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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2.01.16. 충북 보은 법주사-속리산 문장대-신선대-천왕봉의 기운을 담아 세운 호서 제일가람 법주사 탐방

by 하여간하여간 2022. 1. 17.

충북 보은 법주사를 찾아서(2022.01.16)

년초 속리산을 간다기에 만사 제치고 산악회 버스에 올랐다. 어제 덕유산 향적봉을 오른터라 온몸이 피곤하다. 더구나 작년 봄에 다친 고관절이 무리한 산행으로 상처가 도져서 아프다. 그래도 속리산을 오르리라 생각했지만 통증이 만만치 않다. 무리하게 올랐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현명하게 속리산 천황봉을 만나는 일을 포기한다. 대신 법주사를 자세히 살펴보리라!

법주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한국의 사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등학교시절 수학여행을 대부분 법주사로 갔다. 그때는 보은 밀티재를 버스로 넘을 때 아찔한 추억이 아련하다. 정2품 소나무와 법주사는 어린 우리에겐 처음 경험하는 신비로운 곳이였다. 그 후로도 여러번 법주사를 들렸지만 항상 시간에 쫓기어 슬렁 둘러보고 오곤했다.

오늘 잘되었다. 정상에 오르면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 천황봉을 포기한 대신 법주사 대웅보전과 여러 사찰 보물들을 둘러보면서 속세를 떠나보자. 불법승 삼대에 귀의하는 것이 불자의 일인데 법이 들어 앉아 있는 법주사에서 속세의 번뇌를 떨쳐보자. 속세의 아집과 욕심 그리고 그리운 정들까지 더덕 더덕 붙어 있는 집착을 모두 허허로운 바람결에 날려보내자.

 

국보3점, 보물12점, 충북 유형문화재 22점, 문화재자료 2점을 보유하고 명승지 제4호로 지정된 법주사를 둘러볼수록 그 깊은 역사와 선풍을 느낄 수 있어 옷깃을 여민다.

 

법주사 소개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 집니다. 속리산 법주사는 서기 553년 의신조사께서 창건한 역사 깊은 고찰이며, 수많은 문화유산과 불교전통을 간직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이기도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찰이 번성할 때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전해지나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30여 동의 건물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한 법주사는 목조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팔상전을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적지입니다. 

 

 

법주사 창건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절이름은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법주사 가람배치도

 

법주사의 3대 국보

- 쌍사지석등(국보 제5호)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팔상전(국보 제55호)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1624)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 석연지(국보 제64호)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입니다. *높이 1.95m, 둘레 6.65m

 

법주사 보물 12점

 

-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

보물 제15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 제작된 사천왕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8각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높이 3.9m에 이르는 이 석등은 지대석, 하대, 중대(간주), 상받침대, 상대(화사석),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상대의 각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석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보물 제 216호,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전체 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 신법천문도 병풍(보물 제848호)

보물 제848호, 관상감의 안국빈(安國賓) 등 6명이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Kogler, I.)의 성표(星表:기산점 1723년)를 사용, 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쪽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제작한 신법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1곡을 한 폭으로 보면 높이 183. 5㎝, 너비 56㎝로 8폭 전체의 길이가 451㎝나 되는 대형이다.

제1폭에는 신법천문도설(新法天文圖說)이라는 제자(題字) 옆에 당시의 천문학적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그 왼쪽에 해와 달, 그리고 천리경(千里鏡:지금의 망원경)으로 본 5개의 행성의 모양을 위에서부터 토성·목성·화성·금성·수성의 순서로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여 그렸다. 제2·3·4폭을 합한 세 폭에 지름이 각각 165㎝, 162.7㎝, 161㎝ 되는 대·중·소의 원이 삼중으로 그려져 있는데, 가운데 원과 안쪽 원에는 조(條)와 간(間)이 각각 180개로 되어 있어서 모든 방위를 360등분하고 있다. 따라서 조와 간 사이는 1°에 해당된다.

제5·6·7폭의 세 폭은 위의 제2·3·4폭과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는 황도의 남극을 중심으로 남쪽 하늘의 별들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도 적도가 그려져 있으나, 북쪽 하늘과는 달리 대원의 하단에서 위로 23.5° 되는 점과 대원의 좌우 양끝을 연결하는 반원으로 적도를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원의 좌우 양끝은 북쪽 하늘과는 반대로 왼쪽 끝이 춘분점, 오른쪽 끝이 추분점이 된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 제작에 참여한 6명의 관상감 관원들의 직위와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법신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노사나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입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입니다. 세 분 부처님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입니다. 이렇듯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입니다

 

-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통보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떼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다시금 복원하였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정방형(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柱心包系)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 법주보물탱화(보물 제1259호)

보물 제1259호, 조선 영조 42년(1766년)에 제작된 길이 14.24m, 폭 6.79에 이르는 초대형 탱화입니다. 큰 화폭에 오색구름과 더불어 꽃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전체 미륵불의 모습을 장엄하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원형의 광배(光背)와 몸의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으며, 손에는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야단법석(야회법회)때 설치합니다. 금어(金魚:탱화를 그리는 스님)주훈스님 등 14명의 스님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대웅전 소조삼불좌상(3구)(보물 제1360호)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0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크기는 비로자나불 509㎝, 노사나불 492㎝, 석가모니불 471㎝이다.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한 삼존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626년(인조 4)에 조성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기다란 귀,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몸체와 무릎 때문에 둔중해 보인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고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으로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리고 있다. 노사나불상은 형태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며, 수인은 왼손과 오른손이 뒤바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큼직한 중앙계주가 있다. 석가모니불상은 비로자나불상·노사나불상과 체형, 얼굴모습 등이 거의 같고 양식은 비슷하다. 수인은 석가여래불의 전형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노사나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수인이나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법의 착용법이 같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얼굴은 동안(童顔)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하였다.

 

 

-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1호로 지정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235cm, 너비 147cm이다. 1655년(효종 6)에 조성된 이 관음보살좌상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 철확(보물 제1413호)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보물 제1413호

 

- 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

조선 전기의 고승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 1405년경~1480년)의 부도로 1480년(성종 11)에 조성되었다. 신미는 성종 때 영의정에 추층된 훈(訓)의 장자로, 이름을 수성(守省)이라 했고 수암(秀庵)이라 불렸다. 그의 둘째 동생이 김수온(金守溫 ; 1410~1481)이므로 1405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출가하였으며, 세종28년(1446년) 무렵 세종과 조우하여 여러 대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유생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판선교종직(判善敎宗職)을 제수받았으며 국가적인 행사인 수륙제를 관할하였다. 문종대에 선교양종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세조대에는 불경간경사업을 주도하며 세조의 존경을 받고 그의 두 제자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와 더불어 삼화상으로 불렸다. 그의 부도는 제자인 학조의 부도와 함께 속리산 복천암에 봉안되어 있으며, 200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 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

신라 33대 성덕왕 19년 (720년)경에 조성된 입상으로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 약 2m, 붉은 화강석 재료의 조각상입니다. 보물 제1417호

 

- 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

연산군 때의 고승인 학조대사 등곡(燈谷 ; 1432~1514)의 부도로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는데, 등곡의 스승인 신미대사(信眉大師)의 부도 뒤편에 있다. 학조화상은 1464년(세조 10) 속리산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스승 신미와 함께 대법회를 열었고, 1467년(세조 13)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봉선사에 주석한 후 김천 직지사에 머물면서 1488년(성종 19)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고 진관사, 대자사, 낙산사를 중수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1514년(중종 9) 그의 부도가 속리산 복천암과 함께 김천 직지사에 세워졌다. 200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에서 보물 제1418호로 승격되었다.

 

법주사 충북지방유형문화재 22점

- 순조대왕태실(충북지방문화재 제11호)

복천암(福泉庵) 맞은 편의 속칭 태봉산(胎峰山) 산봉우리에 있는 조선 제23대왕 순조(純祖)의 태를 묻은 태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태가 그 사람의 길흉을 좌우하므로 함부로 하여서는 안된다는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아 길지(吉地)를 찾아 태를 안장하던 풍습이 있었으며 궁중에서 태어난 아기의 출생의례로써 태실을 조성하고, 후에 왕위에 오르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하여 다시 석물(石物)로 가봉(加封)하였다.
태실은 중앙에 사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을 놓은 다음 보주가 조각된 팔각의 옥개석을 얹어 석실을 만들고 주위에 바닥돌과 호석난간을 설치한 팔각원당형이다.

 

- 법주사 세존사리탑(충북 유형문화재 제16호)

높이 3.5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형식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서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相輪)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대(上臺)·중대(中臺)·하대(下臺)로 구성되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다.

 

- 사천왕문(충북 유형문화재 제46호)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의 금강문과 법주사 팔상전(국보 55) 사이에 있는 불사의 산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만들어 세웠다.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사천왕상으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수미산(須彌山) 동쪽 승신주(勝神洲)를 지키며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수미산 서쪽 우화주(牛貨洲)를 지키며 손에 용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 담부주(膽部洲)를 지키며 손에 칼을 잡고 있으며,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수미산 북쪽 구노주를 지키며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 법주사 석조(충북 유형문화재 제70호)

1980년 11월 13일 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에 있는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에서 맨 위에 이르기까지 4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 쪽은 23㎝, 짧은 쪽은 34㎝로 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남쪽 벽 바닥에는 지름 11㎝의 구멍이 있어서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일부에 약간의 파손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 벽암대사비(충북지방문화재 제71호)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 바위 위에 있는 조선 중기의 승려 각성의 석비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높이 210㎝, 너비 110㎝, 두께 35㎝이다. 빗돌을 덮은 머릿돌은 우진각지붕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정두경(鄭斗卿)이 짓고 이우가 쓰고 이정(李禎)이 새겼다.

 

- 자정국존비(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

1270년 당시 법주사에 머물렀던 자정국존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탑비로서 고려 충혜왕 3년(134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스님은 많은 절들에 머물며 유식론(唯識論)을 강설하며 92권에 달하는 경론(經論)해설서를 찬술하기도 했으며, 말년에 법주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다가 향년 88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9호, 높이 2.13m, 폭 1.07m

 

- 속리산 사실기비(충북 유형문화재 제167호)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167호 속리산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법주사(法住寺) 근처의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 금강골쌍탑(충북 유형문화재 제200호)

2000년 9월 15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사찰을 주로 평지에 세우던 삼국시대에는 금당(金堂) 앞에 1기의 석탑을 배치한 단탑가람이 성행하였는데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자 불국사·감은사·고선사와 같은 쌍탑가람이 유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쌍탑 1금당' 형식으로 불국사 앞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대표적 예이다.

 

- 석웅(충북 유형문화재 제204호)

2000년 12월 22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법주사의 주방 근처에 있었는데 현재는 법주사 경내 총지선원(摠持禪院) 왼쪽 40m 정도 떨어진 곳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이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속리산 3,000여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 법주사 능인전(충북 유형문화재 제232호)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안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를 알 수 없는 16나한(羅漢)상과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법주사 능인전은 국보 제55호인 팔상전, 보물 제915호인 대웅보전, 보물 제916호인 원통보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인 사천왕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보존 가치가 높다. 2004년 1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 선희궁원전(충북 유형문화재 제233호)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이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이다.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舊)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 법주사 궁현당(충북 유형문화재 제234호)

 

법주사 궁현당은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 경내의 국보 제55호 팔상전(捌相殿)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법주사의 선당(禪堂)으로 중수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인 1632년(인조 10)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852년(철종 3)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쳐 지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상량문에 적힌 ‘숭정기원사임자년(崇禎紀元四壬子年)’이라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특히 상량문에는 그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다.
이 건물은 상량문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과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아 2004년 1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가경구년명범종(충북 유형문화재 제236호)

조선시대의 범종으로, 가경(嘉慶) 9년인 1804년(순조 4) 7월에 4천 근의 동을 사용하여 만든 종이다. 이 청동 종은 대시주자 1명과 일반 시주자 15명에게 시주를 받아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법주사 가경구년명 범종은 전체적으로 규모는 크지만 종신의 문양이 얕고 장식도 선명하지 않으며, 주조 기법도 뛰어난 편이 아니다. 그러나 명문이 있어 종 제작에 관련된 이들과 제작 연도, 사찰명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전형적인 조선시대 범종의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 2004년 7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 보은 중사자암 동종(충북 유형문화재 제237호)

조선시대의 소형 동종으로, 법주사 숭정구년명 범종(法住寺崇禎九年銘梵鐘)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법주사의 부속 암자로 인조 때 중건된 중사자암에 있었으나 어떤 이유로 옮겨져, 현재는 법주사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
보은 중사자암 동종은 규모는 작으나 고려 후기의 종 형식과 조선시대의 종 형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제작 시기와 시주자, 암자명 등이 새겨진 명문이 있고 주조 기법이 정교하다는 점에서 미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보존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2004년 7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 선조대왕어필 병풍(충북 유형문화재 제238호)

조선시대의 선조대왕 어필 병풍이다. 1758년(영조 34)에 왕이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주서무일편병풍(周書無逸篇屛風)’ 등을 법주사에 하사할 때 함께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병풍은 모두 8폭이며, 한 폭당 크기는 가로 67cm, 세로 190cm이다. 병풍의 글씨는 초서체(草書體)의 붓글씨로, 초서(草書)에 능한 선조가 1631년경에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이 병풍은 목판본이기는 하나 조선시대의 목판 인쇄 문화와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4년 7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충북 유형문화재 제239호)

서무일편병풍은 경서(經書) 중 《서경(書經)》의 ‘주서무일편(周書無逸篇)’을 옮겨 적어 만든 것이다. 병풍을 제작한 시기와 옮겨 적은 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제작 시기는 1758년(영조 34) 이전으로 추정된다.
병풍의 크기는 총 10폭이며, 한 폭당 가로 73.5cm, 세로 170cm이다. 글씨는 먹을 사용하지 않고 금분(金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조선시대의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4년 7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었다.

 

-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5폭(충북 유형문화재 제296호)

 

 

-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충북 유형문화재 제297호)

 

 

-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충북 유형문화재 제298호)

 

 

-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삼존불상(충북 유형문화재 제305호)

 

 

- 법주사 복천암 신증도(충북 유형문화재 제306호)

 

 

-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충북 유형문화재 제307호)

 

 

문화재자료 2점

-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충북 문화재자료 제70호)

 

-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충북 문화재자료 제79호) 

 

기타 여러 전각

- 법주사 일주문

 

- 금강문

 

- 당간지주

 

- 금동미륵대불

 

- 진영각

 

- 명부전

 

- 삼성각

 

- 약사전

 

-  범종각

 

 

- 감로천

 

여러 사찰 및 암자

 

- 수정암

 

- 탬플스테이

 

 

- 동암

 

- 응주간

 

-총지선원

-소선당

 

-염화실

 

-강원

 

-허허당

 

법주사 부도탑

- 부도탑-1

 

-부도탑-2

 

- 부도탑-3

 

-부도탑-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