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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2.03.23. 전남 장성 백암산 고불 총림 백양사 탐방

by 하여간하여간 2024. 4. 3.

◎ 전남 장성 백암산 백양사는 늘 찾는 곳이다. 가깝기도 하지만 정신이 혼미할 때 고즈넉한 선사를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이 정리된다. 단풍철에는 백양사 애기단풍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족들과 함께 하면 더욱 아름다운 추억의 길이기도 하다. 백양사 고불매는 호남 5대 매화로 꼭 이맘 때 찾는 곳이다. 쌍계루의 품격과 아름다움은 사진 작가들에게 인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본사 고불총림의 백양사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

 

◎ 2022년 3월 백양사를 찾았던 추억과 최근에 들렸던 추억들을 담고 백양사 홈피에 있는 자료들을 간추려 여기 백양사를 소개한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장성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 탐방

백양사(白羊寺)는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고찰로 호남불교의 요람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한곳인 백양사는 백두대간이 남으로 치달려와 남원, 순창 일대를 거쳐 장성 지역으로 뻗어 내려온 호남산맥의 백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 일주문


백양사가 처음 창건될 때 명칭인 백암사는 '암석이 모두 흰색이라 백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종토사 혹은 정토선원으로 변경되었는데, 사찰의 성격이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한 선종사찰로 변경되면서 그 명칭 또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기록들은 대부분 정토사로 표기되었으나 조선 시대의 기록은 백암사와 정토사가 혼재하여 기록되어 있으며, 백양사란 이름은 이와 관련된 설화의 주인공인 환양선사 다음의 주지인 소요대사의 비명(碑銘)에 백양사라는 명칭이 있어 이 시기부터 백양사라 불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쌍계루

특히 각진국사의 중창으로 백양사는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각진국사의 속가인 고성 이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또 각진국사의 뒤를 이은 청수스님 또한 고성 이씨로, 고려 말 백양사는 고성 이씨의 원찰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청수스님 때 보수한 쌍계루의 기를 쓴 사람이 이색과 이색의 스승인 청수스님의 맏형인 행촌 이암이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현재의 백양사의 모습은 만암선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제시대 본말사제로 변경된 후 1917년 제2대 주지가 된 만암선사는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 사천왕문 등을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장성 백암산 백양사 가람배치도

 

 

◎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 486호)

 

 

한국 4대 매화이자 ‘호남 5매(梅)’로 불리는 장성 백양사 고불매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484호), 화엄사 길상전 앞 백매(485호), 선암사 선암매(488호)와 더불어 국내에 4그루 밖에 없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 중 하나이며, 홍매화로는 유일하다. 전남대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 계당매 등과 더불어 호남 5매로도 통한다. 백양사 고불매는 단 한 그루에 불과하지만 향기가 은은하고 매혹적이다. 

 

 

‘고불매’라는 명칭은 1947년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고불총림’이 결성되면서 비롯됐다.
왜색 불교 잔상이 선명하던 1947년 백양사는 부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했다. 고불은 ‘부처 원래의 모습’, 고불총림은 옛 큰스님들이 모인 도량을 뜻한다.

 

 

백양사 고불매는 350년이 넘는 동안 매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아름다운 담홍색 꽃과 은은한 향기를 피우고 있는 홍매이며, 2007년 10월 8일 부터 국가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북쪽 100m정도 떨어진 옛날 백양사 대웅전 앞뜰에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 그러다가 1863년 절을 옮겨 지을 때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을 이곳에 옮겨 심었는데 지금은 죽고 홍매만 남아 있다.

 

 

1947년 만암대종사가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걸성하면서 이 나무가 고불의 기품을 닮았다 하여 고불매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무 높이는 5.3m, 줄기 둘레는 1.5m,  수관 폭은 동서로 6.3m, 남북으로 5.7m이며, 고목의 품위와 기품을 지켜며 백양사를 대표하는 나무이기에 병해충을 방제하고, 상처 난 줄기에 외과수술도 하고, 줄기가 찢어지지 않도록 지주를 받쳐주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매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남 5매로 고불매를 비롯해 선암사 무우전매, 전남대학교 대명매, 담양군 지실마을 계당매, 소록도 수양매를 꼽는다.

 

 

 

◎ 백양사 대웅전 白羊寺 大雄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백양사 대웅전은 1917년 만암 대종사가 백양사를 5창할 당시 건립되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대종사가 여섯번째로 다시 지었다.

 

 

백양사 대웅전은 본존불인 석모니불을 중앙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다양한 예불과 의식이 치러지는 사찰의 중심이 되는 법당이다. 

 

뒤쪽 백학봉의 드센 기운을 막기 위해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높게 지었으며, 높직한 장대식으로 다름은 3단의 기단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둥근 기둥을 세웠다.

내부천장은 나무 재료가 보이지 않게 우물 정자 모양이고 바닥 역시 우물마루이다. 화려한 단청은 조선후기 불화의 맥을 잇는 보응 스님의 제자 일섭 스님의 마지막 작품으로 휘귀성이 인정되어 눈길을 많이 끈다. 특히, 천장의 봉황, 용 등의 조각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드물고, 엄숙하고 위엄 있는 천상 세계를 실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건물은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전통 건축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이며,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집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조성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이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퇴칸에는 용 모양의 퇴량을 걸쳤다. 지붕 네 모서리에는 활주가 설치되었다. 한편 창호는 전면에 4분합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 어칸에는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와 문수·보현 삼존이 봉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대웅전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건립되어, 조선후기 다포 양식이 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첨차살미의 최상단은 예리한 삼각형 모양에서 익공계로 변화하였으며, 쇠서도 매우 섬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후기 사찰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경향으로서, 전면 기둥 간격이 모두 같은 것은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백양사 극락보전 白羊寺 極樂寶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극락보전은 대웅전 남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1574년(선조 7) 한응(또는 환응)스님이 조성하였다고 전하지만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極樂殿佛糧禊序」에는 문정황후가 향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6세기 후반에 처음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그 조성에 왕실의 지원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만암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재건되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며, 좌향은 동향이다.

낮은 석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안쪽이 3출목, 바깥쪽이 2출목인 다포양식이며, 架構는 2고주 7량이다. 천정은 우물천정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문은 정면 가운데 칸에 빗살 3분합문을, 양 옆칸에 ‘井’자살 3분합문을 달았다. 맞배지붕이면서도 다포집으로 가구를 한 절충식 건물이다.

 

일제강점기(1929년) 극락보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008217)

 

극락보전 내에는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현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1775년 작 아미타회상도는 극락보전 후불화였다.
현재는 1995년에 새롭게 조성된 후불화가 전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長城 白羊寺 極樂寶殿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89호)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 주불로서, 높이 208㎝에 달하는 대형 불상이다.

2005년 발견된 복장물에 따르면 1741년(영조 17) 명부전 시왕상 중수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불상 대좌에서 1607년 11월 조각승 玄眞스님에 의해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임진왜란 직후에 제작된 것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장대한 규모와 긴 허리,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신체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안정된 자태 등에서 현진스님 작품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 불상은 제작시기와 대상, 발원 내용 등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 불상의 변화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불상은 2020년 4월 29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승격 지정이 예고되었다.

 

장성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회상도 長城 白羊寺 極樂殿 阿彌陀會上圖(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장성 백암산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회상도

 

백양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후불화로서, 1775년에 제작된 대형 아미타불화이다.

이 그림은 원래 극락보전 목조아미타불좌상 후불벽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994년 도난당했고, 2006년에 회수한 이래 현재와 같이 박물관에 봉안되었다.

 

그림은 폭 23.8-58.4㎝의 비단 5폭을 이어 가로 234.2㎝, 세로 338.7㎝의 화면을 이루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전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화면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아미타여래좌상과 4보살, 나한, 팔부중 2구가 배치되었고, 하단에는 사천왕과 4보살이 있다. 이 불화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지만, 각 인물들이 바라보는 곳이 모두 다르고 서로 대화하듯 자유롭게 그려져 있다. 색채는 대부분 다홍빛 적색과 연녹색을 위주로 하여 18세기 후반 불화의 색감과 수화승 嗇旻스님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만 여러 부분에서 후대 덧칠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 하단의 화기는 거의 손상 없이 완전하다. 화기에는 “乾隆四十年……金魚秩白月大宗師嗇旻 祐隱 片手戒憲 淨訔 宥閑 斯定”이라 기록되어 있어, 1775년이라는 제작 연대와 嗇旻스님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미타회상도 腹藏囊에 들어 있던 발원문에는 ‘煥月堂 旻肅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외조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단독으로 시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호남불화’의 대표자인 義謙스님이 이룬 18세기 전반의 화풍을 계승한 色敏스님의 대표작이자 만년작으로서, 의겸스님의 화풍이 엿보이면서도 간략화된 구도, 역삼각형 얼굴형, 적·녹색 위주의 세 가지 색채 흐름을 보여주는 점 등에서 색민스님의 화풍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색민스님의 만년기 작품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자, 의겸스님의 맥을 가장 잘 계승한 18세기 호남불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백양사 사천왕문 白羊寺 四天王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사천왕문

 

백양사 사천왕문은 사찰 중심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이 건물 역시 대웅전과 함께 1917년 만암스님의 중창 때 건립된 것이다. 건물은 동향으로 건립되어 있어 남향인 대웅전과는 좌향이 완전히 다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풍판을 지닌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얹고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2익공을 두고 외1출목의 행공첨차를 지녔다. 이는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병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창방 위 구조는 무고주 5량이다. 중앙 어칸은 사찰로 통하는 문으로 사용하며, 좌·우 협칸에는 사천왕을 각 2구씩 봉안하였다.

사천왕문 내부 사천왕상(우)

 

사천왕문 내부 사천왕상(좌)

 

쌍계루 雙溪樓

 

쌍계루

 

쌍계루는 1350년 각진국사가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쌍계루는 고려시대 1350년에 각진국사가 세웠으나 1370년의 큰 비로 무너져 1377년에 청수스님이 다시 세우면서 목은 이색과 삼봉 정도전이 글을 쓰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었다.

 

일제강점기 쌍계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019008)

 

쌍계루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압 박순, 노사 기정진, 월성 최익현, 송사 기우만, 서웅스님, 산암 변시연, 약천 조순 등의 현판 180여 점이 있으며, 이는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스님과 선비들이 소통하고 굘했던 화합의 공간이였음을 보여준다.

 

 

쌍계루는 여러 번 다시 짓기를 거친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백양사가 피해를 입었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1985년에 복원되었으나 주춧돌이 땅에 묻혀있고 처마가 썩어 2009년에 해체하고 다시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운문암 계곡물

 

팔층석탑(불사리탑) 八層石塔(佛舍利塔)

 

이 탑은 대웅전 뒤뜰에 있으며, 1924년에 건립되었다.

 

불사리탑 및 팔정도 석주 전경

 

불사리탑

 

이 탑은 八正道를 상징하기 위하여 8층으로 조성하였으며, 탑 내에는 근대 불교계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龍城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부는 3중이며, 최상층 기단은 원기둥 4개를 세워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비롯한 별도의 조각이 없으며,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얕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보주형이다. 이 탑의 뒤편에는 만암스님이 비문을 쓴 사리탑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탑 정면에는 팔정도의 각 단어가 새겨진 석주가 4주씩 나란히 세워져 있다.

 

팔정도 석주

 

팔정도 석주

 

불사리탑비

 

 

 

 

승탑원 僧塔院

 

백양사 성보박물관과 마주보는 계곡 동편 언덕에 입지한다.

승탑원과 성보박물관(항공사진)

 

승탑원은 원래 쌍계루와 마주보는 곳에 있었지만(구 부도전) 2010년 성보박물관 조성 및 주변 정비 시 현재 위치에 재조성하였다. 현재 승탑원에는 曼菴堂塔을 비롯하여 無價堂塔, 慕雲堂塔, 碧虛堂塔, 影月堂塔, 棲雲堂靈骨塔, 지백당탑 등이 있다. 승탑은 모두 소요대사탑(1650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를 거쳐가신 스님들의 사리탑들이다. 한편 서산대사 제자로서 백양사 21세 주지를 지낸 벽송대사탑을 비롯한 몇몇 승탑은 도난당했다.

 

승탑원(항공사진)

 

승탑원 전경(북에서 남)

 

승탑 가운데 조선후기-1950년대 이전에 건립된 오랜 승탑들은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범종 형태를 띤 소요대사탑을 그대로 모방한 승탑군으로서, 만암당탑, 영월당탑, 모운당탑 등이 이에 속한다. 다른 일군은 방형 옥개석과 구형 탑신석을 갖춘 형식으로서, 당호가 없는 승탑 가운데 몇 예가 이에 속한다. 승탑원 내에는 승탑과 함께 건립된 많은 탑비들과 함께, ‘白巖山白羊寺紀蹟碑銘’ 등의 사적비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면암당탑

 

무가당탑

 

모운당탑

 

벽허당탑

 

영월당탑

 

서운당영골탑

 

지백당탑

 

백암사기적비

 

◎ 성보박물관 聖寶博物館

 

백양사 성보박물관은 사역 남쪽 계곡변에 건립되어 있다.

박물관 내에는 소요대사탑과 백양사 극락전아미타회상도를 비롯하여, ‘장성 백양사 각진국사 복구 진영’ 등의 지정문화재와 조각, 회화, 공예, 전적류 등 백양사 역사를 간직한 귀중한 聖寶들이 보관되어 있다.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 長城 白羊寺 逍遙大師塔 (보물 제1346호)

 

소요대사탑은 2010년에 성보박물관 안으로 이전되었다. 이 승탑은 범종형으로서 세부 표현에 있어서도 실제 범종 형태와 유사하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기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은 현재 평면 사각형이며, 장대석 4매로 구성되었다. 기단석은 평면 팔각형이며, 각 면에 거북이를 비롯하여 게, 두꺼비 등 다양한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동물상 주변으로 화문과 운문을 새겼다. 그 위에는 단판 8엽의 복련문을 조각하였으며, 연잎 사이에는 간엽이 배치되어 있다. 상부에는 탑신석을 받치도록 평면 원형인 1단 호형 괴임을 마련하였다.

 

소요대사탑 당호

 

탑신석은 하부에 상·하로 2조의 반원형 돋을대를 가로로 돌려 구획한 후 그 안에 물결무늬를 새겨 범종의 하대를 표현하였다. 물결문은 3-4조의 선을 반동심원처럼 반복하여 새겼다. 그리고 물결무늬 사이에 거북이와 두꺼비 등 다양한 동물상을 양각하였다.

 

탑신석하대조각

 

탑신석하대조각

탑신석하대조각

 

탑신석하대조각

 

탑신석 앞쪽에는 位牌形 액을 구획하여 그 안에 세로로 “逍遙堂”이라고 당호를 음각하였다. 명문의 자경은 6㎝이며, 액 아래에는 연화문 받침대가 있고, 위에는 하엽이 있다. 탑신석에는 세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한 마리는 앞발이 액을 향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액을 향하여 여의주를 앞발로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이 용 뒤쪽으로 여의주를 쥐고 있는 용이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용은 용신의 비늘, 발가락 모양, 수염 등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탑신석 상부에는 모서리 4곳에 연곽을 마련하고 그 안에 연뢰 9개를 돌출시켜 표현하였다. 또한 연곽과 연뢰 사이에는 화문을 장식하여 실제 범종의 연뢰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연곽 위로는 1조의 돋을대를 돌려 구획하여 상대를 표현하였으며, 그 위에 원권문을 조각하였다. 탑신석 상부에는 단판 16엽의 복련문을 조각하였는데, 이 부분은 범종의 천판에 해당하는 곳이다. 상륜부는 탑신석과 같은 돌로 조성하였는데, 정상부에는 4마리의 龍頭가 보주를 향하고 있으며 용두 사이에 운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의 주인공은 위패형 액에 음각된 당호를 통해 소요대사 태능(1562-1649)스님임을 알 수 있다. 소요대사는 백양사에서 출가한 고승으로서 1649년 입적 후 구례 연곡사, 철원 심원사, 전주 금산사, 담양 용추사 등에 분사리되어 승탑이 건립되었다. 승탑은 대사 입적 후인 16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 백양사 각진국사 복구 진영 長城 白羊寺 覺眞國師 復丘 眞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0호)

백양사 각진국사 복구 진영은 1825년에 제작된 것이다.

 

장성 백양사 각진국사 복구 진영

 

覺眞은 覺儼(1270-1355)의 諡號이며, 휘는 復丘, 자호는 無言叟이다. 화기에 따르면 이 그림은 1825년 선운사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백암산 정토사로 이안된 것이라고 한다.

 

스님은 의자 위에 걸터앉아 우측을 향하고 있으며, 발밑에는 발을 받치는 상이 있고, 의자 밑에는 깔개가 놓여 있다. 왼손에는 용두에 흰 털이 달린 拂子를 들었고, 오른손은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스님은 청색의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쳤는데, 가사 단에는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한편 의자 테두리에는 금장이 있다. 오른쪽 상단 스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암반과 소나무 그림이 있고, 왼쪽 상단에는 ‘覺眞國師’라는 제호가 있다. 이 그림의 화승은 壯愈스님이다. 채색은 군데군데 탈락이 진행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장유스님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진영은 화기를 통해 제작시기와 작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 백양사 둘러보기

일주문 - 성보 박물관 - 부도전 - 쌍계루 - 사천왕문 - 범종각 - 해운각 - 우회루 - 고불매 - 극락전 - 조사전, 칠성각 - 대웅전 - 탑전 - 설선당 - 염화실 - 고불선원 - 청량원 - 청운당 - 중화당 - 향적전 - 영각당 - 화엄전 -노석선방 - 교육관 - 안선국 - 다향각 

 

운문암 계곡물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장 - 이 뭣고

 

대가람백양사

 

◎ 백양사 사천왕문

 

남방 증장천왕(여의주)과 서방 광목천왕(보탑)

 

 증장천왕은 용의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 

 광목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 주는 천왕

 

북방 다문천왕(비파)과 동방 지국천왕(장도)

 

 다문천왕은 비파를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 

 지국천왕은 장도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 

 

◎ 백양사 범종각

 

 

◎ 만세루(우화루)

 

 

◎ 설선당

 

설선당

 

◎ 명부전

 

 

◎ 진영각 과 칠성전

 

 

◎ 우화루

 

대웅전 옆편과 백학봉

 

대웅전 옆면

 

 

 

대웅전 뒤면

 

 

 

◎고불선원

 

 

◎ 향적전

 

 

◎ 호남불교전문강원

 

 

◎ 해운각

 

 

 

◎ 백양사 이모저모 풍광

 

 

◎ 산내암자

 

◇ 운문암 雲門庵

 

운문암은 사자봉과 기린봉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 최상부에 있다.

백양사 북쪽 계곡을 따라 약 2.3㎞ 진입하면 암자에 이르며, 백양사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다.

 

 

운문암은 1350년 각진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창건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조선전기 문헌에서도 그 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656년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 「東國輿地志」에는 당시 운문암이 “彌陀寺”로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7세기 오도일, 월저도안스님을 비롯한 많은 문인과 스님들이 운문암에 머무르거나 방문하고 남긴 글이 다수 전하고 있으며, 19세기 전반에는 「禪文手鏡」, 「作法龜鑑」 등의 佛書가 운문암에서 간행되었다. 이로 보아 운문암은 조선후기부터 백양사 암자 중에서도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만암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이 이곳을 수도처로 삼으면서 지금도 수도도량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한편 운문암은 일제강점기 만암스님이 한 차례 중창하였지만,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이어 1985년 서옹스님이 현재의 규모로 중창하였다.

 

 

 승탑

 

현재 운문암 요사채 뒤편 경사지에는 승탑 1기가 봉안되어 있다.

 

 

이 승탑은 원래 운문암에 있던 것이 아니라, 암자 재건 당시 일수스님이 개울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놓았다고 한다. 승탑은 석종형이며, 상륜부와 탑신석이 별석이며 하부에 연판문이 음각된 지대석과 연화문 기단석 1매가 함께 남아 있다. 전체 높이는 138㎝이다. 지대석은 99.5×90㎝ 크기이며, 중앙에 연판문을 움푹하게 새겨 받침으로 삼았다. 기단석은 평면 원형이며, 상면 지름 61.3㎝, 높이 23.5㎝이다. 연판문은 별다른 장식이 생략된 단판이며, 간엽도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탑신석은 높이 62.5㎝, 최대 지름 61.2㎝, 상면 지름 37㎝, 하면 지름 45.3㎝이다.

탑신석 상면에는 지름 21㎝, 깊이 16㎝의 원형 사리공을 설치하였다. 이 위에 뚜껑처럼 얹혀 있는 상륜부 아래에는 지름 10㎝, 높이 1㎝ 가량의 원형 돌기를 두어 사리공 위에 결구되도록 하였다. 상륜부는 높이 27㎝, 최대 지름 26.3㎝이다. 하부는 반구형이며 그 상부에 석탑의 수련과 형태가 비슷한 장식이 있으나 일부 파손되었다. 승탑 제작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되며, 당호가 없어 승탑 주인공은 알 수 없다.

 

 약사암 藥師庵

 

약사암은 물외암, 영천암과 함께 백학봉 아래에 입지하고 있다.

 

이 암자는 세 암자 중 중앙에 입지하며, 남서쪽 전방으로는 백양사 계곡이 한 눈에 조망된다. 문헌상 약사암은 물외암과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는데, 특히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 󰡔東國輿地志󰡕 ‘약사암’ 항목에 그 북쪽에 물외암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약사암의 사명은 주로 조선후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찰의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며, 주로 백암산의 명승 중 가장 대표적인 영천굴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현 약사암은 2013년 법당을 신축하여 쇄신하였다.

 

 

 

암자는 백학봉 남서쪽 아래에 입지하며, 물외암지와 마찬가지로 암굴을 배후에 두고 있다. 암굴 너비는 15.16m, 깊이 8.92m이며 암굴 내에 석간수가 흐른다. 건물은 암굴 앞의 협소한 평탄지 내에 터를 다져 지었으며, 건물 앞에는 목조 데크를 깔아 마당으로 삼았다. 이 공간 아래에는 암반을 벽면으로 삼아 조성한 3층 규모의 수행처가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주변 환경으로 보아 원래 약사암은 암굴과 현재 법당이 건립된 평탄지 주변에 국한되는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자 주변은 2013년 건물 신축 과정에서 정비하여 원래 지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도 거의 없다.

 

 

다만 영천굴로 향하는 등산로상에서 고려-조선후기 유물이 소량 확인되었다. 유물 양상은 물외암지의 것과 거의 유사하여, 영천-약사-물외 세 암자가 거의 동시기에 운영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영천암 靈泉庵

 

영천암은 물외암, 약사암과 함께 백학봉을 배경으로 건립된 암자이다.

이곳은 세 암자 중 가장 동쪽에 입지하며, 가장 깊고 큰 암굴을 지니고 있어 예부터 ‘靈泉窟’이라 불렸다.

 

‘靈泉窟’은 ‘淨土寺’로 불렸던 백양사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유일한 암자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토사 북쪽 바위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샘이 있다. 굴 북쪽 작은 틈에서 솟아나오는데, 비가 오나 가무나 한결같다.’고 하였다. 즉 암자는 굴 내에서 솟아나는 샘 앞쪽에 지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 약사암과 물외암이 함께 존립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한편 ‘靈泉’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동굴 옆 샘에서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어떤 손님이 와서 더 많이 나오라고 작대기로 쑤셨더니 그 후로는 쌀이 안나왔다.’고 한다. 또한 영천굴 안내판에는 홍락인과 관련된 명칭의 유래가 적혀 있다. 洪樂仁은 1767-1768년(영조 43-44년) 전라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서, 호남 지역에 대 유행병이 돌자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이 ‘靈地를 찾아 크게 기도를 올리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 백양사 바위에 ‘國際基’라 새기고 이 바위에서 솟는 물을 제단에 올렸으며, 이 물을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에 전라감사 홍락인은 報恩의 의미로 이곳에 암자를 짓고 ‘靈泉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 용천이 오래 전부터 ‘병을 낫게 하는 영험한 샘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천굴’은 조선전기에도 알려져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신령스러운 샘으로 이름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영천암 혹은 영천굴은 백암산을 유람하는 여러 문인들이 반드시 한번 쯤 거처간 곳으로서, 명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천암이 현재와 같이 정비된 것은 2013년이며, 목제 데크와 계단을 설치하여 2개 층으로 나누고 윗층은 기도처, 아래층은 약수터로 정비하였다. 암굴 깊이는 16.9m, 너비는 8.22m이다. 암굴 주변은 계단식으로 정비되어 있어 옛 유구의 흔적이나 유물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약사암에서 이곳으로 이르는 등산로상에 소량의 유물이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암과 같이 암굴을 배후에 둔 작은 암자 건물을 두었거나 암굴 앞에 지붕을 설치하는 방식 등으로 시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암은 암굴과 샘을 배경으로 하여 작은 규모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전기 문헌에서부터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선 고려후기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거나 암자로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진암 天眞庵

 

 

천진암은 백양사 북동쪽 계곡 중턱에 있다.

이곳은 백학봉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뻗은 능선 아랫부분에 해당하며, 사역 동쪽으로는 남서쪽 백양사 계곡으로 합류하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천진암은 1644년(인조 22)에 白谷禪師가 건립한 암자로 전하지만 명확한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雪潭 自優(1769-1830)스님이 쓴 「夢行錄」에 천진암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고, 宋秉璿(1836-1905)의 「白巖山記」 중에는 당시 천진암 주지가 印正스님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천진암은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8-19세기에 백암산 내 주요 암자로서 입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찰은 백양사 산내암자 중 유일한 비구니스님 도량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지는 남동향(S-30°-E)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79×53m 가량이다. 현재 암자에는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마당 한 켠에 탱자나무 보호수(수령 500년, 수고 5m, 둘레 0.7m)가 있다. 사찰 건물은 대부분 신축되었고, 마당과 석축까지 모두 정비되어 있다. 한편 석축 전방의 공터에서는 정지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유물은 이곳과 그 주변 화단, 계곡변을 중심으로 다량 산포되어 있다. 확인된 유물은 집선문, 수파문 와편과 백자편 등이며, 모두 조선후기 천진암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청류암 淸流庵

 

 

청류암은 백암산 내 다른 암자들과 함께 각진국사가 1350년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후기 청수선사, 소요대사, 羊岳 啟璇스님, 만암스님 등을 비롯한 역대 백양사 고승대덕들이 주석하였던 곳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또한 사찰은 華曇 法璘(1848-1902)스님이 주석하고 입적하신 곳으로서, 스님의 문집인 「聾默集」는 화담스님이 청류암에 머무르셨던 행장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화담스님 주석 시에는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안심사에 있는 삼세불회도(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6호)와 담양 용화사 묵담유물관 소장 신중도 등의 그림들이 관음전과 별실에 봉안되어 있었다. 錦溟 寶鼎(1861-1930)스님의 글 중에는 백양산 정토사와 청류암을 방문하고 작성한 「白羊山淨土寺靑流洞記」가 전한다. 이와 같이 청류암은 조선후기 많은 고승들이 수행하셨던 선원도량이었으며, 지금도 그 法脈을 잇고 있다.

 

 

암자는 서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르는 계곡의 합류지점에 입지하며, 좌향은 동향이다.

평탄지 전방은 석축을 쌓아 정비하였다. 평탄지 동쪽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남쪽에는 선당이 있다. 6·25 전쟁 이전에는 현재보다 많은 전각이 있었다고 하며,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청류암 신중도」 에는 극락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에는 관음전 이외에도 극락전, 별실 등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선당 남쪽은 계곡과 맞닿아 있는데, 이곳에는 작은 샘이 있다.

이 샘은 갑오농민운동 때 전봉준이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며 물을 마신 후 부지깽이로 ‘南泉甘露’라 썼다고 하여 ‘장군샘’이라고도 한다. 현재 관음전을 제외한 사찰 건물들은 새로 정비하여 지은 것이며, 평탄지도 정지되어 있다. 주변에서는 수파문, 무문 와편과 백자편 등 조선후기 유물이 주로 확인되고 있다. 사찰 마당에는 77×63×30㎝ 크기의 돌확이 있다. 돌확 상면 중앙에는 지름 28.5㎝, 깊이 24.5㎝인 원형 홈이 파여 있다.

 

  백양사 청류암 관음전 白羊寺 淸流庵 觀音殿(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

 

청류암 관음전은 평탄지 북쪽에 입지한다.

사찰에 전하는 「觀音寺創建記」에 따르면 이 건물은 화담스님의 제자인 錦海 瓘英스님이 스승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창건기에 따르면 화담 스님은 1879년부터 청류암에 토굴을 짓고 면벽좌선을 하였으며, 이에 금해 관영스님이 건물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얹었으며, 지붕은 배흘림 없이 두툼하다. 기둥 머리에는 주두를 얹고 그 위에 2익공과 연화형 첨차를 얹었다. 특히 화반은 선 채로 소로를 받치고 있는 인물상, 사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동자상 등 다양한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전각에는 「觀音寺創建記」를 비롯한 각종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다. 또한 원래 청류암에는 삼불회도, 지장도, 신중도, 산신도, 칠성도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백양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관음전 화반

 

 

 

 청류암 관음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淸流庵 觀音殿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이 불상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불상은 높이 73.7㎝, 무릎 폭 45.6㎝이며, 별도로 조성된 대좌는 상과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고개를 약간 아래쪽으로 숙이고 있으며, 왜소한 상반신에 비해 다리 폭이나 무릎이 높다. 양 손은 별도로 제작해 끼운 형태이다. 육계에는 정상계주가 있고, 머리 중앙에 중간계주가 있다. 착의법은 편삼을 착용한 편단우견식이다.

 

복장공은 상 받침 하부 뒤쪽에 있다.

2017년에 실시한 청류암 관음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물 조사에서는 결원문을 포함하여, 축원방, 후령통, 묘법연화경, 보협진언다라니 등 총 24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특히 결원문을 판독한 결과 “康熙二十七年壬辰(1688)”, “淸流洞岐峯庵”에서 “弥陀之尊像二軀”를 조성하여 1구는 “淸流蘭若”에, 또 한구는 “白蓮精舍”에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결원문에는 대시주 尙明 比丘와 證明 敬淨 비구의 명칭과 함께, 畵員의 이름으로는 수화승 自珪스님과 太淳스님, 眞贊스님 등 조각승 3명을 기록하였다. 자규스님은 17세기 중·후반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각승으로서, 1677년에 조성한 합천 해인사 희랑대 지장보살상이 스님이 수화승으로 불상을 조성한 첫 사례이다. 자규스님은 주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이 불상은 스님이 전라도에서 제작한 불상의 첫 사례이다. 즉 이 불상은 조각승 자규스님이 1688년 제작한 2구의 불상 중 하나로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영남지역의 벽암 각성스님 문중과 백양사 소요 태능스님 문중의 교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향암(홍련암) 西香庵(紅蓮庵)

 

서향암(홍련암)은 백양사 서쪽 골짜기에 있다.

이곳은 가인마을과 청류암 사이의 골짜기 상부이다. 홍련암의 옛 명칭은 ‘西陽庵’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양사 스님의 다비장으로서 1800년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사찰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이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후 혜담스님이 사명을 홍련암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은 가파른 산비탈을 정지하여 마련한 대지 위에 건립되어 있으며, 좌향은 동향이다.

최상부에는 미타보전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서로 마주보는 요사채 2동이 건립되어 있다. 요사채 아래에는 대형 석축이 있다. 한편 미타보전 뒤쪽 산비탈에는 돌탑이 있다. 현재 사찰 주변에서는 관련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전각 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목조아미타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묘련암 妙蓮庵

 

묘련암은 백양사 동쪽 계곡 초입에 입지한다.

이곳은 쌍계루에서 불과 11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며, 구 부도전과 인접해 있다. 암자가 입지한 곳은 백양사 동쪽으로 형성된 계곡 초입에 해당하며,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350m 가량 오르면 천진암에 이른다. 또한 북쪽 백학봉으로부터 뻗어내린 산자락이 암자를 감싸고 있다.

 

 

 

묘련암은 현대에 새롭게 건립된 암자이며, 현재는 ‘白雲堂’이라는 선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암자가 자리잡고 있는 평탄지는 남동향(S-30°-E)이며, 상·하 2단으로 정지되어 있다. 평탄지 규모는 72×35m이다. 현재 건물은 상단 평탄지 동쪽에 치우쳐 조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22×11m이다. 건물 서쪽 공간에는 규모 17×7.56m인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지에는 기단, 초석 흔적이 있으며, 현상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건물지 주변에는 조선후기 유물이 다량 산포되어 있다. 하단 평탄지에는 창고로 쓰이는 가건물 이외에는 건축물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평탄하게 정지되어 있다. 평탄지 아래쪽에는 과거 석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토단 형태만 남아 있다.

 

◎ 청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