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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18.07.15. 전남 지리산 연곡사 탐방

by 하여간하여간 2023. 11. 30.

◎ 지리산연곡사()

연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 교구 화엄사의 말사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내동리 산 54-1)번지 , 지리산의 남쪽, 지리산 피아골 초입에 자리한 사찰이다. 

백제 성왕 22년(543) 인도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가까이에 있는 거찰 화엄사보다 1년 먼저 창건된 절이다. 

절의 이름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법당을 세운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燕 제비 연)(谷 골 곡) 사(寺 절 사)

 

화엄계 사찰이었던 연곡사는 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과 승탑비 및 현각선사탑비 (979년 건립) 등이 남아 있어 선종계 사찰로 성격이 바뀌었다.
 
연곡사에 대한 고려시대 후기 기록으로는 목은 집에 이색이 연곡사 주지인 인우스님에게 서찰과 차를 받으면서 지은 시 정도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전기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곡사가 구례 지리산에 위치하고, 고려시대 학사 왕융이 지은 현각선사비문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 연곡사는 1598년 4월 10일에 왜적이 사찰에 들어와 살육을 자행하고 불을 질러 소실된 것을 조선 인조 5년 (1627)에 소요대사 태능(1562-1649)에 의해 중건하였다. 조선후기(1745년) 연곡사를 율목주재봉산으로 삼아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가 되었다.

 
 
정조 3년(1779) 동파당 정심선사가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현각선사비는 임진왜란 이후 문자의 획이 박락되다가 19세기 후반에 마침내 깨어졌다.
 
 
구한말(1895년) 율목주재봉산이었던 연곡사는 밤나무 남용으로 사세가 기울어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절이 폐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1907년 고광순이 의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다시 불타버렸다.
1924년 박승봉이 연곡사 경내에 심우암을 창건하고 쌍계사 손범성 스님이 운영하다. 한국전쟁당시 피아골 전투로 다시 소실되었다. 
 

1965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겸한 전각을 건립하고,1981년에 종인스님이 대웅전을 헐고 대신 그 자리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적광전을 신축하였다.

 

◎ 가람 배치도

 

 

◎ 일주문

 

 

 

◎ 사천왕문

 

 

 

◎ 대적광전

 

 

◎ 관음전

 

◎ 명부전

 

 

 

◎ 삼성각

 

 

◎ 무설전

 

 

◎ 소요당

 

 

◎ 회연당

 

 

◎ 종각

 

 

 

◎ 삼홍루

 

 

◎ 설선당

 

 

◎ 해우소

 

 

 

◎ 연우당

 

 

 

◎ 연곡사 국보 순례길

 

 

◎ 동승탑(국보제53호)

 

연곡사 동승탑은 주불전인 대적광전에서 북동쪽 10M 내외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국보 제53호로 지정된 동승탑은 전체 높이 3.5M, 지대석 폭 1.75M 내외로 연곡사에 있는 3기의 승탑 중 가장 정교하다.

양식적으로는 팔각원장을 기본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쌓은 일반형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개의 석재로, 하대석은 이단으로 팔각형이며, 하대석 윗 부분은 중대석 받침이다.

 

하대석에는 운룡을, 중대석 받침에는 면마다 형태가 다른 사좌상이 1좌씩 돋을새김 되어있다. 

중대석 받침위면에 3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중대석을 받쳤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면마다 안상속에 무기를 든 팔부신중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여있으며, 중대석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측면에는 홀 연꽃이 앞 뒤로 겹쳐진 모습의 연꽃이 위로 벌어진 채 돋을새김 되어있다. 연꽃은 상하 2열에 16판 씩, 꽃잎 안을 다시 꽃씨로 장식하였다. 

 

윗면의 탑신 받침은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 같이 중간에 둥근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자세가 다른 가릉빈가상이 부조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탑신 받침 위면에는 낮은 3단의 괴임을 두고 그 위에 팔각기둥모양의 탑신석을 받쳤다.

 

 

탑신의 각면에는 문비사천왕상이 낮게 돋을새김 되어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 뿐만 아니라 처마 끝에 막새까지 나타내고 있으며, 지붕아랫면에는 구름문양과 비천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지붕마루끝 측면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두 개의 구멍이 있으며, 그 윗부분에는 잡상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편 채로 서있는 새를 조각하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다른 승탑보다 기단부가 높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치밀하다.
연곡사에 현재 남아 있는 승탑 가운데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통일신라말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 동승탑비(보물제153호)

 

동승탑비는 동승탑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규모는 높이 1.9M, 지대석 1.56M(가로) 1.74M(세로)이다. 

현재 비신은 없고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한돌로 네다리를 사방으로 뻗고 있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린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든 귀부의 정상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는 구름무늬를 고부조로 장식하였으며, 그 윗면 주위로 복판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머리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 놓았다. 
거북의 등문양은 앞쪽으로는 파상곡선으로 이루어진 새 깃 모양의 조익형 무늬이고 뒤쪽으로는 육각의 갑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수는 삼산형으로 고부조의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정상에 화염보주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수 앞면에는 탑액을 가로 32CM, 세로 38CM의 크기로 시설하여 놓았으나 명문은 없다. 귀부는 적갈색이고 이수는 암갈색으로 돌의 재질도 다르며 화재에 의한 피열흔이 확인 된다.

 

 
 

◎ 북승탑(국보제54호)

 

동승탑에서 150미터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놓이 3.6M, 지대석 폭 1.75M 정도이다.

 

이 승탑은 동승탑과 같이 한 장의 석재로 된 네모 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차례로 쌓은 일반형이다.

동승탑을 모방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다고 보여지며, 현각선사 승탑으로 추정된다.
이 북승탑의 하대석도 한 개의 석재로, 아래쪽은 구름문양을 중대석 받침에는 겹꽃 16엽의 연화문을 두른 팔각형 돌을 올려 놓았고 중대석 받침의 여덟 귀퉁이에는 귀꽃무늬를 돌출시켰다.
 

중대석과의 사이에는 3단의 굄단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낮고 잘룩한에 각면의 안상 안에는 무엇인가가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에는 3단의 받침을 설치하여 중대석 굄 3단의 받침을 설치하여 중대석 굄 3단과 대칭을 이루었다.
상대석 옆면에는 홀 연꽃으로 3번 겹쳐진 연꽃잎이 위로 벌려져 있고 꽃잎 안에는 꽃씨 무늬 장식을 하였다.
윗면에는 높은 탑신 받침이 있는데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처러 둥근 마디가 있는 난간을 세우고 그 사이 안상 안에 가릉빈가를 1구씩 조각하였다.  가릉빈가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데 8개면 모두 자세가 다르다.
 

탑신은 팔각이며 각면은 문비2개, 2개씩 사천왕상으로 장식되었다.
넓은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라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 막새를 새겼고 아랫면에는 비천을 조각하였다.
지붕마루 끝 윗부분에는 동부도와 같이 지금은 깨져있으나 잡상 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활짝편 채로 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를 조각한 석재를 쌓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이 북승탑은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동승탑을 모범으로 그 양식을 충실히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중대석의 받침처럼 균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 현각선사탑비(보물제152호)

 

현각선사 탑비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 탁본에 의하면 경종 4년(979)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귀부는 지대석과 한 돌로 네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 엎드린 형상이다. 

동승탑비와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다. 비신 받침에 구멍이 나 있어 배수를 위한 시설로 보인다.

 

조각 수법은 몸체에 비해 큰 머리나 비좌 사면에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있다. 이수 앞면 중심에 현각선사탑비이라는 전액이 음각되어있다. 
문헌에 의하면 학사 왕융이 지었고 주국 장신원이 썼다고 한다. 

 

글씨는  2센치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는 체이며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글체를 나타내고 있다.

 

 

 

◎ 소요대사승탑(보물제154호)

 

연곡사 서북쪽에 위치한 이 승탑은 높이 3.08M, 지대석 너비 0.7M로,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승탑은 평면 팔각원당의 기본형으로 지대석은 팔각으로 잘 다듬었으며, 윗면에는 얕은 턱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팔각이며 상하로 구분된다.

하단 측면은 평면으로 장식이 없다. 상단은 둥글게 말아올라가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상단 윗면에는 중앙에 턱이 있고 그 주위에는 홈이 파여 있다. 이홈은 뒤쪽과도 연결되어 배수시설로 보인다. 

 

중대석은 납작한 팔각구형으로 상하에 홀 연꽃이 대칭으로 돋을새김 되었다. 
상대석은 팔각이며 홀 연꽃 8엽이 위로 벌어지듯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지게 꺾 받침이 있다.  윗면에는 높은 둥그런 괴임이 있다.
탑신도 팔각으로 한 면에 문비를 모각하고 다른면에 높게 돋을새김한 신장상이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추녀끝은 얇고 넓은 편이다.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연목이 모각되었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면의 팔각에는 팔조의 우동이 뚜렷하며 추녀 끝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있다.  상륜부는 완전하며 정상에는 팔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가 있고, 그 위에 납작한 구형이 복발이 있는데 횡대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복발위에 큼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는데 보개에는 4방향으로 벼슬을 늘어뜨린 새모양이 조각 되어 있다.
이 승탑 탑신석 한 면에  “소요대사 지탑/순치육년경인” 이라는 두줄의 음각명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소요대사는 백양사에서 계를 받고 부휴대사에게서 경전을 배웠으며, 서산대사에게서 청전본원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 (1649)에 입멸하였는데 그 다음 해에 이 승탑을 세웠다.
소요대사의 승탑은 현재 김제 금산사에 있으며, 지리산 연곡사를 비롯하여 해남 대둔사, 연천 보개산 심원사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소요대사 승탑은 김제 금산사와 장성 백양사 구례 연곡사에 남아있다.

 

◎ 삼층석탑(보물제151호)

 

이 석탑은 기단이 3층으로 옥개석이 전형적인 방형탑으로 각층의기단이 여러개의 석재를 사용하여 건립되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위 아래에 하대 갑석과 하대 저석을 두고 그 사이에 낮은 하대 중석을 놓았다.
하대중석 좌우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탱주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하층 기단 갑석의 상면에는 중층 기단의 저석을 받치기 위한 낮은 단이 있다.
 

이들 하층 기단의 석재는 하대 면석이 8개, 하대 갑석이 6개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중층 기단의 전반적인 모습은 하층 기단과 유사하나 갑석 바깥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중앙에는 각형과 호형의 몰딩이 있다.
중층기단의 면석은 6개, 중층기단 갑석은 3개의 석재로 결구되었다.
상층 기단 역시 하층, 중층 기단보다 높아진 모습이며, 상층 기단 면석은 좁아졌고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었다.
상층기단의 상대 갑석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상면은 비스듬하게 기울며 각지게 꺽인 2단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사층기단 면석은 4개 갑석은 1개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탑신부는 모든 층의 옥신에 우주가 표현되었으며,2층,3층의 옥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옥개는 한 개의 서재로 쌓았고 층급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은 1967년 보수를 위해 해체,복원 되었으며, 해체과정중 상층 기단내 자연판 석상에서 높이 23.5CM 크기의
금동여래입상 1점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이 불상은 턱이 양간 들려진 모습이며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고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이 금동불은 U자형으로 겹쳐지는 법의와 우수상,좌수하 형식의 수인, 상대 하대만 갖춘 대좌의 모습에서 통일신라 금동불 양식의 잔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직된 상호, 자세, 의습으로 보아 고려초에 제작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 의병장 고광순 순국지

 

연곡사는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국란이 있을 때마다 피아가 본거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소각을 하여 여러차례 폐사가 되었다가 다시 부흥하고 하였다. 특히 구 한말 의병장 고광순이 전남 담양 창평에서 창의하여 호남 일대 의병들을 모아 이 연곡사를 거점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직한 곳이다. 고광순은 호남 의병장을 대표할 정도로 용맹하고 지략이 우수하여 일본군을 괴롭폈다. 나라의 힘이 풍전 등화가 되고 결국은 힘이 약한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의병이란 관군이 아니고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결의하여 창설한 군대이다. 전쟁터에 나가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목수목숨을 담보하고 일본군과 싸웠으니 그 의롭고 고귀한 결의가 얼마나 빛나고 숙연한 것인가. 후손들은 선조들의 목숨을 내 놓고 행동으로 보여 준 나라사랑 결의를 길이 길이 기억하고 본 받고 그 의로운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 피아골순국의령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