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동화 능가산 내소사를 찾아서
늘 변산을 찾고 내소사를 들렀다. 천년고찰의 내소사는 차분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을 수 있어 좋다. 화려하지도 않지만 품격이 떨어지거나 왜소하지도 않다. 어딘지 모르게 깊이가 있고 넉넉하며 편하다. 찾는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고 청정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소사가 좋다. 마음이 흔들릴 때나 혼자 조용히 사색을 하고플 때 내소사를 찾는다. 이번에 내소사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 보고자 한다.
◎ 내소사 위치
내소사는 변산반도의 최고봉인 관음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서 바라보면 관음봉은 참으로 아름다운 진경산수화이다. 변산반도의 독특한 지질구조로 인한 암릉이 수려하다. 벌통봉 - 관음봉 - 세봉 - 세봉 산자락의 암릉이 병풍처럼 둘러 싸인 명당에 내소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계절 언제와도 계절에 따라 참으로 아름답고 신선한 절집이다.
◎ 내소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이 절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과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가운데 정지상이 지은 〈제변산소래사 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있고, 이규보의 〈남행일기 南行日記〉가 있는데 모두 '소래사'로 기록되어 있어 언제 '내소사'로 바뀌었는지 분명치 않다.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는 백제 무왕34년(633)에 창건된 전통 문화재 사찰이다.
임진왜란때 절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조선인조11년(1633) 청민선사가 대웅보전을 비롯 설선당 등을 중건 중수 하였다.
그 후 광무 6년(1902) 관해선사와 만허선사의 원력으로 증축불사가 있었으며, 전등회 조실이신 해안 선사의 참선지도로 인하여 수많은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정진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내소사를 있게한 우암 혜산 선사가 1983년 내소사에 주석하면서 다시 한 번 쇠락해진 전각 및 요사를 정비, 복원하여 오늘날의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법화경절본사경(보물 제278호),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8호)가 있고 그밖에 설선당·보종각·연래루·3층석탑 등이 있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전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침엽수 특유의 맑은 향내음은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내기에 적격이며, 사색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인 고려동종이 있으며, 보물로는 관음조가 단청을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대웅보전과 그 안에 모셔진 영산회 괘불탱, 그리고 법화경 절본사본이 있다.
지방문화재로는 삼층석탑, 설선당, 목조 아미타 삼존불상이 있으며, 기타 유물로는 봉래루, 감지금니화엄경등이 경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 내소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관음조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대웅보전은 높게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40尺×35尺의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기둥간살은 넓은 편이며 중앙칸은 더넓으며,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이,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안정감이 있다.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편이어서, 이러한 차이로 인해 내부공간은 높은 천장을 가지게 된다. 외부에서 공포는 살미끝이 심한 앙서형이고 살미에 연봉형의 조각이 새겨져 매우 장식적이고, 내부의 공포 역시 살미끝을 앙서형으로 처리했고 중도리 열주쪽은 빗반자를 사면으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조각하였다.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조선후기 유명한 서화가)가 쓴 글씨다.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후불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있는데,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 대웅보전의 꽃문살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 문살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우리나라 장식무늬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꽃살은 나뭇결이 그대로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더욱 아름답다.
대웅보전의 절묘한 꽃잎 문살은 꽃 한잎 한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그 예술성은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여섯 잎 보상화를 조각하며 기묘하게 맞추어 나간 연속문양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정갈하게 비쳐든다.
◎ 백의관음보살좌상
대웅보전 삼존불을 모신 불단 후불벽면에는 전체 가득히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벽화는 국내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으로는 가장 큰 것 이여서 더욱 귀중하다.
백의관음보살좌상의 눈을 보고 걸으면 눈이 따라오는데. 그 눈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내소사를 찾는 많은 신도들과 관광객은 저마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 3층석탑 (三層石塔)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다. 하층기단은 전고 3.46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다.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내소사 동종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종. 1222년 작. 보물 제277호. 높이 103cm, 입지름 67cm. 내소사에 있으나 원래 변산반도에 있던 청림사의 종이다. 청림사가 폐사되고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0년(철종 1) 현위치로 옮겨왔다.
종의 입구[鐘口]가 종의 몸체[鐘身]보다 약간 넓고, 정상부에는 생동감있는 용조각으로 된 고리[龍]가 있으며 그 옆의 원통기둥인 용통에는 구슬이 둘러져 있다. 종의 어깨 위에 연화를 내포한 여의두무늬의 꽃장식이 2겹으로 있는데, 용통 위의 구슬장식과 함께 고려종의 특색을 보여준다. 종 어깨와 종 입부분에 문양대를 두어 모란당초무늬를 돋을새김했다. 4개의 유곽 주변의 문양대는 종의 어깨부분 문양대보다 조금 좁으며 연주무늬와 당초무늬를 양각했다.
유곽 속에는 각각 9개의 꼭지가 있는데 모두 연꽃 모양의 둥근 받침에서 돋아난 꽃봉오리 모양이다. 유곽 밑에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연화 형태인데 자방을 중심으로 잎이 좁은 연잎이 많이 달려 있다. 종 몸체 중간에는 4곳에 활짝 핀 연꽃이 떠받치는 구름 위에 삼존불상을 돋을새김했다. 본존은 연화좌 위의 좌상이고 양협시보살은 입상이다. 모두 둥근 두광을 갖추었고 광배에서 피어오른 서운이 길게 꼬리를 날리고 있으며, 그 위에는 수식이 바람에 나부끼는 천개까지 표현되어 있다.
이 종은 전체 형태나 조각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고려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신에 "貞祐壬子六月初七日邊山靑林寺金鐘鑄成入重七百斤"과 "餘己酉九月七日卜居靑林翌年九月七日鑿此金鐘移懸于來蘇寺"라는 명문이 있어 종이 청림사에서 만들어진 후 내소사로 옮겨진 경위를 알 수 있다.
◎ 내소사 사천왕문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17평의 목조 한와 맞배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서방 광목천왕(용의 여의주) 과 북방 다문천왕(다보탑)
동방지국천왕(비파)과 남방 증장천왕(장도)
◎ 보종각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 범종각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봉래루(蓬萊樓)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다. 이들 초석의 배치는 전면 5칸 12.23m로 각 기둥 사이가 215-244-305-244-215cm로 중앙의 칸으로 갈수록 넒어지고 있다.
측면은 외열 기둥 사이가 3칸으로 6.20m이며 각 기둥 사이는 215-190-215cm의 간격으로되어 있지만 내부는 2칸으로 각 칸이 310cm를 유지하고 있다.
봉래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1821년에 기록된 “내소사 만세루 상량문”, 1823년에 걸어 놓은 “내소사 만세루 중건기”현판과 특히 최남선의 <심춘순례>의 “변산의 사대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전나무 자욱한 축동으로 들어서서 그것이 다 하는 곳에 “만세루”라는 높은 다락이 앞에 나섬은 이미 내소사에 다다른 것이다 일변에는 봉래루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상의 문헌들을 통해 1823년에 “만세루”란 이름으로 중건하였으며 이 후 “봉래루”란 명칭의 현판을 달았고. 1926년 이후에야 비로소 “봉래루”란 명칭으로 정착되어진 듯하다.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시주질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설선당(說禪堂)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무설당 (無說堂)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 지장전
21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지장보살과 명부10왕을 봉안한 전각.
2010년 건립하였다.
◎ 조사전
6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내소사에 주석하셨던 조사 스님들을 봉안한 전각
.
◎ 관심당(觀心堂)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편에 있으며, 1911년 관해선사가 선실로 건립하였으며,
현재 신축하여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 삼성각
1941년 능파스님이 건립하였다.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봉안하기 위하여 6평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86년과 93년 2차에 걸쳐 우암혜산선사가 보수, 해체 복원하였다.
원래는 법당을 바라보고 동향(東向)으로 건립되었으나 법당과 같은 방향인 남향(南向)으로 바꾸어 세웠다 삼성각의 현판은 구당의 글씨이다.
◎ 진화사 (眞華舍)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 봉래선원(불이문)
옛터에 세운 32평 규모의 목조한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1998년 우암 혜산선사가 스승이신 해안선사의 뜻을 계승하여, 스님들의 참선정진과 호남불교의 선풍을 진작하려는 원력으로 건립하였다.
불이문을 지나면 능가산 아래 봉래선원이 드러난다. 봉래선원의 부속 건물로는 요요당, 본연당, 적적당, 등 욕실 및 화장실을 겸비하여 납자들이 수행하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원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 회승전
◎ 관음전
옛사자암터에 14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관세음보살의 기도정진의 원찰로 1999년 진원 주지스님이 건립하였다.
◎ 청련암
내소사에서 뒤편 산정(山頂)을 올라 가다보면 좌쳔으로 사자암축대, 벽송도인 토굴지 등의 고지를 지나서 약1km쯤 올라가면 푸른 대나무숲과 함께 남으로 툭 터진 해안이 보이며 아담한 아란야가 있으니 이곳이 청련암이다.
이절은 해발 50m 정도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곳에서 보는 조망이 일품이며, 곰소만의 푸른바다의 절경과 절에서 어둠을 뚫고 은은히 들려 오는 저녁 종소리는 마치 천공에서나 선계에서 울려오는 음악과도 같아 신비로운 감상을 자아내고 있다.
즉, 청련만종의 가경으로 변산8경주우 소사모종과 함께 나그네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으며 또한 겨울철의 설경이 빼어난 곳이다.
이 절은 백제 성왕 31년 (553)에 초의 선사가 창건하고 중간의 중건중수는 알 길이 없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능파선사의 중수만 알 뿐이라고 한다. 최근 1984년에 우암혜산선사가 해체 복원중수하였다.
이절은 한때 송진우, 김성수, 여운영등 독립지사가 일제의 피검을 피하기 위해 은거지로 머물기도 했다.
◎ 지장암
내소사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전나무 숲길을 가다보면 오른족으로 조그마한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약 200m 정도 들어가면 지장바위 아래 그림처럼 조용히 자리한 지장암이 나온다. 옛날 은적암이 있던 곳에 세우면서 지장암 위에 지장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장암으로 불렀다.
지장암은 통일신라 초기부터 있던 절로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창건하였으며 이곳에서 3년을 기도하여 지장보살의 현신수기와 간자 12매를 얻었다 그 후 각해선사의 중건과 우암거사의 삼건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는 않고 겨우 흔적만 남은 은적암 옛터에 1941년 해안선사가 다시 복원하여 지장암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그 후 이곳에 서래선림을 개설하여 호남의 정법안장을 드날리는 선 중심도량이 되어 당시 해안선사의 법문을 듣고자 모인 불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지장암은 근세 호남불교를 중흥시킨 해안선사에 의해 선풍을 드높인 선 수행 도량으로 거듭났다.
그 뒤 해안선사의 뒤를 이어 제자 우암혜산선사에 의해 거듭 중창되었고 1987년부터 일지스님이 지장암을 지켜오다가 지난 1990년 38평의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선실을 건립했고 나한전과 요사등을 중건했다.
◎ 내소사 전나무 숲길
150년 전 만들어진 전나무 숲길
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1300여 년 된 내소사.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다시 복구하는 일이 계속됐으나 입구가 여전히 삭막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50여 년 전 일주문에서 사천황문에 이르는 길에 전나무를 심었다. 6∙25 때도 절은 피해를 입었지만 입구의 전나무들은 다행히 무사했다.
내소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매표소가 나온다. 주변에는 여느 등산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커다란 문이 보인다. 문화재관람료 2천원을 내고 들어서자 시작부터 나무의 향연. 고개를 치켜세우고 나무 끝을 바라보니 족히 30~40미터는 될 듯하다. 몇 걸음 앞에는 나무의 역사를 보여주는 나이테가 드러난 기둥이 있다. 전나무 숲은 너무나 울창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가을이 된다. ‘아름다운 숲’과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다.
남녀노소 모두 걷기에 즐거운 길
새벽이면 스님들과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날이 밝으면 등산객, 관광객이 북적인다. 약 500미터의 전나무 숲길. 하얗게 머리가 샌 할머니도 막 돌이 지난 어린아이도 숲길을 걷는 데 어려움이 없다. 티셔츠를 맞춰 입은 커플도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까지 모인 대가족도 즐겁게 이 길을 걷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이 숲길을 걷게 해준, 150년 전 이곳에 나무를 심은 스님이 새삼 고마워진다.
전나무 숲길에선 나이테 안내판을 비롯해 숲을 설명해주는 해설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나무 밑에는 의자를 놓아두어 누구든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왼쪽 계곡엔 조잘조잘 물이 흐르고 이따금 길을 가로지르는 다람쥐는 사람들을 반긴다. 길지 않은 길이지만 마치 거대한 트레킹 코스의 축소판처럼 모든 것을 갖췄다.
등산로도 갈라지고 폭포로 향하는 길도 있다. 길의 끝에는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 장소였던 작은 연못도 있고 오른쪽엔 부도탑도 있다. 전나무, 왕벚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피톤치드’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느낌이다.
◎ 내소사의 전설
스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이렇게 나와서 1년을 기다려도 목수는 오지 않으니, 언제 대웅전을 짓겠습니까?
내일은 소승이 좀 미숙해도 구해 오겠습니다.
허, 군말이 많구나.
그리고 기다리실 바엔 절에서 기다리시지 하필이면 예까지 나오셔서...
멍청한 녀석. 내가 기다리는 것은 목수지만 매일 여기 나오는 것은 백호혈(白虎穴)을 지키기 위해서니라.
노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늙은 호랑이가 포효하며 노승 앞에 나타났다. 호랑이의 안광은 석양의 노을 속에 이글거렸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승이 주장자를 휘저으며 호랑이 앞을 지나려 하자 대호는 앞발을 높이 들고 노승을 향해 으르릉댔다.
안된다고 해도 그러는구나. 대웅보전을 짓기까지는 안돼.
노승은 주장자를 들어 소나무 허리를 때렸다. 팽하는 소리가 나자 호랑이는 '어흥'하는 외마디 울부짖음을 남기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타 버린 대웅전 주춧돌에 앉아 산을 내려다보던 노승은 사미승을 불렀다.
너 일주문 밖에 좀 나가 보아라. 누가 올 터이니 짐을 받아 오도록 해라.
이 밤중에 어떻게 일주문 밖을 나가라고 하십니까?
일주문 밖과 여기가 어떻게 다르기라도 하단 말이냐?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간신히 일주문에 다다른 사미의 가슴은 철렁했다. 무슨 기다란 동물이 기둥에 기대어 누워 있지 않은가. 입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다가서니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나그네였다.
어서오십시오. 스님이 마중을 보내서 왔습니다.
나그네는 아무 말 없이 걸망을 둘러메고 걸었다.
손님, 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스님께서 짐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는 묵묵히 걸망을 건네주었다.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 짐 속엔 뭣이 들었길래 이리 무겁습니까? 노스님과는 잘 아시나요?
나그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부터 대웅전 지을 나무를 찾아 기둥감과 중방감을 켜고 작은 기둥과 서까래를 끊었다. 다음에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목수는 말없이 목침만을 잘랐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노승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언 다섯 달. 목수는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침을 대패로 다듬기 시작한 지 3년, 흡사 삼매에 든 듯 목침만을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목수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 다 가겠소.
사미의 비웃는 말에도 목수는 잠자코 목침만을 다듬었다. 사미는 슬그머니 화가 나 목수를 골려 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사흘이 지나 목침깍기 3년이 되던 날. 목수는 대패를 버리고 일어나더니 노적만큼 쌓아올린 목침을 세기 시작했다. 무수한 목침을 다 세고 난 목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일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연장을 챙긴 목수는 노승을 찾아갔다.
스님, 소인은 아직 법당 지을 인연이 먼 듯하옵니다.
절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목수를 보고 사미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왜 무슨 까닭이 있었느냐?
노승은 조용히 물었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직 저의 경계가 미흡한가 봅니다.
가지 말고 법당을 짓게.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사미는 놀랐다. 목침으로 법당을 짓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산더미 같은 목침 속에서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다니-. 목수는 기둥을 세우고 중방을 걸고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화공을 불러왔다. 노승은 대중에게 엄격히 타일렀다. 화공의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되느니라. 화공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밖에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은 법당안에 그려지는 그림이 보고 싶고 궁금했다. 그러나 법당 앞에는 늘 목수가 아니면 노승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사미는 법당 가까이 가서 목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잠깐 오시랍니다.
목수가 법당 앞을 떠나자 사미는 재빠르게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없는데 오색 영롱한 작은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사미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법당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순간 어디선가 산울림 같은 무서운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는 날아가버렸다. 노호 소리에 놀란 사미가 어슴프레 정신을 차렸을 때 노승은 법당 앞에 죽어 있는 대호를 향해 법문을 설했다.
대호선사여! 생사가 둘이 아닌데 선사는 지금 어느 곳에 가 있는가. 선사가 세운 대웅보전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
때는 1633년. 내소사 조실 청민선사는 대웅보전 증축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변산반도 한 기슭에 자리한 내소사 대웅전(보물 제291호)은 지금도 한 개의 포가 모자란 채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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