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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 이야기

산경표의 새로운 해석(부산맨)

by 하여간하여간 2020. 7. 16.

만신창이로 변해버린 산경표(山經表) 새롭게 부생(復生)한다.

 

산꾼 이재수의 글(블로그 금정산 산돌이 http://blog.daum.net/busanman 에서 퍼옴)

 

 

부산에서 대중교통편을 이용하여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종주하려면 큰 걸림돌 두개가 있다. 첫 번째 방해물(妨害物)은 주말마다 계속되는 남해고속도로 체증(滯症)을 어떤 방법으로 해소(解消)하여야 할지 고민(苦悶)을 해보지만 평일산행(平日山行) 외에는 대책이 없다. 두 번째 장애물(障礙物)은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포함한다면 백두대간(白頭大幹) 종주(縱走)에 버금갈 정도의 체력(體力)을 필요로 하고 일부 구간(區間)은 잡목(雜木)을 헤쳐 나가야하는 어려움까지 숨어있다.

정맥산행(正脈山行)의 경우는 인공적인 환경침해(파괴:破壞)로 지형(地形)이 변모(變貌)된 곳이 많아 조금만한 방심(放心)하면 마루금을 완전 벗어나 큰 곤욕(困辱)을 치러야 한다. 개인 산행을 하는 종주꾼들 및 산악회 산행대장(가이드: guide)들은 많은 준비를 한다. 선답자의 산행기, 지형도, 교통편들을 숙지(熟知)하여 기니긴 여정(旅程)에 들어선다. 내 자신도 대장정(大長程)을 들어서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산행을 시작한 탓에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남정간(洛南正幹),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무사완주(無事完走)를 할 수 있었고 이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도 예외(例外)가 될 수 없었다.

산행계획(山行計劃)을 세부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북 장수군 영취산(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기되는 봉우리)에서 남진(南進)을 하여야 할지, 아니면 전남 광양시 망덕산에서 북진(北進)을 하야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우연히 '사람과 산'에서 20033월부터 20044월까지 연재(連載)했던 호남정맥(湖南正脈) 개념도(국립지리정보원 1:50,000 지형도와 유사)를 접하게 된다.

시중(市中)의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조선일보사 실전 호남정맥 낙동정맥 종주산행은 광양시 망덕산에서 시작하여 장수군 영취산에서 끝을 맺지만 사람과 산의 호남정맥 부록 개념도는 영취산에서 출발하여 망덕산 직전의 백운산을 종착지로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일보사가 발간하는 월간 산’(19695월 창간)과 산악문학의 사람과 산’(198911월 창간)에서 바라보는 관점(觀點)이 다르다보니 정말 혼란스럽다.

1980년 인사동 고서점에서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님에 의해 조선광문회(1910년에 설치된 한국고전 간행기관)의 필사본 산경표가 발견되고 조선일보(월간 산)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부생(復生)하지만,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의 경직적인 해석으로 완전히 왜곡(歪曲)되어 버린다.

산경표(山經表)란 산악전문지식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고전(古典)으로서 전통적(傳統的)인 농경사회(農耕社會)의 지리개념(地理槪念)을 표현하고 있다.

농본주의(農本主義)를 표방(標榜)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0대강의 형성과정과 비상시(非常時)에 군사목적(軍事目的)을 수행하기 위하여 산줄기의 흐름을 분석(分析)했으며 또한 특정한 시대(時代)에 나타나는 문화(文化)도 접목(椄木)되어 있다. 즉 농경생산이 발달하려면 논밭의 취수(取水)는 절대적이며 물의 흐름을 알아야만 안정적인 농업이 가능하고 10대강에서 생산된 농산물(임산물)의 운송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군사적(軍事的)으로 위급한 상황(狀況)이 발생하면 산줄기를 따라 방어시설(防禦施設)을 구축(構築)하였고 백성들의 피난지(避難地: 산성)로 이용되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을 둔 풍수지리(風水地理)도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에는 풍류(風流)를 즐기는 일부 지식층에서 간혹 명산(名山)을 찾기도 했지만, 지금과 같은 산꾼도 없었고 대간(大幹)과 정맥(正脈) 길을 걸어간 사람도 없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도 한양(漢陽)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 고을의 지형도(18세기 후반 영, 정조시대에 군현지도가 제작이 활성화 됨)를 조합(組合)하여 축적을 맞춘 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철종 12)를 제작(製作)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고어(古語)와 문화적(文化的) 차이를 극복(克服)하기 어려운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은 산경표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들은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의 백두대간(백두대간+장백정간+낙남정간)과 열두 정맥만 보인다.

한 개의 백두대간과 열두 정맥으로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산꾼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 산경표를 접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은 등산(登山)을 할 수 있는 산악지형중심으로 산경표를 해석함으로 백두대간 정의(定義)부터 오류(誤謬)를 범한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로 명명(命名)하고 있지만 산경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현대인(現代人)들은 산경표를 읽고 어떤 부분에서 해석(解釋)을 잘못했었기에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으로 끝나는 것으로 착각(錯覺)을 했을까?

 

문화적 차이(文化的 差異)를 극복(克服)하지 못한 산악전문지식인들은 띄어쓰기를 잘못하여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식의 해석으로 큰 오류(誤謬)를 저지른다.

원래 우리말(옛날에 쓰던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다. 고전소설(古典小說)의 한글 본()을 보면 줄줄이 붙어있는 글을, 읽는 독자(讀者)가 적당히 알아서 끊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띄어쓰기는 서재필이 미국생활을 하며 서양문헌(西洋文獻)의 띄어쓰기 유용성(有用性)을 깨닫고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記事)에 처음으로 도입(導入)하면서 시작된다.

한문(漢文)으로 된 고서적(古書籍: 산경표 포함)들도 구절구절에 토를 다면 읽는데 어떤 토씨를 달아주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은 백두대간을 해석하면서 띄어쓰기를 어떤 부분에서 잘 못했는지 산경표 안으로 들어가 보자.

띄어쓰기를 잘하는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의 산경표 분석법은 다음과 같다.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낙남정맥(洛南正脈),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구분(區分)한다. 낙남정간(洛南正幹)을 낙남정맥이라는 억지주장에 따라 ‘1대간, 2정간(장백, 낙남), 12정맥또는 ’1대간, 1정간(장백), 13정맥으로 해석한다.

 

산경표에는 ‘1대간, 12정맥으로 정의(正義)하고 있었지만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은 어떤 부분에서 띄어쓰기를 잘못하여 ‘1대간, 12정맥‘1대간, 2정간(장백, 낙남), 12정맥또는 ’1대간, 1정간(장백), 13정맥으로 착각했을까?

 

현대 산악인의 모습이 아닌 옛 선조의 눈으로 보면 단번에 찾을 수가 있다.

산경표에서 백두대간 편을 들여다보면 한눈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백두대간의 산과 고개들을 나열하다가 장백정간이 분기되는 황토령(분기봉: 원산)에서 장백정간 편으로 넘어가 장백정간의 고개와 지명(地名)들이 표기(表記)되어 있다. 장백정간의 마지막 지명인 서수라곶산에서 다시 백두대간 황토령으로 되돌아와 백두대간 나머지 산과 고개들의 지명이 순서대로 나열된다.

백두대간 다음 장은 낙남정간인데 낙남정간에 위치한 18(산경표 기준)의 산과 고개들의 지명중에 뒤 부분 10개만 보이고 앞부분 8개가 없다. 경상남도 고성군, 함안군, 마산시, 창원시, 진해시, 김해시의 산들만 보이는데 진주시, 사천시, 하동군의 산과 고개들은 어디로 갔다는 이야기인가!

백두대간 마지막 페이지로 되돌아가면 지리산(智異山) 아래로 취령(鷲嶺), 황치(黃峙), 옥산(玉山), 소곡산(素谷山), 옥녀산(玉女山), 망진산(望晉山), 팔음산(八音山), 천금산(千金山)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낙남정간 산과 고개들은 두 쪽으로 나뉘어 하동군, 진주시, 사천시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 표기되어 있고 고성군, 함안군, 마산시, 창원시, 진해시, 김해시의 산줄기에 해당하는 무량산(無量山), 여항산(餘航山), 광려산(匡廬山), 두척산(斗尺山:무학산), 청룡산(靑龍山), 구룡산(九龍山), 전단산(?檀山:정병산),불모산(佛母山), 구지산(龜旨山), 분산(盆山)은 낙남정간 편에 소개되고 있다.

산꾼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달리 낙남정간(일부 산꾼들의 주장: 영신봉~동신어산)은 고성군 무량산(無量山)에서 시작하여 김해시 분산(盆山)에서 끝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현대의 산악전문지식인들 중에 누구 한사람이라도 산악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았다면 혼동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경표의 백두대간은 다음과 같이 나열되어 있다.*****

 

백두대간 장백정간 백두대간 낙남정간

(백두산~황토령) => (장백산~서수라) => (황토령~지리산) => (천금산~분산)

(낙남정간: 취령~천금산)

 

산경표가 무엇 때문에 1대간 12정맥인지 더 자세히 분석(分析)해보자.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간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전개(展開)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2정맥의 산줄기를 소개하는 쪽(:)에는 해당 정맥을 독립적(獨立的)으로 언급(言及)하고 있어 혼란스럽지 않지만, 백두대간 편에서는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간의 산줄기가 뒤섞여 있어 보는 사람에 따라 십인십색(十人十色)으로 해석(解釋) 할 수 있다.

가장먼저 산경표를 접한 사람은 고지도(古地圖) 연구가 이우형님이지만 인문학(人文學)에 능통한 사학자(史學者)들을 등한시(等閑視)하고 역사학(歷史學)에 거의 문외한(門外漢)인 산악전문지식인들에게 공개(公開)함으로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실수(失手)를 범한다.

띄어쓰기에 능숙한 언론계(言論界) 산악전문지식인들은 백두대간을 완전 해체(解體)하여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큰 산줄기는 백두대간으로, 함경북도 원산(圓山)에서 서수라곶은 장백정간,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시 동신어산(산경표는 분산:분성산)은 낙남정간도 아닌 낙남정맥이라는 이름으로 세 토막을 내어버린다. 전문지식이 없는 산꾼들까지 맹목적인 추종(追從)을 하면서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는 터무니 없는 논리(論理)가 정착되고 일반화(一般化)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산꾼의 눈높이로 산경표를 접근하면서 백두대간이란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산경표에서 제기(提起)하는 백두대간이란 현대의 산꾼들이 생각하는 그런 산줄기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산경표란 산꾼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농경사회에서 농업활동, 임업활동을 하면서 잉여생산물을 타 지역과 물물교환(物物交換)을 하다 보니 10대강을 이용한 교통망(交通網)이 발달되었고, 국가비상사태(國家非常事態) 같은 전쟁(戰爭)이 발발(勃發)하면 방어선(防禦線) 또는 피난처(避難處:산성)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용했었다.

현대인들은 산경표를 읽을 때 산꾼으로서가 아니라 200여 년 전의 옛사람들의 일상생활(日常生活)로 돌아가서 산경표를 접했다면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主張)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백두대간장백정간백두대간(마지막장에는 낙남정간 8개 지명)낙남정간(낙남정간 10개 지명)으로 전개(展開)되어 설까?

 

백두대간에서 분기되는 12개의 정맥을 들여다보면 바로 해답(解答)이 나온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정맥과 어울려 10대강의 울타리가 된다. 백두대간은 첫 번째 분기봉인 함경북도 원산(圓山)에서 장백정간(長白正幹)으로 갈라지고, 두 번째 분기봉인 낭림산(狼林山)에서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으로 세 번째 분기봉인 두류산(豆流山)에서 무명정맥(無名正脈: 이름이 없음) 산줄기를 지나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으로 나누어진다. 네 번째 분수령(分水嶺: 현재지명 추가령)에서 한북정맥(漢北正脈)이 분기되고 다섯 번째 태백산(太白山: 현재지명 매봉 또는 천의봉)에서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분기되고 여섯 번째 속리산(俗離山: 산경표와 현재지명이 동일)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산줄기를 지나 한남정맥(漢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이 분기되고 일곱 번째 장안치(長安峙: 현재지명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산줄기를 지나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분기되고 여덟 번째 지리산(智異山)에서 낙남정간(洛南正幹)은 분기가 아닌 백두대간의 연속이다.

 

왜 낙남정간만은 다른 정맥들처럼 분기되지 않고 백두대간에서 계속 이어졌을까?

 

장백정간 및 12정맥의 쪽(:)에는 백두대간에서 분기되는 봉우리(또는 고개)를 선두(先頭)로 하여 자기 자신들의 산줄기에 위치한 봉우리와 고개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낙남정간(洛南正幹) (:)에는 18개 지명중에 뒤 분분 10개만 보인다. 낙남정간이 지리산에서 분기되었다면 앞쪽에 위치한 진주시, 사천시, 하동군의 여덟 개의 지명도 언급되어야 하는데 낙남정간 편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낙남정간 앞쪽에 위치하는 진주시, 사천시, 하동군의 여덟 개의 지명은 놀랍게도 백두대간 마지막장의 지리산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의 작위적인 발상(發想)으로 만들어진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큰 산줄기인데 장백정간 및 12정맥의 쪽(: )과 달리 유독(唯獨) 낙남정간만 이런 표기를 했을까? 옛 선조들은 낙남정간을 백두대간의 연속으로 보았기 때문에 어디에 위치(位置)하던 문제(問題)가 안 되었지만 띄어쓰기에 익숙한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은 백두대간의 산줄기인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을 분리하여 세 토막을 내어버렸다.

만약(萬若)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의 주장대로 지리산 다음의 나지막한 산줄기를 낙남정맥으로 명명(命名)하고 백두대간 원산(산경표에서는 황토령)에서 분기된 산줄기를 장백정간으로 부르려고 했다면, 옛 선인들은 백두대간(백두산~황토령), 장백정간(황토령~ 서수라), 백두대간(황토령~지리산, 취령~천금산) 낙남정간(천금산~분산) 순으로 뒤섞어놓지 않고 12정맥처럼 보기 좋게 나열(羅列)했을 것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큰 산줄기만을 백두대간이라는 주장은 등산을 목적으로 하는 산악전문지식인들의 억척이라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산경표에 의한 백두대간은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의 영역(領域)을 포함(包含)하고 있으며 장백정간, 낙남정간을 포함한 백두대간의 158개 지명중에 85개는 봉우리이고 73개는 나지막한 고개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옛 선인들은 큰 봉우리뿐만 아니라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고개들을 더 중요시했고 현대의 숙박시설(宿泊施設)과 같은 주막(酒幕)들이 산을 넘는 들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두대간과 정맥에 위치한 나지막한 고개들을 왜 중요시 했을까?

 

백두대간(장백정간과 낙남정간포함)은 정맥과 어울려 우리나라 10대강의 울타리가 된다. 10대강 유역(流域)은 농사(農事)를 지을 수 있는 넓은 평야(平野)가 자리를 잡고 있어 대부분의 농산물(임산물)과 특산물의 생산되었고 잉여생산물은 타 지역의 잉여생산물과 물물교환(또는 조세를 현물로 납부)식으로 거래를 했다. 농수산물(특산물 포함)을 운송(運送)하려면 사람의 힘은 한계(限界)가 있다. 우마차(牛馬車)를 이용한 수송방법(輸送方法)은 산지(山地)가 없는 동일지역(同一地域)에서만 효율성이 있고 타 지역으로 이동시에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0대강의 수로(水路)를 이용한 나룻배 수송은 많은 화물(貨物)을 싣고 먼 거리(距離)까지 이동할 수가 있어 현대의 고속도로(高速道路)와 같은 역할(役割)을 하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생산된 농수산물과 특산물은 10대강의 수로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고 백두대간과 정맥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기 위해 우마차(牛馬車)로 환적한다. 고개를 넘은 화물은 다시 10대강의 수로를 따라 목적지(目的地)로 이동된다. 10대강을 축으로 이동(移動)하는 연속수송체계(連續輸送體系)에서 백두대간과 12정맥의 고개위치는 상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대 산악전문지식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산줄기를 표시하려고 했다면, 높은 봉우리 지명만 나열하면 되지 나지막한 고개들의 지명은 표기할 이유가 없었다. 산경표를 사용하던 농경사회(農耕社會)는 현대사회(現代社會)처럼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다. 현대의 산악인들의 주장과 달리 등산이라는 개념(槪念)으로 접근(接近)할 수가 없었다.

 

산경표에서 백두대간과 정맥에 위치한 높은 봉우리들은 어떤 용도(用途)로 이용했을까?

 

첫 번째 전쟁(戰爭)과 같은 국가비상사태(國家非常事態)가 발생하면 백두대간 및 정맥을 위주로 방어선(防禦線: 산성)과 피난처(避難處)가 구축(構築)되기 때문에 산경표를 직간접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역사(歷史)에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현대와 같은 기상관측시설(氣象觀測施設)이 없어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예방(豫防)할 수 없었던 농경사회에서는 그 대안으로 풍수사상 및 산줄기(방풍림 효과)를 이용하여 생활터전을 보호(保護)하려는 노력(努力)들을 엿 볼 수가 있었다. 풍수사상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진산(鎭山)으로 도읍지(都邑地)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조선 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심의 삼각산(三角山)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셋 번째 산경표에 올라와 있는 산들은 보릿고개와 같은 궁핍한 생활을 보전(補塡)해주고 주 연료(燃料) 공급원이면서 목조건축물(木造建築物)의 자원(資源)이기도 했다.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이 백두대간의 영역라면, 백두대간이라는 큰제목 아래에 봉우리와 고개이름을 나열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정간이라는 소제목(小題目)을 사용했을까?

 

먼저 장백정간((長白正幹) 및 낙남정간(洛南正幹)의 정간(正幹)이라는 뜻을 알아보자.

17세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1천지문(天池門)에는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이 나오며 백두정간(白頭正幹)의 정()바르다는 뜻보다 으뜸이라는 뜻이 강하다. 정일품(正一品) 할 때의 정()으로 큰 ()자와 같은 뜻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간과 대간은 같은 뜻으로서 나라의 기둥이다. 같은 뜻을 지녔다면 한가지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두 가지의 이름을 사용했을까?

먼저 장백정간의 장()을 들여다보자. 백두대간의 원산(圓山)에서 분기된 한줄기는 북진을 하고 다른 줄기는 남진을 한다. 장백정간이라는 소제목을 만들지 않고 북진하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장백산(長白山), 마유령(馬踰嶺), 거문령(巨門嶺), 계탕령(契湯嶺), 구탐령(俱探嶺). 차유령(車踰嶺), 이현(梨峴), 무산령(茂山嶺), 가응석령(加應石嶺), 엄명산(嚴明山), 녹야현(鹿野峴), 갈파령(葛坡嶺), 송진산(松眞山), 백악산(白岳山), 조산(造山), 서수라곶산(西水羅串山) 16개의 지명을 먼저 나열하고 다시 백두대간 원산(圓山)으로 되돌아와 남진하는 산줄기의 봉우리 및 고개들을 나열한다면 위치파악도 어렵고 혼란스럽다.

장백정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북쪽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의 지명들과 남쪽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의 지명들이 뒤섞여 그림(지형도)이 아닌 문자로 표기된 산경표를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선인(先人)들은 이런 고민(苦悶)을 해소(解消)하기 위하여 원산((圓山)에서 북진하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장백정간이라는 소제목으로 구분을 했다. 백두대간영역의 북쪽산줄기를 장백정간이라는 소제목을 사용하였고 장백정간은 백두대간의 산줄기라는 의미로 백두대간(백두산~황토령)장백정간(장백산~서수라)백두대간{황토령~지리산~낙남정간(취령~천금산)}낙남정간(천금산~분산)으로 기록했다.

 

장백정간(長白正幹)에서 장백(長白)은 무슨 뜻일까?

 

백두대간의 원산(圓山)에서 분기된 북쪽의 산줄기의 첫 지명이 장백산(長白山)이다. 현대의 지형도에는 장백산이 없지만 철종 12(1861)의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현재의 함경북도 경성군 지역에 장백산이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한반도의 산들 중에 백두산을 가장 크게 표기했고 장백산을 두 번째 크기로 표기한 것을 보면 백두산에 버금가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남쪽에서는 태백산 지역과 지리산 지역을 비교적 크게 표기를 했지만, 백두산과 장백산의 영역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장백산을 지리산 네다섯 배의 크기로 표현했다면 현대의 지형도에서 어떤 산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렇게 크게 표기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지리산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1916.77m)인 주봉으로 노고단(1507m), 반야봉(1571m)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山岳群) 군을 형성(形成)한다면 장백산의 현 위치는 관모봉 주변으로 추정된다.

관모봉(2,540m)은 한국 제2의 고봉(高峯)이며 관모봉을 중심으로 2,000m급 이상의 봉우리들이 30여 개나 솟아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山岳地帶)로서 함경산맥(장백정간)의 주봉(主峯)에 해당된다. 백두산(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과 장백산은 같은 의미인데 한국 제2의 고봉이 위치하고 있는 관모봉(2,540m)지역을 장백산이라 했을까? 장백산(長白山)의 긴 장()자는 길다와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흰 백()자는 말 그대로 희다는 뜻이다. 백두산과 같이 우두머리라는 뜻을 사용했다면 장백산은 백두산과 같은 의미다.

백두대간 영역에서 장백정간이라는 소제목으로 표기했지만 장백정간의 산줄기는 2,000m급 이상의 고봉들이 줄을 짓고 있어 백두대간의 산줄기 중에 가장 웅장하다. 백두대간 산줄기 중에 우두머리에 해당되므로 장백정간이라고 명명(命名)했고, 장백정간의 주봉인 관모봉(2,540m) 주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장백산으로 표기한 것은 백두산에 버금가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내 개인적인 사견(私見)을 제시하면, 함경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10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다음해의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다. 2500m급의 고봉지대는 연중 절반은 설산(雪山) 모습을 하고 있어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

 

왜 옛 선인들은 낙남정간도 백두대간의 영역으로 보았을까?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은 등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지식인임으로 2000m급 이상의 고봉들과 1000m급 이상의 준봉들이 나열되어 있는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기둥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산경표는 등산을 전문적으로 연구(硏究)하는 현대 산악전문지식인(山岳專門知識人)들과는 아무런 연관성(聯關性)이 없다. 산경표가 정착되고 통용되던 농경사회에서는 현대와 같은 등산용 지형도도 없었다. 1463년의 팔도총도(八道總圖)는 진산(鎭山)과 주요 하천, 도명(道名), 주요 섬만 표시한 간략한 지도이며 바다에는 파도 무늬가 그려져 있다. 팔도총도는 농경사회의 생활터전을 대변하는 10대강의 강줄기와 풍수지리설에서 사용하는 진산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어 산경표의 태동(胎動)이 된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근간(根幹)이 되었던 군현지도는 16세기이후 꾸준하게 편찬(編纂)되어 18세기 후반 영조, 정조 시대에 절정(絶頂)을 이룬다. 군현지도(郡縣地圖 )란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기본 단위였던 부(), (), (), ()을 대상으로 하여 그린 지도를 군현지도 또는 읍지도(邑地圖)라고 한다. 18세기 후반 군현지도의 기운에서 태어난 조선도(朝鮮圖)는 총 26권으로 나누어 수록(收錄)함으로써 회화식(繪畫式) 지도에서 탈피(脫皮)해 전국(全國)을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구획(區劃)한 다음 그 위에 개별고을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이른바 방안식(方眼式) 군현지도를 택한다.

조선도의 제작(製作) 시기(時期)1800-1822(순조) 무렵으로 추측(推測)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1861) 보다는 50년이 앞서고, 조선 영조 때에 편찬한 여지편람(輿地便覽) 건책(乾冊)의 내제목(內題目)인 산경표(1770)보다는 50년이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산경표는 현대 산악전문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줄기에 의해 태동(胎動)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사방(四方)으로 뻗어나간 대소(大小) 산맥들이 10대강을 어떻게 형성(形成)하는지를 반영(鎭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서(古書)이기 때문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으로 접근하면 낙남정간도 장백정간처럼 백두대간의 영역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무엇인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두 능선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이 하나 있다.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과 강은 하나이다. 고로 산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듯이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고전지리(古典地理)에서 애기하는 산자분수령은 어떤 산에서든 산줄기(능선)를 통해 다른 어떤 산에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백두대간과 정맥은 10대강을 형성하기 위하여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河口)에서 맥()을 다한다는 내용이다. 이글을 다르게 표현하면 10대 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며 정맥이다. 10대 강()의 울타리인 백두대간과 정맥은 바다에서 끝나므로 주맥(主脈)이다.

주맥은 하나의 강(10대 강)을 둘러싸는 울타리임으로 도중에 끊어지지 않고 바다에 이른다.

지맥(支脈)은 주맥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가지맥(측맥: 側脈)으로 바다까지 가기 전에 합수점(合水点: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흐름)에서 끝나기도 하고 동해(東海)및 서해(西海)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의 지맥들은 바다에서 끝나기도 한다.

혹자(或者)들은 10대 강에 전라남도 나주평야(羅州平野)의 젖줄 영산강(榮山江)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관하여 의아(疑訝)하게 생각할 수 있다. 전남 담양군(潭陽郡)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흘러드는 영산강유역(榮山江流域)3,371이며 길이는 115.5km이다. 10대 강에서 가장 작다는 예성강(禮成江)의 유역은 3,916.3이며 길이는 187.4km이다. 영산강은 예성강보다 작은 규모라서 10대 강에 당연히 들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백두대간과 접하지 않고 있어 산경표와 관련이 없는 강줄기다. 산경표와 관련이 있는 10대 강의 울타리는 반듯이 백두대간과 정맥을 울타리로 하고 있다.

 

현대 산꾼들은 산경표를 잘 못 이해하여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했을까?

 

백과사전에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이다. 신경준의<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1대간과 1정간(正幹) 13개 정맥(正脈) 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산줄기[山經]의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되어있지만 눈을 씻고 산경표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런 내용은 없다.

조선 영조 때에 편찬한 여지편람(輿地便覽) 건책(乾冊)의 내제목(內題目)이 산경표인데, 1대간과 2정간(正幹) 12개 정맥(正脈)으로 기록되어 있고 2정간(장백정간, 낙남정간)은 백두대간 쪽(: )에 위치하고 있어 백두대간의 영역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1861)에는 백두산에서 출발한 산줄기는 지리산에서 멈추지 않고 경상남도 남쪽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행하다가 김해시 대동수문에서 맥을 다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경표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는 백두대간의 영역에 낙남정간을 포함하고 있었다.

산악전문지식인들은 ()’이라는 닫힌 마음으로 보았고, 옛 선조들은 생활(生活)’이라는 열린 마음을 보았기 때문에 견해(見解)차이가 천지(天地) 차이다.

 

이런 오류는 몸체인 백두대간에서만 저질러 설까?

 

'사람과 산'에서 20033월부터 20044월까지 연재(連載)했던 호남정맥 개념도를 보자. 장수군 영취산에서 주화산까지는 금남호남정맥으로, 주화산에서 광양시 백운산까지는 호남정맥으로, 백운산에서 망덕산(섬진강 하구)까지는 호남기맥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이론인가?

'사람과 산'에서 연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태백산맥은 없다는 책이 만들어졌다. ‘태백산맥은 없다70페이지에는 지맥은 어떤 경우에도 바다까지 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도중에 끝난다. 어디서 끝날까? 산줄기를 에워싸는 두 물길이 만나는 지점, 즉 합수점(合水点)에서 끝난다(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되어 있고 몇 줄 아래에는 주맥은 하나의 강을 둘러싸는 울타리다. 다시 말해 강의 유역을 에워싸는 산줄기가 그것이다. 끊기지 않고 바다에 이르는 그 산줄기를 주맥이라 한다.“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호남정맥(‘산과 사람에서 주화산~백운산의 산줄기)은 지맥이고 호남기맥(‘산과 사람에서 백운산~망덕산의 산줄기)은 주맥이라는 엉터리 이론이 성립된다.

'사람과 산'의 집필자(執筆子)가 산경표 원본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광양 백운산까지만 언급을 하고 호남기맥라는 국적불문의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약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적용하려했다면 주화산에서 망덕산(섬진강 하구)까지를 호남정맥으로 명명(命名)하고 기맥이라는 용어는 백두대간 및 정맥에서 분기되는 일반(一般) 산줄기에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문외한(門外漢)도 아는 사실이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옛 고도(古都)는 산경표에 어떤 영향을 미쳐 설까?

 

산경표를 보면 본체(本體)인 백두대간부터 산자분수령에 충실(忠實)하지 못하고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분산(분성산)에서 끝을 맺는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옛 고도(古都) 영향(影響)이 컸다.

분산(분성산)이 위치한 김해시 구산동은 500년간 가야연맹(伽倻聯盟)의 맹주국(盟主國) 금관가야(金官伽倻) 도읍지(都邑地)였다. 해반천을 중심으로 김수로왕릉, 허황후릉, 구지봉, 대성동고분 등이 흩어져 있고, 분성산에는 가야시대(伽倻時代)에 축성(築城)된 분산성과 해은사(海恩寺)가 있다. 해은사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駕洛國)에 무사히 도착(到着)한 후 풍랑(風浪)을 막아준 바다의 은혜(恩惠)에 감사(感謝)의 의미로 지은 사찰(寺刹)이다. 해반천은 분성산 산줄기와 나란히 남북으로 뻗어있다.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된 뒤에는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에 신라의 작은 수도격인 김해소경(756)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김해부 관아(官衙)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현재도 김해시청(金海市廳)을 포함한 대부분의 행정관서(行政官署)가 위치(位置)하고 있다. 분산(분성산)은 고도(古都)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였으므로 우대(優待)를 했다.

옛 고도(古都)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居住)하므로 풍수해(風水害), 태풍(颱風), 가뭄, 등 피해(被害)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했지만 현대사회처럼 첨단기상관측시스템이 없어, 농경사회에서는 풍수지리설에 의존(依存) 할 수밖에 없었다. 분성산 주변은 김해시의 중심으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을 벗어나 예우를 했다.

산경표와 김정호 대동여지전도 어디를 찾아보아도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김해시 분산또는 백두산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금남정맥도 한북정맥과 호남정맥처럼 하구(河口)에 이르지 않고, 내륙(內陸)인 충청남도 부여(扶餘) 부소산(扶蘇山)에서 끝났다. 주행도중(走行途中)에 에워싸기로 포기한 이유는 최고의 풍수터인 왕도(王都) 계룡산과 백제(百濟)의 고도(古都) 부여(扶餘)에 위치한 부소산에서 연유(緣由)한다. 계룡산은 신라 5(五嶽) 가운데 하나로 백제 때 이미 계룡 또는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바다 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한국의 4대 명산(名山)으로 꼽혀 조선시대에는 이 산 기슭에 도읍지를 건설하려 했을 정도이다.

도참사상(圖讖思想)의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變亂)을 피할 수 있는 장소(場所)라 했다. 백제(百濟)의 고도(古都) 부여(扶餘)란 이름은 백제시대((百濟時代)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명칭(名稱)이 바뀌지 않은 오랜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다.

백제의 원래 수도(首都)는 위례성(慰禮城: 한성)이었으나, 장수왕(長壽王)의 남침(南侵)으로 지금의 공주(公州)인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하지만 고구려(高句麗) 세력(勢力)은 충남 일부지역(一部地域)까지 남하(南下)하고, 웅진성(공주) 도읍기간(都邑期間)동안에 두 명의 국왕(國王)이 살해(殺害)되고 귀족(貴族)들의 반란(叛亂)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음모(陰謀)의 칙칙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내분(內紛)을 종식(終熄)하고 국가(國家)의 분위기(雰圍氣)를 일대쇄신(一大刷新)하기 위해 도읍(都邑)을 부여(사비성)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부여는 공주보다 금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마강(白馬江)과 부소산으로 이루어진 천해의 요새로서 방어의 이점과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여(夫餘/扶餘)란 이름은 기원전(紀元前: BC)238~494년에 지금의 쑹화강(松花])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滿洲一帶)를 지배한 초기 국가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부여(夫餘/扶餘)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에서 고조선(古朝鮮)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져 400여 년의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지만 고구려(高句麗)에 통합(統合)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다.

이 부여(夫餘/扶餘)에서 금와왕이 동쪽으로 옮겨와 지금 길림성(吉林省) 연길(延吉)지방에 동부여(東扶餘)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내려와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建國)하였다. 그리고 그 지배층(支配層) 일부가 다시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建國)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팽창정책(膨脹政策)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였다. 무령왕(武寧王)이 중흥(中興)을 이룩하기 위하여 천도계획(遷都計劃)을 하였고, 그 아들 성왕(聖王)대에 수도를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夫餘/扶餘)로부터 나온 국가(國家)들이다. 북방(北方)의 기마민족(騎馬民族) 후예(後裔)라는 뜻에서 부여(扶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백제(百濟)의 중흥(中興)을 기하려 했지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말발굽아래 무참히 도륙(屠戮) 당하고 치욕(恥辱)적인 굴복(屈服)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最後)의 현장(現場)이 부여(扶餘)지만, 백제시대(百濟時代)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명칭(名稱)이 바뀌지 않은 오랜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서 역사를 유지(維持)하고 있다.

신라(新羅)의 수도(首都) 계림(鷄林)은 신라가 멸망(滅亡)한 후 경주(慶州)라는 명칭(名稱)으로 바뀌었지만 부여(扶餘)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어 금남정맥이 군산(群山) 앞바다의 장계산(110m, 금강하구)로 가지 못한 것은 풍수지리설의 뿌리와 고도(古都)의 예우(禮遇)하는 차원(次元)에서 나왔다.

왕사봉에서 부여 부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당연히 지맥이므로 정맥이 될 수 없다. 금남정맥은 왕사봉에서 서진(西進)을 하여 금강하구 장계산(110m)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주맥은 하나의 강(10대 강)을 둘러싸는 울타리임으로 도중에 끊어지지 않고 바다에 이른다. 지맥(支脈)은 주맥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가지맥(측맥)으로 바다까지 가기 전에 같은 강의 합수점(合水点)에서 끝나기도 하고 동해(東海)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하천의 지맥들은 바다에서 끝나기도 한다.

풍수지리설의 진산(鎭山)과 고도(古都)의 예우(禮遇)는 한북정맥에서도 볼 수 있다. 한북정맥은 임진강-한강 두 물머리의 오두산으로 진행하지 않고, 수도의 진산(鎭山)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의 다른 이름)을 예우한다고 한강봉에서 방향을 돌려 남진을 한다. 한북정맥 한강봉에서 분기한 산줄기는 사패산(549m), 도봉산(740m), 상장봉(534m), 북한산(백운대: 837m), 남장대(716m), 북악산(343m), 인왕산(340m), 남산(262m), 응봉(175m), 큰매봉(122m)에서 맥을 다하는데 한강도 아닌 중량천에서 마무리를 하지만 주맥(主脈)이 아닌 지맥(支脈)에 해당된다. 주맥(主脈)은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이 될 수 있지만 지맥(支脈)은 가지맥(측맥)으로 한북정맥이 될 수가 없다. 산경표에서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를 삼각산(북한산)으로 표기했지만 수도의 진산을 따라가다 보니 오류를 범했으므로 수정을 하여야 한다. 한북정맥은 임진강-한강 두 물머리의 오두산에서 맥을 다한다.

호남정맥도 섬진강의 하구(외망) 망덕산에 이르지 못하고 백운산(白蕓山)에서 멈춘다. 백운산에서 멈춘 것은 섬진강(蟾津江) 건너편에 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말 도선(道詵)의 옥룡기(玉龍記, 道詵記)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고 되어있으니 광활한 지리의 정기를 받으려고 주행 중에 멈춰 버렸다.

도선국사(827~898)는 백운산의 아래에 위치한 백계산 자락에 기존의 옥룡사를 중창하고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그 제자들은 옥룡사파를 형성할 정도였으니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신라를 대표하는 4대 승려에 꼽힐 정도였지만, 승려로 보다는 음양지리설의 시조(始祖)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말기(新羅末期)로 올라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국사는 영암출신이며 850년 구례에 있는 천도사에서 구족계(출가한 스님이 지켜야 할 계율) 받은 뒤 주로 백운산 주변에서 활동을 했다. 호남정맥이 백운산에서 멈춘 것은 도선국사의 영향이 컸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로 조선일보 실전 호남정맥, 낙동정맥 종주산행의 저자는 섬진강의 하구 망덕산까지 운행하지 못하고 광양 백운산에서 멈춘 것은 18세기의 역사관(풍수사상)보다는 측량수준을 반영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지만 잘 못된 생각이다. “실전 호남정맥, 낙동정맥 종주산행“ 10페이지에는 만일 백운산이 호남정맥이나 종점이 될 때 백운산에서 가까운 섬진강 지역은 전남 구례군 다암면이 되는데, 사실 여기서 하구인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까지는 약 35Km나 떨어져 있으므로 마치 정맥이 중간에 잘려나간 것처럼 되어 버린다.

여타 정맥에서는 이런 경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백운산이후 줄기에 대하여는 자료가 불충분하였거나 너무나 오지여서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되어있지만 역사(歷史)를 전혀 모르고 내뱉는 아마추어(amateur) 수준(水準)의 글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1861)를 보면 호남정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산에서 끝난다. 대동여지도의 근간(根幹)16세기이후 꾸준하게 편찬(編纂)된 군현지도(郡縣地圖 )이며 18세기 후반 영조(英祖: 1694~1776) 정조(正祖: 1752~1800)시대(時代)에 절정을 이룬다. 산경표도 조선 영조 때의 군현지도(郡縣地圖 )를 보고 만들었다.

호남정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산에서 끝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8세기의 역사관(歷史觀: 풍수사상)을 따르다 보니 백운산에서 멈췄다. ‘산과 사람에는 백운산에서 망덕산까지를 호남기맥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기맥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없다 기맥이라는 용어는 현대 산악전문지식인들이 등산의 난이도(難易度)를 등급제(等級制)로 표시(表示)하기 위해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든 용어(用語)로서 산경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금북정맥도 금강의 하구 중대산(102m)을 향하지 않고 태안반도의 지령산(220m)으로 가버린 것도 18세기의 역사관(歷史觀: 풍수사상)으로 보인다.

 

산자분수령에 충실한 산경표를 정의해 보자.

 

백두대간은 북으로 서수라곶산 아래의 두만강(豆滿江) 하구(河口)에서 맥()을 다하고, 남으로는 지리산을 돌아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아래의 낙동강 하구(河口)에서 끝을 맺는다. 백두대간의 영역(領域)인 낙남정간은 산경표의 분산(분성산)에서 끝나는 것으로 주장(主張) 할 수도 있고, 종주산꾼들은 동신어산으로 착각(錯覺)하기도 한다.

지난해 831일 백두대간 단독산행(單獨山行)을 마치고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글을 올려 전문산꾼들에게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은 20세기 초까지 낙동강 하구였다. 일제강점기시대(日帝强占期時)에 대규모의 낙동강(洛東江) 제방(堤防)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김해시 대동면에서 양산시 물금읍 호포까지만 강의 형태(形態)를 유지(維持)하고 있었다. 1,300리를 흘러온 낙동강은 현재의 대동수문에서 부채꼴의 형상(形象)으로 퍼져나갔다. 의심스러우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1861)를 보라. 김해백두산 아래의 대동수문부근이 낙동강 하구였다는 사실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다.

한북정맥은 한강봉에서 임진강-한강 두 물머리의 오두산에서 맥을 다한다.

산경표에서는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를 삼각산(북한산)으로 표기(表記)했지만 수도(首都)의 진산(鎭山)을 따라가다 보니 지맥(支脈)이 주맥(主脈)으로 둔갑(遁甲)하는 오류(誤謬)를 범했으므로 수정(修正)하여야 한다.

금남정맥은 왕사봉(718m)에서 분기된 산줄기가 북진(北進)을 하여 내륙인 부여 부소산에서 끝난 것은 최고의 풍수터인 왕도 계룡산과 백제의 고도 부여(扶餘)에서 연유(緣由)했다. 왕사봉에서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소산(扶蘇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당연히 지맥(支脈)이므로 정맥(正脈)이 될 수 없다.

금남정맥은 왕사봉에서 서진(西進)하여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하구 장계산(110m)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호남정맥은 한북정맥과 금남정맥과 달리 주행 중에 광양 백운산에서 멈추는 오류를 범한다. 도선국사의 옥룡기(玉龍記, 道詵記)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고 되어있으니 광활한 지리의 정기를 받으려고 주행 중에 멈췄다고 보아야 함으로 망덕산에서 맥을 다한다.

금북정맥도 태안반도의 지령산(220m)으로 가버린 것은 18세기의 역사관 및 풍수사상으로 보임으로 충청남도 서천군 금강의 하구 중대산(102m)에서 끝을 맺어야한다.

해서정맥은 산자분수령을 준수(遵守)하기가 어려워 큰 고민(苦悶)을 한 흔적이 보인다. 해서정맥은 대동강과 예성강을 가로지르는 울타리지만 두 강의 하구는 너무 떨어져 있어 편의상 중앙(中央)을 가로질러 황해도 장연군의 장산곶(長山串)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대동강과 예성강의 하구(河口)로 운행하는 정맥을 만든다면 너무도 복잡해진다.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분기된 산줄기(이름이 없는 무명정맥)는 화개산{산경표에서는 개연산(開蓮山)}에서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으로 나누어진다.

산자분수령의 원칙(原則)을 고집(固執)한다면 해서정맥의 멸악산 부근에서 한줄기는 대동강하구로 다른 한줄기는 예성강으로 하구로 운행(運行)하는 산줄기를 정맥으로 명명(命名)하여야한다.

백두대간에서 분기된 산줄기(무명정맥)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 나뉘고 또 다시 해서정맥은 대동남정맥(대동강 남쪽의 산줄기)과 예성북정맥(예성강 북쪽의 산줄기)4분기한다면 정맥이 주맥(主脈)인지 지맥(支脈)인지 분간(分揀)을 할 수가 없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동강과 예성강의 중앙을 가로질러 장산곶으로 향했다.

청북정맥과 청남정맥도 타협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압록강과 청천강의 울타리인 청북정맥은 청천강의 하구가 아닌 압록강으로 향한다. 대동강과 청천강의 울타리인 청남정맥도 청천강의 하구가 아닌 대동강으로 향한다. 청천강보다 규모가 훨씬 큰 압록강과 대동강을 선택했지만 정맥의 이름은 청천강을 사용하여 약자(弱者)를 위로(慰勞)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보인다.

 

만신창이(滿身瘡痍)로 변해버린 산경표(山經表), 산꾼 이재수가 바로 잡는다.

 

산경표에는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은 백두대간영역으로 정의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북으로 서수라곶산에서 맥을 다하고 남으로는 김해 분산에서 주행을 멈추지만 산자분수령에 의한 백두대간의 마지막 봉우리는 김해 백두산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이론은 불멸의 진리다.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은 산자분수령의 정신을 지키려했지만 한계에 부딪쳐 타협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인위적경계(人爲的境界)를 적용했지만 산자분수령에 충실한 정맥으로 보아야 한다.

한북정맥은 한강봉에서 삼각산(북한산)으로 남진을 한 것은 18세기의 역사관(풍수학)으로 임진강-한강 두 물머리의 오두산으로 운행하여야 한다. 한강봉에서 삼각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주맥이 아닌 지맥(가지맥)이다.

낙동정맥과 한남금북정맥에서 분기된 한남정맥은 산자분수령의 교과서(敎科書)라 할 정도로 잘 정의(正義)되어있어 이론(理論)의 여지가 없다.

금남호남정맥에서 분기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은 18세기의 역사관(歷史觀: 풍수학)이 적용(適用)되어 있어 산자분수령에 충실한 정맥으로 재조명(再照明)하여야 한다.

금남정맥의 왕사봉에서 부여 부소산으로 향한다면 주맥이 아닌 지맥(가지맥)이 되므로 왕사봉에서 서진(西進)을 하여 금강하구 장계산(110m)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의 분산(하구는 김해백두산)처럼 백운산에서 운행 중에 멈출 것이 아니라 섬진강의 하구 망덕산까지 이어가야한다.

 

산경표는 1대간(백두대간+장백전간+낙남정간) 12정맥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태백산맥(太白山脈)은 있고 신산경표(新山經表)는 없다.

1986년 언론매체(言論媒體: 조선일보)에 이우형님이 태백산맥(太白山脈)이라고 하지 말고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권유(勸誘)하는데서 일반대중(一般大衆)에게 알려지고 백두대간을 완전히 이해(理解)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산악회(大學山岳會)에 의해 백두대간 산길이 최초로 열리고 열정(熱情)적인 산악인들과 일반산악회에서 그 길을 따라가면서 사회적(社會的) 공감대(共感帶)를 형성(形成)한다.

198911사람과 산이라는 전문잡지(專門雜誌)가 창간(創刊)되고 그 당시(當時)에 많은 산악인들이 관심(關心)을 가지고 있던 백두대간을 신생(新生) 잡지사(雜誌社)에서 이슈(issue)화 시켜 연재(連載)를 한다. 짧은 시간에 독자층을 확보(確保)하기 위해 산맥(山脈)은 없다는 흑백논리(黑白論理)를 전개(展開)했고, 백두대간에 절대적((絶對的) 가치(價値)를 부여(附與)함으로서 그에 반하는 모든 이론(理論)은 잘못되었다며 권선징악(勸善懲惡)식의 연재소설처럼 변질(變質)된다.

산경표란 인문학(人文學)의 향기(香氣)로서, 지질학(地質學)을 다루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산맥(山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고토 분지로(일본 지리학자)가 조선침략정책(朝鮮侵略政策)의 일환(一環)으로 1900년과 1902, 두 차례에 걸쳐 광물탐사사업(鑛物探査事業)을 하면서 산맥(山脈)이라는 용어(用語)가 사용되었더라도 산맥(山脈)은 산맥(山脈)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侵略)하기 전에도 산맥(山脈)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연과학분야의 학문(學問)이 발전하지 못하여 우리 선조(先祖)들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이다.

20년 전 신생(新生) 전문잡지사(專門雜誌社)가 정착(定着)하기 위해서는, 독자(讀者)의 입맛에 딱 맞는 흥미(興味) 위주(爲主)의 기사연재(記事連載)가 필요했고, 고객(顧客)의 취향(趣向)에 맞추어 산경표(山經表)를 번역(飜譯)을 하다 보니 백두대간의 실체(實體)와 관련한 진실성(眞實性)을 담을 수가 없었다.

산악언론사(山岳言論社)들이 만신창(滿身瘡痍)이로 만들어버린 산경표(山經表), 이제는 흥분(興奮)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바라보자. 산경표는 인문과학(人文科學) 또는 사회과학(社會科學)으로 역사학자(歷史學者)가 논하여야 할 고서(古書)이며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지질학(地質學 또는 자연지리학)까지 침범하여 이 땅에는 산맥(山脈)이 없다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전개(展開)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최근에 조선일보에서 발간(發刊)신산경표라는 서적(書籍)을 대형서점(大型書店)에서 접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산경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고 산악인(山岳人)들이 유용(流用)하게 활용(活用)할 수 있는 등산지침서(登山指針書) 정도로 보인다. “신산경표에서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지리산(智異山)까지이며, 이 땅의 중심 산맥(山脈)이 되어 모든 물줄기를 크게 동서로 양분(兩分)한다는 취지(趣旨)이다. 물줄기를 동서(東西)로 나누려면 지리산((智異山)에서 멈춰서는 안 되고 낙동강(洛東江) 하구(河口)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까지 이어가야한다. 백두대간은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을 포용(包容) 할 때만 이 땅의 모든 물줄기를 동서(東西)로 양분(兩分)할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애국가 첫 구절에 올라와있다.

한국 국가에 준용(準用)되는 애국가(愛國歌)는 작사자(作詞者) 미상(未詳)이지만 우리민족의 얼(정신)이 숨 쉬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의미는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북으로 장백정간의 서수라곶산 아래의 두만강 하구에서 맥을 다하고 남으로는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 아래의 낙동강 하구에서 끝을 맺으므로 백두대간(백두산)의 산줄기는 동해바다와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18961121일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불린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 세는 산경표의 1대간 12정맥과 10대강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산경표에서는 종주산꾼들이 등산을 하기 편리하도록 구간을 나누어 무슨 기맥(奇脈), 무슨 지맥(支脈)으로 표기했지만 기맥이라는 용어는 풍수학에서 인용(引用)했고 지맥이라는 단어는 주맥(主脈: 으뜸 맥)에서 분기(分岐)된 가지맥(지맥: 支脈)을 의미(意味)한다.

산경표는 농경사회(農耕社會)를 대표하는 고서(古書)로서 10대강유역의, 뱃길, 육로, 농수로를 논하는 인문학(人文學) 서적(書籍)으로서 일반적인 상황(狀況)에서 그 내용과 가치를 인정받아 널리 사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普遍妥當)한 지식(知識)을 설명하고 있다.

태백산맥은 없다신상경표는 산악인에 의하여 등산(登山) 목적(目的)으로 사용될 때 가치(價値)를 갖는 등산용 지침서(指針書)로서 산경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산악인들의 등산용 지침서를 설명하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산경표를 인용(引用)한다면 사회적(社會的)인 혼란(混亂)만 야기(惹起)한다. 산경표에서 1대간 2정간(백두대간 영역) 12정맥은 10대강의 유역능선(원수분: 原水分)으로 산줄기의 높이, 규모(規模), 명산(名山), 진산(鎭山)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미약(微弱)한 산줄기라도 하구(河口)까지 이어가야 한다.

 

글쟁이도 아닌 무명의 산꾼 이재수가 소책자 한권의 분량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20058월 낙동정맥을 준비하면서 조선일보 신산경표사람과 산의 연재물(連載物)을 발췌(拔萃)하여 만든 태백산맥은 없다는 책자(冊子)를 접했다. 산악전문지식인들의 혼()이 깃들어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등산(登山)이라는 편협(偏狹)적인 경험(經驗)과 좁은 전문성(專門性)으로 102페이지()밖에 안 되는 산경표를 본질(本質)과 동떨어진 해석(解釋)으로 백두대간을 세 토막(백두대간+장백정간+낙남정간)을 내고 말았다. 인문적(人文的) 소양(素養) 부족(不足)은 산경표의 내면(內面)에 숨어있는 10대 강을 볼 수 없었고 등산만을 위한 산줄기 분석(分析)5,000년 역사의 애환(哀歡)이 담긴 찬란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제대로 계승(繼承)하지 못했다.

산경표를 산악인의 전유물(專有物)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잘못된 해석(解釋)에 관련하여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다. 검증(檢證)을 거치지 않은 산악전문지식인들의 산경표와 관련한 이론(理論)은 어느 시기에는 신뢰(信賴)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진리(眞理)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백두대간을 238년 만에 되찾기 위해 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 백두대간 길과 정맥 길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하고 느끼면서 걸었다.

200631일 김해시 백두산을 출발하여 2007831일 강원도 고성군 진부령에 도착(到着)하면서 올렸던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글은 이 땅을 걷는 진정한 종주산꾼들에게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글에 도취(陶醉)되어 곧장 호남정맥 길로 들어서려다가 멈췄다.

6개월 동안 백양산(낙동정맥)을 주말(週末)마다 오르내리며 김해시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훗날 호학(好學)의 자질(資質)을 갖춘 후배 산꾼들은 백두대간의 정확한 의미(意味)를 알게 될 것이고, 그 길을 걸으면서 '산꾼 이재수를 공공연하게 떠 올릴 것이다. 현대 산꾼의 눈으로 바라보면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지만 옛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면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참된 마음을 전하려 했던 무명의 산꾼을 잊지 않을 것이다.

 

20085월 호남정맥을 시작하면서 산꾼 이재수가 쓰다.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2007년 9월 8일) 출처 : 블로그 금정산 산돌이(http://blog.daum.net/busan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