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집 이야기

2022.08.15. 전북 부안 내변산 월명암

by 하여간하여간 2023. 2. 23.

1. 작년 여름 녹음이 한창 짙어갈 때 늘 그리운 월명암을 찾았다. 월명암에 올라 바라 본 내변산 관음봉을 비롯한 기암들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아른거려 발걸음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월명암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동안 담아 놓은 월명암에 대한 추억을 오늘에야 정리하여 본다.

  

 

2. 월명암의 위치

 

월명암을 찾으려면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를 찾아야 한다. 변산에는 내변산과 외변산이 있다. 월명암은 내변산 자락에 위치한다.

 

 

지방도 736번 남여치에 주차하고 바로 월명암으로 오르거나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 주차하고 봉래곡삼거리까지 와서 내변산 쌍선봉으로 향하는 산행의 수고로움을 해야 한다.

 

월명암은 쌍선봉과 낙조대 아래 고즉넉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대둔산 태고사(太古寺), 백암산 운문암(雲門庵)과 함께 호남지방의 3대 영지(靈地)로 손꼽히는 곳이며, 봉래선원(鳳萊禪院)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 남여치에 있는 월명암 입구 표지석

 

남여치에 입구에 있는 월명암 표지석

 

변산 월명암은 한국 거사 불교의 효시로 일컫는 부설거사(浮雪居士)가 통일신라 시대 신문왕 11년(691년)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쌍선봉 아래에 창건한 암자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 소속이다.

 

◎ 월명암 사적기

 

 

월명암 사적기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산 96-1번지

 

본 명월암은 노령산맥의 서단 변산반도 능가산 法王峰에 자리 잡은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암자로 신라 神文王 11년에 부설거사께서 창건인바 그 후 많은 세월의 風磨雨洗(풍마우세)로 수차의 重修를 거쳐 현금 제6創에 이르러 이어오고 있다.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세계불교 3대 거사로서 그 欽慕와 尊崇을 함뿍 받아오는 在家出家人으로서 본래 경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불국사의 圓淨스님에게서 得度를 하고 영희, 영조 두 道伴과 더불어 각처를 행각 하며 도를 닦다가 이곳 변산에서 십 년 동안 수도하고 오대산을 찾아가던 도중 만경현(萬頃縣) 백운지(白雲池)(김제군 성덕리 고현리) 청신도 구무원(仇無冤) 씨 집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의 여장을 풀었는데 仇씨의 무남독녀 妙華는 방년 18세의 벙어리였으나 부설거사를 보고는 갑자기 말문이 열려 스님과 三生緣分이 있다 하여 죽기를 한하고 부부의 結緣을 원함으로 부설스님은 생명을 중히 여겨 묘화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登雲과 月明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시 이곳 변산을 찾아와 각기 한 칸의 토굴을 짓고 도를 닦아 모두 成道하였고 부설거사는 열반 뒤에 많은 사리가 나와 여기에 사리 부도를 안치하고 묘화부인은 110세를 살며 갖은 異蹟의 도를 발휘하였으며 登雲은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렸고, 月明은 이 자리에서 肉身登空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이곳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성취한 자리이고 그 후에 많은 스님이 도를 깨치었다 하여 전국에서 제일가는 수도도량으로 그 이름이 사해에 떨치고 있다.

 

신라 때 의상대사께서 주석하시었으며, 이조 宣祖 때 震黙大師(진묵대사)께서 17년 동안이나 修禪하시었고, 哲宗 때 性庵조사께서 三創을 하여 팔부대중을 堤接하시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行菴스님, 鶴鳴스님, 龍城스님, 西翁스님, 古巖스님, 海眼스님, 呑虛스님, 香峰스님, 月印스님 등 많은 高僧大德이 출현하시어 住錫堤接하신 곳이다.

 

그러나 비극적인 625동란으로 인하여 본 월명사찰은 전소되고 호남 제일 성지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월인스님이 수년간 苦心慘憺(고심참단)의 원력으로 인하여 전후의 혼란과 기근 속에서 근근이 본당과 요사채 일동을 修築하였는데 三十餘星霜의 노후로 도괴 직전의 형편에 놓여 누구 하나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을 현주지 宗興스님의 연비소신의 대원력으로 본당 건물은 물론 요사채도 다시 늘려 증축하였고, 이어 四聖禪院, 妙寂庵, 雲海堂, 東淨, 西淨우물, 기타 부속건물을 修築하여 놓으니 자연히 면목이 일신하였다. 

 

그리고 또 이곳 월명암은 그 풍광으로도 천하제일의 둥두렸한 月出과 茫茫한 七仙바다의 찬란한 日沒과 무릉도원으로 끝없이 펼쳐진 아침의 雲海, 水太極, 山太極의 玉筍(옥순)과 같은 群峯(군봉)들이 과연 해동 제일의 선경 강산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부설거사의 예언으로 이곳 월명암에서 四聖은 부설거사의 가족으로 나타났고, 八賢 중 성암, 행암, 학명스님의 삼현 이미 나오셨고 앞으로 五賢과 12法師가 나오실 것이라 한다.

 

연혁표:

불기 1035년 제1創主 浮雪거사       불기 1396년 제2창주 震黙대사

불기 2207년 제3창주 性庵대사       불기 2259년 제4창주 鶴鳴선사

불기 2299년 제5창주 月印선사       불기 2325년 제6창주 宗興화상

 

◎ 월명암으로 가는 길 연꽃 방죽

 

월명암 입구 연꽃 방죽

 

연꽃 방죽의 물이 맑다. 연꽃은 온갖 것이 쌓여 있는 더러운 연못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 물 속에 줄기를 뻗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부처님이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나서  "이 심오한 진리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들려주지 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할 때 범천이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깨달은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부처님께서 중생을 향한 자비심에서 깨달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셨다. 마치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들이 피어 있는  연못에서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물 위로 나오지 못하고 물속에서 핀 꽃들도 있고,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간신히 물 위에서 피어난 꽃도 있고,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고 피어난 꽃도 있듯이 중생들도 그와 같음을 관찰하셨다. ~ 중략

 

 

월명암 앞 마당에서 내변산 올망 졸망 산그리매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한여름 내변산 풍광을 담는다.

 

 

 월명암 대웅전

월명암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눈에 들어 온다.

 

월명암 대웅전

전면 3칸, 측면 2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대웅전은 월명암의 본당이다.

 

 

수미단에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가부좌한 석가모니불 협시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벽에는 칠성탱, 산신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

 

산신탱

 

 

신중탱

 

 월명암 관음전

 

월명암 관음전

대웅전과 함께 2005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으로 편액은 ‘관음전’이고 주련은 4기가 걸려 있다.

 

월명암 관음전 주련

 

 

주존불은 2005년 이전 법당에 모셔져 있던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뒤쪽에는 목각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연꽃을 투각해서 화려하게 꾸민 목각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목각신중탱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대개 부드럽고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는데 월명암의 관음보살은 방원형의 얼굴에 근엄한 모습을 띤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진목대사의 영정과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고, 부설거사의 열반송이 일원상과 함께 걸려 있다.

 

 

 

진묵대사의 영정

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는 진묵(震黙)으로, 만경(萬頃)의 불거촌(佛居村) 사람이다. 불거촌은 요즘의 전북 김제시 만경면 대진리(大津里)이다. 어머니는 조의(調意)씨라 하니, 이는 아마 성(姓)이 아니고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진묵[1562~1633]은 조선 인조 때의 승려로 72세의 나이로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범어사 승보박물관에 3폭을 연결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제작한 액자 형식의 「월파당 진묵 대사 영정(月波堂震默大師影幀)」 이 있는데 월명암의 이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화면 중앙에 좌측을 향하여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에는 염주를, 왼손에는 주장자를 쥐고 있는데 완주 봉서사 등 사찰에 봉안된 영장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 부설거사의 열반송과 일원상

 

부설거사의 열반송과 일원상

 

 

 부설전

 

 

부설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이 책은 월명암을 처음 세웠다고 전하는 부설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행서체로 쓴 한문 필사본으로 본문은 모두 14면이다. 표지에는 부설전이라는 책의 제목 등이 적혀 있으며 표지 안쪽에는 월명암 연혁표를 적어 놓았다. 본문에는 부설스님이 월명암에서 영희, 영조 스님 등과 수도생활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화와, 부설선사가 지은 몇 편의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누가 언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설 스님의 일생을 더듬어 보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월명암 범종각

 

월명암 범종각의 범종 '부설월명범종(浮雪月明梵鐘)'

 

 

◎ 부설거사의 팔죽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그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러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물건 사고파는 건 세월 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

 

 

◎ 월명암 식영당과 묘적암

 

월명암 식영당

 

월명암 묘적암

 

식영정과 묘적암

 

묘적암 현판

 

월명암 현판

 

◎ 부설거사 사부시(四浮詩)

 

처자권속삼여죽 (妻子眷屬森如竹)    처자권속이 대숲처럼 빽빽이 있고

금은옥백적여구 (金銀玉帛積如坵)    금은보배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어도

임종독자고혼서 (臨終獨自孤魂逝)    죽을 땐 홀로 외로운 넋만 돌아가니

사량야시허부부 (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생각하면 허망할 뿐이로다

 

조조역역홍진로 (朝朝役役紅塵路)    날이면 날마다 세상사에 골몰하고

작위재고이백두 (爵位纔高已白頭)    벼슬 겨우 높아지니 이미 백발이 되었구나

염왕불파패금어 (閻王不怕佩金魚)    염라대왕이 벼슬자리를 두려워 하랴

사량야시허부부 (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생각하면 허망할 뿐이로다

 

금심수구풍뇌설 (錦心繡ㅁ風雷舌)    아름다운 글재주와 혼을 빼는 말솜씨

천수시경만호후 (千首詩經萬戶侯)    천편의 시 문장, 만호의 높은 벼슬은

증장다생인아본 (增長多生人我本)    여러 생에 너다 나다 잘난 자랑만 키울 뿐

사량야시허부부 (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생각하면 허망할 뿐이로다

 

가사설법여운우 (假使說法如雲雨)    설령 설법을 구름과 비 오듯 하고

감득천화석점두 (感得天花石點頭)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돌조차 머릴 끄덕여도

건혜미능면생사 (乾慧未能免生死)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고(生死苦)를 면치 못하리니

사량야시허부부 (思量也是虛浮浮)    생각하고 생각하면 허망할 뿐이로다.

 

◎ 월상원과 누안당

 

월상원과 누안당은 ㄱ자 기와 지붕 요사체다.

 

월명암 월상원 현판

 

월명암 누안당 현판

 

월명암 월상원

 

 월명암 열정각

 

월명암 열정각, 뜨거운 물이 솟는 우물

 

 

 월명암과 면선각

 

월명암은 다실로 이용되고 정면에 월명암 현판이 걸려 있고 옆면에는 면선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면선각 뒤 연꽃 

 

면석각 뒤 연못엔 소담스런 연꽃이 만발하였다.

 

싱싱하고 건강한 연잎에 연꽃이 참으로 아름답다.

 

 

◎ 부설전에 전해온  전설

 

부설전(浮雪傳)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0

 

부설전은 월명암을 창건했다는 부설거사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 내용을 보면 부설이 태어나면서 부터의 행적과 월명암에서 함께 수도생활을 한 영조, 영희 두 스님과의 법담과 부설거사의 오도송이 기록되어 있고 사부송과 팔죽시도 함께 기록되어 있으며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월명암에 얽힌 수많은 전설 속에서 부설전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월명은 오빠 등운과 함께 발심하여 수도하고 있을 때 월명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부목이 월명에게 정을 품고 접근하였다. 월명은 그 부목의 간절한 요구를 물리쳐야 할 것인가 어떤가를 오빠 등운에게 의논하였다. 등운은 부목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이라면 한번쯤 허락해도 좋다고 했다. 월명은 부목에게 자기 몸을 주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등운은 그 일에 대하여 누이 월명에게 소감을 물었다. 월명은 “허공에 대고 장대를 휘두르는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뒤 부목은 다시 관계를 요구해 와 월명은 다시 오빠 등운에게 의견을 물었다. 등운은 한 번 더 들어주어도 무방할 것이라 하였다. 두번째의 소감을 물으니, 월명은 “진흙탕에서 장대를 휘젓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뒤 부목은 다시 세 번째로 월명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월명은 오빠 승낙을 받고 부목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였다. 세번째로 오빠가 소감을 물으니, 월명은 “굳은 땅에 장대가 부딪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등운은 월명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운은 월명에게 “깨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결단을 요구했다. 오빠는 동생에게 “깨치는 길은 오직 부목을 죽이는 것뿐이다.”고 했다. 애욕과 견성의 두 갈래 길에서 월명은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했다. 부목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숯불이 새빨갛게 피어오를 무렵, 월명은 부목에게 숯불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월명의 부탁을 받은 부목은 무심코 허리를 굽혀 아궁이 안에 반신을 들여 밀고 숯불을 고르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월명이 그의 몸을 힘껏 아궁이 안으로 밀어 넣고 부목이 아궁이에서 나오려고 하자 등운이 발로 차서 못 나오게 밀어 넣었다. 부목은 그만 죽고 말았다. 

 

등운은 월명에게"이제 우리는 살인자다. 살인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법이니 우리가 지옥으로 가지 않으려면 깨치는 것뿐이다. 지옥이냐, 깨치느냐의 두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그 날부터 용맹 정진하여 드디어 이레 만에 깨달았다.

 

한편 불의의 화로 저승에 간 부목의 영혼은 염라대왕에게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등운과 월명을 처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염라대왕은 차사를 보내어 월명과 등운을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입선 중이어서 못 잡아갔다. 등운은 부목을 죽인 전후의 사연을 자세히 써서 염라대왕에게 보내며, “나를 잡으려면 모래로 밧줄을 꼬아서 해를 묶어오는 재주가 없다면 나를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르니 염라대왕은 그의 구도심에 감동하여 그를 용서하고 잡아가지 않았다.

그 후 두 남매는 성불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걸림없이 살 줄 알라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 법보장경 -

 

 

◎ 월명암 마당에서 바라 본 내변산 아름다운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