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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 이야기

18세기 최고의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 이야기

by 하여간하여간 2020. 7. 16.

18세기 최고의 지리학자 여암(如菴) 신경준 이야기

 

(순창군 공식 블로그에서 전메라 순창군 블로그 기자단님의 글을 발취)

 

여암 신경준 영정

신경준(1712~1781)은 조선 후기 영, 정조 때의 문관이자 지리학자입니다. 그의 호는 여암으로 순창의 귀래정 신말주 후손의 세거지에서 태어났는데요. 여암은 신말주의 10대 손인 아버지 신래와 한산 이 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태어난 지 아홉 달 만에 글자를 알아보았고, 네 살에 천자문, 다섯 살에는 시경을 읽었다는 천재였다고 합니다.

 

귀례정 : 신말주선생의 정부인 설씨와 신말주의 10대손인 여암 신경준선생의 출생지

그는 어려서 상경(上京) , 강화도에서도 공부를 했으며, 12살 때 다시 순창으로 돌아와 아버지 아래 글을 배우고 시를 지으며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26세 때인 173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 가족들과 경기도 소사로 이사를 갑니다. 이때 [소사문답]이라는 책을 지었다고 합니다. 또한, 산과 들, 하천에 대해 읊은 시, 지역의 역사 및 지명 유래 등을 고찰한 글을 모아 책을 쓰는가 하면 산 정상에 올라 바람을 맞는 일을 즐겼다고 하는데요. 당시의 사대부들이 한곳에 머물러 정착했던 것과는 달리 여러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그의 사색과 체험은 훗날 많은 지리학 서적을 남길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33세 때 그는 다시 순창으로 내려와 벼슬할 때까지 전라도 일대를 주유합니다. 선승들과도 교유하며 차()를 즐기기도 했으며, 이때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게 문자론을 연구,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진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했습니다. 이후 그의 나이 43세 때인 1754(영조 30) 호남좌도 증광초시에 1등으로 합격을 하고, 2년 후인 1756년 상고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수도와 강계를 역사지리적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지리서인 [강계지]를 완성, 지리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나 봅니다. 관직을 두루 거친 그는 1769(영조 45)에 고향으로 다시 낙향하지요. 그러나 사도세자의 장인이요,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봉한은 그를 강력하게 천거하여 다시금 관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영조는 신경준이 편찬한 [강계지]를 보고 그로 하여금 [여지편람]을 감수하여 편찬케 합니다. [여지편람]은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든 책으로 영조는 이 책이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 하여 [동국문헌비고]로 이름을 바꾸게 하고 이 [동국문헌비고][여지고]를 신경준에게 맡깁니다. 이를 계기로 그의 해박한 지리 지식을 종합한 [여지고]를 편찬을 전담하게 됩니다. 이때 육로와 해로 등 유통로에 관한 백과사전 격인 [도로고]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 공로로 인해 신경준은 승지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넓고 깊은 그의 학식을 인정한 영조는 이러한 여암과의 만남이 늦음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국토의 지리지와 지도 제작에 대한 일들이 활발히 진행됐는데요. 여암이 다른 실학자들과 다른 점은 개인적 지식을 인정받아 왕명에 의해 국가적 사업으로 연결한 것을 듭니다. 신경준은 영조의 명을 받아 관청의 여러 지도를 검토한 결과, 정상기의 아들 정항령의 지도를 바탕으로 각 도별 군현 지도 등을 통해 당시 지도학의 성과를 총집합한 [동국여지도]를 제작했는데요. 나아가 전국을 구획, 축적한 군현 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종합하여 동일한 축적의 군현 지도를 연결합니다. 이를 통해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적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암의 축적 지도는 19세기 [대동여지도]로 완성되는 일련의 대축적 전도(全圖)로 발전, 조선 전도 제작의 초석을 놓았다는 데 의의를 가집니다.

 

한편, 고령 신씨 집안에 문화재로 지정된 신경준의 고지도 2점이 소장되어 있는데요, 이 고지도는 이러한 그의 지도 저작에 대한 실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지도에 정확한 명칭이 없어 편의상 [북방강역도][강화 이북 해역도]라 이름 붙였는데요. 이 고지도는 19791227일 전북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됩니다. 신경준의 출생지인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그의 유적지 안에 있는 안내판에 이 고지도에 대한 간단한 안내가 명시되어 있는데요. 이 고지도는 백두산에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의 거리와 지명, 동네 이름 등을 적은 [북방 강역도]와 강화도로부터 압록강 하구 사이의 각 섬과 암초, 해안의 굴곡 등을 표시한 [강화 이북 해역도]로 나누어진 지도로, 군사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경준의 고지도 북방강역도
신경준의 고지도 강화도 이북의 해역도

 

문인으로서 성리학적 도그마에 매몰되지 않은 그의 자유로운 사상은 앞서 말한 [소사문답], [운해훈민정음], [강계지], [도로고] 등을 저술하였고, 전국 사찰을 주유하며, 그 사찰들의 이름과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가람고],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리서인 [산수고] 등의 저서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지리학 관련 저서를 남깁니다. 이후 여암의 현손인 신익구, 신재휴에 의해 1910, 1936년 여암에 대한 [여암유고][여암전서]가 발행됩니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그는 60세 되던 해 순천 부사를 거쳐 63세 때에는 제주 목사가 됩니다. 몇 년 후 영조가 승하(1775)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후 68세 때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합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고향으로 돌아간 그를 다시 승지의 벼슬을 주어 삼고초려 했으나 굳이 사양했다고 하네요. 화창한 봄 어느 날, 고향에서 친구들과 바둑을 두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정조 5(1781521))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묘지는 순창읍에서 남원 쪽(24번 국도)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섬진강변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해 있습니다. 적성 소재지 못 미쳐 태자 삼거리 우측으로 난 섬진강을 따라 걷다 보면 산자락 중턱, 지금은 흔적도 없는 옛 화산서원의 터 맞은편 대나무 숲속에 있습니다.

 

신경준은 수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업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입니다. 이러한 신경준 역시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권선문첩을 지은 설씨 부인과 함께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셀 수 없는 그의 작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주요 저작이라는 조선 산줄기 체계를 정리한 [산경표]를 듭니다. 대동여지도의 초석이 되었다는 수식어가 눈길을 끄는 신경준의 [산경표], 모 교수의 논문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 결과를 통해 지은이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판각됩니다. 대동여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산줄기의 명칭과 소속산에 대한 것이 이보다 한 세기가 앞선 1769년 편찬된 [산경표]에는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다는 것에 그 가치를 둡니다. 앞서 말했듯 [산경표]의 저자가 신경준일까?’ 라는 점에 논란이 되고는 있지만, 어쨌든 산경표는 신경준이 쓴 [동국문헌비고] 중의 [여지고][산수고]에 기초해서 쓴 책이라는 근거는 신경준의 저작임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처럼, 우리나라의 산에 관한 족보를 비유합니다. 이에 따른 우리나라 산줄기의 시조는 백두산, 종손은 백두대간을 듭니다. 이 종손에서 갈라져 나간 계열은 1정간(장백정간) 13정맥으로, 곧 백두대간이 됩니다. 세손이 뻗어 나가는 혈통처럼 산줄기를 나누는 기준은 수계(산자분수령)인데요. 산자분수령이란, 산은 물을 가르는 선을 전제로, 한반도는 시조인 백두산을 뿌리로 우리나라 모든 산을 거미줄처럼 연결하여 거대한 하나의 산줄기를 만들어낸다는 법칙입니다. 우리나라의 산 어디든 산마루만 따라가면 시조 할아버지 백두산에 이를 수 있다는 지리 체계의 인식에 대한 확실함을 증거로 산줄기 체계가 담긴 신경준의 [산경표]에 대한 부활의 이유를 듭니다.

 

조선광문회에 의해 활자로 제작된 산경표
산경표 102쪽 중 첫 쪽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이 [산경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산경표]가 시중에 유포된 1980년대부터입니다. 또한 백두대간과 9정맥을 직접 탐사하고 그 보고서를 쓴 일반 산악인들이 [사람과 산]이란 잡지에 올리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를 계기로 어쨌든 [산경표]의 저자로 지목된 여암 신경준은 이 산경표를 성서처럼 품고 다니는 백두대간 종주 산악인들과 세인들에 의해 지리학자로 화려한 부활을 합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산경표]는 이러한 산 사람들의 산행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산경표]가 조명되기 전에는 하나의 산을 정해 정상을 오르내리는 <점 산행>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산경표]가 발견된 후, 산줄기를 이어가는 <종주 산행>, 즉 백두대간 종주가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됩니다. 소중한 우리 국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슬로건 아래 [산경표]의 저자가 부활하는 것이 이러한 영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많은 학자들이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기긴 했지만, 신경준 만큼 방대한 지리학 저작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드문 경우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자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인물 신경준에 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하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대동여지도의 골격이 된다고 하는 국토의 족보, 산악인들 및 세인들에 의해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백두대간 종주>의 주역인 [산경표]가 우리 순창 출신 여암 신경준 작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긍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요. 산경표의 내용이 더욱 가치롭게 부활되어 후세로 이어짐으로써 정규적 지리 개념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명칭 및 소속산, 그 족보의 근거가 확실하게 명시되었다는 우리나라 대축적지도인 대동여지도의 원형격이라는 [산경표], 대동여지도보다 한 세기가 앞선 고지도가 어째서 산악인들과 세인들에 의해 부활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째서 세상에 묻혀 그동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는가?’하는 안타까움에 의아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궁금증과 학계에서 나름의 논란이 되고 있다는 이 [산경표], 그 정체를 찾아 저와 함께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