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망산 산행을 마치고 충무사 성웅 이순신 장군을 참배하러 제승당으로 향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제승당으로 가는 길은 아늑하고 고요하다. 한산만 바닷물이 호수처럼 잔잔하다.

왜놈들이 이유 없이 조선을 침략해 나라가 풍전등화 촛불처럼 꺼져갈 때, 홀연히 일어나 삼도수군통제사 조선 바다 지켜내니, 왜놈들 혼비백산 학익전에 떨어지고, 조선 총통 불화살로 왜놈 수장 목을 갈라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구했건만,

한심한 나라님은 의주로 도망가고, 무슨 놈의 역모인지 역적으로 몰아붙여 삭관파직 하였어도 그의 가슴 오매불망 나라 걱정 한이 없다.

명일 협상 지리멸렬 지루한 세월 속에 죄 없는 일반 백성 온갖 고초 다 격의고, 노모 부인 아산집안 쑥대밭으로 분탕 되고 사랑하는 막내아들 죽임까지 당했건만, 나라 구한 전장에서 애끓는 그의 심정 그 누가 알아주랴.

가족도 지켜주지 못한 허약한 나라 구한다고 이역만리 전장에서 노심초사 애끓는 마음 한산도 바다 위에 달빛만 처량하다.

성웅 이순신에 대한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어 제승당으로 향한 발걸음 허우적거릴 뿐이다.
○ 한산대첩

1592년 일본군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전체가 큰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유독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황포, 율포 등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 재해권을 확보하여 서해로 통한 대륙진출의 계획을 세우고 병선과 전력을 정비하여 1592년 7월 7일 와키자키가 이끄는 일본군의 주력 함선 70여 척이 견내량 해협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접한다.
이순신 장군은 7월 8일 아침 55척의 전선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진격하였다. 현장에서 견내량의 지세를 파악하고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거북선을 앞세워 학익전을 펼치고 각종 총통과 활을 쏘아 적선 59척의 적을 섬멸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사적 제113호 한산도 이충무공유적지 표지석

제승당 입구

제승당 관람안내소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제승당 안내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이곳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후 운주당을 건립한 곳이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로 임명된 이후 1597년까지 3년 8개월간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을 두고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하여 국란을 극복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1592년 한산대첩은 불리했던 전쟁 상황을 완전히 뒤바꾼 결정적 승리로,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록된다.
한산도는 천혜의 요새이자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산대첩 승리 후 이순신 장군은 이곳으로 본영을 옮겨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1597년 이순신 장군이 파직된 후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면서 이곳 본영은 모두 불타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된 지 142년 만인 1739년 107대 통제사 조경이 충무공이 작전을 지휘하던 운주당 터에 제승당과 제승당유허비를 세웠다.
1963년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5년 제승당 성역화 사업을 통해 충무공의 영전을 모신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을 정비하였다. 이후 복원을 거쳐 현재 수려한 주변 경관과 함께 당시 수군 본영의 모습을 되찾아 충무공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자리하고 있다.
* 삼도수군통제사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 전라 충청 세 도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무관직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효율적인 수군 지휘체계를 위해 삼도수군통제사(종 2품)가 신설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 제도는 1895년까지 유지되었고, 그동안 208명의 통제사가 재임하였다.
○ 난중일기

이충무공께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진중생활을 기록한 일기로서 전투 출동상황, 부하장수의 보고내용, 장계를 올린 일, 어머님과 가족을 걱정하는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벌한 일, 공문 발송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아울러 16세기말 동아시아 각 국가 간의 갈등과 패권 경쟁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세계사적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제승당 가는 길

한산도야음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한산도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성웅 이순신에 대한 가슴 깊이 사무치는 절절한 존경심을 뒤로하고 제승당으로 향한다.
○ 우물

이 우물은 1593년 당시 이순신이 한산도 통제영 안에 운주당을 창건하고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이다. 바다에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 대첩문

제승당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

제승당 경내 들어가기 전 느티나무
○ 제승당 안내

○ 충무문

충무문을 향하여

충무문을 지나면

사적 제113호 한산도이충무공유적지 표지석
○ 제승당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부하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현재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 이순신은 선조 26년(1593) 7월 15일부터 한양으로 압송되어 갔던 해인 선조 30년(1597) 2월 26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주둔했다.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제승당은 이충무공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 업무를 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화약을 사용한 신무기인 총통의 제작과 보급에도 힘썼다.

이곳은 1,491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와 많은 시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 이순신이 기거했던 운주당* 의 터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을 집으로 사용하는 한편 집무실로도 사용하였다. 당시의 운주당은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 운주 : 지혜로 계책을 수립한다는 뜻

이후 영조 15년(1739)에 통제사 조경이 다시 세우고 이름을 제승당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제승당은 1976년 제승당 정화사업 때 다시 지은 것이다.
○ 수루

이 수루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망루였다.

수루에서 남해안의 왜적의 동태를 파악한 후에 이를 봉화, 연, 고동 소리 등을 이용하여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 등 주변 지역으로 알렸다. 이순신은 수루에 올라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나랏일을 걱정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1976년의 제승당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현재의 위치에 수루를 새로 지었다. 이후 옛 문헌의 내용에 근거하여 2014년에 전체를 나무로 고쳐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이순신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공덕비


○ 한글비

한글비는 1948년 815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남도 초, 중등학교의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이순신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서 그 정신을 이어받자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제승당 유허비

제승당 유허비는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작전지휘본부로 사용한 운주당이 있던 곳이다.

운주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제승당은 1739년 통제사 조경이 다시 지은 것이다.
3개의 비석 중 왼쪽비석은 1739년에 제107대 조경이 세운 것이다.

오른쪽 비석은 그곳이 전에 있던 비석을 묻은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이순신의 후손이자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세웠다.

가운데 비석은 오른쪽 비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 제승당 정화기념비


○ 충무사

충무사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정은 종 2품 통제사의 관복 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매년 봄, 가을 통영시민들이 제승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또한 한산대첩 기념일인 8월 14일 (양력)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해군사관생도들이 참배한다.

통영시는 한산대첩제를 성대히 거행하여 이순신의 정신을 기리며 이어가고 있다.
사당에는 국보 제76호인 서간첩의 일부와 이순신이 중국 송나라 역사를 읽고 썼던 독후감이 병풍으로 만들어져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이순신 영정은 1978년에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이순신 영정
○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덕수 이 씨로 1545년 3월 8일 새벽에 한성 건천동에서 부친 이정과 모친 초계 변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순신 영정
1576년 32세에 과거시험의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을 시작으로 무관직을 수행하여 훈련원 봉사, 발포수군만호, 조선보만호, 훈련원참군 등을 거쳤다. 1589년 45세에는 정읍 현감을 지냈고, 1591년에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48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여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니 이순신의 나이가 54세였다. 전란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했던 우리 민족사의 영웅 이순신의 3대 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멸사봉공의 정신
- 거북선과 조총을 새로이 만든 창의개척의 정신
- 미리 전쟁에 대비해 적을 물리쳤던 유비무환의 정신

이순신의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의 어라산에 있다. 이순신이 죽자 인조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조가 다시 영의정으로 올려 모셨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부인은 상주 방 씨이다.
○ 한산정

한산정은 이충무공이 부하들과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 정도로 활터와 과녁사이에 바다가 있는 것은 이곳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충무공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하여 이곳에 활터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내기에 진 편에서 떡과 막걸리를 내어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러한 기록에서 활쏘기 훈련에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자 한 이충무공의 지혜를 볼 수 있다.
한산정에서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병사들은 대부분 경상, 전라, 충청 출신으로 선조 27년(1594)에 이충무공의 건의로 무과특별시험에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 이충무공 정신

1. 멸사봉공의 정신
2. 창의와 개척정신
3. 유비무환의 정신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정유년 10월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이충무공이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일 ~ 14일
아산본가가 왜적들로부터 분탕질 당해 잿더미가 됐고 아들 면이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비통해했으며, 아들 회를 올려 보낸 후 잘 도착했는지를 걱정했다는 내용이다.
정유년
10월 1일 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여러 집안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2일 맑음.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
3일 맑음.
새벽에 출항하여 돌아오다가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내려가니, 바람이 매우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생략
14일 맑음.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내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 참배를 마치고

이순신장군이 막내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슬퍼하였는지 모른다.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에 마음이 절절하다. 눈물이 난다. 같은 아비로써 그 마음을 공감한다. 전장에 있는 몸이라 죽은 아들을 보지도 못하고 집안이 숙대밭이 되어버린 그 소식 앞에 장수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비통하고 원통했을까? 자꾸자꾸 눈물이 나 가눌 길이 없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역만리 전장에서 노심초사 목숨을 바치고 있는 장군의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한 허약한 나라 조선, 아니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조선의 간신배들!

생각하면 분통하기 그지없는 울분으로 치가 떨린다. 가족을 잃은 장군의 인간적 슬픔이 오죽했으랴? 마음이 먹먹해진다.
나라가 무엇인지?
나라가 그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지?
왜란이 끝나고
전승 농공행상에서 왕과 함께 의주로 간 신하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으니
조선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선조는 과연 어떤 임금이었는가?

역사는 그를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재 평가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길이길이 기억하고 참배하고 교육하도록 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나라 위한 그의 충정
역사는 길이길이
그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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