고 있다. 2층과 3층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4층·5층·6층·7층의 층급받침은 4단이다. 이 석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일 교차문의 장식과 옥개석 하면의 네 귀퉁이에 추녀 모양의 돌기 부분과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내림마루)가 두툼하게 돌기하고 있는 양식이다.

 

 

 

이 칠층석탑의 옥개석 하면 모서리에 돌출부가 각출되었고,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도 두툼하게 튀어나오게 하여 백제계 석탑의 기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또한, 1층 탑신 각 면의 양쪽 귀퉁이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부분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는데, 이 같은 예는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시위부처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좌불 높이 12.7m, 입상 높이 10.26m. 운주사의 낮은 산등성이에 길게 누운 2구의 불상이라 와형석조여래불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왼편은 하반신을 마치 결가부좌한 다리처럼 만들어 좌불이라 하고, 오른편은 따로 다리를 나타내지 않아 입상으로 알려졌다. 넓적한 바위 암면을 다듬어 불상의 형태를 만들었으나 운주사의 다른 불상처럼 얼굴과 머리만 윤곽이 분명하고 신체는 장승처럼 처리했다.

 

 

 

우리나라에서 누운 모습의 불상은 유례가 드물기 때문에 일설에는 먼저 조각을 하고 일으켜 세우려다 실패하여 현재와 같이 누워있는 모습이 됐다고 전하지만 바위 모습으로 보면 처음부터 입상을 세우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넓은 암반에 불상을 조각한 것뿐이다. 심지어 운주사를 세운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천불 천탑을 다 만들려다가 첫닭이 우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이 와형불상을 세우려다가 실패하여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통상적으로 와불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처럼 똑바로 누운 모습의 불상을 와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와불은 부처의 열반 장면을 재현한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형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와불을 만드는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운주사 와형불상 2구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두 구 모두 얼굴과 신체 형태가 유사하여 같은 시기, 같은 조각가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 얼굴은 아주 낮은 부조로 이목구비를 표현했는데, 눈, 코, 입을 개념적으로 나타내 장승처럼 보인다. 두 불상 모두 통상적인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옷 주름을 새겼다. 신체에 해당하는 바위 면에 그대로 두 손을 조각하여 입체감이나 사실성은 전혀 없으나 일반적인 불상처럼 수인을 나타내려고 했다. 어깨와 가슴은 좁고 빈약하며 인체의 굴곡도 없어서 더욱 장승이나 입인상(立人像)의 느낌을 준다. 

 

 

 

지하에 묻힌 바위 상단을 다듬어 광배처럼 만들고 그보다 안쪽으로 다시 불상을 조각했는데 두 구의 불상 사이에 약간 깊은 골이 있어서 이 역시 바위의 원래 모양을 따라서 만든 것으로, 최대한 자연 암반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누워있는 모습의 불상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화순 운주사 칠성바위앞칠층석탑(和順雲住寺七星─七層石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1기로,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총높이는 7m이며,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탑신부만을 건립하였다. 상·하의 탑신석 양식이 같으므로 하단부터 1층으로 삼았는데,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H자 조립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양쪽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된 판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면석만으로 된 판석을 끼워 넣었다. 2층과 3층의 탑신도 각기 4매의 판석으로 짜여졌으며, 각 면의 양쪽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어 있어 1층과 같은 방법을 취했다. 4층 탑신석은 상·하 2석으로 조성되었으며, 5층 이상의 탑신석은 1석씩으로 조성하였다. 

 

 

 

각 층과 각 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널찍한 우주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은 둔중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은 각 층 1석씩으로 조성하고, 하면에는 옥개받침을 각출하였는데, 모두 3단씩이나 7층만은 2단으로 조성하였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의 전각에 반전이 표시되었으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 있다.

 

 

 

 

운주사의 계곡 서측 산록의 칠성바위가 있는 큰 암반 위에 있으며, 운주사 내 다른 문화재와 함께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칠층석탑은 상·하의 탑신석 양식이 같아 하단부터 1층으로 삼은 특이한 구조이며, 고려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화순 운주사 수직문 칠층석탑

운주사 동쪽 산중턱의 높직한 암반 위에 있는 석탑이다. 지대석 등의 별 다른 시설 없이 암반 위에 방형단을 만들어 기단부를 대신하고 탑신부를 얹었다. 모서리 기둥 사이의 면석에는 가늘게 층에 따라 7~11선의 수직종선문을 음각하였는데 각 층이 똑 같은 형태이다. 각층의 옥개석 하면에는 받침을 생략하고 대신 마름모꼴을 음각하였다. 현재 6층까지 탑신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7.2m이며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오층 거지 석탑

 

 

석불군 가

 

 

운주사 층상응회암

 

운주사 주변의 돌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어리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화암이다. 이곳의 석불과 석탑은 보통의 화강암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납작하고 형태가 뚜렷치 않습니다.

 

 

석불군 나

 

석불군 다

암벽 왼쪽에는 사각형과 원반형 대좌에 불상 4구가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사각형 연화 대좌를 갖춘 불좌상이 있고 그 좌우로 입상의 석불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석불은 두 손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두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의 법의를 걸쳤다. 또 복련이 묘사된 사각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앉아 있다. 좌우 석불은 다른 불상군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앏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석불군 다

 

운주사 동쪽 산등성의 암벽 좌우에 위치하는데, 오른쪽에는 불두 5편, 석불 입상 3구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불상 입상은 세 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1993년 보수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석재군 나

 

 

 

 

 

 

 

운주사 입구 석불 24기

 

 

2021.11.20. 다시 찾은 운주사

지난번 운주사 탐방 때 시간이 없어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어 아쉬웠다. 시간을 내어 다시 둘러본다. 꽤 많은 불상과 탑이 있다. 이곳을 지나쳤으면 참으로 후회 할뻔 했다. 다시 찾아 보았기에 다행이다. 

 

운주사 대웅전 뒤에 극락전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을 보러 완만한 오름길을 오른다. 오르다 만난 원형 석탑이다. 원형 돌이 매우 불안전하게 층층히 얹어 있지만 운주사에서는 흔히 보는 현태이다. 

 

 

산신각에서 바라 본 운주사 대웅전! 참으로 고즉넉하다.

 

 

산신각이다. 부처는 본인이 신이라고 보지 않고 누구나 깨달으면 광명대천의 지혜를 얻는다고 보고 중생들도 그 길을 가도록 가르쳤다. 절집에는 절이 있는 산의 산신을 숭상하였나 보다. 절집에는 산신각이 있다. 여기 산신각은 영귀산의 신령을 모신 제각이다. 

 

 

운주사 미륵전

운주사 미륵전은 특히 남다르다. 미륵불은 미래의 불로 미륵불이 다시 세상오면 극락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믿었다. 태어나면서 부터 천한 계급으로 태어나 평생 짊어지고 가는 고역을 풀어주고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래에 오는 미륵불만 사람다운 세상을 사는 소원을 성취하여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운주사는 유난히도 많은 천불과 천탑에 염원을 새겼고 미륵불을 간절히 염원하였여 미륵불의 중심이 되었다. 그 미륵불을 모신곳이 운주사 미룩전이다. 

 

 

미륵불은 석불로 모셨다. 잔잔한 눈길은 '기다려라 때가 되면 내가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것이다.' 라고 예언하고 계셨다.

 

 

 

 

화순 운주사 발형다층 석탑

 

운주사 대웅전 동쪽 뒤편에 있는 1기의 다층석탑으로, 일반적 탑과는 매우 다른 이형탑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이 다층석탑의 총높이는 4.15m이며,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3단의 각형괴임을 각출하고(현재는 흙에 파묻혀 있음) 그 위에 4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단층기단을 놓았는데, 현재는 북면의 1매 판석을 복원하였다. 기단갑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있는 원형의 1매 판석을 얹었으며, 탑신부는 발형(鉢形: 원구형·바리형·발우형이라고도 함)을 4개 쌓아올렸다. 기단 중석은 각 면의 양 우주가 뚜렷하고 높직하며 갑석은 원형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별다른 조식은 없다. 

 

 

 

갑석 위의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구별이 없이 발형 석괴 4석을 규격순으로 올려놓았다. 이 석괴의 형태는 상하면이 평평하고 별다른 조식은 없으며, 다만 표면 중앙에 상하부를 구별하는 가느다란 선이 한 줄 돌려 있다. 1층과 3층의 부재는 주판알 같은 발형이고, 2층과 4층은 중심부에 1면을 만든 주판알 같은 발형 모습이다.

 

 

석불군 마

 

 

원반형 석탑과 사층석탑

 

 

화순 운주사 마래여래좌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5호. 전체 높이 5.16m. 현재의 운주사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40m 떨어진 거대한 암벽에 새긴 운주사 유일의 마애불이다.

암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부조로 새긴 고려시대 마애불로 광배와 대좌까지 갖추고 있다. 매우 낮은 부조로 얼굴과 머리 부분만 약간 높이가 있고 나머지 부분은 선각에 가깝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 있으나 머리와 이마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고 마모되었다. 희미한 눈썹과 좁은 삼각형의 우뚝한 콧날이 마애불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이다. 기다란 귀는 낮게 양각되었으며 입체감은 없지만 형체가 뚜렷하다.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나 오른쪽 어깨의 마모가 심해서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과 오른쪽 소매의 옷 주름은 선각에 불과하며 그 선도 아주 가늘고 얕다. 광배는 머리부터 그대로 신체의 윤곽선을 따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부드럽게 암벽을 파낸 것으로 암시했다. 뾰족한 잎 끝을 아래로 내려뜨린 8잎의 꽃잎이 있는 대좌가 이 마애불에서는 비교적 복잡한 형체를 갖춘 것이다.

 

운주사 유일의 대형마애불로 어깨 이하는 선각에 불과한 조각이지만 얼굴 형태와 개념적인 이목구비의 표현이 운주사 불상군의 다른 불상과 같다. 그러므로 이 마애불과 같은 암벽을 이용한 불상도 다른 독립된 석불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불사바위

도선국사가 운주사에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들 당시 이곳에 앉아 운주사를 내려다 보며 공사 감독을 했다고 해서 불사바위라 부른다.

 

 

 

다시 운주사를 나오면서 만난 석불과 석탑 그리고 운주사 석탑 풍광

 

 

 

석불군 라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석불들

 

 

장길산과 운주사

잊혔던 운주사를 다시 세상에 알린 이는 소설가 황석영이다. 그는 조선 숙종대의 의적을 다룬 소설 ‘장길산’에서 천불산 골짜기의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후 운주사는 미륵신앙의 혁명적인 성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와 운주사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를 썼다. 2001년 대산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던 그는 운주사를 돌아보고 감동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간 후 시를 써서 한국으로 보냈다.

“서울 거리에 / 젊은이들, 아가씨들 /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 무언가를 사고, 팔고 /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 운주사의 가을 단풍 속에 / 구름 도량을 받치고 계시는 / 두 분 부처님은 / 아뜩 잊은 채 / 찾고 달리고 / 붙잡고 쓸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