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00대 물줄기/영산강 트레킹

2024.03.17. 영산강트레킹 7구간(담양 삼지교 - 담양교 - 담양관방제림 - 담양호)

by 하여간하여간 2024. 3. 18.

1. 일자 : 2024.03.17.(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3. 트레킹구간 : 담양 봉산 삼지교 - 오례천- 수북천 - 담양 양각교 - 담양교 - 만성교 - 향교교 - 담양관방제림 - 학동교 - 금월교 - 대곡교 - 석현교 - 대성교 - 담양호

 

 

영산강트레킹 7구간 산행 후기를 정리하는 데 자료와 사진을 제공해 주신 김명수 회장님, 박옥현 노무현재단 공동대표님, 임진택 산행이사님, 박미경 산우님께 심심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4. 트레킹 소감

 

지난 주에 이어서 광주지오트레킹(회장 김명수)에서 실시하는 영산강 트레킹 7구간에 함께 한다.

 

곡창지대인 나주 평야와 담양들녁을 지나는 영산강을 걸으며 호남인으로서 선조들의 얼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역사를 만난다. 영산강과 함께하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과 수 많은 야생화와 식물들을 만나면서 호남 젖줄의 풍성함을 알아가는 영산강트레킹 길이다. 

 

 

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용추봉 아래 용소에서 발원하여 담양댐을 지나 담양군, 광주광역시, 나주시, 장성군, 함평군, 화순군, 영암군, 무안군과 목포시를 거치며 거의 전남과 광주시를 거치며 흐르는 강으로 4대강 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전남 담양군 병풍산에서 발원하여 장성댐을 지나 장성군 등 중서부 지역을 지나 서해로 흘러가는 총 길이 150km, 유역면적 3,551㎢의 강으로 정의하는 것인데 이는 지금의 황룡강을 영산강의 본류로 하는 것으로 영산강 발원지를 어디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한 것이다.

 

나는 담양 용소에서 발원하여 담양댐을 거쳐 흐르는 강을 영산강으로 정의한 것을 선호한다.

 

오늘 구간은 담양댐까지 주로 담양 지역의 영산강 줄기이며 송강정과 같은 가사문화가 꽃피는 본류로서 역사적 흔적이 많은 곳이다. 봄을 부르는 시기에 각종 봄꽃이 반긴다.

 

담양장 날을 맞아 시골장날의 모습을 만난 것은 트레킹의 또 하나의 재미이다. 

 

담양의 자랑인 관방제림은 오랜 역사적 숨결이 살아 있고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묻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걷기 좋은 길 으뜸일 것이다.

 

 

5. 트레킹 이모저모

 

담양군 봉산면 삼지교에서 출발 인증

 

삼지교 

 

삼지교 인증

삼지교는 담양군 봉산면과 수북면을 잇는 다리이다.

 

임진택 산행이사님과 인증 한장

 

자전거길 보수

 

뚝방 양옆으로 대나무 숲이 잘 자랐다. 담양 하면 대나무이다. 죽록원이 담양 대나무 숲 체험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혹여 영산강 변을 이렇게 대나무를 조성하면 참 좋겠다. 관광상품도 될 것 같다. 담양에는 메타세콰이어 길이 있다. 대칭성의 아름다움으로 전국 사진 작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곳이다. 대나무를 울창하게 아주 길게 강변에 조성하면 사람들이 좋아 할 것 같다. 대칭성의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탄생할 것 같다. 담양군은 새겨 듣길 바란다.  

 

대나무 숲길 배경 한장

 

담양 대나무 숲길을 걷는다. 누군가 한가한 시간에 이 길을 걸어보라. 한적하면서도 사색하기 좋은 길이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싶걸랑 이 길을 걸어보거라. 대나무 속이 비어 있어 흔들릴지라도 부러지지 않는 부드러움의 철학을 공유하거라. 고고한 선비의 대쪽 같은 곧은 선비 정신을 향유하거라. 무엇보다도 속삭이듯 불어오는 대나무 숲 갈바람에 취해보거라. 나즈막히 소리내어 그리운이 불러보거라.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대나무 숲에 취해보거라. 

 

신학배수문

신학리 영산강보이다. 강물이 한가롭다.

 

오례천과 합수지점이다.

 

영산강 너머 저기 하늘금의 산군은 병풍산 - 불태산 줄기인 병풍지맥 산군이며, 저 산군 너머에 영산강의 또 다른 발원지가 있다. 늘 오르는 병풍산에 올라 황금들녁으로 넘실대는 담양 들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산강 젖줄의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그야말로 아름답게 느낄 수 있다. 

 

오례천을 건너는 자전거 길이다. 

 

오례천을 건너고

 

오례천

오례천은 담양군 무정면에서 흘러온 지류이며 지난 주 문화탐사를 했던 면앙정을 지나 흘러 내려 온다.

 

 

자전거 종합 안내

 

담양댐까지 16.5km 남아 있는 지점이다.

 

담양 들녁에는 비닐하우스가 많다. 특수작물인 딸기 재배를 하는 비닐하우스이다.  들녁 저편 산능선에 면앙정이 자리하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이지만 아직 영산강 주변엔 지난 가을 억새와 앙상한 가지에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마음 한 구석 허전하고 아릴 때 이 강뚝을 걸어보거라. 하늘을 향해 마음속에 담아 둔 하고 픈 이야기를 맘 껏 해보거라. 울고 싶거든 실껏 울어라. 외치고 싶거든 목청껏 외쳐보거라. 애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거든 한없이 애뜻하게 전해보거라. 그리고 웃고 싶거든 환하게 웃어보거라.

    

함께 걷는 길은 우정이 되고 동지가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이 된다. 

 

세상사 뭐 별거 있더냐? 사는 데로 살면 그만이지?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너만 웃고 있느냐? 나도 웃고 싶다. 세상사 혼자 다 안고 고민하지 말라. 모두가 다 너처럼 힘들고 행복하고 울고 웃는단다. 있을 때 잘 해라. 가고 나면 이미 때는 늦단다. 이왕에 잘해 줄려면 진심을 다하여 간절히 잘 해주어라. 그래야 상대가 감동을 한단다. 이해 타산에 빠지지 말아라. 그냥 잘 해주어라. 친절하게 잘 해주어라. 그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잘 해주어라. 그게 사는 것이란다.

 

강뚝을 걷다가 강변으로 걷고자 방향을 튼다. 가끔은 가던 길을 틀어 새롭게 걸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 아버지의 강

 

https://www.youtube.com/watch?v=hTKpEd-hCSo

 

김태연 노래

 

아~ 저녁 바람에 억새 울고

강기슭에 물새 우는 

어디선가 들어오는 아버지에 뱃노래

사랑 하나로 날 키우시고

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아~ 강건너 나룻터에

물새 한마리 슬피우니

강바람에 검게 타신 아버지가 그리워

사랑 하나로 날 키우시고 

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아~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아버지의 강이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애뜻하게 전해져 한없이 마음이 멍멍해진 노래이다. 13살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리도 그리움을 잘 불러 내는지? 김태연 가수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더 성숙하여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주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대성하길 바래 본다.

 

다시 강뚝으로 올라와 담양군 자전거터미널에 들렸다. 경정비도 하고 쉼터이며 화장실도 있다. 

 

이곳 쉼터에서 잠시 쉬어간다.

 

사진놀이 삼매경

 

담양 대마무 막걸리로 우정을 나눈다. 

 

수북천 합류지점이다.

 

수북천은 병풍산 일대의 물줄기를 대방저수지에 모아 흘러서 이곳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기생하는 식물이 마치 원나무 가지처럼 얽혀 진짜 나무행세를 하고 있다. 공생하는 것일까? 아님 일방적일까?

 

담양천변의 파그골프장이다.

 

최근 파크골프는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나이 많으신 어른들에게 인기가 높다. 큰 힘이 안들고 적당한 운동을 할 수있기 때문이다. 각 지자체에서 지역민을 위해 파크골프장을 만들고 있어서 좋은 일이다. 어른들이 건강해야 그 사회가 건강하다.

 

양각교이다.

 

오늘이 담양 장날

 

옛 시골 장날 분위기다. 오랫동안 이어 내려온 시골 장날이다. 각종 생활용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참으로 오랫만에 장날 분위기에 젖어든다. 행복하다. 

 

장날에 핀 수국

 

꽈베기도 사고, 족발도 사고, 찐방도 사고, 생두부도 사고, 김치도 사고, 막걸리도 사고 풍성한 점심거리를 마련하였다.

 

담양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다. 담양 국수이다.

 

담양 국수를 먹고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매일 몰려 북세통을 이룬다. 잘 우려낸 멸치 국물에 쫄깃 쫄깃한 면발 한 움끔을 넣고 간단한 대파와 깨 그리고 참기름을 곁들인 담양 국수 한 그릇을 먹어보거라. 왜 사람들이 이 맛을 못 잊고 계속 다시 찾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담양천변에 언제부터 담양국수집이 생겼는지는 알 수없다. 52년 원조 담양국수집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후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담양관방천 주변으로 담양죽물시장이 형성되었고, 상인들의 배고픔을 달래 줄 간단히 싸고 맛있는 한끼 식사가 간절할 때, 이곳 담양 관방천 주변으로 국수집이 즐비하게 생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경제가 성장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도 높아졌지만 그리운 추억의 담양 국수는 오늘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 긴 애환을 담은 담양국수가 전국민의 사랑을 오래 오래 받길 바란다.

 

담양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

 

관방제림은 담양천변의 제방인 관방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숲이다. 관방제를 따라 1.2km이어져 있는 이 숲은 300년이 넘은 푸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벚나무, 은단풍 등 여러 종류의 낙엽성 활엽수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의 굵기는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1m에서 5.3m까지 다양하다.

관방제림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부사 성이성이 수해를 막기위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립이 이 제방을 다시 늘려 쌓으면서 숲을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약간 3만여 명을 동원해 제방과 숲을 다시 정비했고, 이후에 부임해 오는 관리들도 개인의 재산을 털어 관방제림을 관리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 영조32년(1756)에 당시 담양 부사 이석희가 편찬한 [추성지]에는 관방제림에 대하여 다음과같이 적혀 있다.

 

북천은 용천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담양부의 북쪽 2리를 지나며 불어 넘쳐 해마다 홍수가 나, 내와 담양부 사이에 있는 60여 호를 휘몰아 사상자가 나므로, 부사 성이성이 법을 만들어 매년 봄에 인근 백성을 시켜 제방을 쌓아 수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관방재 쉼터에서 점심을 한다. 담양 장터에서 사온 푸짐한 음식으로 오손 도손 맛있는 시간이다. 이 순간 한 식구가 된다.

 

관방재 기념 한 장 남기고

 

관방제림을 걷다가 기념 한 장 남기고

 

관방제는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따라 북쪽으로는 추월산과 용추봉, 동쪽으로는 광덕산, 남쪽으로는 덕진봉과 봉황산, 고비산으로 이어지는 호남 정맥의 광할한 유역에 걸쳐 있는 담양천 변의 제방으로 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숲이 관방제림이다.

 

 조선 인조 26년(1648)에, 해마다 홍수로 60여호에 이르는 가옥이 피해를 당하자 당시 부사를 지낸 성이성이 제방을 쌓은 뒤 이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립이 약간 3만여 명을 동원해 제방과 숲을 다시 정비했고, 이후에 부임해 오는 관리들도 개인의 재산을 털어 관방제림을 관리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과거 관방제림 안에는 약 700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벗나무 등 15종의 낙엽활엽소 3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특히 푸조나무는 남부 지방의 낮은 지역에서 자라는 난대 수종으로, 강바람이나 바닷바람을 잘 견뎌 방풍림이나 해안 방재림으로 매우 유용하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2km의 구간 안에는 200년이 넘은 팽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개서어나무 등이 신묘한 기운을 뽐으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담양에서 커피숍으로 유명한 곳이다. '달빛예술창고'라고 한다. 과거엔 방앗간이였는데 지역의 한 예술인이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지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누구든 시간이 나걸랑 한 번 쯤 들려볼만하다.

 

아름다운 관방제를 걷고  또 걷는다.

 

관방제 시종점/ 반대로 산책을 한다면 이곳이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이제 관방제를 지나고 벗나무 뚝방을 걷는다.

 

아름다운 길이다.

 

학동교

 

학동교 

학동교 인근에서 담양의 명품 메타세콰이어 길이 시작된다.

 

 

저 멀리 메타세콰이어 길 너머 메타프로방스 마을이다. 담양군에서 관광지를 위해 새로 조성한 마을인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지자체 장은 어떻게 하면 우리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지역민들이 먹고 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인데 담양군은 그런 면에서 매우 잘한 지자체이고 성공적이다. 다른 지자체도 담양군을 본 받았으면 좋겠다.

 

4대강 국토종주와 영산강 자전거길 합류지점으로 가는 방향

 

벗꽃이 벌써 활짝 피었다.

 

자주광대나물과 산까치꽃이 봄을 부른다. 싱싱하고 싱그럽다.

 

개나리 길을 지나고

 

이제 막 피어나는 개나리가 예쁘다.

 

개나리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란 꽃이란다.

식물이름을 정할 때 최초로 발견하고 연구한 학자나 지명을 붙여 학명을 정하는데, 일제 때 우리나라 식물체계는 일본 학자인 나카이 다케노신이 무려 1,118 종류의 우리나라 식물을 연구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는 식물에 자기 이름을 붙여 세계학회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토종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일본학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 식물이 많다. 서글픈 현실이다. 개나리도 원래 나리과로 우리나라 토종 꽃 나무인데 일본인이 '개'자를 붙여 개나리가 되었다.

일본 학자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어찌하여 그 당시 우리 학자들은 그리도 세계 학문 정세에 어두웠을까? 일반인은 그렇다치더라도 어떤 학자 한 사람이라도 세계 학문 정세에 밝아 우리나라 식물을 우리나라 학자가 조사 연구하고 식물분류체게를 만들었다면 또 우리나라 학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한스러운 일이다.

 

참고로 개망초라는 야생화가 있다. 한여름 하얀게 집단으로 피어 있는 개망초 꽃은 참으로 아름답다. 한개 한개 꽃은 그다지이지만 집단으로 피어나면 흰눈이 내린 들녁처럼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꽃이다. 망초는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도가 건설될 때 사용되는 철도침목을 미국에서 수입해 올 때 함께 묻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철도가 놓인 곳을 따라 흰색 꽃이 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이 꽃의 씨를 뿌렸다하여 망국초라고 불렀고 다시 망초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망초보다 더 예쁜  꽃이 나타났는데 망초보다 더 나쁜 꽃이라 하여 개망초라고 불렀다.

  

청매화가 마치 탱자나무 꽃처럼 탱자나무 가지 사이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량한다.

 

영산강은 담양댐에 가까워 올 수록 강폭은 개천 수준이 되었다.

 

금월교

 

금월교 앞에서 인증 한 장

 

금월교에서 바라본 영산강 상류 방향

 

자전거 종합안내 현위치 금월교

 

대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뚝방길을 따라  걷는다.

 

대곡교를 지나서

 

일반 차량이 달리는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에어로 마스터 담양비행장 

 

저기 보이는 와룡교는 담양과 순창의 경계를 이루는 광덕산과 방축마을 덕진봉 그리고 호남정맥 산군들의 물길을 모아 흐르는 금성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석현마을 대나무 조형물 앞에서

 

석현교 징검다리를 건넌다.

 

 

 

자주광대나물, 광대나물, 봄까치꽃

 

석현교를 지나

 

원율리 앞 다리를 지나면서

 

바라본 영산강 상류와 금성 산성과 추월산 

 

 

어느 민가 담벼락 아래 다소곳이 피어난 수선화! 노오란 꽃잎이 아름답다.

 

담양댐까지 3.7km 남았다.

 

개나리 길을 걷고

 

산자고

 

◎ 산자고에 얽힌 시어머니 사랑 이야기

 

산자고에서 자고는 자비로운 시어머니라는 말이다. 이 식물이 산자고라 부르게 되는 이야기다. 옛날 홀로 삼 남매를 키운 여인이 있었는데, 딸 두명을 시집 보내고 막내아들만 남았지만 하도 가난하여 아무도 시집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해 봄 한 처녀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물어보니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죽자 유언에 따라 그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지만 사람들이 부러워했기 때문일까? 그만 며느리가 등창이 나고 말았다. 날로 고름이 심해졌으나 돈도 별로 없고 마땅히 의원을 찾아갈 수 없이 보내다가 어머니가 우연히 산에서 이 꽃을 발견해 며느리의 등창이 난 곳에 발랐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 이 작은 꽃을 산자고라 부르게 되었다. 자애로운 시어미니를 생각한다.

 

 

호남 정맥 용추봉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발원지 용소를 거쳐 담양댐에 머물다가 금성산성 아래로 본류가 되어 흐른다.

 

 

잠시 금성산성을 생각한다.

 

◎  풍부한 수원과 넓은 활동공간을 갖고 있는 금성산성

금성산성은 해발 603m되는 산성산을 주봉으로 하고 북동쪽에 시루봉(525.5m), 남서쪽에 노적봉(439.0m), 서쪽에 철마봉(484.4m) 등으로 이어진 가파른 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을 이용하여 골짜기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13세기 중반 무렵의 고려 말에 처음 쌓았으며, 조선 태종 10년(1440)에 고쳐 쌓았다. 그 후 세종 16년 무렵에 폐기되었다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다시 수축하여 사용된 이래, 광해군 2년(1610)에 외성 개축, 광해군 14년(1622)에 내성에 대장청 등 건물을 세우고, 효종 4년(1653)에 내성을 수축하는 등 여러 번 수리와 개축을 거듭하면서 1895년까지 사용하였다.

 

◇ 금성산성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전적지 였다.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5)이 금성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옛 전투를 지휘하다가 옛 전우를 찾아 식량 보급을 요청하였으나, 순창군 피노리에서 친구 김경천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담양, 광주, 장성, 순창 지방의 1천여명에 달한 동학농민군은 쫒기고 밀리면서 총수 전봉준의 뒤를 따라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20여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을 벌였다. 농민군들은 모두 희생 또는 체포되었고,  금상선상 내의 모든 시설이 이 때 전소되었다.

 

◇ 호남창의회맹소(기삼연 대장) 전투지 - 금성산성(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08년 호남창의회맹소 본진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치른 곳이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결성한 연합의병 지휘부로 기연삼이 대장이였다. 기연삼이 이끄는 호남창의맹소 본진은 1908년 1월 혹한을 피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금성산성에 머물렀다. 이때 의병부대의동향을 탐지한 일제 군경의 습격으로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기연삼은 인근에 몸을 숨겼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혔고, 의병들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때도 의병활동의 거점이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 기연삼의병대장

 

 

 

성재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은 철종2년(1851) 장성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태어나 호남의 거유이자 위정척사사상의 태두인 노사 기정진(1798~1879)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종32년(1895)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 단발령 시행후 1896년 토적복수를 내걸고 장성에서 300명의 의병을 모아 광주의 기우만, 고광순과 합세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권유로 기우만이 의병부대 해산을 명령하자 축령산에 은거하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을사조약(1905), 정미조약(1907)이 채결되자 1907년 호남지역 의병부대를 규합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 고창 문수산, 영광 법성포, 장성 오동촌, 백양사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장성공원 기삼연 순국비

 

이후 장성, 담양, 나주, 함평, 광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 담양추월(금성)산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던 중 순창에서 체포되어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라는 시를 남기고 1908년 총살되어 58세로 순국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건너편 가지사이로 담양리조트가 보인다. 

 

담양리조트는 우리 고장에서 유명한 온천지이다. 금성산성 아래 조용한 쉼을 원한다면 이곳에 와서 하룻 밤 쉬어가는 것도 삶의 활기를 찾는데 도움이 될만하다.

 

 

벗꽃 꽃망울이 앙증맞다. 올 봄도 또 한번 난리가 날 것 같다. 꽃바람이 꿈틀대니 이를 어찌하랴. 맘 속 활 활 타오른 꽃바람을 무엇으로 끌까? 타오르면 타오른데로 타면 되지 무엇이 그리 고민인가? 그냥 활 활 타 버리소. 남은 것 하나도 없이 활 활 태워버리소. 아름답게 태워버리소.  

 

담양댐을 눈 앞에 두고 마지막 발 걸음을 옮긴다.

 

18km 길고 긴 영산강 트레킹 7구간을 마무리한다.

 

오늘 트레킹의 종점 담양호 인증  지오트레킹 미녀 4인방

 

오후에 시간이 남아서 송강정을 찾았다. 인근 쌍교숫불갈비집에서 나온 갈비 굽는 연기와 냄새가 송강정을 가득 매운다. 정철 선생이 살아 있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자유시장경제 사회에서 개인의 영업활동을 무엇이라 말 하겠는가만은 문화재가 있는 곳에서 영업활동을 하려면 최소한의 조치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 송강정(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2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1972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압박에 못이겨 대사헌의 자리를 그만두고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하여 1770년(영조 46)에 세운 것인데,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방이 꾸며져 있다. 지금도 정자의 정면에 ‘松江亭’이라고 새긴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竹綠亭’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사미인곡 思美人曲〉을 지었다 하며, 현재 정자 옆에는 그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송강 정철에 대한 호남인의 정서는 사뭇 다른 두 개의 감정이 있다.

 

하나는 가사문학의 거두로 성산별곡과 사미인곡을 지어 조선 가사문학에 남긴 거대한 발 자취인 반면

다른 하나는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에 그의 정적인 동인들의 호남 선비 1000여명을 연루 시켜 처단하여 호남 인재의 싹을 잘랐다는 평가이다.

 

나는 두번째 호남 인재 싹을 잘랐다는 부분에 분개하며 정철을 들여다 본다. 

 

송강정 돌계단을 오르면서 호남 인재 1000여명이 희생당한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테리 역모아닌 역모사건인 기축옥사와 관련한 정여립, 선조, 정철, 송익필 등의 인물들을 생각한다. 

 

정여립은 역모자인가? 혁명가인가? 아니면 시대의 풍운아인가? 

선조는 왜 그렇게 정여립의 사건을 모질게 다루었을까

정철은 어찌하여 그리 악독한 처신을 하였을까

정철의 처소에 숨어서 비겁한 행동을 한 송익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정여립은 역모자인가혁명가인가? 아니면 시대의 풍운아인가? 

 

신분에 상관 없이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바라보며 무능한 임금과 오직 자신들의 권력과 배만 채우는 데 급급한 중앙 세력들을 쓸어버리고,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요,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꿈을 꾸는 정여립은 혁명가 인가? 풍운아 인가? 역모자인가?

 

정여립은 어릴 때 부터 아주 명석했고 사리판단 능력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할 정도로 당돌하고 독불장군 식이었다. 정여립은 스물다섯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 평균 급제 나이가 서른 살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급제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인인 성혼(成渾)과 이이(李珥)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였고, 전라도 금구(金溝) 동곡마을로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며 지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당대의 석학 성혼과 이이와 학문적 토론을 할 정도로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으니 이제 막 왕이된 선조 정도는 눈에 차지 않을 정도로 기고 만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너무 똑똑하여 그의 역량을 조선이 못 받아들였다고나 할까! 나의 상상이다. 그의 마음에는 무능한 임금과 허구헛날 학문적 이론에만 매몰되어 갑론을박하면서 자기 같은 새로운 사상을 배척하고 기존 질서만 고집하고 있는 고관 대신들을 갈아치우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조시대 연산군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임금을 함부로 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그 꼴을 못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물러난 이후에도 궁중 예법으로 굳어져서 신하들은 용안을 함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선조시대의 정여립은 임금의 눈을 당당히 바라보면서 얘기하는 신하였다.

정여립은 이이의 슬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이는 말년에 죽기 전 선조에게 정여립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이이가 중심이 된 서인 사람이였지만 나중에는 이이를 비방하면서 동인 사람이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당적을 옮긴 철새 정치인이였던 것 같다. 스승인 이이를 비망하면서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기고 임금에게 함부로 대하는 정여립을 선조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더 이상 관직을 주지 않았다.

 

결국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받고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하였다. 낙향이라고 하지만 팽당한 것이다. 정여립이 동인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아마 성격이 당당하고 독불장군의 혁명가적 성격이였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주장이 센 사람이 아니였나 쉽다. 그의 맘속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선조와 중앙 권력들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정여립의 생각과 행동이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였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어떤 생각이였을까?  낙향 후 그가 한 여러 행동들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혁명의 꿈을 꾸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여립은 당시 시중에 떠돌던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 즉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 "정감록"에 나오는 참언(讖言: 길흉화복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을 옥판에 새겨 승려 의연에게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춰 두게 한 다음 우연히 자신이 이것을 발견한 것처럼 꾸몄다이 참언의 목자는 곧 조선왕조를 세운 이씨이고 전읍(奠邑)은 정()씨를 이르는 말로서 정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었다정여립은 승려 의연에게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주의 남문 밖에 있다." 라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차별의 분수령이 되며 1,000여명이 참변을 당한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1546~1589)은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나 선조3년(25세)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의 벼슬에 올랐다가 선조와 서인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동계를 조직하여 모악산 앞 제비산(현 김제시 금구면)에 머물면서 천반산 앞에 보이는 죽도에 시설을 지어 놓고 천반산에서 군사를 조련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은 선조 22년 역모로 고변되자 아들과 함께 죽도에 피신하였다가 관군에 쫒기자 죽도에서 아들과 같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여립은 양반 신분이였지만 양반이든 천민이든 산적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신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받아 들여 차별 없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천반산에서 군사 훈련을 하였다. 정여립이 천반산에서 군사를 키우는 목적이 무엇이였을까? 스승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영향을 받아서 앞으로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고자 미리 군사를 키웠는지, 아니면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요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있다는 공화국 세상을 만드는 혁명을 위한 군사 훈련이 였을지? 그것은 모른다. 실제로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 지금의 여수일원)에 침범했을 때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무술을 익한 대동계원들이 힘을 모아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다. 그 뒤 대동계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넓혀 갔다.

정여립이 진안 천반산에서 군사를 키우는 것은 그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 선조는 왜 정여립 사건을 모질게 다루었을까?

 

선조는 중종 일곱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세째 아들이다. 선조가 왕이 되어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이 되어었다. 중종이후 인종 명종은 후대가 없었다. 그래서 정통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옆가지인 후대에서 왕이 되었다. 선조로는 늘 정통성이 가슴을 짓누르는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당대의 강력한 중앙 대신들인 동인들의 권력 앞에 늘 초람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동인과 서인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왕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가 선조의 고민거리가 아니었을까? '아니되옵이다'로 일관하고 있는 대신들을 누르고 임금의 말에 순종하는 왕권강화를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선조로써는 정여립 모반 사건이 절호의 찬스였는지 모른다. 중앙 권력을 쥐고 왕권마져 우습게 아는 동인을 모조리 몰아내는 절호의 찬스였을 것이다. 그 적임자가 서인인 정철이였다. 더구나 정철은 스스로 이 역모를 다스리겠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는가? 선조로써는 가만히 두고 떡만 먹으면 되는 일이다. 정치 9단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정치 세력을 교모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정철도 세자 책봉으로 문책되어 전라도 담양으로 귀향 보내어졌다. 어쩌면 정여립 모반 사건은 도화선은 정여립이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한 선조와 서인의 영수로 동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을 쥐겠다는 정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더욱 모질게 다루어졌지 않았나 생각한다. 역모사건에 직접 모반한 자는 숙청을 하고 가담자는 멀리 귀양을 보낸 조선의 4대사화에 비하여 역모사건의 실증도 석연치 않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유난히도 크게 다룬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담양에 귀향 온 정철은 송강정을 짓고 사미인곡 등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오늘날 까지 조선 최대의 가사 문인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기축옥사의 중심에 서서 정적 1000여명의 목을 쳐 죽이고 수 없이 많은 억울한 사람을 귀양보내는 악독한 짓을 한 위인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정철의 사미인곡과 성산별곡에 밑줄을 그으면서 그 의미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았던 시간에 그 누구도 정치적 야욕에 눈이 먼 정철을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의 뒤에는 원한이 숨어 있고 그 원한의 앙갚음에 폭풍이 일고 그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며 억울한 자가 무지기 수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다시 정여립을 생각한다. 

 

정여립은 진안에서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여 사람을 모은다. 정여립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자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조정이나 세상에 대한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상을 설파한다. 정여립 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선진적인 공화국의 사상인 것이었다. 그는 신분혁파를 주장하고 인권을 높이 평가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그의 이른바 '천하공물설'은 서양의 사회계약론 보다 더 앞서 나온 계몽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민평등의 계모임인 대동계를 조직하여 조선을 바꾸려고 했다. 정여립은 유교로 뒤덮힌 조선사회에서 보기 드문 혁명가였다. 만약 조선이 왕권국가에서 정여립이 꿈꾸는 공화국 시대가 되었다면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화 정치를 구현한 선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며 전 세계의 문명을 바꾸는 선도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정여립을 아직 조선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여립이 너무 일찍 왔는지? 조선이 정여립을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했는지? 아무튼 아쉽다. 역사는 늘 그렇게 흐르지 않는가?  

 

 

조선 4대사화라고 하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희생자 모두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낳은 조선 최대의 역모아닌 역모사건으로 알려진 정여립사건은 결국 전라도 인재가 조정에서 배척이 되고, 반역향으로 낙인찍어 호남 차별의 시발이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사상이 싹트고 저항 의식이 자라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을 것 같다. 정여립은 과연 역모의 주인공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풍운아였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기축옥사의 진실은 과연 밝혀 질 것인가? 이 곳 송강정을 돌아보며 나의 머리를 맴돌고 있는 의문이다. 

 

정여립이 군사를 일으켜 한강을 넘어 조정으로 쳐들어온다는 고변이 황해도에서 선조에게로 날아 들였다. 역모로 고발 된 것이다. 전북 김제에 있던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아들과 함께 급히 피신하였고 관군에 맞서 저항하였지만 결국 한계를 알고 죽도에서 아들의 가슴에 칼을 꼿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아들은 칼을 맞았지만 살아 80여명의 대동계원들과 함께 관군에 잡혀가 선조가 친히 한 국문에서 갖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정여립이 모반하였다고 말하고 죽었다. 정여립은 죽고 그의 아들 입에서 역모를 시인하는 말이 나왔으니 선조나 정철에게는 확실한 역모사건이 되었다. 지금 같으면 증거는 없고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다. 따라서 지금도 정여립 모반 사건은 정철이 조작했다는 조작설과 실제로 모반이 있었다는 논란이 되고 있다. 

 

◎ 선조는 정여립 역모 사건을 엄히 다루었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에게 위관(委官)이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게 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권유로 입궐한 정철이 차자(箚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양식의 상소문)를 올려 정언신이 동인으로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그해 11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추궁하였다.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이 체포되자 정언신의 아들 율이 상소를 올려 무죄임을 주장하고 성혼도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여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와 서신들을 조사했을 때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고, 정언신에게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얼마나 억울하였을까? 이처럼 억울하게 역모에 얼켜서 죽임을 당하고 귀양을 간 당시의 죽음이 수천이고 그들의 억울함 앞에 나는 숨이 막힐 만큼 숙연한 마음이 든다.

 

◎  정철은 어찌하여 그리 악독한 처신을 하였을까? 

 

정철은 독하게 정여립 역모를 다루었다. 역모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는 자결하여 없으니, 역모 사건은 어떤 이유든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였다.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누리던 정치 권력을 서인이 되찾는 계기로 삼았다. 천인공노할 피의 숙청이 3년동안 있었다. 관련이 있든 없든 숙청하고자 한 정적인 동인은 모조리 정여립 사건과 관려지어 없엤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인재 1,000여명이 숙청 되었다. 조정에는 인재라고는 씨를 말릴 지경에 이른다.  이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 간 사람이 수천이다. 그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두가 조정을 외면했다. 왕과 서인에 대한 원한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서인은 나중에 세자 책봉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갈라져 당파싸움에만 몰두하였다. 조선은 그로 부터  몇년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환란을 맞았다.

 

율곡 이이는 이미 수십년 전에 조정 대신들이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국난을 예측했는지 모른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꿈적도 않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며 하세월을 보내는 동안 국력은 쇄퇴하고 인재는 말라 없어지고 백성은 굶주림에 거리를 헤멨다. 그러는 동안 토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륙을 치겠다는 명문으로 조선에 쳐들어 온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나라에 인제가 없으니 나라를 지키질 못하고 속수 무책으로 조정이 함략되고 무능한 임금 선조는 저만 살겠다고 의주로 피신을 가 버렸다. 원균 같은 서인이 수군통수자로 임명되어 전쟁에 나갔지만 우리 수군을 통채로 말아 먹고 겨우 함선 12척만 남기는 패배로 나라는 풍전등화가 되였다. 그나마 조선을 지킨 사람은 이순신과 권률 같은 동인이였으며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킨 사람도 동인이 대부분이였다.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서인들이 양란이 끝나고 집권세력으로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과 청을 섬기는 유교 사대부가 되어 왜정 때는 친일파로 해방 후 미군정 시절 기득권을 유지한 채 지금도 토착왜구가 되어 그 맥을 이어오면서 사사건건 기득권 유지에 나라를 흔들고 있다. 아직도 그들의 반대에 부딪쳐 친일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정여립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 오는가?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다 실패한 조선 혁명의 풍운아 정여립!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온 세상 물상은 백성의 것이고 임금도 백성이 선택할 수있다는 공화정치를 꿈꾸었던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한 혁명가 정여립!

정여립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로 호남 인재 1000여명을 숙청한 정철의 권력싸움!

 

그 후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후손들이 영조 이후 안동 김씨 같은 외척세력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중앙권력을 독식해 오다가 일제 때는 일제 앞잡이가 되고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때는 친일파가 되어 날뛰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분자가 되어 반대자를 빨갱이로 몰고 오늘날 자유경제시장 원리를 내세우며 양극화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헐안이 된 보수우파들의 역사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억울하게 숙청대상이 되었던 동인들은 역적이 되어 숨 소리도 내지 못하고 노비가 되고 종이 되어 살아온 세월이 그 얼마인던가? 백성들이 고관대작들의 탐욕과 극에 달한 탐관오리 부패에 항거하여 목숨을 내 걸고 분연히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정의의 깃발을 들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흘린 피의 투쟁이 그 얼마든가?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몰렸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분여히 일어난 호남 의병들의 역사적 교훈은 무엇을 말하고있는가? 일제 청산을 못하고 해방 후 지금까지도 소외지역이 되어 모든 기득권을 빼앗기고 역사의 항의 집단으로 차별 받고 소외 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만약 정여립이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거나, 정철이 정적을 물치는 수단으로 또는 선조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기축옥사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정철 

 

역사는 가정을 상정해 말 할 수 없지만 과거를 통해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바라본다는 측면에서

 

만약 정여립이 우리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거나, 정철이 정적을 물치는 수단으로 또는 선조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기축옥사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란 주제를 생각해 본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축옥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유능한 호남인재들 1000여명이 억울하게 숙청되지 않았을 것이다. 호남 인재들이 중앙에 진출하여 기득권을 빼았기지 않았을 것이고, 이 후 일어나는 역사적 소외는 없었을 것이다. 외침이 있었어도 그리 호락호락 나라가 위태롭지 않았을 것이며 국제사회가 약소국으로 그리 싸잡아 홀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국론이 통일되고 나라가 부강한다면 강대국이 되어 백성은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전쟁의 고초를 격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일제침략 및 일제 강점과 독립투쟁(운동) 그리고 해방 후 한국전쟁과 극심한 이념 갈등, 오늘날 분단 국가의 고통 등 우리 역사의 암울한 물줄기가 아니였을 것이다.

 

어쩌면 역사는 물과 같아서 곧게 흐르다가도 앞에 방해물이 생기면 돌아가거나 역류하기도 한다. 가는 방향이 틀어지면 그 나중은 참으로 달리 흘러가는 것이 물길이 아니던가?

 

현재의 위치에서 역사의 바른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한세대를 살아야 할 것인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나라가 정의로워야 한다. 나라가 부강하여야 한다. 나라가 양극화 보다는 모두가 차별 없이 잘 살아야 한다. 국민 각자의 가치를 존중하고 능력과 재능으로 서롭 돕고 협력하는 복지 국가가 되어야 한다. 하루를 살드라도 억울하게 죽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전쟁일지라도 억울한 죽음 없어야 한다. 특히 국가권력으로 희생당한 억울함은 없어야 한다.

 

"선비 천명 죽은 '기축옥사', 조선시대 '광주학살'...역모아닌 혁명이었다"-역사 재조명(1) < 특별기획 < 연재/특별기획 < 기사본문 - 전북의소리 -http://www.jb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