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둘레길,트레킹길/지리산둘레길

2021.05.09.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트레킹

by 하여간하여간 2021. 5. 10.

1. 일자 : 2021.05.09.(일)

2. 누구랑 : 5인(대석님, 오드리님, 찬찬님, 천천님, 하여간)

3. 산행구간 : 서림공원-북천마을-신기마을-비전마을-군화마을-옥계저수지-흥부골자연휴양림-월평마을-구인월교(2구간 : 9.9km)-중군마을(3구간 : 3,km))

4.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9.9km)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구간.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5. 산행소감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은 운봉에서 인월까지 9.9km로 람천을 따라 제방길을 따라 걷는 비교적 편한 트레킹 구간이다. 또 이 길은 운봉 고원의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지나면서 북으로는 남원 정령치에서 고리봉-팔랑치-바래봉을 잇는 서북능선과, 남으로는 고남산과 수정봉을 잇는 백두대간을 한눈에 바라보며 걷을 수 있는 트레킹 길이다.

 

특히나 고려말 우리나라 남해안에 쳐들어와 도적질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지발도가 군산 앞바다에서 최무선의 화표에 패하여 퇴로가 막히자 이곳 운봉을 거점으로 주둔하고 있으면서 바다로 도망갈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이성계 장군이 "밝은 보름달을 밝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 끝에 밝은 달이 떠오른 것을 놓치지 않고 신궁에 가까운 활 솜씨로 아지발도 상투를 떨어뜨리고 옆에 있던 이두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 머리에 화살을 꽂아 사살을 하고 크게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있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 고남산-수정봉의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이곳 운봉과 남원에서 민보군의 박봉양과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려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대파시킨 곳이기도 하다. 탐관오리와 무능한 조정의 권력자들의 횡포에 저항하여 그들을 쓸어버리고 농민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난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에서 패하고 쓰러져간 수 많은 농민군들의 원한이 메아리쳐 울려퍼진 길이기도 하다.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 판소리 고장을 지나는 길로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역사문화탐방길이다. 인월 마을 유래에서 '밝은 달을 비춰어 주십시오' 하는 이성계의 간절한 바램을 읽을 수 있으며, 이곳이 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영토전쟁을 하였는지 궁금증을 풀어가는 역사의 길이기도 하다.

 

여유와 낭만을 등에 지고 불어오는 람천의 산들바람을 벗삼아 한발 한발 걷는 발걸음은 평화와 생명, 상생과 화합의 숨결을 느끼하는 사랑의길이다. 길을 걷는다. 사랑의 길을 걷는다. 생명의 길을 걷는다. 평화의 길을 걷는다. 상생과 화합의 길을 걷는다. 그런 길을 그냥 걷고 싶어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6. 산행 안내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시작점이다. 기념인증하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시작점(남원083  운봉0.0km, 인월 9.9km) 또 1구간 종점( 남원 083  운봉 0.0km, 주천 14.km) 표지 앞에서 인증
서림공원 입구에 있는 남자석장승 '방어대장군'
서림공원 입구에 서 있는 여자석장승 '진서대장군'

남원 서천리 당산(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남원 서천리 당산에는 남녀 한 쌍의 돌 장승이 서 있다. 외형상으로는 남녀를 구별하기 쉽지 않은데, 북쪽에 서 있는 장승이 남장승, 남쪽에 서있는 장승이 여장승이라고 전해진다. 각각의 돌장승에는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이다. 두 장승은 모두 수염이 있고 벙거지를 썼는데 남장승인 방어대장군은 귀가 없다. 두 장승이 부부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원 서천리 당산의 돌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서림공원 입구에 공적비가 여럿이 있다. 모두가 선정을 하였거나 공적이 있어 비를 서웠으리라! 이중에 제일 왼쪽에 있는 공적비는 한쪽 모서리가 깨져 나갔다. 누군가 망치로 후려갈긴 것 같다. 그 사유가 궁금하다. 
갑오토비사적비-박봉양(일목) 장군비

갑오토비사적비

갑오년 도적을 토벌한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도적이라? 갑오농민전쟁 때 민보군을 조직한 박봉양이 농민군의 운봉 함양으로의 진출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민보군이란 동학농민군의 위협을 받던 양반과 토착 부호들이 조직한 반동학농민 자위대이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땅에서 시작한 동학농민 항쟁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지도 아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한양으로 북진을 시도하였지만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은 11월 청주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봉준 또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지고 만다. 한편 남원에 남아 있던 농민군은 경상도 진출을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운봉으로 향하는데, 이 때 박봉양의 민보군과 맞붙어 싸우지만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남원으로 퇴각한다. 박봉양은 이에 멈추지 않고 남원성까지 쫒아가 농민군을 초토화한다. 결국 민보군은 운봉을 지켰냈고 농민군은 사실상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저 비석은 역설적으로 탐관오리와 권력자들의 횡포와 착취로 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꿔온 민초들의 간절한 희망을 허망하게 끝내버린 슬픈 역사인 샘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저 비석이 만들어졌을터다. 탐관오리에겐 수성의 상징물이였을 것이고 박봉양과 민보군에 대한 공로의 찬양이였겠지만, 목숨걸고 항거했던 민중의 패전을 상징하는 원망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가슴이 쓸어 내린다. 누군가 저 비석을 망치로 내리쳐 깨부수고 싶은 심정을 이해한다. 만약 그때 동학농민군이 승리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일본군의 개입만 없었어도 농민군은 승리하여 한양을 함락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을텐데! 역사의 가정앞에 부질없는 생각만 가득담고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 잠깐! 동학농민군과 박봉양의 민보군의 전투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고 가자. 백두대간 여원재에 가면 이런 설명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두대간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 11월 중순 남원의 대 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렸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 수정군 모두가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 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새운다. 2008. 11. 22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여원재! 옛이름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또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94년 9월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하여 기새를 몰아 남원성 남문을 불지르고 남원 동학군을 패주시켰다.

 

서림공원 앞에 있는 서림정을 지나고
둘레길 이정목 남원084  운봉 0.2km  인월 9.7km 지점이다.
서림공원 둘레길 이정목 옆에 둘레길 인증 도장을 찍는 함이 있다. 우리는 람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는다. 
남원시에서 세운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안내판이다. 여기에는 운봉농협에서 인월까지 10km로 표기 되어 있다. 산꾼들에겐 조금 헛갈린다. 우린 서림공원에서 인월까지 이정목을 기준으로 9.9km라고 여긴다. 
람천제방길을 따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여유롭게 걷는다.
지리산 서북능선인 덕두산(1,115m)-바래봉(1,165m)-세걸산(1,220m)-고리봉(1,304.5m)-만복대(1,433.4m)-작은고리봉(1,248m)이 출렁이는 능선길을 바라보며 걷는다. 
둘레길은 계속되고 남원085  운봉0.6km, 인월9.3km 지점이다.
오늘 걷는 이길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한강을 지나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 경상도 서부를 이어졌던 통영별로가 지나던 길이다
운봉에서 시작한 람천은 지리산 이골 저골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을 모아 인월과 산내를 거치고 함양 마천에서 임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른다.
남원086 운봉0.9km, 인월 9.0km
다리를 건너고
가야할 방향이다. 람천은 말없이 서서히 인월을 향해 흐르고 저 하늘금엔 황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원087  운봉1.0km, 인월 8.9km
신기마을 방향으로 향한다.
도로를 지나면 바로 방향을 바꾸라는 둘레길 이정목이 있다.
잠시 그늘에 앉아서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오늘의 여유로움으로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운다. 이시간이 제일 좋다. 서로를 격려하는 따스한 시간이다.
한가로운 람천 제방길을 따라 편안한 길을 걷는다. 평화의 길이다. 생명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함께 걷는 이 길은 사랑이요 평화요 생명이다.
신기마을 숲이 보인다. 저기 마을 뒤로 보이는 숲은 마을 사람들이 둑을 만들고 토성을 쌓아 나무를 심어 조성하였다고 한다. 
초봉?
한가롭고 풍요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마을 위로 파란 하늘이 장관이다.
다리를 건너고
걷다보면 또 방향을 바꾼다. 남원089 운봉 1.0km,  인월 8.9km 방향을 바꾼다. 가급적 안내 이정목을 모두 찍어서 여기에 실어 본다.
둘레길은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 둘레길 안내 이정목을 꼭 세워 놓았다. 둘레길을 걷는사람은 이 안내 이정목을 잘 보고 따라가야 한다.
이제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잡아 튼다.
서북능선 하늘금
저 멀리 지나온 하늘금엔 수정봉이 보인다. 운봉에서 시작한 람천은 이시기에는 흙탕물이다. 모내기가 시작되어 들녁을 지나오기 때문이다. 비록 흙탕물이지만 저속에는 각종 영양분을 함껏 품고 흐른다. 람천에 서식하는 각종 수생 식물과 어류 및 동물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찹잘한 엄마 젓줄 같은 생명의 질긴 사랑을 느낀다.
앞으로 가야할 황산 방향이다. 람천은 인월을 향해 서서히 흘러 간다. 운봉에서 시작한 람천은 지리산 북쪽을 휘감고 돌아 지리산 북쪽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모든 물줄기를 품어 안고 산내와 마천을 지나면서 임천을 만나고 잠시 경호강이 되어 흐르다 남강으로 바뀌어 진양호로 들어간다. 진양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도도한 남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부산 앞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경상남도 남녁의 생명 젓줄이기도 하다. 
람천 제방길을 따라 인월 방향으로 걷는다. 들녁은 이미 모내기가 끝났고 산들바람은 불어와 산꾼을 위로하며 풍요를 속삭인다.
람천을 따라 둘레길 이정목이 지나는 산꾼을 위로 한다. 이 길을 지나는 모든이가 따스한 심장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다정히 손잡고 아름다운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걷고 또 걸으며 사색의 시간이다. 너그러워야 한다. 품어 안은 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용서와 화합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역지사지를 생각한다. 판단의 기준을 상대에게 맞추면 그런대로 괜찮은 판단일껏 같다.   
흐르는 람천은 말이 없고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에 잠겨 이 평화로운 둘레길을 걷는다. 또 만나는 둘레길 이정목
이 긴 제방길을 걸으며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행불행이 어디 구별 되는가? 상황에 따라서 행불행이 달라지는 것을?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이고 불행하다면 불행인 것을! 언제나 행복할려면 언제나 행복을 느끼면 되는 것이고, 언제나 행복을 느끼려면 있는 그대로를 느끼면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걸으면 되는 것을! 길을 걷는다. 끝도 없는 이길을! 길이 있기에 그냥 걷는다. 행복한 이길을!
남원092 운봉 2.8km, 인월 7.1km 지점이다.
한가한 둘레길은 계속되고
어느덧 비전마을로 접어든다.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안내 표지인다.
동편제 마을! 국창 박초월의 상징물인가?
남원시에서 동편제마을 공원을 조성하여 놓았다.
길따라 소리따라 동편제
동편제마을 쉼터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어 간다.
황산대첩비지와 동편제 중시조 가왕 송흥록 생가를 가려면 다리를 건낸다.
비전마을 조선 가왕 송흥록 생가로 가는길
잠시 우린 왼쪽에 있는 황산대첩비지로 향한다.
황산대첩비지

이 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지금의 군산)에서 최무선장군의 화포에 패해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 운봉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했었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도발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도발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 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조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 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사적 104호 황산대첩비지
대첩비각
황산대첩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 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을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파비각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하였다
황산대첩기념비
사적비각
황산대첩사적비

이비는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증건한 비이다. 일제강점기 때 황산대첩비와 비각등이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가록되어 있다.

 

어휘각

이 어휘각은 조선 태조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고려 우왕 6년, 1380)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 여러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다.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럿하였던 그  성적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본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잠깐! 남원 피바다에 대하여 살펴보고 가자(피바위는 인월쪽에서 람천을 타고 오다보면 위치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 람천에는 군데군데 붉은빛을 띠는 신비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직경 10m의 큼지막한 크기로, 1년 내내 붉은색이 변치 않는다고 해 남원 '피바위'(血巖)라 불리고 있다.
바위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피바위'라는 명칭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남원 인월에서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3천여명의 왜구를 맞아 싸울 때 생겨났다. 활을 쏘는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 '신궁'으로 불린 이성계는 맹장 아지발도와의 전투에서 활로 왜구를 몰살했다. 이때 주변 계곡과 천이 왜구의 피로 붉게 물들면서 피가 스민 곳에 피바위가 생겨났다고 조선시대 문집인 '계곡집' 등에 전해져 내려온다.
실제로는 "혈암(피바위)는 일반 바위보다 철분 성분이 9%가량 많이 함유돼 있다"며 "이 바위가 오랜 시간 물과 닿아보니 붉은색을 띠게 된 것이다
다시 동편제 마을 비전마을 입구로 온다.
동편제 탯자리 비전마을
송흥록선생 생가터

이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 송흥록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 우조 진양조 등 가조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전의 옥중가에서 귀곡성 등 많은 곡을 남겨 판소리의 큰 유파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당대의 가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비전마을의 유래
가왕 송흥록선생 생가 입구에서 인증 한장

가왕 송흥록, 국청 박초월 생가

이곳은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하고 그 시대의 초가형태로 2007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송흥록(1780~1863)은 조선 정조 초기 권삼득의 고수 송첨지의 아들로 테어나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하였고, 철종 10년(1859) 정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조선말기 순조, 헌종, 철종대에 걸친 명창으로 계면조 진영조의 완성, 메다리조 도입과 모든 가사를 집대성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라 불리며 가왕칭호를 받았다.
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이 장기이며, 제자 박만순과 동생 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 만갑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의 소리를 이루었다

박초월(1916.9.17~1983.11.26)은 12세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송만갑지도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전수하였고, 1961년(사)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 취임과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재5호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1988년 68세에 숙환으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에 안치되었다가 제자와 국악계의 성원으로 2000년 8월 28일 운봉읍 가산리 산 1-12번지로 이장하였다.

 

송흥록 선생 생가
비전마을 쉼터
비전마을 쉼터 둘레길 이정목 남원095 운봉 4.1km, 인월 5.8km 지점이다.
다시 비전마을을 뒤로하고 람천을 따라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우리는 거대한 보호수를 만난다.
4명의 대원들이 양팔을 벌려 보지만 부족할 정도로 거대한 보호수다.
한가로운 둘레길을 걷는다.
오손도손 사랑을 그리며 걷는다. 아낌없이 걷는다. 즐겁게 걷는다.
다시 둘레길은 시작되고
군화마을 이정목 남원 098  운봉 4.8km, 인웡 5.1km 지점이다.
오늘날 이성계의 후예들이 국궁을 쏘며 그 정신을 이어 받고 있는 황산정 궁도장 입구를 지나고
황산아래 람천변을 지난다. 지금은 조용히 흐르지만, 고려 우왕6년 1380년에는 이성계가 아지발도과 치열하게 싸워 이긴 황산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황산 아래 어느 쉼터/ 남원 099  운봉4.9km, 인월 5.0km 지점이다.
황산 맞은편 산자락엔 고사리 체험장이 있고
불탑을 크게 세운이들의 기원이 있는 곳을 지나
둘레길은 꺾여져 
도로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기 위해 데크 정비가 잘된 곳을 지나야 한다. 
긴 데크길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시 산길을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GNKC리조트라는 건물이 나오고 
아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빈 건물인가? 아무튼 저기 보이는 옥계호 제방으로 올라간다.
남원 101  운봉 5.7km, 인월 4.2km 지점이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옥계호가 나온다.
옥계호 제방 아래로 향한다. 
옥계호 제방을 가로질러가는 대원들
둘레길은 옥계호 제방 아래로 이어진다.
옥계호 둘레길을 돌고 돌아 오르면 
아름다운 옥계호가 그림처럼 나타난다. 덕두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깨끗하게 담아서 물빛이 청명하다. 상수원으로 쓰일까?
지리산 동자삼 농원 입구/ 산양산삼 전문 농장이다. 출입금지다. 
쉼터에 앉아 막걸리와 소주한잔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둘레길은 임도로 접어 든다. 임도는 넓고 잘 정비되어 있지만 지루한 감이 든다. 차라리 이 길을 숲길로 하였으면 좋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든다.
임도길에서 인월이 보이고
지루한 임도를 구불 구불 한참을 돌아 걷는다.
덕두산 아래 흥부골 휴양림으로 들어선다.
꽃잔디가 유난히 아름다운 어느 언덕배기에서 대원들과 함께
흥부골휴양림 둘레길 이정목 남원104 운봉 7.7km, 인월 2.2km 지점이다.  
흥부골휴양림 안내도
흥부골휴양림
남원105 운봉 7.8km, 인월 2.1km 지점이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하천을 지나고 숲길로 접어 든다.
오랫만에 아늑한 숲길을 지나니 대원들은 절로 흥겨워 발걸음이 가볍다.
둘레길은 숲길을 벗어나 다시 도로로 접어든다.
큰길을 만나는 둘레길은 남원107 운봉8.2km 인월 1.7km 지점이다.
여럿이 이야기 하면서 내려오다 보면 놓치고 마는 둘레길 이정목! 우린 여기서 둘레길을 놓쳤다.
월평마을로 가야하는 둘레길을 놓치고 구인월마을로 와버렸다. 지리산 태극종주 안내 
차도를 따라 쉽게 내려 갔지만 이길은 둘레길이 아니다. 
인월리 마을의 유래
구인월마을 표지석
구인월마을 유래
인월이야기는 다양하게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구인월마을 입구이다. 여기까지는 둘레길에서 벗어난 부분이다.
남원112 월평마을 둘레길 이정목이다. 둘레길은 월평마을을 거쳐 이곳으로 지나온다.
달오름마을 표지석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 종점이다.
달오름 마을의 유래 원래 월평마을이라 하였는데 달오름 마을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산행은 이곳 달오름마을에서 마무리하고 제3구간으로 이어진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을 마무리하고 다시 3구간 시작점에서 인증하고 중군마을로 향한다.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을 마무리하고 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