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실상사를 탐방하면서
지리산 칠암자 순례 산행을 마치고 실상사를 돌아본다. 실상사는 여러번 들렸지만 시간이 없어 자세히 들여다 보지 못해 늘 아쉬웠다.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여 자세히 둘러보고자 한다.
실상사의 연혁을 보며 이 절이 얼마나 오랜 세월의 숱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종의 출발지이고 창건 후 여러 번의 소실과 다시 재건한 역사를 볼 때 남원 실상사는 다른 절과 차원이 다른 절이다.
절집은 그 숱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수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절이다. 어디 하나 화려하거나 가식적인 부분이 없는 절이다.
절집 전체가 웬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도회지 냄새가 하나도 없는 시골 고향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준 것은 이 절이 그 만큼 정재된 수행의 깊이가 깊은 절이기 때문이리라.
◎ 실상사 實相寺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智異山) 천왕봉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홍척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신라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실상사 절집이야기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을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가 그중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때 모두 불타 숙종(1674~1720)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천왕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부처의 자비를 보이듯 포근히 감싸안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맑고 투명한 반선계곡 물이 속세의 번뇌를 씻어 주려는 듯 절 안을 돌아 굽이쳐 흐르고 있다.
경내와 부근의 국가지정문화재 : 백장암삼층석탑(국보 제10호), 삼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탑비(보물 제33, 34호),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 36호), 증각대사 응료탑과 탑비(보물 제 38, 제 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약수암목조탱화(보물 제421호), 석장등(중요민속자료 제15호)
◎ 실상사 천왕문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신화적인 존자들로서,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왕들이다.
북방 다문천왕, 동방 지국천왕
◇ 다문천왕(多聞天)
수미산 북쪽에 위치하며 거주하는 성이 3개가 있다.
가외성(可畏城), 천경성(天敬城)과 중귀성(衆歸城)이다.
항상 부처님의 도량에서 호위하고 불법을 많이 듣기 때문에 다문(多聞)이라 칭해진다.
비사문천왕이라고 불리는 다문천왕은 사천왕 중에서도 가장 높고 대표적인 천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다문천왕은 진리를 보호하는 호법신이며 스스로 진리를 배우기도 하지만 야차신과 나찰장수신을 영도하고 북쪽 하늘 밑에 있는 북구로주의 인간계를 수호하는 재부(財富)의 신이기도 하다.
◇ 지국천왕(持國天)
천왕이 거주하는 성을 현상성(賢上城)이라 한다.
지국천왕은 건달바(乾達婆)와 비사도신장(琵舍闍神將)을 영도하고 동쪽의 인간세계인 동비제하주의 사람을 보호한다.
건달바는 음악을 다스리는 천신임으로 동방을 지키고 수호하는 지국천왕의 지물이 비파인 것은 이를 상징한 것이다.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 증장천왕(增長天)
수미산 남쪽에 있으며 천왕이 거주하는 성은 선견성(善見城)이라 부른다.
증장천왕은 구반다(鳩槃茶)라는 사람의 정기를 빼먹는 감인정기귀(瞰人精氣鬼)와 설레신 등을 영도하고
남쪽에 있는 남섬부주의 인간세계를 수호한다.
◇ 광목천왕(廣目天)
수미산 서쪽에 위치하며 천왕이 거주하는 성은 주라선견성(周羅善見城)이라 한다.
광목천왕은 모든 용왕과 부다나귀신을 영도하고 서쪽 하늘 밑에 있는 서우화주(西牛貨洲)의 인간계를 보호한다.
서방의 수호신인 광목천왕의 지물이 용과 여의주인 것은 이를 상징한다.
◎ 옛기와 탑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가장 먼저 개창한 유서 깊은 사찰인 실상사에서 출토된 기와돌로 쌓은 것입니다. 실상사가 창건된 당시의 모습과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해 실상사와 남원시의 도움으로 지난 1996년 부터 2005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부터 조선시대 까지의 기와들을 모아 이 탑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와 하나 하나가 1200여년에 걸쳐 실상사에 남겨진 우리 조상의 얼을 담고 있사오니 한 점도 없어지지 않게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줍시다.
◎ 법종각
불전사물(범종·운판·목어·홍고)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
◎ 남원 실상사 동종(유형문화재)
이 종은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든 것으로 높이 123cm, 넓이는 83cm 이다. 종 머리에는 용뉴라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한국 종의 전통요소인 용통이란 굵은 관을 달았다.
종 어께의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새겼다.
네 개의 유곽마다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으며, 유곽들 사이에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용뉴와 용통의 장식이 간소하여, 종의 밑자락에도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몸통에 새긴 딱딱한 선녀상을 볼 때, 조선 후기 종의 장식이 형식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남원 실상사 동 서 삼층석탑 (보물 제37호)
이 쌍둥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높이는 8.4m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을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고, 각층 몸체의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다. 지붕 아래 면은 수평이나, 윗면 모퉁이 부분은 위로 치켜올려졌다. 받침부가 비교적 커서 균형감은 덜하나 전체적인 모습은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두 석탑 모두 윗부분이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어 그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서)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동)
◎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 35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각 부분을 팔각형으로 만들어 그 시대 석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석등은 기둥이 둥근 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석등과 다르다. 지붕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원형 지붕을 얹은 점 역시 독특하다. 받침과 기둥, 몸체 등 곳곳에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무늬를 새기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부처의 자비를 담은 불빛을 온 누리에 환하게 비추려는 듯 몸체의 여덟 면 모두에 큼직한 사각창을 내었다.
◎ 남원 실상사 보광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고종21년(1884) 월정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서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서 인정받고 있다.
법당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전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원래 극락전의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을 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 전한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으며 불단 오른편에는 신중 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 실상사 보광전 건칠보살 입상(전북유형문화재)
한편, 실상사 보광전에 모셔진 건칠보살입상은 본존불인 아미타불의 좌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입상은 허리가 길고 하체가 작은 편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고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 눈, 코, 입이 단정하다. 목에는 심도(불상의 목에 있는 세개의 주름으로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3가지 인과를 상징)가 뚜렸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는 이 입상은 특이하게도 온몸에 화려한 구슬 장식을 두르고 있다.
◎ 남원 실상사 명부전
보광전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하여 염라대왕과 시왕을 모신 법당이다.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 남원 실상사 목탑지
불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시사리를 모시기 위한 축조물로 인도에서 기원하였다. 석탑이나 진찹과는 달리 목탑 안에서는 예배를 비롯한 각종 의식이 이루어졌다.
실상사 목탑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가 소실되고 초것만 남아 있다. 목탑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98년~1999년에 시행한 실상사 목탑지 발굴조사에 따르면, 실상사 목탑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정방형으로 각 면의 모서리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한 변의 길이는 20.5m로 1층의 면적은 420.25㎡(127평)이다. 기단은 길이 26.7m 높이 1.16m로 구성된 가구식 구조를 하고 있으며, 남측과 북축 기단에 각각 1개식 계단의 유구가 남아있다. 이는 황룡사 9층 목탑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조선 후기에 목탑지 초석을 재사용하여 남북 19.54m, 동서 8.07m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 실상사 약사전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3년 방화에도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에는 가늘고 기교를 부려서 전서로 쓴 '약사전'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는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나타나 노력질을 일삼던 때이다. 홍척은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 간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약사전의 창호가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 무궁화나무가 있었으나 지금 베어지고 없다.
◎ 남원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
통일신라 말 지방의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 불상은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는 2.69m이다. 무릎 아래는 복원한 것이며,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붙였다.
두리뭉실한 머리 윤곽, 촘촘한 고수머리, 원만하고 시원스런 얼굴, 넓은 가슴에 가름한 허리 등으로 보아 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띈 이 불상은 온유함과 생동감을 보이던 앞 시대의 불상과 달라 신라 말 불상의 변천 양상을 가늠케 한다.
◎ 실상사 요사체
◎ 남원 실상사 전경
실상사 뜰에서 바라본 산정능선은 지리산 주능선 삼각고지(1,462m)에서 북서로 뻗어내리며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으로 지리산 중북부능선인데, 중간에 삼정산이 솟아 있어 일명 삼정능선(1,225m)이라고도 한다.
이 능선이 품고 있는 도솔암(약 1,165m), 영원사(약 895m), 상무주암(약 1,162m), 문수암(약 1,060m), 삼불사(약 990m), 약수암(약 560m), 실상사(약 330m) 등 7곳의 암자와 사찰을 흔히 지리산 칠암자라 부른다.
지리산 삼정능선의 기운이 마지막 도달한 평지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히 배치된 절집의 분위기는 고즉넉하고 여유롭다.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 35호)을 다시 둘러보고
실상사 보광전 앞 널은 뜰에 서 있는 소나무
◎ 남원 실상사 칠성각
칠성각은 정면과 측면 한칸 짜리에 팔작지붕을 올린 아담한 정각이다.
치성광여래는 해와 달들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하늘의 주신으로 천재지변과 재앙에서 중생을 구원하며 자녀 생산을 관장하는 부처이다.
◎ 실상사 극락전(전북 유형문화재)
실상사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 때 불타버리고 조선 숙종(1674~1719) 때 다시 지었다. 그러나 고종 때 함양과 산청 출신 유생들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정자 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로 짠 문짝을 번갈아 달아 다체로움을 더하였다. 둥근 기둥은 위 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고,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
서쪽에는 부도들이 세워져 있으며 거기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이라 하였다. 이와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의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 1832년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간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되었다. 실상사에는 보물 33호인 수철화상탑과 34호인 수철화상탑비를 바롯한 여섯 개의 승탑이 있어서 순례길을 만들어 문화적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 실상사 극락전 건칠아미타불좌상(전북 유형문화재)
건칠불은 흙으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나 삼배를 입혀 옻칠을 거듭한 뒤 채색하거나 도금한 불상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주로 만들어졌다.
실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건칠아미타불좌상은 천을 10장 이상 겹치고 1cm 내외로 두껍게 옻칠을 하여 만들었다. 양발을 드러낸 채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이 좌상은 전체적으로 체구가 늘씬하다. 얼굴이 가름하고 둥글어서 이목구비가 부드러워 보이는 이 좌상은 가슴의 양감이 강조되어 있다. 승각기(드러난 가슴을 가리는 속옷)와 군의(허리에서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모양의 아래옷), 군의를 묶은 띠 매듭과 옷 주름은 입체적이면서 자연스럽다.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보물 제34호 )
수철화상탑비 실상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수철화상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서 수도하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에 그가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가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실상사에 조성한 비문에수철화상이 '실상사 수철화상' 이 아니라 '심원사 수철화상'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수철화상이 비록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우너사의 승려였기 때문이다. 아십게도 현재는 비문의 글자가 거의 닮아 없어져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탑비는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 모양의 밑받침돌 대신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는 비좌에는 큼직한 연꽃을 두르고 머릿돌에는 구름속에서 마주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듯한 모습을 조각하였다.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보물 제33호)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으로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한다.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은 신라 후기의 승려 수철화상(817~893)의 사리를 모셔 놓은 탑이다. 수철화상은 본래 심원사에 머물렀는데,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스승인 증각대사 홍척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그가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자 왕은 수철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리를 모신 탑을 '능가보월'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 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조성하였으며 맨 아래 지대석에서 지붕돌까지모두 팔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의 아래 받침돌에 구름과 용, 사지 등의 무늬를 조각하였으나 모두 심하게 닮아 없어져 형태를 알아 보기 쉽지 않다. 위의 받침돌에는 솟은 연꽃 무늬를 삼중으로 조각해 둘렸다. 탑 몸체의 각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고 지붕돌에서 기왓골과 막새기와(처마 끝에 놓인 암기와와 수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구현하였다. 탑의 꼭대기 부분은 층단 몇게가 남아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없어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보물 제 38호)
이 부도탑은 통일신라말 홍척스님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경내에 함께 있는 그의 제자 수철스님의 부도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당나라에 다녀온 홍척스님은 선종을 널리 전파하였으며, 실상사를 처음으로 열었다. 탑 몸체에 새긴 문짝 문늬는 윗부분이 반원인데,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세밀하게 새긴 것이 눈길을 끈다. 지붕은 목조단의 모습을 본 따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탑의 높이는 2.4km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후반기 우수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 남원실상사 증각대사탑비(보물 제 39호)
이 비석은 홍척스님을 추모하여 옆의 부도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증각은 홍척스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칭호이며, 일명 남한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유명한 스님으로 이곳 지리산 자락에 실상사를 처음 세웠다. 아쉽게도 현재 비의 몸체는 없어지고 비 머리와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에는 용머리 모양으로 표현하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거북머리를 그대로 조각하였다. 비의 장식이 전체적으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이여서 우리나 고전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 남원 실상사 요사체 및 주변 풍광
◎남원 실상사 주변 풍광
◎ 남원 실상사 석장승(국가민속문화재)
장승은 마을 또는 절 입구에 새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으로 예로부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이정표 혹은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내를 건너기 전에 2기, 시내를 건너 2기가 있었으나 시내를 건너기 전의 2기 중 1기는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장승들의 크기는 높이 2.5m~2.9m, 너비 40~50cm가량이다. 몸체에 각각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 이라는 글자와 '옹정삼년을사삼월입' 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아 조선 영조 1년(1725)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궃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시내를 건너기 전에 있는 석장승(1기)
시내를 건너 있는 석장승 (2기)
◎ 남원 실상사 초입 풍광
《참고자료》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 10호)
당나라 유학 후 돌아온 승려 홍척(洪陟)은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지리산 천왕봉 서편인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자리에 실상사를 창건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실상사에 딸린 암자로 ‘백장암’이 나타난다. 1962년에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그 아래 경작지에 세워져 있다. 탑의 위치는 산속 별스러울 것 없는 곳이지만 통일신라 후기 양식으로 보이는 탑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구조로 화려한 장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낮은 기단 위에 3개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점차 줄어드는데 반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다. 2층과 3층의 높이도 비슷하다. 탑의 층이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작아져야 삼각형 구도의 안정감을 주기 때문인데, 이 탑은 그런 안정감을 포기한 대신 날렵하고 고아하다.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돼 있다.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한 것도 특징이다.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 모양을 새겨 멋을 냈다.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 3층에는 앉아서 연주하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옥개석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그 중 3층만은 세 분의 부처와 보살을 뜻하는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 2019년 서울경제 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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