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사 홍매화
화엄사 홍매화는 2월말에서 3월 중순이면 활짝 필것 같다. 화엄사 홍매화 촬영 대회가 2024. 2. 25(일)~3.23(토) 동안 개최된다. 남녁의 홍매화가 개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화엄사 홍매였다. 올해는 꼭 만개한 붉다 못해 진한 흑색을 머금은다 하여 흑매라고도 불린 화엄사 홍매를 보고 싶었다. 2.17일 첫번째 찾았지만 아직 피지 않아 아쉽다.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 2024. 화엄사 홍매화 들매화 촬영축제
◎ 작년에 접한 화엄사 홍매화 자료를 여기 올림니다.
2024.02.17. 화엄사 홍매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 대한불교조계종제19교구본사지리산대화엄사 탐방
화엄사는 오래전부터 여러번 왔다. 국보급 보물이 많은 문화재 보고인 화엄사를 둘러본다. 여러번의 국란에 소실되고 다시 재건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은 화려한 문화재 보고다운 절집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절집 구석 구석 국보급 보물과 여러 보물로 인정 받은 문화재에서 깊은 역사를 느낀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지리산 일대 절집 소각 작전 시 화엄사 소각 명령을 받은 구례경찰서장 차일혁경무관은 화엄사를 고수하기 위해 거짓으로 대웅전 앞에 문짝을 놓고 불을 놓아 소각하는 것 처럼 하여 천년고찰 화엄사를 보존하였다는 이야기는 감동이다. 여기 자료는 화엄사 홈페이지 자료를 참고하였다.
◎ 천년의 화엄성지 화엄사 창건연혁
- 문화재의 보고 수많은 문화재와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불멸의 명작
◇ 백제시대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습니다.
◇ 신라시대
신라시대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우셨습니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신라말기 헌강왕(875)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 되었습니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습니다. 문종(1047시083)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1126시146)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시330)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옹, 승인, 부휴, 증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릅니다.
인조(1630시636)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 가람배치도
◎ 화엄사 적별보궁
적멸보궁 탑전에 올라서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면 부처님 사리를 모신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이 바로 보인다.
◎ 화엄사 4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화엄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 (544)에 연기존자(鷰起尊者)가 세운 절로,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비구니)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존자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존자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에 자장율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사리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연기존자께서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 메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머리에 석등을 이고 왼 손에는 찻잔과 구슬(여의주:불성)을 받쳐 들고 어머니에겐 진리의 공양을 부처님에겐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효사상의 공양탑(供養塔)이며, 앞쪽은 12선녀(시간,공간), 희노애락(번뇌)의 표정을 한 4사자(지혜)와 어머니(비구니:수행자)는 봉오리 연꽃(불성)을 들고, 3층(3계)의 탑의 모습인 사리탑은 즉 수행자는 불성(佛性)을 밝히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삼계(三界)의 대도사인 부처님 되기를 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상의 사리탑(舍利塔)으로서 4사자3층사리석탑을 일명 효대(孝臺)라고도 부른다.
◎ 화엄사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국보 336호)
대웅전 불단 중앙에 모신 불상으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며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으로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비로자나 수인과 달리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산 모양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표하며 이 결인으로서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일체인 뜻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 왼쪽에 모신 불상인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두 손을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데 보관(寶冠)을 머리에 쓴 보살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자나불 오른쪽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두고, 왼손은 엄지를 중지에 대고 왼쪽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는 이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서 악마를 항복시키는 인상(印相)이며 부처님깨서 성도한 모습이라고 한다.
인조 10년(1632년)에 청헌(淸憲), 인균(印均)이 조성을 했으며 비로자나불상 크기는 2.7m, 노사나불상 크기는 2.5m, 석가모니불상 크기는 2.4m이다. 도광 스님이 1973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 개금불사 점안식, 종열 스님이 1997년 개금불사를 했다. 2006년 3월 12일 보물 1548호 지정되다.
2018년 4월 26일 덕문 스님이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각황전과 대웅전 불상에 부분 개금을 시작했다. 에어건으로 먼지를 불어내는 작업을 마친후 남은 먼지를 극세사 천으로 다시 한번 제거한 후 옷칠 마치고 개금을 한다. 부분 개금을 4일간에 걸쳐 29일에 마쳤다.
2021년 6월 1일 오전 10시 보제루에서 국가무형문화재 139호 볼복장작법보존회 경암스님께서 대웅전 삼신불 복장의식을 1시까지 봉행하고 2시부터 대웅전에서 삼신불 복장을 넣은 의식도 봉행 되었다.
2021년 6월 5일 대웅전 삼신불복장불사 회향날을 낮 12시부터 대웅전에서 삼신불 재복장 점안의식을 봉행했다.
2021년 6월 23일 문화재청은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보물에서 국보 제 336호로 승격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발견된 기록에는 1634∼1635년에 17세기 대표 조각승으로 꼽히는 청헌(淸憲), 응원(應元), 인균(印均)이 제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본 사찰의 중창을 주도한 승려인 벽암 각성(1575∼1660)이 불상 제작을 주관했고, 선조의 여덟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1589∼1645) 부부와 선조 사위 신익성(1588∼1644) 부부 등 왕실 인물과 승려를 포함해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
◎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 301호)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 무게가 200Kg이 넘는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손가락을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괘불은 마(麻) 바탕에 채색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효종 4년(1653) 5월에 지영․탄계․도우스님 등이 조성하였으며 1976년 대웅전 왼쪽 계단옆 도량에 괘불을 모셔 세워 초파일 의식 도중에 하단부분이 찢어지는 파손을 입어서 1977년에 명선스님이 텡화 뒷면을 배접하여 보수, 1989년 4월에 종원스님이 탱화보수를 하였다.
※ 괘불은 국가에 천재지변이 생겼을 때나 기우제(祈雨 祭),영산재(靈山齋),예수재(豫修齋),수륙재(水陸齋)같은 것을 행하기 위해 신도들이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할 때 모시는 신앙의 대상물이다. 티베트는 괘불을 당카라고 부르며 석가탄신일,성도일,열반일에 큰 축제을 열고 이 때 당카를 내어 모시고 소원을 빌거나 예배를 드린다. 연중 행사로 내어 모시는 것을 ‘거불(巨佛) 햇볕쬐기’ 라고 하며, 부처님이 현세에 나타나서 고통을 덜어 주는 날이라고 믿고 있다.
◎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신라 문무왕17년(677)에 의상조사께서 조성한 것으로이 탑의 높이는 6.36m이며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이다. 꽃잎 형태는 우담바라화로 이 꽃은 3천년만에 한 번 핀다고 하여 부처님 오심이 지극히 드문 일이라 비유 한다 꽃의 8잎은 8정도[정견(正見),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명(正命),정업(正業),정어(正語),정사유(正思惟),정정(正定)]이고, 4개의 화창(火窓)은 사성제(苦集滅道)와 부처님의 광명이며, 북의 모습은 진리의 소리이니, 즉 팔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 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으시며 진리의 소리를 중생들에게 들려 주시어 마음의 등불[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석등이다.
◎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임진란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공주는 인경황후(仁敬王后) 막내 딸로 태어났다. 황후는 1680년(숙종6년) 음력 10월 26일 2경(二更: 오후 9시~ 11시)에 경덕궁에서 발병 8일 만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인 20세에 승하했다. 어머니를 여윈 아기 공주는 유모와 나인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다.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육전 법당을 짓기 시작할 무렵에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同參하여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무릇 2층 48칸으로서 그 장엄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하자 조정에서는 사액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2139호)
각황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桂坡 聖能)이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을 중창한 후 1703년 조성한 대형 왕실발원 불상으로서(평균 높이 약 3.3m), 색난(色難)의 50대 만년작(晩年作)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각황전의 창건과 불상 조성은 화엄사 중창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불사(佛事)로서, 전각명도 왕실로부터 하사받아 이때부터 장육전에서 ‘각황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불상 조성에 있어 숙종을 비롯해 측근 왕실인사들인 인현왕후, 경종(景宗, 당시는 세자), 숙빈최씨(淑嬪崔氏), 영조(英祖, 당시는 연잉군) 등을 비롯해 여흥민씨, 해주오씨 등 유력가문들도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초 최대의 왕실불사였음이 인정된다.
현재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에 의해 이 7존의 불보살상은 1703년 10월 4일에 조각승 색난(色難)을 중심으로, 충옥(沖玉), 일기(一幾) 등 24명의 조각승이 협업해 만든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석가여래좌상은 색난, 다보여래상과 문수보살상은 충옥, 아미타불상은 일기, 보현보살상은 웅원, 관음보살상은 색난과 추붕, 지적보살상은 추평이 각각 주도하여 조성한 사실을 통해 당시 최고 권위의 왕실발원 불상 조성에 색난이 초빙된 것은 조각승으로서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았음을 입증해 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거대한 이층전각의 목조건물로서, 여기에 봉안된 불상 또한 규모에 맞는 웅장함과 형태미로 조성되었다. 주존불인 석가여래삼불좌상은 당당하고 묵직한 형태에 신체에 비해 큰 네모난 얼굴로 압도적이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삼불좌상의 좌우에 서 있는 사보살입상은 유사한 얼굴과 비례를 보이면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여 대조를 이룬다. 이렇듯 서로 대비되는 여래와 보살의 조형성은 전각 내부를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끄는 효과를 보이는데 이는 색난의 우수한 감각과 조각기술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각황전 불상은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석가·다보·아미타여래 삼불상과 석가여래의 좌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다보여래의 협시보살로 지적보살(智積菩薩)이,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이 짝을 이룬 도상은 1665년 간행『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의거한 ‘법화거불(法華擧佛)’, 즉 법화신앙에 바탕을 둔 불교의식집에 등장하는 도상의 최초 조각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삼존불(三尊佛)․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다.
이처럼 화엄사 삼불사보살상은 40여 년 동안 활동한 조각승 색난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동안 숙련된 기량과 원숙함이 반영된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이자,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는 점, 수준 높은 조형성과 기술적 완전성을 갖춘 점에서 2021년 10월 25일에 보물로 지정했다.
◎ 화엄사 대웅전(보물 299호)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크기는 전면19.5m, 측면12m로서 정면 5칸 ,측면3칸이며 부처님 머리위에 못과 풀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우아하고 형태가 일품인 천개(天蓋)가 조각 되어있다.
대웅전 편액은 인조 14년(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법당에는 깨달음의 세계(진리)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모양과 빛깔이 따로 없고 오고 가는 곳도 없이 진리 그대로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과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과 모든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로 목불(木佛)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인조8년(1630)에 벽암(碧巖)스님과 문도에 의하여 중건 되었으며 삼존불상은 인조 10년(1632) 안치하고, 영조 33년(1757) 주지 회심(會心)대사때 처관(處寬),학찬(學贊),섭심(攝心),탁계(卓戒)스님께서 중수 및 삼존불 개금과 함께 후불탱화 삼폭을 완성 했으며, 정조 22년(1798) 화엄사 대웅전 중수를 했다. 1972년 도광스님이 삼존불 개금불사, 1989년 4월에 종원스님이 탱화보수, 1997년에 종열스님이 개금불사, 2000년에는 종걸스님이 법당마루 보수를 했으며, 종삼스님이 2013년 2월에 양쪽 옆문을 교체하였으며, 영관스님이 2014년 1월 28일에 대웅전 신중단 옆으로 불등단(佛燈壇)을 설치했다.
◎ 대웅전 삼신탱화 (보물 1363호)
화엄사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그린 탱화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이 삼신불탱은 3폭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불탱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노사나불탱,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탱을 각 한 폭씩 그렸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과 8대보살, 4위의 타방불과 6위의 제불, 사자와 코끼리 탈을 쓴 성중(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들이 에워싸듯 배치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키 모양의 광배를 가지고 있는 본존불은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으며,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는 기다랗고,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두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무늬가 장식되어 다소나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보신(報身)인 노사나불도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에 보관을 쓴 보살형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8대보살과 사천왕상 2위, 4위의 타방불, 3신장과 4금강이 주위에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단정한 귀·눈·입·코 등에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는 있으나, 둥근 머리광배에 보관을 쓰고 귀걸이·목걸이·팔찌·구슬 장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보살형 불상으로서의 꾸밈이 돋보인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도는 유난히 몸광배가 큼직한 키형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6대보살과 함께 2구의 사천왕상을 그리고, 그 위로는 흔히 등장하는 타방불 대신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및 4금강과 3신장, 용왕·용녀를 에워싸듯 배치하였다. 이 삼신불탱은 18세기 조계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 스님 외 13명의 화원이 동원되어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필선이 섬세하며 녹색을 많이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 화엄사 서오층 석탑(보물133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있는 쌍탑 가운데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동탑이 아무런 조각이 없는 반면 서탑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하다. 형태는 기단(基壇)은 2층이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워져 있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배치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나뉜 두 면에는 8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몸돌에는 각 층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1층 몸돌 4면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배치하였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머리장식에는 2층의 단을 둔 받침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석탑의 형태는 높고 가파르면서도 상하의 체감비율이라든지,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수법 등이 잘 조화되어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의 12지신상 조각은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예의 하나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1층 몸돌 세 곳에 나타난 조각상은 그 배치에 보다 신중을 기하였고 특히 12지신·8부중·4천왕 모두 불교의 수호신적 기능을 지닌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탑 안에 모셔진 사리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이나,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께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조성한 것으로 화엄사의 대가람의 배가 백두산의 혈맥의 웅대한 힘과 섬진강의 태극의 힘에 출렁되니, 부처님 사리를 두탑에 봉안하여 요동함을 막음과 동시에 가람의 원만한 기운이 감돌도록 하였다. 기단 아래 조각형태는 12지신으로 개개인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수호신이고 위 부분의 조각형태는 팔금강(八金剛)과 사천왕(四天王)으로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며 이 탑을 일명 옹호탑(擁護塔)이라고도 부른다. 2층 기단은 상대의 차별을 없애고 절대 차별이 없는 이치인 불이법(不二法)을 표현한 것이다.
1995년 8월에 보수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22과를 비롯, 16종 72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132호)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이 서 있다. 그 중에 동쪽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탑이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반면, 동탑은 아무런 장식없이 단정하다. 탑은 1층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서탑의 기단이 2층인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다.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각 층 몸돌의 너비가 줄어드는 정도는 큰 것에 비해 높이의 줄어드는 정도가 적어 늘씬해 보인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몸돌을 따라 너비의 줄어드는 정도가 큰 편이며, 그 중 1층과 2층의 차이가 한층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있고, 다시 사잇기둥을 두어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 2층 기단인데 비해 1층 기단으로 되어 있고, 기단부의 돌구성이 다소 느슨해진 경향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만들어진 시기는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
신라말기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께서 조성한 것으로 신라, 백제의 양식이 혼합된 탑이다. 부처님의 모든 법이 거짓과 꾸밈이 없고 순수하여 진실 그대로 참된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곧 부처님 도량은 참된 장소요. 세계요. 법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탑이다. 증명탑,다보탑,다보분좌탑이라고도 한다. 오층은 삼계(욕계,색계,무색계),보살계,불계를 표현하고, 장식과 꾸밈이 없음은 청정한 마음을 표현하며, 단층기단은 일승법을 뜻하니 이 탑의 사상은 부처님과 보살님과 사람들의 성품은 둥글고 원만하여 차별이 없고 꾸밈이 없으며 평등한 마음의 세계가 곧 화엄세계요, 연화장세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탑이다.
1999년 10월에 보수중 이 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8과를 비롯, 330여점의 성보 유물이 나왔다.
◎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 : 사사자 감로탑(보물 300호)
화엄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로,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사상의 구현을 이루어 왔다. 신라 후기에는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문종 때에는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어 일주문 밖에 큰 창고를 짓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으며,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4사자 감로탑은 신라 문무왕17년(677)에 조성한 것이며 4사자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인 희노애락(기쁨,성냄,슬픔,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뜻하며, 사자의 표현은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獅子吼) 또는 감로법(甘露法),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사람들의 수많은 번뇌를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여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 연화장세계로 이끌어 주는 감미로운 탑이라 할 수 있다. 2007년 2월에 주지 종삼스님이 이끼제거를 하여 탑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공사를 하였고 다시금 2012년 2월에 4사자 감로탑 해체보수및 보존처리공사를 했다.
◎ 구례 화엄사 소조사천왕상(求禮 華嚴寺 塑造四天王像)
북방 다문천왕(비파)과 동방 지국천왕(장도)
◇ 다문천왕은 보천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
◇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
남방 증장천왕(여의주)과 서방 광목천왕(보탑)
◇ 증장천왕은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
◇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 주는 천왕
「구례 화엄사 소조사천왕상(求禮 華嚴寺 塑造四天王像)」은 벽암각성(碧巖覺性)과 계특(戒特)대사에 의해 화엄사를 중창하는 과정에 조성한(1632∼1636년 추정) 것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제작된 의좌형 사천왕상이다. 전체적으로 중량감 넘치는 조형 감각, 사각형의 주름진 큰 얼굴, 넓고 두텁게 표현된 콧방울 등은 17세기 전반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 만물을 창조(創造)한 신(神)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제석천왕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福)을 주고, 악한 짓을 하면 벌(罰)을 주는 등 인간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때문에, 그를 도와 주는 신으로 사천왕을 두어서 역할 분담하였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올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이다.
원시경전인 장아함경에는, "사천왕은 그 방위에 따라 각기 자리를 담당하고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의 습격을 방지한다."
조선 인조 10년(1632) 벽암각성선사께서 중건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사천왕상을 다른 모습으로 개체하였다.
◎ 화엄사 서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1348호)
1995년 서오층석탑의 해체보수시 탑 내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일괄 성보유물로 14종 22점 이다. 백지묵서 다라니경은 고려시대 이전의 서적이나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당시의 종이 글자체, 문자등 서지학적 또는 불교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며, 탑인은 고대 인쇄사에 있어서 초기 단계를 알게 해주는 국내 유일의 실물자료이다. 청동불상법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불상주조용 틀로 불상의 대량 생산을 알려주는 중요한 성보이다. 이외 성보 유물은 사리장엄법이나 조각양식, 금속공예, 기형과 기법, 청자에 대한인식과 사용, 비녀장식,등 당시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어 여러방면의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
* 지류뭉치(법신사리)
* 다라니경 필사본과 탑인이 찍힌 종이
* 청자양이호 (사리를 담은 바깥용기, 이 속에 서 사리를 담은 녹색 유리병과 청동합, 수 정옥등이 나옴)
* 청동합(청자양이호안에서 수습된 2점의 청 동합, 한점에는 향으로 보이는 목재편과 신 골(身骨)로 추정되는 작은 편이 다른 한점 에는 다라니로 보이는 폭2cm정도의 작은 두루마리와 신골로 추정되는 파편이 함께 담겨 있었다)
* 녹색유리사리병 * 소탑(탑 속에 소탑을 봉안하는 것 역시 조 탑공덕과 같다. 목탑 1기와 철탑 2기가 나 옴)
* 철도(鐵刀)와 금속편 일괄
* 뒤꽂이(청동제, 남성용 머리 뒤꽂이로서 불 국사 석가탑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 불상금형틀(흙으로 불상을 찍어내기 위해 사용한 틀이다)
◎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장육전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가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華嚴經)을 돌에 새기고 법당안에 장육황금입불상(丈六黃金立佛像)을 모셨으며, 법당을 짓게 된 연유는 의상스님께서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통달하시고 귀국하여 원효스님과 법담을 나누니 신라국에 없는 화엄경에 대하여 능통하여 사연을 물어본즉, 백제성왕 22년에 구차례(구례)라는 곳에 인도스님이신 연기존사께서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여 천축적 화엄경을 설법하여 화엄의 꽃이 피워 있었다는 말씀을 듣고서, 화엄사에 와보니 부처님 성지에 온 느낌을 받고, 백두산 혈맥자리 아래에 부처님 나라에서 온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한 땅이며 화엄불국세계 화엄사가 화엄의 근본도량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장육전 법당을 세우게 되었다.
정유재란때 건물이 파괴 되어 지금은 조각만 남아 화엄석경으로만 불리우고 있다.
※ 글씨는 신라 명필 김생체 이다.
계파 스님에 의해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다시 중건될 때 화엄석경 파편들을 불전 근처에 정리하여 쌓아 놓은 것을 1938년 각황전 해체 복원후 진응스님의 각고의 노력으로 정리했다. 6.25 동란전후에 전란중에 일제때 분류 포장 되었던 화엄석경 상자들이 노천에 방치된 비운을 맏게 되었는데 석경 파편이 다시 정리된 것은 1961년 9월 8일부터 10월 6일까지 29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석경편은 14,242점으로 이들을 크기별로 대 중 소로 나누어 163상자로 나누어 각황전 불단 밑에 보관 했는데 많게는 50여자에서 적게는 몇자 미만인것도 있다. 1997년 종열 주지스님이 화엄석경을 영전으로 옮겼으며 2013년 6월 3일 영관 주지스님이 화엄석경을 화엄사 성보박물관 지하 보관실로 옮겼다.
◎ 화엄사 구층암석등(전남유형문화재 제132호)
구층암 석등은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높이는 2.43m이며 하대석(下臺石)과 간석(竿石), 상대석(上臺石), 화사석 (火舍石), 옥개석(屋蓋石) 및 상륜(相輪)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는 팔각(八角)으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복련대 (覆蓮臺)까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8장의 꽃잎으로 된 연꽃 장식 이 있고 아랫면에는 일 단의 받침이 있다. 팔각형의 화사석은 네 면에 화창(火 窓)이 있다.옥개석은 기와를 쌓아 올린 듯한 모양의 동마루와 귀끝 부분이 거꾸 로 되어 있으며, 아랫면에 두 줄의 홈을 둘렀다. 안상과 연화무늬 등 각부 양식 과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꽃의 8잎은 8정도[정견(正見)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 정명(正命), 정업(正業), 정어(正語),정정진(正思惟), 정정(正定)], 4개의 화창(火窓)은 사성제(四聖諦)의 고집멸도(苦集滅道)와 부처님의 광명, 즉 팔정도로 수행하여 사성제의진리의 이치를 밝히고 광명을 놓으시며 마음의 등불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세계를 밝혀 주시는 부처님의 참다운 말씀을 엿볼 수 있는 석등이다.
◎ 화엄사 보제루(시도유형문화재 49호)
보제루는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어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는 법요의식(法要儀式) 장소입니다.
누각은 정면7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 누각형식의 건물로 인조때 벽암선사(碧巖禪師) 가 중창했다.
순조27년(1827)에 금봉우익선사(錦峰祐益禪師), 랑규(朗奎)선사께서 크게 고쳤다
1974년 12월에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했다.
주지 종열스님 때는 보제루 안에는 화엄석경, 괘불탱화사진. 화엄사 성보유물사진, 동서양탑 성보 유물 사진과 부처님사리 사진등을 전시하고 있었으며,
종삼스님 때 는 불교 관련 전시물을 장소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2007년 8월에 종삼스님이 해체보수를 하셨습니다.
◎ 화엄사 일주문
일주문은 절 들어가는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문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워서 지은 것이며 이문을 들어서면 오직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 인조18년(1640년)에 벽암선사가 중건 했고, 고종3년(1866년)주지 지선스님과 도감 회성스님이 연목과 부연보수, 1919년에 주지 진응스님이 도리일부, 부연, 연목보수, 하면서 지리산화엄사조계문중수연기(智異山華嚴寺曺溪門重修緣起)을 쓰고 상량에 넣었다. 1998년 종걸스님이 보수을 하였다.
영관 스님이 2015년 12월 18일에 해체하고 2016년 5월 13일 복원 되었지만 단청을 하지 않았다. 덕문 스님이 2018년 6월 30일 일주문 단청을 맞쳤다.
글씨는 선조대왕의 네 번째 부인의 네째 아들인 의창군의 글입니다.
◎ 화엄사 금강문
금강은 쇠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라는 뜻이며 그 무엇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나 금강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금강의 마음을 가지면 모든 번뇌도 없어집니다.
인조 10년(1632년) 벽암 각성선사께서 중건했으며 1998년에 종열스님이 단청불사를 했다.
◇ 왼 쪽에 밀적금강 :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이 있으므로 밀적금강이라한다.
◇ 보현동자 : 보현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보처로 진리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있다.
◇ 오른 쪽에 나라연 금강 :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 문수동자 : 문수보살이 동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보처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엄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자를 타고 있다.
◎ 화엄사 천왕문
고대 인도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 만물을 창조(創造)한 신(神)이라 하여 존경하였습니다.
제석천왕은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복(福)을 주고, 악한 짓을 하면 벌(罰)을 주는 등 인간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때문에, 그를 도와 주는 신으로 사천왕을 두어서 역할 분담하였습니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올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이다.
원시경전인 장아함경에는, "사천왕은 그 방위에 따라 각기 자리를 담당하고 정법을 수호하고 마귀의 습격을 방지한다." 조선 인조10년(1632) 벽암각성대사께서 중건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사천왕상을 다른 모습으로 개체하였다.
◇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
◇ 증장천왕은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
◇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
◇ 다문천왕은 보천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
◎ 화엄사 원통전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 칠성, 독성, 산신이 모셔져 있었다.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은 크고 넓고 자비로운 덕이 있으신 분으로 가장 널리 우러름을 받으시며 극락세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 형편을 살피시고 모든 이들을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는 인자하신 분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합니다.
◇ 칠성(七星)님은 사람들의 좋은일,나쁜일,복덕,수명장수를 도와 준다고 합니다.
◇ 독성(獨聖)님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緣覺)을 이룬분입니다.
◇ 산신(山神)은 산신령,산왕대신으로 산을 맡아 수호 하고 있는 분입니다.
조선 숙종29년(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고, 편액은 정조23년(1799)에 조종현에 의해 쓰어진 것이다
도광 스님이 1969년 11월 20일 취임하면서부터 각 법당을 정비 불사를 하시면서 나한전에 없어진 제화가라보살상과 미륵보살상 좌대에 가섭존자 아란존자를 모셨고 나한님 한 분이 없어져서 양쪽으로 8분 씩 배열이 되어야 하는데 배열이 맞지 않아서 빈두로존자(나반존자)를 원통전에 독성탱화 앞으로 모셨다.
명선스님이 1978년에 해체중수 했으며, 1978년 원통전 나한탱화에 있는 나비그림 부분만을 오려내어 없어져 도난 당했으며 몇 달후 그 부분을 다시 그려 넣었다.
종열스님이 1997년에 관세음보살상을 개금했다.
종삼스님이 2006년 10월 기와번와를 하였다.
종삼 스님이 2010년 독성탱화와 나반존자상 특별전시회가 있었던 곳에 빌려 주었다가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 나반존자상은 성보박물관 수장고로 모셨다.
법당 왼쪽에 목판 보관실에 부휴집(浮休集), 염불직지(念佛直指)등 많은 귀중한 목판본이 보관 되어있으나 영관스님이 2013년 7월 원통전안 왼쪽 목판 보관실에 있는 목판을 박물관 지하보관실로 옮겼으며, 2015년 1월 28일 목판 비어있는 목판 보관실을 해체해서 없에버렸다.
덕문 스님이 2019년 1월 3일 나한전 오른쪽 지붕 붕괴로 인해 해채보수 하기 위해 원통전 왼쪽 공간에 임시 불단을 만들고 나한전에서 석가모니불상, 인왕상만 남기고 가섭존자, 아란존자, 16나한, 판관상과 후불탱화, 나한탱화 를 옮겼으며 1월 5일 원통전에 나한전 불단을 밤색천 위에 유리를 올려놓는 불단으로 재정비하고 나한전에서 석가모니불상, 인왕상을 옮기고 난후 후불탱화, 나한탱화, 가섭존자, 아란존자, 16나한, 판관, 인왕상을 가지런히 배치하여 모셨다.
덕문 스님이 2019년 2월 14일 원통전 오른쪽에 있던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를 탑전 칠성각으로 옮겼다.
2019년 11월 9일 오후 12시 원통전에 임시법당으로 있던 나한전 나한탱화와 불상및 나한상을 나한전으로 옮겼지만 그중에서 후불탱화는 수미단에부터 천장까지 높이가 맞지 않아서 걸지 못하는 보수 하자(瑕疵)가 발생되여 다시 원통전에 모셨다. 11월 11일 원통전에 있던 임시 수미단을 철거하고 후불탱화는 나한전 법당안 오른쪽 문에 두었다.
2023년 6월 15일 원통전 칠성탱화를 덕문 주지 스님이 성보박물관 수장고로 이운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그동안 원통전에 모셔져 있었던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 중에서 독성탱화, 산신탱화는 탑전에 삼성각으로 이운되고 칠성탱화는 화엄사 성보박물관 수장고 이운되었으니 원통전에서 사라져 버려서 이 곳 법당에서는 삼성의 존재가 잊어지고 말았다.
◎ 화엄사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시왕(十王)들을 모셨습니다. 지장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남다른 칭찬과 당부를 받고 매일 선정에 들어 모든 이들의 마음과 힘을 살피며 중생들 모두를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해 죄를 짓고 고통받는 지옥중생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구제한 다음에 부처님이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의 보살님이다. 편액은 정조 23년(1799)에 조종현의 글씨이다.
시왕은 저승세계에서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판결하는 분으로 진광대왕,초강대왕,송제대왕, 오관대왕,염라대왕,변성대왕,태산대왕,평등대왕,도시대왕, 오도전륜대왕이다.
인조 8년(1630년) 벽암스님 중건, 1970년 리산 도광선사께서 중수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시왕상, 동자상, 판관, 금강역사를 개체(改彩)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지장보살상을 개금 했고, 2005년 법당 옆면에 시왕탱화 2점을 명섭스님이 조성했으며 주련도 달았다.
◎ 화엄사 나한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신곳이며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번뇌의 적을 죽여 영원히 깨달음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베풀어 바르게 이끌어 주시니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어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분입니다.
인조10년(1632)벽암선사께서 중건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후 정조19년(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하얀나한상을 개채(改彩)를 했으며, 1997년 종열스님이 석가모니불상 개금, 주지 종걸스님 때 1998년 8월 8일 나한전 금강역사상 한분과 녹사 2분 도난 당했고 12월에 복원하여 모셨으며, 2005년에 명섭스님이 새로 후불탱화와 십육나한탱화를 조성과 주련을 달았다.
덕문 스님이 2018년 9월 18일 없어진 나한님 한 분과 좌대 두 개를 조성하여 종삼 스님이 2010년 독성탱화와 나반존자상 특별전시회가 있었던 곳에 빌려 주었다가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 나반존자상은 성보박물관 수장고로 모셨던 빈두로존자상을 나한전으로 모시고 와서 오늘 봉안하니 16 나한님이 완성 되었다.
2019년 1월 3일 나한전 오른쪽 지붕 붕괴로 인해 해채보수 하기 위해 원통전 왼쪽 공간에 임시 불단을 만들고 나한전에서 석가모니불상, 인왕상만 남기고 가섭존자, 아란존자, 16나한, 판관상과 후불탱화, 나한탱화를 옮겼으며 1월 5일 원통전에 나한전 불단을 밤색천 위에 유리를 올려놓는 불단으로 재정비하고 나한전에서 석가모니불상, 인왕상을 옮기고 난후 후불탱화, 나한탱화, 가섭존자, 아란존자, 16나한, 판관, 인왕상을 가지런히 배치하여 모셨다.
2019년 9월 16일 나한전 해체 보수 하기 위해 2019년 1월 3일 부터 시작한 이후 공백 기간을 가졌다가 오늘부터 보수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에 법당 목재중 재활용이 가능한 것은 사용하는데 나한전 기둥 모두가 느티나무(괴목)인데 육송 2개로 교체 했으며 대들보 4개도 느티나무이며 육송 1개로 교체하였다.
2019년 11월 2일 나한전에 해체된 수미단을 조립 설치를 시작 했으며 11월 5일 나한전 수미단 조립 설치를 끝내고 11월 8일 수미단에 옻칠로 법당안 내부와 밖에 해체 보수가 마무리가 되었으며 11월 9일 오후 12시 원통전에 임시법당으로 있던 나한전 나한탱화와 불상및 나한상을 나한전으로 옮겼지만 그중에서 후불탱화는 수미단에부터 천장까지 높이가 맞지 않아서 걸지 못하는 보수 하자(瑕疵)가 발생되여 다시 원통전에 모셨다. 11월 11일 원통전에 있던 임시 수미단을 철거하고 후불탱화는 나한전 법당안 오른쪽 문에 두었다.
2019년 11월 16일 나한전 수미단 뒷쪽를 짤라서 공간을 만들어 후불탱화 높이를 맞춰 모시게 되니 2019년 1월 3일부터 시작한 나한전 해체 보수가 오늘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다.
2019년 11월 22일 오후에 나한전 십육나한님의 명패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 화엄사 법종각
화엄사에 3층 누각의 에밀레종 버금가는 정도로 무게가 20톤이나 대는 신라화엄대종 (新羅華嚴大鐘)이 있었는데 정유재란때 왜병이 종을 갖고 가다가 용두리앞 섬진강에 빠트렸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범종각은 1976년 11월28일 준공과 더불어 타종식을 거행했다. 종 이름은 화엄사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는 곳이니 지혜를 범어로 반야라고 한다. 그래서 반야범종(般若梵鐘)이라고 부른다. 명선스님이 건립했다.
새로운 범종과 범종각을 조성하기 위해 종삼 주지스님이 2012년 11월 4일에 범종각을 해체하여 보광사로 보내고 , 2013년 4월 18일 반야범종(般若梵鐘)인 화엄사 성보가 담양보광사로 옮겨갔다. 2013년 3월 8일에 범종각 상량식, 4월 12일(음력 3월 3일) 범종의 무게 3300관 으로 범종주조와 함께 새로운 범종각을 건립하고 타종식을 거행했다. 종면에 새겨진 조각형태는 4분 비천상과 사리탑의 4사자상의 모습으로 했다. 종 이름은 백제 땅에 연기존자 께서 전해주신 화엄경을 따서 화엄사라 하듯 화엄법계의 성종(聖鐘)이라고 해서 화엄성종(華嚴聖鐘)이라고 부른다.
◎ 화엄사 법고루(운고각)
화엄사 운고각(운고루) 사물(四物)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네가지 물건이라고 한다.
법고(法鼓)는 축생(짐승)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악기로서의 북이 아니라 법요에 쓰는 북이라는 뜻에서 법고라 한다.
운판(雲版)은 공중을 날아 다니는 중생,허공을 헤매이는 영혼등 허공계 중생 들을 제도하기위하여 치는 것으로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운판이라 한다.
목어(木魚)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으로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을 비게 파내어 두두리면 소리가 난다.
범종(梵鐘)은 육도중생(六道衆生)을 제도하기 위한것으로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천상 28천(욕계6천,색계18천,무색계4천)이며, 저녘에 33번 치는 것은 28천과 오도(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합해서 33이 된다. 육도 중생들이 진리의 범종 소리를 듣고 기쁜 마음을 내어 불도를 이룰 수 있 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운고각은 1918년 금정암에 계시는 세월(世月)비구니께서 중건하시고, 1976년 명선(明煽)스님이 범종각(梵鐘閣) 세우면서 운고각을 해체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종삼(宗三)스님이 2010년 10월 21일에 운고각 해체하여 신축불사 중건했으며, 2012년 6월에 운고각 단청불사 및 운고루(雲鼓樓) 현판를 달았다.
◎ 화엄사 영전
본래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 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면서 연기조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 선사,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전각이다.
조선 인조10년(1632)때 벽암선사가 중건하고, 헌종 2년(1836)에 선일(善馹)스님이 보수, 명선 스님때 1976년에 고승영전 여러 점 도난 당했으며, 도광선사께서 1983년 영전 왼쪽 뒷방 개조, 1997년 종열스님이 보수, 각황전에 불단해체보수 하면서 불단 에 있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을 옮겨 놓았으며, 종삼 주지스님이 2006년 도량 복원 정비불사 하면서 영전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했으며 2012년 10월에 주련을 달았다.
옛영전 모습
영관 주지스님이 2013년 6월 3일에 화엄석경을 화엄사 성보박물관 지하 보관실로 옮 겼다. 6월에 해체보수 하면서 왼족 2칸 앞은 야경실 뒤는 선원접견실, 오른쪽으로 3칸 석경보관 했던 것을 타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면서 영전 안 바닥 전체를 마루로 바꾸고 기단부와 계단을 다시 조성하여 12월 13일 완성했으며 2014년 4월 22일 영전 고색 단청을 마쳤다.
◎ 화엄사 청풍당
백옥같이 아름답고 고결하며 청정한 마음의 향풍(香風)을 갖고 불보살님과 사중(寺中)을 위하여 시봉하며 수행정진하는 보사(補寺)님들이 거주하는 당우 이였으나 보수를 하고 산사에서 기도하는 불자님들이 기거하는 방사로 사용 하고 있다.
1987년 6월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였으며 2007년에 종삼 주지스님이 보수하고 2008년 4월에 기와번와 5월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청풍당 앞에 수각을 없애고 왼쪽으로 2 칸 5칸 요사체및 정자(亭子) 와 저장고 지하시설 증측을 2012년 10월 25일에 완공하였다.
덕문스님이 2017년 11월 22일 청풍당 마루 정자칸을 화엄사 신도회 방으로 만들게 위해 공사를 하기 시작하여 12월 16일 청풍당 마루 정자칸을 화엄사 신도회 방으로 완성되어서 원륭요 2층에 있던 신도회 사무실을 이곳으로 옮겼다.
2018년 11월 11일 청풍당에 일하는 처사님 방사가 있던 곳을 가리게 했던 철재 틀에 대나무를 넣어 만든 울타리를 철거했다.
2023년 9월 4일 청풍당 오른쪽 방면 방사는 앞뒤로 10개 방인데 방사로는 협소하고 불편하여 방사를 앞뒤로 벽을 터서 하나로 만들어 5개 방사 만들면서 방안에 화장실을 만드는 리모델링 작업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2023년 11월 10일 방안 리모델링이 끝나서 오늘부터 청소를 했으며 청풍당 밖에 앞 벽면과
옆 벽면에 퇴색 된 단청을 보안하고, 뒷쪽 백면 전체에 단청하고 있으며 마루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여 11월 12일에 마쳤다.
◎ 화엄사 원융요
걸리고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러짐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여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원융이라 한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함께 지내는 요사(寮舍)이다.
원융요는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1987년 6월10일에 중창하였으며 본 당우를 1층은 공양방 및 식당, 목욕탕이 있고 2층은 재무실, 원주실외 객실로 사용, 평전스님이 1992넌 원주실 마루을 접대실 방으로 개조했다.
종걸스님이 1999년 원융요 1층인 공양채 위로 2층 왼쪽편에 2칸이 없으니 전각의 모양세가 별로 좋지 못했다. 이어 부쳐 2칸을 만드니 전각의 균형미가 완벽해졌으며 이방을 행자실로 사용한다.
종삼스님이 2006년 12월에 보수하여 공양방이였던 1층은 불보살님과 사중(寺中)을 위하여 시봉하며 수행정진하는 처사님, 보사님이 거처하는 방사로 사용하고 2층은 재무실, 원주실, 강사실외 객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2012년 1층에 각방마다 세면시설을 만들었다.
덕문 스님이 2017년 5월 1일 적묵당 큰방 옆에 있던 사집 강의실을 원융요 오른쪽 끝방으로 옮겼으며, 6월 19일 원융요 2층 왼쪽 끝 강원전산실을 옆방으로 옮기고 그 곳은 소임자 해우소를 만들기 시작하여 7월 18일 공사를 마쳤다.
◎ 화엄사 만월당
보름의 만월(滿月)이 이곳을 모자람이 없이 원만히 밝고 환하게 비추니 만월 빛으로 인하여 만월당 대중 스님들이 만월지상(滿月之相 : 아름다 운 부처님의 모습을 말함)인 모습으로 지내는 전당이다.
인조 13년(1635년) 벽암스님이 중건했으며 1951 년 이때 작전을 주도한 것은 제11사단으로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으나 만월당 만 소실 되었다.
1986년 6월10일에 원응종원(圓應宗源)스님이 중창하여, 불단을 모시고 수련장으로 사용하였고, 1998년 왼편 뒤쪽 방에 화엄편집실 만듬, 1996 년 2월 종열 주지스님이 특히 불단 모신 수련장을 종무소로 만들고 불상 과 불화는 연화당으로 옮겨졌으며 오른 쪽에서 4번째칸 앞뒤 2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들고 세 번칸 마루 대접실도 방으로 만들어 칠직 소임을 맡 은 스님방으로 사용하였다.
종걸 주지스님이 1998년 종무소로 쓰던 방을 3칸의 방으 로 만들어 만월 당 전체가 대중스님 처소가 되었다.
1999년왼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보일 러 시설들을 왼편 마당을 파서 지하시설로 만들어 보일러를 완비했으며, 2002년 명섭스님이 오른쪽 옆칸 대문안에 있던 부엌시설을 방으로 만듬, 종삼스님이 2008년 7월에 만월당 기와번와, 단청불사,방문교체를 했으며, 2012년 10월 만월당 현판 교체 하였다.
영관스님이 2014년 11월 28일 만월당 보일러 교체하면서 방바다 온도 조절기를 부착하였다.
덕문스님이 2018년 4월 3일 방안에 해우소를 만들기 위해 스님들이 임시 거처인 화엄원 1층으로 다 옮기신 4월 25일 부터 시설물 해체하여 리모텔링이 2018년 9월 27일 완공했다
◎ 화엄사 적묵당
적멸(寂滅)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여신 곳. 화엄경을 설한 장소를 적멸도량 이라 함으로 화엄사의 적묵당은 번뇌를 쉬고 고요적적한 세계로 이끌어 주는 승당(僧堂)이다.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를 배우 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며 대중공사․회의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였으나 전애는 사교반 강의실로 사용 하고 있었다.
인조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수하고, 정조 19년(1795)에 행원(幸元)스님 이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동월병선(東月秉善)스님이 중수, 1978년 명선(明煽) 스님이 보수, 1979년 수각 방향으로 밑에는 바라지창 2개가 있는 2간 벽을 헐고 마루로 반 이상 나오게 나무로 벽장을 만들어 하단에는 이불장 상단에 는 서고(書庫)를 만들었으며, 1998년 종걸스님이 이불장과 서고를 헐고 벽으 로 만들고 혜원당 왼쪽 끝방에 도서실로 꾸며 서적(書籍)을 이곳으로 옮겼다.
2010년1월 30일에 종삼(宗三)스님이 기와번와 하였다.
◎ 화엄사 각황전 봉향각( 전 영산전 )
각황전봉향각(奉香閣)은 서노전(西爐殿)으로 각황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기 거하셨고 영산전으로 바뀌면서 산중 조실스님이 기거하는 요사(寮舍)로 사용 하다가 지금은 각황전 기도스님, 각단 기도스님이 거주하고 있다.
법운선사(法雲禪師)께서 창건하고 장유재란 때 소실되여 고종11년(1874)에 구례 현감 방효함(方孝涵)이 시주하여 회성스님이 중창했다.
영산전(靈山殿)을 1970년 리산 도광선사께서 석가래를 보수하시고, 1998년 11월에 종걸스님이 해체보수중 상량문을 보니 각황전 봉향각(覺皇殿奉香閣) 중건할 때 도량을 고르고 넓히다가 옛터의 솥이 발견하였는데 청정하고 신령 스런 기록들이 증거로써 남겨져 있었고 좋은날을 받아서 건물을 짓다가 옛날 주춧돌에 새로운 섬돌을 얹었는데 상쾌하고 맑은 명당의 표시들이 증거로써 남겨져 있었도다. 라고 하였다.
또 서노전(西爐殿)은 각황전봉향각으로 각황전 부전스님이 거처, 중노전(中爐 殿)은 현재 영전으로 대웅전, 나한전 부전스님이 거처, 동노전(東爐殿)은 삼전 으로 원통전, 명부전 부전스님이 거처하는 전각의 위치가 기록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상량문과 같이 영산전의 본래 전각의 이름인 봉향각이란 편액을 달았다.
종걸스님이 보수하면서 왼쪽 방 뒤에 있던 부엌을 없에고 방하나로 만들고 두번 쩨 방안 뒷편에 방문 열면 마루와 유리를 낀 문짝있는데 마루에서 오른 쪽 옆에 들어가는 문을 막고 뒷방 2번째칸 창문이 있는 방과 앞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들었으며, 명섭스님이 2002년 오른쪽 두칸 방을 터서 방 하나로 만 들고, 뒷 마루을 없에고 세면시설을 만들면서 주지스님 거처로 사용했으며, 종삼스님이 2005년 세면시설을 없에고 방으로 하고 뒤는 벽과 창문을 만들 었고 계단 옆으로 지하를 만들어 그안에 세면시설을 꾸몄다.
◎ 혜원당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을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었다.
혜원당(惠圓堂)에 본래 총원소(惣院所) 자리 였다. 종걸스님이 1998년에 총원소(惣院所)를 해체 후 신축 중건하면서 혜원당(惠圓堂)으로 부르고 있다.
적묵당에 서고(書庫)를 헐고 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혜원당 왼쪽 끝방에 도서실로 꾸며 서적(書籍)을 이곳으로 옮겼다.
저녁 예불후 누전으로 화재가 일어나서 사부대중과 소방관이 와서 진화(鎭火)했으며 또한 차례 2003년 3월 5일 예불후 새벽 4시에 누전으로 화재발생 하였으나 무사히 진화했다.
덕문스님이 2019년 3월 25일 적묵당과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2020년 2월 29일 혜원당 전체 리모델링는 금년에 자금이 없어 공사가 중단이 되었다.
2020년 3월 14일 혜원당 왼쪽에 해우소겸 샤워실을 만드는 부분쪽에 해체한 모습이 보기 안좋아 판자로 2칸 부분을 앞과 옆에 창방 중방 하방을 그림으로 그려 벽면 같이 만들었다.
2021년 3월 6일 예산금이 나와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2021년 7월 29일 혜원당을 리모델링한 왼편으로 해우소와 목욕탕의 기본 시설을 구비했지만 아직 덜 완비 되지 못했다. 오른편으로 예전에는 큰방이었던 것을 방을 3개로 만들면서 에어콘 설치와 방충망 방문을 만들어 완성은 헸지만 혜원당 전체적으로는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1년 7월 30일 혜원당 단청을 하기 시작하여 2021년 8월 9일 혜원당 단청이 끝났다.
2021년 8월 19일 혜원당 죽담 공사가 자연석으로 만든 죽담을 적묵당 죽담 형태로 만들기 위해 허물며 시작한 공사가 2021년 10월 21일 마쳤다.
2021년 10월 23일 혜원당 전체 리모텔링 공사가 끝났지만 주변 마무리가 덜 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적묵당과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를 2019년 3월 25일 시작하면서 보일러 창고와 함께 있었던 수각을 헐어 던 그 자리에 수각을 놓는 공사를 시작했다.
2021년 10월 27일 혜원당 왼쪽 공간에 전에 있었던 사물을 치는 연습용 법고 목어 운판을 갖다 놓았으며 28일에 눈비가 맞지 않도록 한 구조물을 다시 설치하고 29일에 지붕을 만들어 놓았다.
2021년 11월 5일 혜원당 주변 마당에 새롭게 흙을 뿌려서 깔끔하게 하여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 화엄원
화엄원(華嚴院)은 종삼스님이 지리산(智利山)의 좋은 기운과 '참나를 찾아가는' 가교(假橋)의 큰 역활을 할 수 있는 사찰체험 수련원(修鍊院)이 절실히 필요하여 2008년에 2층 규모로 1층은 수련생 처소, 2층은 수련원으로 사용할 건립계획안을 냈다.
2010년 3월 1일 상량식을 거행하였으며 2012년 5월에 화엄원(華嚴院) 2층 단청불사, 6월10일에 현판및 주련을 달았으며 2012년 10월 27일에 1층 수련생 처소가 완성되었다. 2013년 3월 11일 불화를 봉안했다.
화엄원(華嚴院)은 1700년 동안 한국인들의 삶과 함께 수행의 전통을 지켜온 전통사찰에서, 수행자들의 일상을 경험해 보는 기회를 갖아서, 현대인들의 생활속에서 찌들어 있는 삶을 맑고 깨끗하게 순화하는 과정으로 만들어 주는 사찰체험원(寺刹體驗院)이다.
◎ 범음요
맑고 고운 깨끗한 음성으로 모든 불보살의 말씀을 찬탄하고 불법승 삼보님을 공양하는 마음으로 수행정진하는 당우이다.
범음요는 명섭스님이 2004년에 1층을 착공과 더불어 종삼스님이 2006년에 1층의 시설및 2층을 중창 완료 하였다. 1층은 공양방및 식당, 목욕탕, 해우소가 있고, 2층은 다용도의 수행방이었다.
2015년 10월 범음요 계자작난간, 하엽, 난간두겁대를 보수 단청 및 앞 마루를 대패로 밀고 니스칠을 바르는 보수를 했다.
행자실을 원주실로 사용하기 위해 덕문 스님이 수리하여 2017년 5월 20일에 원주 스님 입주했다.
2019년 11월 18일 “화엄사 템플스테이 시설 지원 사업 범음요(전통사찰음식 체험관) 개축” 이란 공사로 범음요 앞 땅바닥에 콘크리트를 까는 기초 공사를 하기 시작 했으며 건물을 짓는데 이 용도는 범음요 오른쪽 일부분에서 철거하는 목욕탕, 화장실, 곡물및 다용도 물품 보관및 보일러실이 없어지므로 지금 짓는 건물이 완성이 되면 곡물및 다용도 물품 보관 창고및 보일러실과 오른 쪽은 부분은 장독대로 활용할 것이며 사찰음식 체험관이 완성이 되면 이 건물은 철거 할 것이다.
2019년 12월 2일 범음요앞 콘크리트 바닥 왼쪽에 보일러를 갖다 놓았고 12월 3일 건물 시설 구조물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12월 9일 사찰음식 체험요사 산사밥상 체험관 불사를 위해 범음요 오른 편에 있는 물품을 임시 건물로 옮기고 범음요 오른 편 2층 공간 장독대에 장독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1층에 있는 목욕탕 화장실 창고등을 철거 하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 15일 범음요 공양방에서 전에는 그릇으로 공양을 했으나 오늘 아침 공양시간부터 사부대중, 신도불자, 탬플스테이 참가자등 모두가 발우받침 쟁반 위에 발우를 놓고 공양물을 담아서 식탁에서 여법히 공양하게 되었다.
2020년 2월 28일 범음요 앞마루를 부분 보수했다.
2020년 4월 14일 본사에서 큰 행사후 범음료 1층 공양방에서 2층 큰방에 대중공양상을 차릴대 식기 음식등을 옮기는데 불편함이 있어 음식승강기를 설치하기 위해 원주실 옆 바닥을 사각형으로 뚫었다. 2020년 4월 21일 음식승강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2020년 5월 1일 음식승강기 몸체를 흑벽돌로 쌓아 만들기 시작했다. 2020년 5월 12일 음식승강기 흑벽돌 틈세에 석회로 매우기 작업을 시작하여 2020년 5월 28일 음식승강기 흑벽돌 틈세에 석회로 매우는 작업을 끝냈다. 2020년 5월 29일 범음요 음식승강기 위에 뚜껑을 만들면서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2020년 7월 27일 범음요 옆 오른 편에 지어진 산사의 밥상 체험관 낙성식을 오후 2시에 거행했다. 가람청 의식과 주지 스님 인사 말씀과 산사의 밥상 강사 마하연 보사님의 인사말과 더불어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과를 했다.
2021년 2월 28일 범음요 1층 공양방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범음요 옆에 창고를 2021년 2월 17일부터 ~ 27일까지 마친 임시 주방으로 개조한 곳으로 아침 공양후 주방 기구들을 옮겼다.
2021년 5월 9일 범음료 1층 주방과 공양방이 리모델링이 끝나서 오늘 부터 아침공양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2021년 5월 18일 범음요 1층 공양방을 2021년 2월 28일 리모델링하면서 2층 요사체의 뒷마루와 개각자난간 없앴고 대신 담장을 산사 체험관 윗부분 빈 공간부터 요사체까지 쌓았으며 또한 요사체 앞 바닥은 돌판으로 바꾸었고 원주실 앞 부분 벽면은 축대 형태로 만들고 원주실로 올라가는 곳도 새롭게 만들어 보수를 마쳤다.
2021년 5월 21일 범음요 1층 밖 천장 부분에 단청을 하면서 범음요 1층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가 되었다.
◎ 책육당
책육당(策六堂)은 사찰의 행정 및 기타 사무를 보는 종무소(宗務所) 이다
책육당은 명섭(明燮)스님이 2003년 6월에 중건하였다.
본래 이름은 성행당(省行堂) 이었는데 종삼스님이 2012년 10월에 책육당이라고 바꿔 현판을 달았다.
2012년 11월 26일 기단부 해체 12월 새로운 기단부 완공했다.
◎ 화산학림
인조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건한 후원 요사채로 국을 끓이고 물을 데우는 부뚜막이 있고 찬상을 준비하는 십자방과 삼직스님과 침선보사님이 사용했던 곳이다.
이곳 후원채가 비어 있게 되면서 강원채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종원스님이 1989년 7월 1일 원융요(圓融寮) 청풍당(淸風堂)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원융요 1층는 공양방과 공양주보사님 처소 그리고 남녀 목욕탕과 창고가 있고 2층는 재무실 원주실 및 객실로 사용하고 청풍당은 침선보사님, 법당보사님, 채공보사님 처소와 객실로 새로운 후원채가 생기게 되었다.
덕문스님이 2020년 2월 20일 화산학림 기와번와를 하기 위해 기와를 내리기 시작하여 3월 2일 기와번와를 끝냈다.
2020년 3월 6일 강원채인 화산학림 옛죽담을 헐고 새롭게 죽담 조성을 맞쳤다.
◎ 광학장
광학장은 수련장으로서 산사체험과 수련회를 통하여 정신이 맑게 개이는 새벽 도량석, 정성스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불, 모든 이의 고마움을 되새기는 공양, 땀흘리는 속에 공부가 되는 큰 운력, 생활속의 선과 산사의 마음을 한자락 담아 가게 하는 전당입니다.
광학장은 종걸(宗乞)스님이 2001년에 중건하였으며 종삼(宗三)스님이 2005년 6월에 단청불사를 하였으며, 2012년 11월 6월 자연석 기단을 해체하고 12월에 새로운 기단부 완성했다.
영관스님이 2014년 7월 11일에 광학장 큰방 내부 시설공사및 오른 쪽 1칸 막고 앞쪽에 옷장과 뒤편는 주방시설을 만들었다.
2016년 11월 24일 광학장에 템플스테이 수련생이 세면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방마다 화장실를 만드는 공사를 하면서 방안마다 다시금 전기시설및 천장과 벽에 나무 판자를 붙히고 방바닥에 새롭게 보일러 파이브 깔고 방문 안쪽으로 유리 방문틀을 달고 도배를 하면서 화장실 공사는 2017년 2월 25일 마무리 되었고 훼손 된 벽면 외부 단청 부분을 2017년 3월 20일 ~ 21일 양일간 걸쳐 단청했다.
◎ 덕장전
덕(德)은 바른 도를 행하므로 하여 얻은 공덕이 있어 잃지 않은 것이며, 또는 내가 얻은 것을 다른 이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도(道)이다. 이러한 진리를 몸소 수행하고 실천하며 사는 전당(殿堂)이다.
인조 10년(1632) 벽암선사께서 중건하고, 본전(本殿)은 불교학(佛敎學)을 배우는 전문 강원이였는데 6.25 동란 당시 종무소가 소실된 후 덕장전 오른 편 방을 종무소로 사용하였다.
도광선사께서 1982년 종무소옆 큰방 4칸을 보수 수련장으로 활용하였다.
종열스님이 1996년 1월 왼쪽 뒷편 방으로 화엄편집실 옮기고 1997년 10월에 수련장을 3칸을 앞뒤로 6개 처사님 방으로 만들고 종무소와 수련장 1칸을 합쳐 종열스님이 주지 퇴임후 거처할 방으로 보수했다.
종삼스님이 2006년 11월에 왼편 앞 뒷방 전체를 방 하나로 만들고 세면시설을 갖추는 개보수(改補修)하고 12월에 단청을 하였다. 종삼스님이 2012년 11월 28일 덕장전 기단부 해체하여 12월 완성하였으며 2013년 1월 덕장전 처사방 6개를 터서 수련원장 방으로 2월 17일에 개조하였다
◎ 혜원당
본당(本堂)은 화엄사승가대학 학인(學人)스님들이 부처님의 경전교리을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장소요. 또 대중스님들이 모두 모여 공양(供養)을 하는 대중방(大衆房)이었다.
혜원당(惠圓堂)에 본래 총원소(惣院所) 자리 였다. 종걸스님이 1998년에 총원소(惣院所)를 해체 후 신축 중건하면서 혜원당(惠圓堂)으로 부르고 있다.
적묵당에 서고(書庫)를 헐고 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혜원당 왼쪽 끝방에 도서실로 꾸며 서적(書籍)을 이곳으로 옮겼다.
저녁 예불후 누전으로 화재가 일어나서 사부대중과 소방관이 와서 진화(鎭火)했으며 또한 차례 2003년 3월 5일 예불후 새벽 4시에 누전으로 화재발생 하였으나 무사히 진화했다.
.덕문스님이 2019년 3월 25일 적묵당과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2020년 2월 29일 혜원당 전체 리모델링는 금년에 자금이 없어 공사가 중단이 되었다.
2020년 3월 14일 혜원당 왼쪽에 해우소겸 샤워실을 만드는 부분쪽에 해체한 모습이 보기 안좋아 판자로 2칸 부분을 앞과 옆에 창방 중방 하방을 그림으로 그려 벽면 같이 만들었다.
2021년 3월 6일 예산금이 나와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2021년 7월 29일 혜원당을 리모델링한 왼편으로 해우소와 목욕탕의 기본 시설을 구비했지만 아직 덜 완비 되지 못했다. 오른편으로 예전에는 큰방이었던 것을 방을 3개로 만들면서 에어콘 설치와 방충망 방문을 만들어 완성은 헸지만 혜원당 전체적으로는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1년 7월 30일 혜원당 단청을 하기 시작하여 2021년 8월 9일 혜원당 단청이 끝났다.
2021년 8월 19일 혜원당 죽담 공사가 자연석으로 만든 죽담을 적묵당 죽담 형태로 만들기 위해 허물며 시작한 공사가 2021년 10월 21일 마쳤다.
2021년 10월 23일 혜원당 전체 리모텔링 공사가 끝났지만 주변 마무리가 덜 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적묵당과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를 2019년 3월 25일 시작하면서 보일러 창고와 함께 있었던 수각을 헐어 던 그 자리에 수각을 놓는 공사를 시작했다.
2021년 10월 27일 혜원당 왼쪽 공간에 전에 있었던 사물을 치는 연습용 법고 목어 운판을 갖다 놓았으며 28일에 눈비가 맞지 않도록 한 구조물을 다시 설치하고 29일에 지붕을 만들어 놓았다.
2021년 11월 5일 혜원당 주변 마당에 새롭게 흙을 뿌려서 깔끔하게 하여 혜원당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 화엄사 창건설화
한반도와 만주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된 뒤 제각기 국력을 기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국을 비롯한 멀리 천축에서까지 문화와 문명을 수입하여 바야흐로 태평성국의 기틀을 다진 삼국시대의 중엽,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단에 우뚝솟은 두류산(頭流山 : 현 智異山)에 봄이 무르익어가는 삼월중순 무렵.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꼽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에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 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가 우리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은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같이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 이렇게 필담을 나눈 후 사문은 저녁공양 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리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년묵은 거북만한 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박노인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느라고 노비구니께서 그들의 등뒤에 나와 서 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연의 등에 사문이 앉자 노비구니는 바른손을 들어 번쩍들어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문은 노비구니에게 합장하고 다음에 연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는 범어로 머라고 이르니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박노인 일행들은 감탄을 말하며 사문이 사라져간 남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가. 비연존자(飛淵尊者)라 할가.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緣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후 “우리 고을에 경사가 난거야.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올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야"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할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索舍)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응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 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緣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華嚴寺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 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러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善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연기존자는 박노인의 마을사람들에게 특별히 차공양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차맛이었다. 혀끝과 입안에 젖어드는 향내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존자님, 이 차는 무슨 차 입니까 ?"
이 차는 작설차(崔舌茶)라고 하는데 빈도가 여기에 올 때 수십 그루의 차나무와 씨앗을 갖고와 이산 금방에 심어 났지요. 이 차는 불보살님께 올리는 귀중한 차이지요. 이 차를 올린 후에 이렇게 게송하지요.
“깨끗한 맑은 물 감로수로 변하여 삼보님께 받잡노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하고 염불, 독경을 한 후 내려서 빈도가 마시지요. 이 찻잔 안에 화엄법계의 무진법문이 들어있고 자비광명이 충만히 들어 있지요. 여러분 이 차를 드시지요. 이 마을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불단에 올려놓고 게송을 읆고는 소원을 빈 다음 찻잔을 불단에서 내린 후 제자리에 각기 앉아서 흡족하게 차를 마셨다.
연기존자는 “빈도가 천축에서 제조하여 가지고 온 것이 조금 있어서 여러분께 차공양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빈도의 소원대로 화엄법문을 문수보살 도량 에서 선양할 수 있도록 화엄사를 창건한 여러분의 불사동참 공덕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기 때문이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불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러분께 차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그윽한 차 향기는 화엄사 골짜기를 맴돌고 연화장세계에 가득가득 퍼졌다. 연기존자는 화엄법문을 들려주는 것과 차공양으로 마을사람들의 노고에 보답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존자의 위덕과 효심과 무궁무진한 법문에 감화를 입어 어느덧 신심이 지극한 신도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화엄사에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은 날로 펴져서 널리 알려졌으며 연기존자는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삼아 문수대성의 명호를 날마다 십만송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그를 찾는 청신사 청신녀에게 문수보살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두류산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방방곡곡에서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으로 여기고 지리산이라 부르는 이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라 하거니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일체보살중에 상수(上首)의 위치에 있는 보살이시며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泳山)이라 하므로 사람들은 때로는 지리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연기존자는 이따금씩 연을 타고 지리산의 여러곳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더러는 며칠씩 묶고 오는 일도 있었다. 존자는 이산의 주봉올 반야봉이라 이昌 하였으니 반야(般苦)란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이 주위가 팔백리나 되는 웅장한 산이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이라면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면 산 그대로가 바로 문수의 몸이 아니랴? 수천척 높이의 봉우리가 수백도 더 되는 우뚝한 산 전체가 그대로 문수대성의 진신(眞身)이요 본면목인 것이다. 존자는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S)라 하였는데 문수를 한역을 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禪)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 (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 화엄사 창건 이야기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義湖)스님은 유학길을 포기한 원효(元효)스님에게 자기가 화엄학에 통달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화엄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원효스님은 막힘없이 답변함에 의상스님은 놀라고 말았다.
"화엄학(華嚴學)은 해동(海東)에서는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원효스님은 어떻게 화엄학에 대하여 통달올 했을가" 하고 생각하며 " 스님 소승이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학을 전수받고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은 저 훈이고 해동의 화엄학 시조(始祖)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스님은 화엄학에 대하여 달통하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132여년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楚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올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 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올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언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올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가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움으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학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A殿) 법당을 건립하여야 겠구나."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올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大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올 돌에 새기고, 황금장욱불상(黃金丈A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계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화엄십찰은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 山浮石寺) 원주 비마라사(原州昆麻羅寺), 가야산해인사(例側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昆瑟山 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楚魚寺, 팔공산미리사 (八公山 美理寺), 계릉산갑사(鷄龍山陣寺), 옹주 가야협보원사(能州 例側映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澤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중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숭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方)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하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 “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올 올리며, “ 오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올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홀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를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 번 절한 뒤 소(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올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지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저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으로 전남 구례 지리산대화엄사 탐방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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