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 : 2023.02.04.(토)
2. 누구랑 : 송아산악회
3. 서해랑 4코스 : 원문버스정류소 - 학동저수지 - 우수영관광지 - 진도대교 - (종점)11.3km, 4시간
4. 산행소감
2023.02.24.(토) 오전에 4코스 남은 구간을 걷고 5코스 시작점인 원문버스정류장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서해랑길 해남 5코스 11.3km를 걷는다. 서해랑길 5코스는 우수영을 지난다. 해남 땅 우수영 울돌목을 지난다.
정유재란 때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빛날 명랑 해전이 벌어진 곳을 지난다. 이순신 장군이 회룡포(지금의 회진항)에서 부하들과 죽음을 결의하고 해남 우수영 울돌목으로 진군하여 명랑해전을 승리로 이끌때, 해남 우수영 일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희생 그리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고 참전한 의병들과 일반 백성들의 함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 것은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장군의 지도력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목숨을 받쳐 협조한 이 지역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해남 우수영 지역은 어떤 지역이였을까? 서해랑길 5코스 구간 마을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그 당시 백성들의 불안과 염려 그리고 하늘을 치르는 항전정신 그 참담한 심정을 이해 해보려고 노력해 본다. 의미 있는 역사의 길을 걷는다.
5. 산행추억
원문버스정류소에 있는 서해랑길 해남 5코스 안내판에는 12km이지만 걷다보니 11.3km이다.
서해랑길 해남 5코스 출발하면서 인증 한 장 남기고
무슨 거대한 출입문인 줄 알았는데 수로란다. 물이 양 옆의 시멘트 기둥사이로 흘러 이어 간단다.
서해랑 해남 5코스 출발 시점 0.2km 이정목
서해랑길 5 코스 시점에서 0.2km 이정목을 지난다.
국도 18번 공룡대로를 끼고 서해랑길을 걷는다.
공룡대로와 수로 사이를 걷는다.
또 다른 수문
해남 문내면 신월길을 따라 걷는다.
요사이는 밭농사도 모두 트럭터로 한다. 기계화 되었다.
서해랑길 5코스 시점에서 1.6km 이정목을 지난다.
배추를 수확한 자리에는 양배추를 심으려고 준비 중이다.
송정마을회관을 지난다.
양배추 모종
5코스 시점에서 2.9km 지점을 지난다. 해남 문내면 석교리 1791-4 현위치
5코스 시점에서 3.8km지점 이정목
원동리를 지나고
공룡대교를 터널 밑으로 지나고
장포마을회관
여기서 바로 가지 말고 왼쪽으로 잡아 돈다.
서해랑길 5코스 시점으로 부터 7.6km 이정목
학동리 마을을 지난다.
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가
학동리마을회관 앞으로
시점으로 부터 7.8km 이정표
학동마을회관
서해랑길은 사진에서 왼쪽 마을길로 가야한다. 학동마을 회관 앞에서 서해랑길 표지를 잘 살피길 바란다.
서해랑길 5코스 시점에서 8.4km 이정목
서해랑길 5코스 시점 9.7km 이정목
명량대첩기념공원 산책로 안내판 지점에서 90도 왼쪽으로 꺽어 접어든다.
울돌목 물길이 보이고
저기 보이는 곳이 진도이다.
잘 정비된 계단을 따라서 걷는다.
울돌목이다. 정유재란 때 성웅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함선으로 일본 왜선 133척을 격파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이 있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갈수록 물길이 거세지고
해안바위
해안 바위
이곳은 영화 "명량"에서 일본수군이 대장선을 폭파하기 위해 폭약선을 보내는 위급상황을 알리려 민조들이 옷을 벗어 소리치며 흔드는 장면이 되는 바위이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뛰어난 전력과 함께 인근의 백성들이 군선을 수리하고 수군으로 출전하는 등 협심으로 이루어낸 통쾌한 승리다.
옷을 벗어
일본수군이 대장선을 폭파하기 위해 폭약선을 보내는
위급사항을 알리려 소리치며 흔드는 장면을 그 날의 심정으로 재현 해 본다.
진도대교
◎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이다.
명량해전 직전 당시 극심했던 당파간 다툼으로 희생돼 파직된 후 감옥에 갇혀 있다 한 달여 만에 특사로 풀려나 도원수 밑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됐다. 하지만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함 12척에 한 척을 추가해 겨우 13척을 이끌고 9월 16일 명량해전 울돌목(해남과 진도 사이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 해전에 나섰다.
◎ 명량해전 난중 일기(1597년 9월 15일~ 16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1597년 9월
15일.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주천부 一夫當逕 足懼千夫)' 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길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하였다.
1597년 9월
16일 :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 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삼심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꽤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의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대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은 배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의 무리가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이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라고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로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게 하고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세우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위에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이르렀다.
나는 배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것이냐? 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척에 지령하니,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거나 혹 긴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반들거린 돌)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외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 보며 말하기를, "무늬 좋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사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며서 "이자가 마다사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대어 적선 세른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이였다.
* 당사도 :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
◎ 울돌목의 의병 항쟁
정유년에 왜적이 침공하니 호남의 뭇 백성이 앞을 다투어 일어나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해남 오극신과 그의 아들 오계적 부자도 그 호남 의병의 한 분으로 여러 싸움에서 늘 큰 공을 세웠는데 명량해전에서 외로운 군세로 더불어 돌과 창으로 닥치는대로 왜적을 무찌르다가 부자가 함께 한날 한자리에서 전사하니 충무공이 탄식하여 "나의 오른팔이 잃었다"고 통곡하였다.
쇠사슬 감기 틀
옛 부터 전하기를 해남과 진도 해안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일본전선을 유인하여 급한 물살을 이용 쇠사슬을 당겨 모조리 뒤집혀 죽게하고 빠져나온 전선은 제2진에 있는 우리 수군에 의해 섬멸시켰다 한다. 바닷가 바위에 박혀 있는 큰 쇠고리가 발견되어 더욱 사실로 전해짐. 이 틀은 당시 널리 사용된 기술을 상상하여 만들어진 것임.
울돌목의 의병항쟁
명량대첩은 해남 진도 등 해안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 항쟁의 승리였다. 부자형제와 이웃들이 함께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으니 마하수* 일가 5부자의 혈전이 그 한 예이다.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그들은 적이 패퇴할 때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 마하수 : 1564년(명종 19) 무과에 합격하여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도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투옥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전라도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렀을 때 네 아들과 향선(鄕船) 10여 척을 거느리고 이순신을 배후에서 도왔다.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 때에는 왜선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된 이순신을 보자,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때가 죽을 때이다.”라고 마성룡(馬成龍)·마위룡(馬爲龍)·마이룡(馬而龍)·마화룡(馬化龍) 등 네 아들과 함께 왜적선에 돌진하였으나, 적의 총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경기도 충현사(忠顯祠)에 배향되었다.
서해랑길 5코스는 해남 우수영 관광지 명량대첩 기년공원을 통과한다.
해남우수영관광지 정문으로 향하는 서해랑길 표지
서해랑길 표지기를 지나서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
원균이 이끈 칠천량 패전 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아홉 척 뿐이였고, 엄청난 왜군 함대는 전라도 해역에 쳐들어 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전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했던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충량, 김세호 등과 함께 전쟁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였다.
울돌목 스카이워크
울돌목 스카이워크로 가는 표지
서해랑길은 울돌목 스카이워크로 가지 않는다. 혹여 올돌목 스카이워크를 구경할 사람은 다시 돌와와 해남우수영관광지 정문으로 향해야 한다. 참고하길 바란다.
명량대첩 기념관에서 잠시 서해랑길은 멈추고 우수영관광지에서 명량대첩과 관련한 여러 조형물과 의미를 살펴본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이 말은 계사년(1593) 7월 16일 이순신이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지평 현덕승에게 올리는 답서에 나오는 글귀라고 한다.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의 출처가 국보 76호인 난중일기(亂中日記)라고 말하고 있지만 난중일기에는 그 말이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 말은 이충무공 전서의 끝 부분 부록 서한문(書翰文)편에 있는데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편지 답장을 쓰는 내용 중에 언급된 것이다. 이 편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7월16일자이며, 김천일 의병장과 호남의 제장졸(諸將卒)들이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모두 순절했던 6월29일을 약 보름 지난 시기이다.
명량대첩탑
해남 출신 임진 정유 병자란 호국공신 충혼비
회령포(지금 장흥 회진)의 결의
명량해전이 눈앞에닥쳤을 때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관내장수들과 더불어 최후의 결전을 맹세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어찌 한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이제 모두 충의에 죽죽어 나라지킨 영광을 얻자" 하여 비장한 결의를 다진 수군장들은 격전이 기다리는 우수영바다를 향해 진군했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순신 장군의 연전 연승
거북선을 만들고 남해안의 물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호남 어부 출신 제장졸 때문에 이순신이 해전에서 연전 연승을 할 수 있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오늘날 여수 땅인 전라좌수영에 부임해온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국가 위급을 고려하여 관할구역 밖인 경상도 해전에 출전했습니다. 그리하여 5월7일 옥포 해전을 승리하였고, 6월2일 당포*해전을 승리하였으며, 6월 5일 당항포 해전, 7월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소위 “학익진(鶴翼陣)의 전법”으로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이며, 9월1일 부산포 해전을 이기는 등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당포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 임진왜란 해전
1592년
제1차 출전 : 5월 7일 옥포해전 : 왜선 40여 척 섬멸, 5월 6일 적진포해전 : 왜선 13척 섬멸
제2차 출전 : 5월 29일 사천해전 : 왜선 12척 섬멸,
6월 2일 당포해전 : 왜선 21척 섬멸,
6월 5일 당항포해전 : 왜선 31척 섬멸,
6월 7일 율포해전 : 왜선 41척 격침
제3차 출전 : 7월 8일 한산대첩 : 학익진(鶴翼陣) /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움,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 적선 42척을 분파
제4차 출전 : 9월 1일 부산포(釜山浦)해전 : 적선 100여 척을 격파
1593년
7월 14일 :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8월 15일 :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1594년
3월 4일 : 2번째 당항포해전: 적선 8척을 분파
9월 29일 :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 : 적선 2척을 격파
10월 1일 : 영등포해전 :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
정유재란 해전
1597년
2월 26일 :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 : 권율의 모함으로 투옥됨
4월 1일 :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
7월 16일 :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칠천량 (漆川梁) 해전 참패
8월 3일 :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8월 24일 :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옴
8월 29일 :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 :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김 :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
9월 16일 : 명량대첩 : 조선 수군 함대 13척과 왜선 함대 330대와 싸워 모두 격침
10월 14일 :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
1598년
2월 18일 :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7월 16일 :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
7월 18일 : 절이도 해전 대비 완도 금당도에서 조.명 수군 경야
7월 19일 : 절이도(지금의 거금도) 해전(조선수군만 참전 왜선 100척 격침, 왜군 16,000천여명 수장)
- 절이도 해전은 난중일기나 이순신전서에 언급되지 않음, 명나라 진린은 황제의 병력이 신하국 병력과 같이 싸울 수 없다고 참전하지 않고 관망만 함. 이 사실이 알려져 천병(황제의 군사)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 절이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지략에 감복한 명 장수 진린은 이후 조선수군을 동급으로 생각하고 적극 참전함
8월 19일(일본력 8. 18) : 왜군은 일제히 철군
11월 18일 : 노량 해전 : 적선 200척 격침 적병 500명 수급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 전사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남
이순신 안장
1598년 12월 11일 : 이순신 시신 마지막 진영 고금도에서 아산에 도착
1599년 2월 11일 :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
1614년(광해군 6) :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
해남 우수영관광지 정문을 벗어나서
진도 대교를 향해 간다.
저기 도로 끝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진도대교로 간다.
진도대교
진도대교 앞에서
울돌목의 거친 회오리 물살을 바라보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저 물살을 이용하였을 것을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본다.
진도대교를 지나서
진도쪽에서도 회오리 물살이 일어 나고
지금은 울돌목 급물살을 이용하여 화물선이 오고가고 있다.
진도대교를 지나 서해랑길 5코스를 마무리 한다.
오늘 서해랑길 해남 5코스를 걸었다. 오늘로서 해남을 다 걸었고 다음은 진도 구간이다. 5코스 마지막 우수영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전적지를 둘러 보면서 위대한 지도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를 새삼 생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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