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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 물줄기/영산강 트레킹

2024.03.10. 영산강트레킹6구간 : 광주천분기점- 영산7경(풍영야우, 풍영정) - 영산8경(죽림연우) - 첨단대교 - 담양하천국가습지보호지역 - 담양봉산면 삼지교

by 하여간하여간 2024. 3. 11.

1. 일자 : 2024.03.10.(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3. 트레킹구간 : 광주천분기점- 영산7경(풍영야우, 풍영정) - 영산8경(죽림연우) - 첨단대교 - 담양하천국가습지보호지역 - 담양 봉산 삼지교

 

 

4. 트레킹 소감

 

광주지오트레킹(회장 김명수)에서 야심차게 실행한 [영포인트 트레킹 무등 1187]을 1구간부터 5구간까지 마무리 하고, 광주천 분기점에서 부터 영산강 발원지 담양 용소까지 영산강 트레킹을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기에 , 평소 영산강을 완전히 걷고 싶은 마음에 만사제치고 영산강 트레킹 6구간에 참여한다.

 

멀리 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호남정맥 산군들과 병풍산과 불태산으로 이어지는 병풍지맥 산군들 사이로 펼쳐지는 광활한 담양 들녁을 가로질러 영산강이 유유히 흐른다. 

 

영산강을 끼고 흐르는 긴 유역 중에 오늘 걷는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먼저 삶의 터전을 잡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숱한 역사와 문화 및 사상을 깨워 온 곳이다. 풍영정과 면앙정 등 우리나라 가사문화의 본류가 이 지역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었고 선조들의 고고한 학문적 기풍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담양하천국가습지는 자연생태가 살아 숨쉬는 그야말로 생명의 길이기도하다.

 

목포하구언에서 광주 무등산까지 걸어보는 소중한 경험을 이어서 영산강 나머지 구간을 걷고 싶었다. 혹시 향후 기회가 된다면 황룡강과 지석천, 나주천, 고막천 등 영산강 주요 지류들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산강 트레킹 6구간은 광주첨단 지구를 지나면서 담양 들녁을 적시는 영산강 줄기를 따라 걷는 길이다. 평소에도 늘 다니던 길이지만 영산강 트레킹 프로그램과 연결하여 완성하는 의미로 산우님들과 함께 걸었다. 늘 길은 새롭다. 누구와 걷는가? 언제 걷는가? 그때 그때 다른 느낌을 주는 길이기에 오늘도 새롭게 다가온다. 오늘 걷는 영산강 6구간은 친근하면서도 다정하고 우정이 넘치고 서로를 이해하는 따뜻한 길이다. 

 

 

5. 트레킹 이모저모

 

광주천 분기점을 향하여

 

광주천 분기점에서 출발 인증 한장

 

단체 인증

 

치평교를 건너서

 

광주천을 건넌다.

 

 

어등대교

 

덕흥대교

 

 

극락강역 앞 영산강 

 

이곳에서 영산강은 잠시 용트림을 한다.

 

광산대교

 

천변 축구장

 

풍영정을 잡아당겼다. 소나무 숲 속에 풍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철도 : 송정역에서 광주역으로 가는 철도이다.  지금은 광주송정역이 서울가는 기차역이 되어 광주역이 많이 쇄퇴하여 철로로서 역할은 덜 한편이다. 이번에 특별법으로 통과 된 대구와 광주를 연결하는 달빛철도가 개설된다면 광주역을 거쳐 가도록 설계되어 광주역의 활성화가 기대 된다. 

 

광산김씨 후손인 김명수 회장님께서 건너편 풍영정을 구수한 입담으로 설명해주었다. 

 

◎ 풍영정

 

조선 중기에 김언거(1530~1584)가 세운 정자이다. '풍영' 이라는 이름은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음조린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김언기의 자는 계진 호는 칠계이다. 1531년(중종26)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물러나 이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들과 어울리며 생활하였다.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제일호산' 이라는 커다란 판액이 걸려 있으며, 송순 이황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현존한다.

 

 

◎ 풍영정 글씨


풍자가 영정과 달리 약간 비틀어져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한다.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때 선창산 주변 12대 정자가 왜병에 의해 모두 불 탈 때 풍영정도 불에 탔다. 불타는 풍영정 현판에서 갑자기 풍자가 오리로 변해 영산강으로 날아갔고 이를 괴히 여긴 왜장이 즉시 불을끄도록 했는데, 오리가 다시 날아와 풍자가 되면서 완전 소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김언거가 풍영정을 짓자 명종 임금이 무주구천동에 있는 길처사에게 글씨를 받아 걸라고 해 13번의 방문에도 길처사는 거절했다고 한다. 김언거는 포기하지 않고 14번째 방문하자 마지못해 칡넝쿨 붓으로 풍영정을 써주며 가는 길에 절대로 열어보지 말 것을 요청했는데, 궁금한 나머지 열어보자 풍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에 다시 길처사를 찾아가 풍자를 써달라고 했지만, 거절하자 그 제자인 황처사가 써줘 글씨가 틀리다는 전설이다. 

 

 

◎ 풍영정에 얽힌 애틋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


옛날에는 목포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극락강까지 소금배가 드나들었다. 풍영정에는 소금장수와 선창마을 처녀의 슬프고도 애닮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눈에 반해 사랑을 맹세했지만, 3년이 지나도 소금배가 오지 않자 처녀는 출가했고 4년만에 돌아온 소금배가 풍영정에 머물려 애타게 처녀를 기다렸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처녀는 올 수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소금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서서히 멀어져 가는 소금배를 바라보고 이후 풍영정 높은 언덕에 서서 님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풍영정을 바라보며 공부도 하고 잠시 쉬어 간다.

 

◎ 영산7경(풍영야우)

 

풍영정에서 바라본 영산강에 내린 밤비이다.

아마 밤비가 내릴 때 영산강 강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너울 거린 영산강물 표면의 추적거린 정취가 더 없이 아름답고 고혹적이였을까?

 

 

강둑위에 영산7경 (풍영야우)를 들려 와야 하는데 억새밭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쳐 버렸다.

이 길은 늘 일상에서 걷던 길이다. 가을 억새가 출렁일 때 금빛 억새 꽃이 찬연한 기막힌 풍광을 볼 수있다. 추억이 아련하다.

 

강변 넓은 부지에 꽃밭을 만드나 보다. 북구청의 이벤트 행사준비일까? 기대가 된다.

 

산동교를 지나

 

옛산동교

 

◎ 옛 산동교

 

'옛 산동교"는 1950년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 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벌였던 광주지역의 유일한 6.25전적지이다.

당시 호남의 방어 부대인 5사단 20연대는 전선으로 이동되었고, 26연대가 새로 편성되었으나 호남지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 7월 22일 장성에서 퇴각한 26연대는 광주지역 사수와 북한군의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7월 23일 새벽 4시경 산동교를 폭파하였다.

 

 

군경합동부대는 산동교에서 광주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르렀을 때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북한군을 대적하기엔 중과부적이였고, 결국 군경합동부대는 23일 여수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전투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했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은 중상을 입었다. 

 

'옛 산동교'는 폭 6m, 길이 228m의 다리로 교각이 아치형 기둥모양이며,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국도 1호선의 일부로 건설되어 현재 일부 보존되어 있으며 2011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옛 산동교에서 단체 기념 한장

 

산동교 설명 

 

나는 극락강을 건너 무등의 품에 있는 광주가 극락정토이다. "무등은 등급이 없는 평등한 산이며 그것이 부처가 가르치는 큰 가르침인데 이 영산강(극락강)을 건너면 극락정토인데 그곳이 무등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광주다" 라고 했다.  ㅋㅋ 산우님들도 공감 ㅋㅋ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 본다.

 

지금은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옛산동교

 

영산강은 광주구간 중 광주천과 만나는 곳까지를 옛날부터 극락강이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극락강 주변으로 극락초교, 극락강역 등 지명이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칠천이라고 표기해 선사시대부터 각종 물건에 옻칠을 했던 신창동 유적과도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영산강이 광주를 지나며 크게 휘돌아가며 쌓은 퇴적층이 흰 백사장이 되어 펼쳐지고 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월봉산(98.6m) 자락에 세상을 깜짝놀라게 한 초기 철기시대(BC 1세기 경)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신청동유적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이 지역은 2천 년 전 광주 신창동 영산강변 산자락 따라 많은 부족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

 

 

 

◎ 신창동 선사시대 유적지

 

신창동 유적은 초기철기시대 말에서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거대한 유적지로써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에 형성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생산과 생활 그리고 분묘의 실상을 알려주는 복합유적지이다. 40,000제곱미터에 으르는 넓은 지역에 주거지와 생산과 관계된 각종 유구가 분포되어 있으며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면서 우리나라 최초 저습지 유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적의 중요성이 학계와 일반에 알려지면서 국가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 서단의 삼각산 정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4개의 저평한 구름과 구릉사이의 곡간대지 강변 층적대지에 형성되어 있으며 주거지, 환호, 토기요지, 저습지와 공방지 등이 확인되어 당시의 마을의 생활영역, 생산영역, 의례영역, 방어영역이 모두 확인된 셈이다.

 

그들은 논과 밭을 일궈 농사를 짓기 위해 경작지로 추정되는 고랑이 조사되었고 짐승을 사냥하고 강에서 물고기와 우렁이 조계 등을  잡아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물패류와 각종 생선뼈와 짐승뼈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들 자료들은 당시의 자연환경 복원뿐만 아니라 인간활동 모습을 재현 가능케하고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종 목기와 토기, 검, 무기, 농기구(통발, 괭이, 빗자루 등) 공구, 동형칠기를 비롯한 각종용기와 발화구, 신골, 배틀부속구, 현악기, 빗 등이 있으며 자연유물로는 쌀, 조 등 곡물을 비롯해 오이씨, 조롱박씨, 호도, 가래씨 등이 발견되었다. 이와같은 유물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같이 출토된 토기와 함께 고대 한국문화의 여러가지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길가에 매화가 피었다 지고

 

홍매도 만나고

 

박옥현 노무현재단 공동의장님과 함께 걷는 긴 영산강변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 옛 세곡 곡물창고 '동창'이 지금 광주 무양서원 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 광주에는 세 곳에 곡물창고를 두었는데, 세금으로 받은 곡물을 서울로 옮기기 전 쌓아놓았던 장소다. 그 중 하나가 광주읍성 내에 있던 읍창(억만고)이다. 또 지금의 첨단지구 월계동 무양서원 자리에 동창이 있었다. 

 

예전에 영산강 줄기에는 동창과 서창이 있었다. 동창은 지금의 무양서원 자리이고 서창은 지금의 서창이다. 담양과 나주 지방 세곡을 저장하였다가 쪽배에 싣고 극락강을 따라 영산포로 이동하고 영산포에서 다시 큰배에 세곡을 싣고 영산강을 따라 목포를 지나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옮겼을 것이다. 이 시기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극락원이 있어다고 한다. 지금의 여관급이다. 

 그리고 서창이 있었는데 이후 마을 이름이 서창 또는 창촌(倉村)으로 불렸다. 마을 주민들이 창등(倉嶝)이라고 부르던 언덕 인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창은 ‘극락창’이라고도 불렸다. 

 

무양서원은 지금의 첨단지구 산월동 산월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다. 조선시대만 하드라도 이곳 산동교가 있는 곳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고 강수심도 깊어 나룻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무양서원에서 가까운 영산강 줄기

 

지난해 화려했던 억새 밭 추억을 뒤로 하고 억새밭을 거닐은 대원님들

 

첨단대교 앞 공터가 넓다 가족단위 상춘객이 많다.

 

◎ 거진나루 이야기

조선시대 거진나루는 장성 등 북쪽지방을 이어주고 광주광역시 서구 벽진나루는 나주 등 남쪽지방을 이어주는 우리 지역의 오랜 역사를 지닌 대표적인 나루이다.
주변의 비아장이 열리는 날과 장성 필암서원 행사가 있는 날이면 거진 나루는 장꾼과 선비들로 북적이던 곳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일대에 활기를 불어 넣었던 유명한 장소이다.
이에 거진나루는 광주광역시 읍내보다 한양의 소식이 먼저 당도했다고 하며, 오늘날 '거쟁이 쉼터'의 동쪽 용두동에는 거진길이 남아있다.

 

노을 풍경 거징이 쉼터

 

첨단대교 앞 놀이 공간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도 많다. 

 

불태산에서 저기 보이는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용산천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영산강과 만나 산동교으로 향한다. 

 

이곳에 보를 설치하여 강속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넓은 강폭이 한가롭고 운치를 더하다.

 

이곳에 8각정이 있다. 아름다운 영산강변을 풍경삼아 점심을 한다.

 

점심 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기념 한장

 

 

 

오후 트레킹 출발 인증

 

오후 트레킹을 출발

 

산우님들과 추억도 남기고

 

지야대교

 

지야대교 너머 불태산

 

백로? 외가리?

 

무등산

 

불태산

 

한가로이

 

길가에 산수유도 활짝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을 박옥현 의장님이 담아 공유한다. 참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우며 든든하다.

 

강변은 이미 봄이 무르익고

 

용산교

 

영산8경으로 가는 강변길

 

◎ 영산8경 죽림연우

 

대나무 숲에 피어난  안개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봄비 내리는 강가에 피어 오른 물안개와 대나무가 어울러져 연출한 기막힌 서정적 풍광이다. 언젠가 봄비 내린는 날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다.

 

추억 몇 장

 

 

 

영산 8경을 지나 강변을 걷다 보면 이곳 영산강 담양하천 국가습지보호지역을 지난다.

 

생태환경이 살아 있고 생명이 살아 있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대나무 숲을 지나면 철새 조망대가 나온다.

 

새로 조성한 영산강면 대나무 숲이다. 담양하면 대나무다. 울창하게 잘 자란 대나무 숲에는 4계절 철새들이 날아든다. 지금은 봄이여 일까? 철새들의 먹이활동이 뜸하다. 그러나 가을이나 겨울철로 접어 들 때 이곳에는 철새들의 천국이 된다.

 

◎ 담양 태목리 대나무 군락

 

담양은 전국 대나무 면적의 34%를 차지하고 채상, 부채, 대바구니 등 대나무공예로 이름난 고장이다.

한국의 자연유산인 천연기념물 담양 대나무 군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영산강 하천변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 퇴적층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대규모 대나무 군락이다.  

 

담양하천국가습지가 보호되어 먹이가 풍부하고 철새도래지로 보호하기에 먹이사슬이 잘 형성되어 각 종 철새들이 날아든다.

 

◎ 담양습지

 

퇴적환경변화의 연대측정으로 1000년 전 형성 확인

 

담양 습지는 영산강 본류에서도 상류에 형성된 하천 습지로서 자연형 하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람사르 협약에 의해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조류의 집단서식지를 이루고 있으며, 멸종위기종인 수달, 삵 등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들이 대규모 대나무 군락지를 포함한 식생에 서식하는 우수한 생태환경이 보존된 지역이다.

연대측정을 통하여 담양습지가 약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철새관찰대이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철새들의 먹이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숨어서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해서 만든 관찰대이다. 

 

긴 하천을 따라 담양하천국가습지보호구역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 주변에서는 농사를 할 때 농약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습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잘한 일이다. 이런 하천 습지가 잘 보호되고 보전되길 희망한다. 

 

강에는 중간 중간  낮은 보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 유네스코지정 무등산권세계지질공원  담양 하천 습지(MG22)

 

 - 영산강 상류에 형성된 하천습지로, 람사르협약에 의해 습지구역으로 지정됨

 - 하천습지에서는 보기 드물게 다양한 목본류 식생이 자라고 있어 2004년 7월 우리나라 하천습지보호구역으로 등록됨

 - 조류 집단서식지임은 물론, 멸종위종인 수달, 삵 등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들이 대규모 대나무 군락지를 포함한 식생에 서식하는 우수 상태 환경보존지역으로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임

 - 1000여 년 전에 형성되어 담양습지에 있었던 퇴적 환경변화가 모두 기록되어 있음

 

◇ 지질지형 특성

 

 - 영산강의 상류지역으로 최후최대빙하기(L.G.M : Last Glacial Maximum)에는 오늘날보다 해수면이 약 120m 아래에 위치하였으며, 오늘날 비교적 짧은 길이의 영산강은 남해로 더 긴 길이로 흘렀을 것이고 강의 최상류 지역에 해당됨에 따라 자갈크기의 퇴적층이 형성되었을 것임.

 - 이후 해수면의 상승으로 약 5~6천년 전에 현재와 비슷한 해수면이 올라 왔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영산강은 해안선이 나주를 지나 광주인근까지 올라왔으며 이후 전진퇴적작용이 일어나면서 퇴적환경이 변화한 것으로 해석됨.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광주호에 잠시 머물다가 증암천으로 흐르고 창평을 지나는 창평천과 만나서 이곳에서 영산강와 만난다. 합수지점이다.

 

긴 걸음으로 대원님들도 잠시 쉬어 간다.

 

마지막 걸음을 힘차게

 

영산강 여유로움 너머 하늘금엔 호남정맥 산군들이다. 저 산군들 아래로 흐르는 물이 모여 담양호로 흘러 들고 영산강 줄기가 된다.

 

호남정맥의 중심인 무등산이 저기 우뚝 솟아 호남들녁을 거느리고, 영산강은 넉넉히 풍요롭게 호남들녁을 흐른다.

 

오늘 트레킹의 종점인 삼지교이다.

 

병풍산과  삼인산 등 병풍지맥의 산군들이다. 저 산군들 너머에는 황룡강이 흐른다.

 

무등산과 담양 창평방향의 산군들

 

황금물결 출렁이는 황금들노래마을이다. 

 

황금물결 출렁이는 황금들은 가을에 벼가 노오랗게 익어 바람에 출렁일 때 그 풍요로움과 넉넉함이 황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풍요의 상징이다.

 

오늘 영산강 트레킹 6구간의 종점인 삼지교

 

삼지교에서 인증 한장 남기고 오늘의 트레킹을 마무리 한다.

 

◎ 면앙정

오후 시간이 남아 인근 면앙정 문화 답사시간

 

전남 담양군 봉산면 면앙정

 

급경사 오름계단을 올라

 

면앙정가비 앞에 섰다.

 

 

◎ 면앙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 6호

 

이 정자는 송순(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것이다. 송순은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골기와의 팔작지붕(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지붕) 건물이며,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를 한 것이며, 1979년과 2004년에 지붕을 새로 올렸고, 주변 대나무와 잡목을 제거하여 시야를 확보하였다. 

 

 

 

 

◎ 면앙정가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떼어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는 너른 들판에서 무슨 생각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함께 뭉쳐서 우뚝우뚝 벌여 놓은 듯하네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갓 깨어 머리를 얹어 놓은 듯하니,

너럭바위 위에

소나무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리고 있는 듯하네

 

 

옥천산, 용천산에서 내린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끊임없이 펼쳐진 듯이

넓거든 길지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 말거나,

쌍룡이 뒤트는 듯, 긴 비단을 활짝 펼친 듯,

어디로 가느라 무슨 일이 바빠서

달리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으로 흐르는 듯하네,

 

 

물 따라간 바닷가 모래밭은 눈처럼 펼쳐져 있는데,

어지럽게 나는 기러기는 무슨 정을 통하느라

앉았다가 내렸다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따르느뇨

 

 

넓은 길 밖이요,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

숨거니 보이거니 가거니 머물거니

어지러운 가운데 이름이 난 것처럼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것이 추월산 머리를 만들고

용귀산, 봉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늘어서 있으니,

멀고 가까운 푸른 절벽에 머문 것도 많기도 많구나

 

 

흰 구름,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로다.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으로 삼아 두고

나며 들며 아양을 떠는구나.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먼 하늘로 떠나기도 하고 넓은 들판으로 건너가기도 하며

푸르기도 붉기도 옅기도 짙기도 하며

석양과 섞여 가느다란 비조차 뿌리는구나

 

 

가마를 재촉하여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며 가며 하는 때에

푸른 버드나무에 우는 노란 꾀고리는 아양을 떠는구나

나무 사이가 촘촘하여 짙은 그늘이 우거져 있는 곳에

긴 난간에서 긴 졸음을 조니,

물 위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은 그칠 줄을 모르는가

 

된서리 내린 후에 산 빛이 수놓은 비단 같도다.

누렇게 익은 곡식은 또 어찌 넓은 들판에 펼쳐져 있는가?

어부의 피리도 흥에 겨워 달을 따라 부는구나.

 

 

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산이 묻혔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꾸며내니

곱디고운 집과 누대, 새하얀 들과 산들이

눈 아래 펼쳐져 있구나.

하늘과 땅도 풍성하구나.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고 싫겠느냐

오늘도 부족한데 내일이라 여유가 있겠는가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을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 길이나 전하겠는가?

다만 하나의 푸른 명아주 지팡이만이 다 무디어 가는 구나.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을 것이냐

부르게 하며 타게 하며 켜게 하며 흔들며

온갖 소리로 술에 취한 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겠는가

누웠다가 앉았다가 굽혔다가 젖혔다가

읊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가 마음껏 놀거니.

천지도 넓고 넓으며 세월도 한가하다.

복희 황제를 몰랐는데 지금이야 그것이로구나.

신선이 어떻든지 이 몸이야말로 그것이로구나.

 

 

자연을 거느리고 내 한 평생을 다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 온다고 한들

호탕한 마음이야 이보다 더할 것이냐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님의 은혜이도다.

 

◎ 면앙정가 해설

 

조선 중기에 송순(宋純)이 지은 가사.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145구이며, 음수율은 3·4조, 4·4조, 3·3조, 4·2조, 3·5조 등 다양하다. 필사본 ≪잡가 雜歌≫에 국문가사가 전한다. 작자의 문집인 ≪면앙집 俛仰集≫에는 한역가가 실려 있으며, ‘무등곡(無等曲)’이라고도 한다.

 

작자가 41, 42세 때인 1533년(중종 28)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창작연대에 관해서는 송순의 만년설과 40대설 두 가지가 있다. 송순의 행적에 기록된 면앙정 창건시기가 1533년이라는 점과 면앙정 창축 후 읊었다는 <면앙정삼언가 俛仰亭三言歌>의 가의(歌意)가 <면앙정가>의 그것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보아 40대설에 더 신빙성을 두고 있다.

또한 명칭에 대해서도 <면앙정가>와 <무등곡>을 같은 작품으로 보는 견해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면앙집≫ 권7 <면앙정잡록> 중 이안눌(李安訥)의 시주(詩注)에 <무등곡>은 <면앙정장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어, 두 개가 같은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사는 작자가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그의 향리인 전라도 담양 기촌(企村)에 머물러 있을 때, 그곳 제월봉(霽月峰) 아래에 면앙정을 짓고 그 주변 산수 경개와 계절에 따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며 즐긴 것을 노래한 가사이다.

내용은 6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서사(序詞)로서, 무등산 일맥(一脈)이 동쪽에서 뻗어와 면앙정이 위치한 제월봉을 이루었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제2단은 면앙정 주변 경개의 수려함에 감탄하여 칭송한 것이다. 특히 칠곡(七曲)의 기묘함과 정자 앞에 펼쳐지는 긴 내와 너른 전야(田野)의 유연한 경관을 노래하였다.

제3단은 면앙정에서의 조망(眺望) 풍경을 그린 것으로, 추월산(秋月山)을 두산(頭山)으로 하여 용구산(龍龜山)·몽선산(夢仙山)·불대산(佛臺山) 등 여러 산봉우리가 우뚝 솟은 장관과 이어서 천암만학(千巖萬壑)을 집을 삼아 유유히 떠다니는 흰 구름, 안개노을의 조용하고 한가로운 모습을 탄미하였다.

 

제4단은 사시경물(四時景物)을 노래한 것이다. 봄철의 푸른 버드나무 숲 속 꾀꼬리의 교태 겨운 울음소리, 여름철의 백척난간에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과 긴 낮잠, 가을철의 온 산을 물들인 영롱한 단풍과 흥겨운 어부의 피리소리, 겨울철의 빙설(氷雪)로 치장한 경궁요대(瓊宮瑤臺)와 옥해은산(玉海銀山)의 아름다운 경치를 탄미하였다.

제5단은 취흥자득(醉興自得)하는 흥취를 노래하였는데, 거문고를 타며 풍류삼매(風流三昧)에 든 경지가 신선과 방불함을 그렸다. 제6단은 결사로서 강산풍월(江山風月)을 거느리고 소요자적하는 생활이 악양루(岳陽樓) 위의 이백(李白)이 부럽지 않다고 자랑하며, 이것이 모두 임금의 은혜라고 노래하였다.

 

자연탄상(自然歎賞)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전래의 풍류미를 선양한 격조 높은 가풍을 보인다. 동시에 구성 체재와 표현형식이 완성도가 높다. 특히 시어의 선택에 있어 자유자재의 고유어 구사능력과 말을 섞는 기발한 솜씨, 조어(造語)의 공교(工巧)함, 그리고 이에 따른 절실한 정감 등은 가사문학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을 비롯하여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 遣閑雜錄≫,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 旬五志≫,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등에서도 이 작품을 한결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즉, 내용적으로는 면앙정 주변의 산수의 아름다움과 이를 유상하는 즐거움, 그리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유감 없이 표현하였고, 형식적으로는 어사(語辭)가 청완(淸婉)하고 유창(流暢)하다고 칭찬하였다.

<면앙정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 賞春曲>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가 될 뿐 아니라, 그 내용·형식·가풍 등은 정철(鄭澈)의 <성산별곡 星山別曲>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어 가사문학의 계보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면앙정기/ 기대승 선생 지음

내용 생략

 

면앙정에 올라 담양들녁을 바라보며 넉넉히 흐르는 영산강과 저멀리 병풍산과 불태산이 이루는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는다. 긴 시간이 흐르고 숱한 사연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물을 따라 서울에 두고 온 그리운이 보고 싶어 대나무 쪽배를 타고 찾아나선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 트레킹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