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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지리산둘레길

2021.05.19.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인원~금계) 트레킹

by 하여간하여간 2021. 5. 20.

1. 일자 : 2021.05.19(수)

2. 누구랑 : 4인(대석님, 산산해님, 오드리님, 하여간님)

 

3.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인월-금계, 20.5km)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구간. 지리산의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넓게 펼쳐진 다랑논과 6개의 산촌 마을을 지나 엄천강으로 이어지며 제방길, 농로, 차도, 임도, 숲길등이 전 구간에 골고루 섞여있다.

 

4. 트레킹 구간

5. 산행 소감

지리산둘레길 3구간은 지리산 둘레길 22구간 중 가장 긴 거리이며 많은 사람이 찾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지리산 주 능선과 지리산 북쪽 능선과 계곡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부처님 오신날(5월 19일, 음 4월8일) 요며칠간 흐린 날씨가 다행이 청명하여 산행 내내 상쾌하면서도 싱그런 기운을 받고 지리산 주 능선과 달궁계곡, 삼정계곡, 백무동계곡, 한신계곡, 칠선계곡과 그 계곡들을 가르는 산줄기 등을 바라보면서 파란 하늘과 생명의 녹음이 펼쳐진 환상적인 지리산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어 행복한 산행이였지만 한편으론 전북과 경남을 가르는 등구재가 있고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지리 빨치산들의 수많은 죽음이 지리산 북쪽 어느 골짝에 뭍혀 있는지 아직 수습되지 않은채 울려온 원혼들의 통곡이 들려오는 구간이기도 하다. 싱그런 녹음과 들려오는 물소리가 시원하여 긴 둘레길을 대원들과 오손도손 걸으면서 나눈 대화가 편하고 좋아 힐링이 되는 시간이였다. 지리산은 어디를 가나 나에겐 늘 깊은 사색의 강으로 빠져 들게하고 그 깊은 사색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어 새롭고 설렌다. 오늘도 그랬다.   

 

6. 산행 추억

지리산둘레길 3구간(인월~금계, 20.5km) 시작점 앞에서 인증하고
중군마을 방향으로 트레킹을 시작한다.
중군마을

중군마을 유래

1380년(고려 우왕 6년) 삼남지역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정벌하기위해 삼도 도원수 이성계장군은 황산에 본진을 두고 이곳에 중군을 상우에 소군, 서무, 동무에 척후복병, 사창, 창몰에 군수창을 주둔시켰다. 그는 황산에서 영남을 거쳐 북진 중인 왜장 아지발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지발도가 팔랑제를 넘어와 대처했다. 이성계장군은 신궁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활솜씨가 뛰어나 아지발도를 활로 제압하려는 작전을 마련하였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믐날 밤 밝은 달을 떠오르게 하여주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한 덕분에 환한 달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출 때를 놓치지 않고 왜장 아지발도의 목에 화살을 명중하여 죽게 함으로써 큰 승리를 이루었다. 이 전쟁을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올렸다 하여 인월이라는 지명이 전해졌으며, 이곳 중군리는 중군이 주둔하였다 하여 중군리가 되었다.

 

중군정/2016년에 지리산 둘레길 3길이 열리면서 중군정을 건축하여 방문객들에게 편안한 옛마을의 정취를 전하고 있다.

고려 군대의 기본편성은 중, 전, 후, 좌, 우군의 오군으로 중군은 그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한 부대이며 고려 오군 중 중군이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지금이야 사통팔달로 길이 잘 나있지만, 고려말 당시의 사정으로 예측하여 본다면 람천을 따라 호남의 남원과 영남의 마천을 연결하는 길이 유일하게 이 길이였을 것이고, 이곳 중군리가 가장 전략적으로 요충지대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내륙에서 영호남을 통과하려면 지리적으로 좌우에 덕두산과 삼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이곳이야 말로 영호남의 관문이기도 하다. 

 

중군정 내부

 

중군마을 벽화
선화사 입구에서 둘레길은 두 길로 갈라진다. 하나는 선화사와 황매암을 거치고 또 하나는 람천변을 따라 걷다가 두길은 수성대에서 합쳐진다.
우리는 람천변을 따라 걷는 둘레길을 택해 걷는다. 주랑흙집 펜션을 지나서
비탈진 산길을 오르다 보면 추억의 감나무가 반긴다.
2020년 가을 부산 실이봉산악회와 합동산행 때 주러주렁 달린 감나무를 배경으로
수성대 쉼터가 나온다. 코로나 이전에는 주인이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요즈음은 주인이 없이 셀프 판매대만 있다.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 쉼터에서 한잔에 2천원하는 막걸리를 4잔에 8천원을 넣고 갈증난 목을 축인다. 맛있다. 시원하다.
선화사 입구에서 갈라진 둘레길은 이곳 수성대에서 다시 합쳐져 이어진다.
지루한 비탈길을 한참 걷다보면 백련사로 가는 이정석이 나오고 우리는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이제 둘레길은 계곡으로 접어 들고
이곳 단풍은 가을에 참 아름답게 물든다.
지난 가을 단풍 추억
계곡쉼터를 지나서
배넘이제까지 지리산 둘레길 3구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싱그런 구간을 걸으며 생명과 평화의 힐링을 한다. 
맑은 영혼과 편안한 맘으로 걷는 자유로운 힐링구간이다.
배넘이제
장항마을을 향해서 편안한 내림막 길을 걷는다. 전에 반대방향으로 둘레길을 걷을 때 장항마을에서 배넘이제까지가 참 힘든 구간으로 기억한다.  
오늘 걸어야 할 둘레길인 산내면의 장항마을-장항교-매동마을- 중황마을-상황마을-등구재가 한 눈에 들어오고
시야를 조금 오른쪽으로 돌리면 청명한 하늘아래로 삼봉산-등구제-백운산 줄기가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시야를 조금 더 오른쪽으로 돌리면 일성콘도 뒤로 산내면 소재지와 저 하늘금에 지리산 천왕봉이 거대한 위용으로 다가온다.  
 지리산 하봉-중봉-천왕봉을 당겨 본다.
장항마을이 지리품에 안기어 평화롭다.
장항마을의 명품 소나무당산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당산나무에서 둘레길은 장항교로 향한다.
남원시에서 조성한 지리산 신선 둘레길 종합 안내도
지리산둘레길과 신선둘레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지나
지리산둘레길은 장항교를 향한다.
저곳 삼거리에서 오른쪽 함양쪽으로 길을 잡지만 마치 산내면이 함양 산내 처럼 보이지만 남원 산내면이다.
장항마을 입구 표지석을 지나고
지리산 둘레길은 60번 국도변에 있는 지리산둘레길 화장실 맞은편 감식초공장쪽으로 향한다. 
매동마을로 향하는 지리산둘레길 이정목
지루하고 긴 아스팔트 길을 힘겹게 오른다.
숨이 목에 차 헐떡거릴즘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향하면서 평지를 유지한다.
그늘도 나오고 길주변에 계수나무가 빽빽히 자라고 있으며 열매가 주렁주렁하다. 가을엔 잘 익은 열매를 맛보면서 걷는다면 즐거운 길이 될 것 같다.
맞은편을 바라보니 바래봉과 덕두산 줄기가 아름답다.
가끔은 둘레길을 매동마을에서 출발하면 저곳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만난다. 
매동마을에서 바로 올라오면 만나는 둘레길은 서진암으로 향해 방향을 튼다.
이 구간은 긴 콘크리트 길로 지루하고 가파르다. 길 주변에는 고사리 밭이 잘 관리되어 있지만 서진암 이정표까지는 무척 힘들게 올라야 한다.
가파른 길을 걷다 잠시 쉬면서 뒤돌아 본 하늘금에는 바레봉과 덕두산 그리고 그 아래 백련사가 아련히 조망 된다. 
이곳 서진암 이정표에서 지리산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솔향 그윽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 힐링구간이 길게 이어진다.
솔향 그윽한 숲길을 걷는 동안 머리도 맑아지고 마음도 청정해져 매우 기분 좋은 힐링길이다.  
화재로 고목이 된 아련함을 지나면서 이 길을 걷는 동안 행복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늘 생각하는 화두를 다시 한번 붙들어 본다.

행복한 삶을 위한 생각

개인적으론 자유와 평화, 국가나 공동체간에 인권과 화합을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을 생각한다.

행복한 삶이라고 해도 좋고 건강한 삶이라고 해도 좋다. 살아보니 마음이 편해야 한다. 마음이 편할려면 자유로와야 한다. 육신이 건강하고 정신이 자유로우면 마음이 편하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아야 한다. 사물을 포함한, 개인간이나, 국가간, 공동체간에 평화로와야 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자연을 포함한 모두가 서로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아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 또한 공동체의 일부이기에 공동체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서 서로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절대 권리인 인권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인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화합이되고 평화로워 진다. 상대를 인정하고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환경과 생각이 다른 그 어떤것을 자기 기준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거기에는 화합은 커녕 갈등과 분열로 모두가 상처만 남는다. 오늘날 중동의 전쟁이 그렇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전쟁을 하는 것은 전쟁을 하지 않는 약소국 보다 못하다. 전쟁은 피아가 모두 희생을 불러오고 인권이 유린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으면 다소 굼주리더라도 함께 격려하며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다. 다소 부족할지라도 희생과 인권 유린은 없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0여년이 지나가는 지금에도 휴전상태에서 서로를 적대시 하고 있어 세계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총부리를 직접 겨누고 서로 죽이고 원수가 되어 살아온 세대의 원한이 어찌 없어지고 잊을 수 있게냐마는 더 큰 행복한 삶을 위해 이제는 상대를 인정하고 종전을 선언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3만달러 이상의 인구 5천명의 세계7대 선진국이 되었지만 우린 아직 행복하지 않다. 자유와 평화가 늘 위협 받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고 인권이 살아 있어 서로 차별없이 화합하는 통일된 국가를 만들었으면 한다. 개인간의 소득차가 최소화되고 모두가 노후를 보장 받는 복지 국가에서 개인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3구간 중간지점인 인월 출발 10.0km지점에 다다른다.
특별히 여기 한장의 추억을 더한것은 저기 보이는 사진에 있는 분이 지리산 사진작가님이신데 작품이 매우 유명하여 오래전에 한번 들른적이 있어서 이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따스한 차 한잔의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사진작품도 많았던 기억이 나서이다.  들려보고 싶지만 시간상 그냥 지나친다.
지리산 둘레길은 편안하게 계속되고
사람 손이 떠난 논밭, 묵답도 만나고
산업화 물결에 따라 농부는 도시로 떠나고 고추가 익고 벼가 고개숙인 논 밭에는 나무가 들어서 숲으로 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둘레길은 아래로 향한다.
이쯤에 이르면 지리산 주능선이 그야말로 활짝 나타난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리라! 그리운이를  갑자기 어는 길목에서 만나는 기분이랄까? 
지리산 둘레길은 이제 중황마을로 향하여 직각으로 꺽인다.
담쟁이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돌담을 지나고 
다래랑 머루랑 쉼터! 이곳에서 우린 파전에 막걸리 한잔으로 점심을 하기로 한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을 걸을 때 늘 오던 쉼터이다.
5월 담쟁이가 잘 어울러진 쉼터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볼 수 있어 더 없는 행운이다. 
지리산 주능선을 이렇게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어 참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평화로운 지리산에 한국현대사의 슬픈 흔적이 숨어 있어 가슴이 멍멍하다.

피로 얼룩진 산마루에 잎이 피고

초연이 흐르던 골짜기에 눈이 내리고

그렇게 천 백 해를 거듭할 때까지

지리산아 다시금 새겨라.

천 백 배의 적과 맞서 굴복할 줄 모르던 용사들의 이름을...

- 어느 빨치산의 시,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들>

 

지리산의 골짜기에 서면 어디선가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지리산에서는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을 합쳐 2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그들은 같은 동포였고, 우리 모두의 가족이었다.

 

6.25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엔 빨치산이라고 하는 지리산 유격대가 있었다. 

 

지리 빨치산(지리산 유격대)

겨울날 매운 삭풍에 가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지리 빨치산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다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수습되지 않은 육신과 고혼은 아직도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고 어느 산자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흐르는 계곡물소리에서도, 산자락을 휘감는 바람 속에서도 그들의 절망적인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군경에 체포되어 사형대에 오른 빨치산.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그 당시 너무 많은 청춘들이 지리산에서, 또 다른 산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죽어 갔다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이 땅의 역사에서 그들은 단지 빨갱이, 그들과 피붙이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에게는 연좌제란 이름의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려진 그들은 지리산 유격대로 알려진, 일명 빨치산(partizan)이다. 전쟁 후에는 남부군으로 불리던 좌익 게릴라가 그들이다.

 

 

한국전쟁 전후 사살당하거나 생포된 빨치산의 숫자는 무려 21,000여 명(*보고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의 수가 9만여 명가량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토벌된 빨치산의 수가 2만여 명을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은 왜 산으로 갔던 것일까?

 

해방 후 우리나라 빨치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이 세 사건은 1948년에 연이어 발생하는데,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 투쟁이었던 ’2·8투쟁‘, 제주도의 ’4·3사건여순사건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지리산 유격대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은 19481020일 당시 하사관이던 지창수의 주도로,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등지를 무력으로 점거한 사건을 말한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자료사진)

하지만 여순사건은 사병 중심의 우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초기의 그 위세와는 달리, 5일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하지만 투항을 거부한 1,000여 명의 반란군은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등지의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지리산 유격대의 효시가 된다. 특히 남로당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이들 반란 세력들을 조직화할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 19498, 뒷날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명해지는 이현상(李鉉相)을 파견한다. 공식적인 지리산 유격대의 탄생이다.

 

처형당한 빨치산들

처형당하는 빨치산들

당시 소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교전 횟수는 무려 1만여 회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 전투로 군경 토벌대는 6천여 명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빨치산의 희생자(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시 엄청나 토벌대 희생자의 2배에 이르는 대략 1만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라고 한다. 일례로 게릴라 혁명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기간 동안 치른 가장 큰 전투가 80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60여 명의 정부군과 벌인 전투였다고 하니, 남한 빨치산이 감당한 유격전의 규모는 과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이 성장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해방 이후 폐허 위에 선 사람들은 생활의 고통과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어떤 구원이 필요했고, 그 희망을 실현시켜줄 세력으로 좌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산당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이념적 요인들은 알 수도 없었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4년간 토벌대를 이끌고 빨치산을 소탕했던 차일혁 총경 역시 그의 자서전에서 그들에게 이념은 애당초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말한다.

빨치산 토벌의 산증인이었던 차일혁 총경(자료사진)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사실 그들에게 이념이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더란 말인가. 그들에게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그들이 산으로 간 가장 큰 이유는 ‘()’이었다고 말한다. 빈곤에 대한 한(),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괄시, 당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발, 특히 일부 우익 청년 단체와 공권력의 초법적인 횡포에 대한 분노가 반사적으로 좌익 동조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미군정과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적 고리를 통해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결탁함으로써, 국내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던 때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은 곧 빨갱이이라는 등식 아래 일부 야당이나 반정부세력조차도 빨갱이로 낙인찍음으로써, 이에 반하는 제 세력들이 좌익화했던 것이다.

 

우린 이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미군정이 이승만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 스스로 나라를 세우도록 가만히 두면서 소련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도왔다면 민족주의 여운형이나 김구선생 같은분이 민족 분단없이 하나의 나라로 독립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충분히 그런 역량을 우리 지도자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 우익 청년 단체, 특히 서북청년단과 같은 백색테러집단이 정권의 비호 아래 행했던 온갖 불법적이고 무도한 행위들은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좌익으로 이끄는 아주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그들의 초법적인 폭력 행위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되었으며, 이들 피해자들은 불만세력이 되고, 뒤이어 자연스럽게 좌익 동조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한 대 맞고 나온 젊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 번 당한 젊은이는 진짜 빨갱이가 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익단체의 폭력성은 악명이 높았다. 단순한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제주 4·3 사건이 서북청년단을 위시한 우익집단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섬 전체를 전쟁터로 만드는 실마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형당한 보도연맹원들. 그들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자료사진)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봉건 질서의 붕괴로 인한 갈등 상황이었다.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 주인과 머슴으로 맺어졌던 신분제의 붕괴는 하위 계층의 한()에 방아쇠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이 두 집단 간의 갈등관계는 결국 필연적 약자이자 대항자였던 하위 계층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하대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소작농과 머슴들이 산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역시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내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산에서 죽어갔다. 1만 하고도 수천 명의 그들은 인민 해방이라는 꿈을 품었으나,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시간에, 그 땅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이렇게 세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세 번 죽을 각오를 하고서도, 결국엔 그들이 각오했던 그 이유대로 죽어갔다

 

지리산 저 산자락마다에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수많은 넋들이 잠들어 있다.

 

어느 빨치산이 묻는다. “나는 여기에 왜 있을까? 이 깊은 밤, 낯선 산마을 논두렁 위에 무슨 까닭으로... 그리고 저기 오늘 뿌려진 피와 생명에서 무슨 뜻을 찾아야 옳은가?”

처형당하는 빨치산들(자료사진)

빨치산은 죽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들의 흔적은 아직도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다.

지리산의 어느 골짜기에서 산화해 간 그들의 삶이 그러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던 그들에게 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인가? 어떤 작은 이유로 그들은 산으로 갔고, 그 산에서 죽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고군분투했을 뿐이었다.

 

어느 밤 산골짜기 위에 흩뿌려진 피와 생명과 흔적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의 희생이 상징하는 바는, 시대적 모순 앞에서 선택지가 없었던 기층 민중들의 분노저항이었을 것이다.

 

이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원혼이 지리산 구천을 떠돌지 않도록 그들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남북이 하나되어 매년 향불을 피우고 제를 올려야 하는 것이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리산 빨치산들의 아픈 현대사를 뭍어두고 아는지 모르는지 쉼터 돌담에는 5월의 빨간 앵두가 익어간다.
또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햇볕에 강한 마을길을 길게 지난다.
계곡을 지나고
찔래꽃이 활짝 핀 길을 지나
맛집들을 지나서
달궁계곡이 보이는 조망터에 앉아 지리산 서북능선과 만복대를 바라보는 망중한 시간이 좋기만 하다. 
마을위로 만들어진 저수지엔 수양버들이 아릅답게 운치를 더한다.
지난 원산우회 산행 때 이곳 조망터을 지나면서 여러 대원들과 우중에 같이 찍은 사진을 기억하며 함께한 오드리님이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함께한 산길은 늘 이런 오붓한 추억을 새기고 추억을 다듬어 가기도 한다.
2019년 11월 원산우회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산행 때 추억
이리 저리 둘레길을 걷다보면  
아직도 남아 있는 다랭이 논이 나온다. 
둘레길이 지쳐갈 때 등구제 바로 아래 등구령쉼터가 반긴다. 누구나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시원한 막걸리에 목을 축이고서야 지날수 밖에 없다. 
등구재를 향해서 가파른 둘레길을 힘들게 오른다.
등구재이다. 무척이나 힘들다.
함양군에서 세운 등구재 안내판이다.

등구재를 넘으면 길은 숲을 따라 이어진다.

엄천강을 따라 이어지는 60번 지방도가 놓이기 전에는 이 등구재를 넘어 경상도인 마천의 마을 주민들은 전라도의 인월장으로 오고 갔던 것이다. 팔 물건을 이고 지고 가서 산 물건을 또 이고 지고 넘던 고개가 이 등구재였다. 등구재 외에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오도(吾道), 제안재, 팔량치(八良峙) 등이 있다.

 

등구재를 넘어 이제 함양 마천으로 급하게 내리막 길을 지나면 오두막 같은 쉼터를 만나고 둘레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맞은편 이정목이 재미있다.
이 구간을 지날 때 저 하늘금에 청왕봉-중봉-하봉-산내봉-와불산으로 이어지고, 하봉에서 벋어 내린 두류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호강을 누린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저렇게 현대적인 정원주택이 계곡마다 꽉 차있어 씁씁하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을 지날때마다 이 감나무밭 쉼터가 인상적이여서 친근감이 든다. 
이제 창원마을을 지난다.
창원마을을 지키고 있는 보호수다. 둘레길을 걷는이들은 이곳에서 인증스탬프를 찍고 잠시 쉬었다가 가는 쉼터이다.  느티나무가지 밑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우리도 여기서 막걸리 한잔하고 커피도 한잔하면서 한숨을 돌린다.
다시 걷는 둘레길은 차즘 지쳐가지만 저 곳에 있는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마지막 둘레길은 숲길을 지나고  오르 내림을 지나면서 길게 이어진다.
이제 금계마을로 하산하는 지점이다. 데크로 잘 정비하여 놓아 고맙고 감사하다.
내려오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지리산 천왕봉과  마천 의탄리, 추성리, 칠선계곡과 두류능선의 아름다운 풍광 앞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마지막 금계마을로 내려가는 둘레길은 계속되고
드디어 금계마을로 접어든다.
금계마을 노인정, 코로나로 출입금지다.
지리산둘레길 3구간 마지막 이정목 함양13(인월 20.5km, 금계 0.0km)
함양군이 세운 지리산 둘레길 안내
함양군 지리산둘레길 안내판 앞에서 인증을 하면서 3구간 트레킹 산행 20.5km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