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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이야기

2023.01.29. 경남 하동 율찰대본산 쌍계총림 삼신산 쌍계사

by 하여간하여간 2023. 1. 30.

2023년 1월 29일 지리산둘레길 13구간을 오전에 걷고, 오후에 하동 쌍계사를 탐방한다. 하동 쌍계사는 워낙 유명한 절집이고 여러번 둘러보았기에 친근하지만 이번엔 좀더 자세히 살펴보러 한다. 특히 신라 때 최치원 선생이 직접 문장을 짓고 썼다는 진감선사탑비에 새겨진 知異山 이란 글자에 대하여 관심이 크다. 

 

최치원 선생은 왜 智異山(지리산)을 知異山으로 썼을까?

신라때는 지리산 명칭은 知異山이였을까? 나중에 智異山으로 바뀌었을까?

 

◆ 하동 삼신산 쌍계사

 

◎ 화계장터 입구에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율종본찰  율찰대본산 쌍계사」 표지석

 

화계장터 입구에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율종본찰  율찰대본산 쌍계사」 표지석

 

대한불교 조계종 율종본찰 율찰대본산 쌍계총림 삼신산 쌍계사(雙磎寺)

대한불교 조계종 율종본찰 율찰대본산 쌍계총림 삼신산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3년(724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 보물 9점(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 대웅전 삼세불탱-보물1365호, 대웅전 목조 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쌍계사 괘불-보물 제1695호, 쌍계사 감로왕도-보물 제1696호, 쌍계사 동종-보물 제1701호) 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적묵당, 설선당, 육조정상탑전, 팔상전, 사천왕상, 산중탱, 아미타후불탱, 불경책판 등의 20점의 지방지정 문화재, 총 30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선교율, 차와 범패의 근본 도량 쌍계총림 쌍계사

 

쌍계사는 여러 문화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선사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의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현재 혜능대사의 정상이 모셔진 금당(金堂)에 금당선원이 있어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강원(傳統講院)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어 바야흐로 선맥과 강맥, 그리고 율맥의 법통이 바로선 수행도량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최치원의 철장서 '쌍계(雙磎)'와 '석문(石門)'

쌍계사 입구에는 두 개의 큰 바위가 석문(石門)처럼 놓여 있고, 이 바위들에다가 최치원이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쇠지팡이로 새겨 놓았다고 해서 철장서(鐵杖書)라고도 불린다.

 

 

최치원선생 글씨라고 하지만 최치원 선생이 직접 쓴 「진감선사탑비」 글씨체와 비교해 보면 최치원 선생 필체는 아닌 것 같다.(내 생각) 쇠지팡이로 써서 그럴까? 그래도 아니다.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최치원 선생이 쇠지팡이로 썼다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믿어야지~

 

◎ 최치원 선생의 글씨체

 

당에서 돌아온 지 3년만인 31세(887년) 때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이다. 본문 글씨는 구양순, 저수량은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안진경까지 떠올릴 만큼 당해의 전형적인 필법이 녹아 있다. 국운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것을 바로 잡을 기세라고나 할까 통일기의 미감이 긴장감 있게 붓끝에서 마감되고 있는 것이다. 굽은 듯하면서도 한없이 곧고 낭창낭창한 탄력적인 필획에다 해서의 전형답게 키가 크고 균제미가 뛰어난 짜임새이다.

 

쌍계사 입구 암벽에 세겨진 쌍계(雙磎)와 석문(石門) 진각선사탑비의 최치원 글씨체와 비교하면 최치원 선생 글씨가 아닌것 같다란 나의생각이다.

 

호리병속 별천지 화개동 안내판에 소개된 최치원 철장서 쌍계(雙磎), 석문(石門) 내용이다.

 

쌍계사 석문 밖에 문 같이 생긴 바위에 새겨진 각자이다.

헌강왕(875~886)이 최치원에게 '쌍계석문'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왼편 바위는 타원현으로 쌍계가 오른편 바위에는 마름모꼴로 석문이 각 각 음각되어 있다. 

쌍계사 입구 수문장처럼 서 있고, 법계와 속계의 경계를 짓는 듯 하다. 최치원이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조선시대 유자나 승려들의 입에 오르 내릴 정도로 지리산 유람의 명소였으며, 후대인에게 시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쌍계사매표소를 지나서

 

 호리병 속의 별천지(壺中別有天) 쌍계사와 불일폭포

고려 제21대 왕 희종이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에게 ‘불일보조(佛日普照)’란 시호를 내린 것에 유래하여, 지눌이 수도하며 머문 곳 일원을 ‘불일’이라는 명칭을 붙여 불일폭포, 불일평전, 불일암이라 부르고 있다.

불일사상의 요람인 쌍계사는 724년(신라 성덕왕 23년)에 옥천사로 창건하고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대사가 1632년(인조 10년)에 중건한 것이 지금까지 이른다.

한국 유학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최치원은 쌍계사 가람이 사찰 입구에 있는 일주문부터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인 대웅전까지 점차 확장되는 영역의 모습이 호리병 형태와 닮은 데다가 별천지 같다 하여 ‘호리병 속의 별천지(壺中別有天)’로 묘사했다.

 

 

◎  삼신산 쌍계사

 

쌍계총림 산신산쌍계사 종합안내판 앞에 섰다.

 

삼신산이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보하이 만[渤海灣]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말한다.

 

삼신산 쌍계사의 삼신산은 지리산을 말한다.

 

 

삼신산 쌍계사

 

쌍계사는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이라고 불리는 지리산의 남록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산이다.

쌍계사는 서기 723년(신라 성덕왕 22년)에 삼법, 대비 두 스님이 당나라 6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대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雪裏葛花處)을 찾아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은 것이 처음이다.

서기 830년 진감해소(774~850)국사께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삼법, 대비스님의 옛 절터에다 육조 영당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라 하시고 이곳에서 선과 불교음악인 법패를 가르치다 77세로 입적하셨다. 그 후 정강왕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고 산문밖에는 두 시내가 만난다 하여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리셨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 혜수 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벽암, 소요, 인계, 법훈, 용담스님 등이 중창을 하였고, 1975년부터 고산스님에 의해 복원, 중수 중창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의 사격을 갖추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과 불일암이 있고 문화재로 국보1점, 보물 9종,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3점, 기념물 1점, 문화재자료 5점을 보유하고 있다. 

 

◎  쌍계사 가람배치

 

 

전각과 중요문화재

쌍계사는 구위(舊位)인 금당영역과 신위(新位)인 대웅전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숭정(崇禎)* 연간(1628~1644)의 중창 이후 진감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영역과, 벽암각성스님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영역의 두 공간으로 분할되는 독특한 가람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즉 청학루 · 팔상전 · 금당으로 이어지는 금당영역과, 일주문 · 팔영루 ·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대웅전영역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금당영역은 남북의 축선(軸線)을, 대웅전은 동서의 축선을 갖게 되어 두 영역이 서로 직교(直交)하는 가람배가 형성되었다.

또한 금당영역의 정면에 있던 진감선사대공탑비는 그대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대웅전은 서향을 취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두 영역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된 것은 구위가 터가 좁다는 입지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지세를 살펴보면, 금당영역은 국사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여 가람조성을 하단 · 중단 · 상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배경이 되는 산봉우리는 지리산의 주봉인 토끼봉 · 형제봉으로 이루어지며, 금당영역은 특별히 주산(主山)의 의미보다는 남북의 방위개념이 두드러진다.

 

지금의 대웅전영역은 삼신봉(三神峰)을 주산으로 하여 쌍계를 끼고 있는 동에서 서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산지가람을 형성하기에 알맞다고 할 것이다.

 

현 쌍계사 사역 전체가 도지정 기념물 6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숭정(崇禎) : 명 왕조 마지막 17대 황제인 毅宗 朱由檢의 年號임. 연간(1628~1644)

 

◆ 하동 쌍계사 금당영역

1875년 枕溟罕醒스님이 쓴 현판에 의하면, 구위라 하여 금당(金堂)과 동서방장(東西方丈)과 팔상전(八相殿) ·영주당( 瀛洲堂) · 방장실(方丈室) · 봉래당(蓬萊堂) · 청학루(靑鶴樓)를 들면서, 금당이 초창시 육조의 경당(影堂)이고 팔상전이 옛날법당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영주당 · 봉래당 · 동서 방장 등의 전당들은 한라산 · 금강산 · 지리산의 이칭인데, 이는 곧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산숭배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쌍계사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진감국사비문을 보면 진감스님이 지리산 국사암에서 선문을 열어 선법을 전파하니 많은 신자들이 다투어 모여들게 되어, 국사암 남쪽인 지금의 금당영역으로 옮겨와 선(禪)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금당은 육조 영당이고 팔상전은 법당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초기 선종(禪宗) 가람의 특징으로서 탑과 회랑이 없고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에 대한 의미보다는 육조 혜능에 대한 존경과 조사에 대한 숭배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있다. 1980년부터 2003년까지 동서 방장 · 팔상전 · 영주당 ·봉래당을 중건하고 성보전과 방장실을 새로 건립하여 금당, 청학루, 팔상전, 영모전, 동서 방장, 선방인 영주당, 방장실, 성보전 등이 현존하고 있다.

 

금당(金堂)은 육조혜능대사의 정상(頂相 머리)을 모신 곳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의 근본도량이라 할 수있다. 서기 724년 삼범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혜능의 정상을 모시고 눈속에 칡꽃이 핀곳을 찾아 봉안한 것이 그 시초이다. 금당은 원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의미하는데, 육조혜능대사의 정상을 봉안하고 금당이라고 이름한 것은 조서의 가르침을 중시한 선종사찰의 특징이다. '금당(金堂)' 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 租宗六葉)' 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금당성지를 2023.09.03. 둘러 볼수가 있었다.

 

 

 

◎ 하동 쌍계사 청학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청학루는 진감선사가 창건당시에 세운건물로서 처음 승려가 되는 이들이 수도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인계화상 우하화상 범성화상 등이 새로 고쳐 지었고, 지금의 건물은 1930년에 쌍계사 주지 손민 화상이 손질하여 고쳤다. 청학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산의 경계면에 지어서 앞에서 보면 2층의 다락집 형태인 누각이며 뒤에서 보면 1층이다. 거대한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글고 굵은 참나무 기둥을 세워 마루를 얹었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1979년에 고산화상이 손질하여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하동 쌍계사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나 조각상을 모시는 전각이다. 쌍계사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로,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형식으로 지어졌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 대웅전과 같은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 안의 기둥머리에는 장식이 많은데, 그 장식들을 안쪽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만들어 공간이 웅장하고 화려해 보인다. 또한 천정은 격자 모양으로 짜맞춘 우물 정자 청장이며, 가운데로 갈수록 점차 올라가는 층단을 두어 시야가 트이게 하였다. 불상을 모셔 둔 불단 뒤에는 진정 국사가 처음 세우고 나서 여러 차례 손질하고 고쳤는데, 지금의 건물은 1978년에 고산 화상이 고친 것이다.

 

 

◎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제 925호)

 

쌍계사 팔상전 영상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바탕 재질은 비단이며 크기는 가로 273cm, 세로 410cm이다. 화면 가운데에 본존인 석가여래가 결가부좌하였고 양옆으로 사천왕, 보살, 분신불, 팔부중, 제자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각이 형상에 일그러진 부분이 없고 문양 등 묘사가 치밀하며 붉은색계와 녹색계가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전된 느낌을 주는 우수한 그림이다. 그림에 기록된 기록에 따르면 숙종 14년(1688)에 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17세기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불화이다.

 

 

하동 쌍계사 팔상전 팔상도

 

 

◎ 금당 -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두상) 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25호)

 

육조정상탑전은 쌍계사의 개산(처음으로 산문을 연 것) 설화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삼범과 대비 두 화상이 신라 성덕왕 23년(725)에 중국 불교 선종의 제6대조인 혜능 대사의 정상(두상)을 모시고 와서, "설리감화처(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하라" 는 불보살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와 정상을 봉안하고 산문을 연 데서 유래한다. 그후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가 쌍계사 창건 당시에, 건물을 짓고 육조영당이라 하였다. 

 

건물 안에 있는 육조정상탑은 7층으로 용담선사가 세웠다고 하며, 주변 옥암사 터에서 옮겨 왔다고도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 없이 툇마루를 두어 지면과 떨어뜨린 것이 특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지어졌다.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낮아 건물이 작은데 비해, 기둥머리의 장식이 많고 커서 화려하고 장중해 보인다. 천장은 낮지만 건물안의 기둥장식들을 중앙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만들었고, 탑의 위쪽에는 작은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지금의 건물은 고산 화상이 1979년 고쳐 지은 것이다. 쌍계사 건물 가운데 균형미가 가장 돋보인다.

 

혜능대사 존영

 

◎ 봉래당

 

 

◎ 하동 쌍계사 영모전

 

 

영모전은 쌍계사의 창건주인 진감선사의 진영(동치2년, 1863)을 비롯하여 지눌대사의 진영, 사명,부휴,벽송,소요 호원 대사 등의 진영을 모신 곳으로, 인조 19년(1641)에 벽암이 고쳐 지었고 1978년 고산 화상이 새로 고쳐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모전은 불교의 진리와 중생에게 생명의 감로수를 내린 여러 큰 스님의 뜻을 길이 숭모한다는 뜻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단층 홀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포작을 짜지 않은 간결한 도리집으로 정면에는 모두 2분합의 세살문을 달았다.

 

◎ 서방장

 

 

◎ 동방장

 

 

◎ 영주당

 

여기까지는 2023.09.03. 금당영역을 둘러 볼 수 있어 다시 올린 내용이다.

 

◆ 하동 쌍계사  대웅전영역

 

대웅전영역이란 쌍계사의 제 2 중창주라 할 수 있는 벽암(碧巖)스님에 의해 세워진 영역으로,

쌍계사를 들어가는 초입부터 삼성각에 이르는 영역을 말한다. 현재 우리들이 쌍계사를 찾았을 때 접하게 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 초입인 석문에서부터 삼성각에 이르는 발자취를 따라 성보(聖寶)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따라서 그 초입인 쌍계석문을 지나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거치면 웅장한 누각인 팔영루를 만난다. 팔영루 양쪽으로 스님들의 거처인 설선당, 적묵당이 자리잡고 있고 높은 계단 위에 대웅전이 위엄있게 황장봉을 서향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화엄전이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다.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절묘하게 어울려 자리잡고 있다.

 

 -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 - 팔영루 - 설선당 - 적묵당 - 대웅전 - 나한전 - 명부전 - 삼성각 - 화엄전 순이다.

 

◎ 삼신산쌍계사 일주문

 

하동 쌍계사 일주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86호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쌍계사 일주문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암 화상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에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쳤다. 일주문으로는 드물게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올렸다. 건물 높이에 비해 지붕이 넓지만 추녀 밑에  받침 기둥을 세우지 않고, 기둥의 앞 뒤에 보조 기둥을 세워 지붕을 안전하게 받치고 있다. 처마는 2단으로 있는 겹처마이며, 처마를 받치는 기둥머리 장식이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이어서 화려하다. 또 기둥머리 장식 부재가 가늘고 섬세한 점 등 장식성이 강한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건물이라고 할 수있다.

 

 

삼신산 쌍계사 일주문 주련

入此門內莫存知解 (입차문내막존지해)    이 문안에 들어서면 알음알이 두지 말라

無解空器大道成滿 (무해공기대도성만)    알음아리 비운 그릇에 대도가 가득차리라.

 

◎ 삼신산 쌍계사 금강문

 

하동 쌍계사 금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27호

 

금강문은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로 나오는 문이다.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치치는 금강역사가 모셔져 있는 문으로 쌍계사 금강문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다.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암 화상이 고쳤으며, 문 앞에는 벽암이 쓴 현판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79년에 고산 하상이 손질하여 고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이 높고 기둥의 장식들은 단순하다. 처마는 2단으로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양옆에는 비바람을 막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 가운데 칸을 열어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양옆 칸의 바닥에는 지면에서 약 45cm 가량을 높여서 마루를 갈았다. 왼뽁에는 부처님을 보호하며 비밀스러운 내용을 들으려 하였다는 밀적금강이 있고, 오른쪽에는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나라연금강이 있다.

 

 

 

쌍계사 금강문 주련

 

品類無邊形色別 (품류무변형색별)    품류가 갓이없고 형색이 다르지만

隨其願力現神通 (수기원력현신통)    그 원력을 따라 신통을 나투어서

奉行佛法常爲護 (봉행불법상위호)    불법을 봉행하고 늘 보호하며

利益衆生一切同 (리익중생일체동)    중생모두 하나같이 이익되게 하도다.

 

 

◎ 삼신산 쌍계사 천왕문

 

하동 쌍계사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26호

 

천왕문은 절에 들어설 때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지나게 되는 세 번째 문으로,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사천왕은 부처님께 귀의(믿고 따름)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4명의 수호신이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지국천왕, 남쪽에는 증장천왕, 서쪽에는 광목천왕, 북쪽에는 다문천왕이 있다.

쌍계사 천왕문은 조선 숙종 30년(1740)에 백봉화상이 지었고, 순조 25년(1825)에 고쳐 지었으며 1978년에 고산 화상이 다시 고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맛배지붕이다.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머리에 짜 맞춘 공포를 단순하게 만들어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이 든다. 천왕문 안에 보셔 둔 사천왕은 나무로 조각 되었는데, 조각 솜씨가 뛰어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26호로 지정 되었다.

 

천왕문 현판

 

동방 지국천왕

수미산 동쪽을 수호하는 신으로 한 손에 비파를 들고 있다. 노래를 전문으로 부르는 건달바를 거느리고 계시며, 평화의 노래가 넘치게 해서 밝은 지혜를 준다.

 

남방 증장천왕

수미산 남쪽에 살며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을 소생시킨다 하여 증장이라고 하며, 중생의 이익을 증대시켜준다. 손에는 칼을 잡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

눈을 부릅뜨고서 서쪽을 수호하며 손에 여의주와 용을 쥐고 있다. 온 우주 모든 생명의 마음을 본다고 하며, 큰소리와 웅변으로 온갖 악귀를 물리친다.

 

북방 다문천왕

수미산 북쪽을 지키며 부처님의 설법을 빠짐없이 듣는다 해서 다문천왕이라고 한다. 손에 불탑과 창을 지니고서 불법을 수호하며 나찰과 야차를 권속으로 부린다.

 

 

쌍계사 천왕문 주련

梵王帝釋四天王 (범왕제석사천왕)    범천왕과 제석천왕 그리고 사천왕이

佛法門中誓願堅 (불법문중서원견)    불법을 수호하는 서원이 견고하여

列立招提千萬歲 (열립초제천만세)    가람 주위 늘어서서 천만년을 수호하니

自然神用護金仙 (자연신용호금선)    자연스런 신통묘용 부처님을 보호하네

 

◎ 삼신산 쌍계사 팔영루

 

하동 쌍계사 팔영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74호

 

팔영루는 진감 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무로기를 보고 8음률로 "범패(梵唄) 또는 어산(魚山)" 이라는 불교음악(우리 국악의 시초이기도 함)을 작곡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감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쌍계사 창건 당시 팔영루를 세웠고, 그 뒤 조선 중종 4년(1509)에 중섬 선사가 고쳐 짓고, 문신인 어득강에게 글을 부탁하니, 어득강이 서문과 팔영을 찬양하는 8수의 한시를 지어 놓았다고 한다. 이후 인조 19년(1641)에 벽암 화상이 쌍계사를 다시 지을 때 대웅전과 함게 팔영루를 고쳐 지었고, 1979년에 고산 화상이 새로 손질하여 고쳤다.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인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이 사람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부처나 보살을 모시지 않은 곳이어서 처마를 받치는 기둥머리 장식은 없지만, 처마는 2단인 겹처마로 만들었고 단청도 화려하다. 팔영루는 우리 민족에게 맞는 범패를 만들어 내고 범패의 명인을 교육했던 뜻 깊은 곳이다. 

 

 

쌍계사 팔영루 주련

塵墨劫前早成佛(진묵겁전조성불)    진묵겁전에 일찌기 이미 성불하셔서 

爲度衆生現世間(위도중생현세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바세계 출현하시니 

巍巍德相月輪滿(외외덕상월륜만)    덕높으신 부처님 상호 보름달처럼 원만하여

於三界中作導師(어삼계중작도사)    삼계화택 가운데 대도사가 되시었네.
實際成法八萬門(실제성법팔만문)    실제에 맞춘 법 팔만문을 이루시니

門門可入得解脫(문문가입득해탈)    문문마다 들어가면 해탈을 얻으리라 

 

◎ 하동 쌍계사 범종루

 

쌍계사 범종루 주련

願此鐘聲遍法界(원차종성편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의 어두움을 다 밝게하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삼악도의 지옥고통 모두 멸하여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三神山中梵鐘樓(삼신산중범종루)    삼신산의 범종루 장엄한 곳에서  

金聲玉振大千界(금성옥진대천계)    금옥과 같은 소리 대천세계 진동하니 

雲上靑鶴徹天外(운상청학철천외)    구름위의 청학이 하늘밖을 궤뚫었고 

晧月精明印雙磎(호월정명인쌍계)    환한 달빛 맑고밝아 쌍계수에 인(印)을 치네.
 

 

범종루 사물(범종, 홍고, 운판, 목어)

범종루에는 범종, 홍고, 운판, 목어 이렇게 사물이 있는데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북으로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구름 모양의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나무로 만든 물고기 형상의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 하동 쌍계사 적묵당

적묵당은 불도를 닦는 스님 중 처음 배우는 자가 수행하던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가 세웠다.

조선 인조 19년(1641)에는 벽암선사가 넓혀 짓고 1978년에는 고산 스님이 고쳐 지었다. 정면 6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현재 쌍계사 강원 스님들의 정진처로 쓰이고 있다. 정면에는 회산 박기돈(1873~1948)이 쓴 ‘적묵당’이 걸려 있다.

 

쌍계사 적묵당 주련

身和同住用身一(신화동주용신일)    몸이 화합하여 함께 주하니 한가지로 행동하고 

口和無諍同口說(구화무쟁동구설)    입을 화합하여 다툼이 없으니 한가지로 말하고 

意和無違一心行(의화무위일심행)    뜻을 화합하여 어김없으니 한마음으로 행동하고 

見和同解無等觀(견화동해무등관)    견해가 화합하여 한가지로 알아 짝없이 관하고 

戒和同遵眞修行(계화동준진수행)    계법을 화합하여 함께 준수하니 참다운 수행이요 

利和同均心平等(이화동균심평등)    이익을 화합하여 함께 나누니 마음이 평등하도다 

如是行者能得道(여시행자능득도)    이와같이 수행하는 이는 능히 도를 이루리라.
 

◎ 하동 쌍계사 설선당

 

 

쌍계사 설선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53호

 

설선당은 학인 승려들의 교육장소로, 승려들이 불경을 공부하는 곳이다. 진감 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대웅전과 함께 설선당을 처음 지었으며, 이후 1641년과 1801년에 고쳐 지은 것을 1975년에 고산 화상이 다시 손질하고 고쳐지었다. 건물은 정명 7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쌍계사 설선당은 산중대중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발우공양(스님들이 예법에 따라 식사 하며 수행하는 일)하는 곳으로 사용한다.

 

 

쌍계사 설선당 주련

雲山說有千萬事(운산설유천만사)   운산처럼 천만법문 설하였으나 

海天廣茫本無言(해천광망본무언)   하늘과 바다 넓고넓어 본래부터 말이없네

黃鶯上樹千里目(황앵상수천리목)   노란 꾀꼬리 나무에 오르니 천리보는 눈이요

鶴入田地心豊富(학입전지심풍부)   학이 밭에 드니 마음이 풍부하도다.

色求有色還非實(색구유색환비실)   색으로 경계를 구한다면 도리어 실답지 않고

心到無心始乃明(심도무심시내명)   마음이 무심경계 이르러야 비로소 밝아진다

行李整收方丈入(행리정수방장입)   행장을 거두어서 방장에 들어가니

天雲散盡日輪晴(천운산진일륜청)   구름걷힌 하늘에 태양이 빛나도다.

 

 

◎ 하동 쌍계사 대웅전

 

하동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 500호

 

쌍계사 대웅전은 진감선서가 문성왕 2년(840) 창건 당시에 세운 건물인데 임진왜란(1592~1598) 때  불탔던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으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쌍계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에는 삼존불과 사보살을 모셨다. 우리가 부처님을 마주하고 서 있는 정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좌축에는 아미타불 등 삼존불을 모셨고 석가모니불 좌 우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약사여래불 우측에 일광보살을 그리고 아미타불 좌축에는 관세음보살 등 사보살을 모셨다. 이렇게 삼존불 사보살을 모신 단을 상단이라 하고, 좌측으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을 수호한다는 화엄신장을 모신 단을 중단 또는 신중단이라 하고, 맨 왼쪽에 영가(돌아가신분)를 모신 단을 하단 또는 영단이라고 한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기둥이 높아 전체적으로 건물의 규모가 크게 느껴진다. 건물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 위로는 지붕 모양의 닫집을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선 시대 불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시방중)    불신이 널리 시방세계에 두루하사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모든 부처님 한결 같으시니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넓고 크신 원력 구름같이 다함없고  
汪洋覺海玅難窮(왕양각해묘난궁)    망망한 깨달음의 바다 궁구할 수 없도다.  

廣大淸淨妙莊嚴(광대청정묘장엄)    광대하고 청정한 묘한 장엄이여   
衆會圍遶諸如來(중회위요제여래)    운집한 사부대중이 부처님을 에워쌌네.
  

 

◎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보물 제1378호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나무로 만든 칠존불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의 삼불 좌상과 일광, 월광, 관음, 세지보살의 사보살 입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가모니불은 쌍계사 대웅전 내부 가운데 모셔저 있고 그 양 옆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놓여 있으며 약사불과 아미타불의 좌우에 사보살 입상이 서 있다.  삼불 좌상의 높이는 172~203cm이고, 사보살 입상 높이는 177~ 186cm이다. 
이 칠존불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청헌 스님 등 11명의 승려 화가가 만들었다. 불상의 재료는 붉은 소나무 이지만 불상 어께 위로 길게 드리워진 머리 카락은 황토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불상의 손과 발은 따로 만들어 끼웠고 등 뒤에는 복장구*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석가모니불은 옷차림 형식이 17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복장구 : 불상 안에 금은보화나 불경등의 유물을 넣어 두는 구멍

 

◎ 쌍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 주련

 

身在海中休覓水(신재해중휴멱수)     몸이 바다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말고 

日行嶺上莫尋山(일행영상막심산)     날마다 봉우리에 행하면서 산을 찾지말라   

鶯吟燕語皆相似(앵음연어개상사)     꾀꼬리 울음과 제비의 지저귐이 다 비슷하니 

莫問前三與後三(막문전삼여후삼)     전삼과 다만 후삼을 묻지말라.
莫謂慈容難得見(막위자용난득견)     부처님의 자비상호 보기 어렵다 하지마라 

不離祇園大道場(불리기원대도량)     기원정사 대도량을 여의지 않았도다.
 

 

 

 

 

 

◎ 하동 쌍계사 첨성각

 

 

쌍계사 첨성각 주련

 

三神山色凌空碧(삼신산색릉공벽)     삼신산(지리산)의 푸른색은 하늘빛을 능멸하고 

雙磎活水通海流(쌍계활수통해류)     쌍계골에 흐르는 활수 바다로 통했는데 

講經榻下虎常臥(강경탑하호상와)     강의하는 걸상아래 범처럼 누워있는 

這個一條柱杖子(저개일조주장자)     이낱 주장자의 한 소식은 

不屬於佛法與僧(불속어불법여승)     불‧법‧승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네.

 

◎ 쌍계사 나한전

 

 

하동 쌍계사 나한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료 제 124호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오맥 명의 나한 중에서 열여섯 명인 십육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은 인간 세계의 온갖 번내를 끓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자를 말한다.

쌍계사 나한전의 십육 나한상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쪽 옆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 전각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쌍계사 창건 당시 처음 세웠으며, 조선 인조 19년(1614)에 벽암 화상이 고쳐지엇다고 전해진다.

건물은 정명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크기가 작고 장식도 없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이 든다. 건물의 아래를 받치는 기단을 높게 쌓아 주변의 대웅전, 명부전과 균형을 맞추었다.

 

 

쌍계사 나한전 주련

靑蓮座上月如生(청련좌상월여생)   푸른연꽃 자리위에 보름달이 환하듯

 三千界主釋迦尊(삼천계주석가존)  삼천대천세계 주인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紫紺宮中星若列(자감궁중성약렬)  거룩한 천상궁전에 뭇별이 늘어서듯 

 十六大阿羅漢衆(십육대아라한중) 열여섯분 대아라한님 엄연히 계시도다. 

 

 

◎ 하동 쌍계사 삼성각

 

쌍계사 삼성각 주련

 

雖宣雲山千萬事(수선운산천만사)    비록 산의 구름처럼 천만법문 설하였으나  

海天明月本無言(해천명월본무언)    바다와 하늘과 명월은 본래부터 말이 없네.   

黃鶯上樹一枝花(황앵상수일지화)    노란 꾀꼬리 나무에 오르니 한송이 꽃이요.  

白鷺下田千點雪(백로하전천점설)    백로가 밭에 내리니 천점의 눈이로다.
  

 

◎ 쌍계사 화엄전

 

 

쌍계사 화엄전 주련

一光東照八千土(일광동조팔천토)    부처님 백호광명 동으로 팔천토를 비추시니

大地山河如杲日(대지산하여고일)    산하대지가 일월처럼 밝아지도다

卽是如來微妙法(즉시여래미묘법)    이것이 곧 여래의 미묘한 법문이니

不須向外謾尋覓(불수향외만심멱)    모름지기 밖을 향해 부질없이 찾지말라.

 

 

◎ 하동 쌍계사 목판 대장경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85호

 

화엄전에 봉안된 쌍계사 목판 대장경은 1603년에 제작된 보물 선원제전집도서 22판, 1604년에 제작된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11판, 1611년에 제작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335판 등이 있고, 국가지정과 지방지정등이 있다. 목판 대장경의 전체 수량은 불경과 불교 관련 서적 등 총 33종 1,743판이다. 쌍계사는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경판을 보유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주로 1603년에서 1903년 사이에 여러 차례 제작된 것이다.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에서 제작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과 쌍계사 본사와 국사암 칠불암 등에서 제작한 것이 있다. 능인암 판은 대부분 1603~1604년에, 국사암판은 1903년에 제작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간행되었다. 쌍계사 화염전에 봉안된 목판 대장경은 쌍계사의 오랜 역사와 함께하여 400여년에 걸친 목판 대장경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한편,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가 훼손되어 있지만 조선조 영조 2년(1726) '유당신라국지리산쌍계사교시진감선사비명병음각(有唐新羅國智異山雙磎寺敎諡眞鑑禪師碑銘并陰刻)'의 목판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쌍계사 목판대장경을 통해 각 시기에 읽힌 불경의 종류와 당대를 살았던 고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 문화 유산의 가치를 더해 쥰다.

 

◎ 하동 쌍계사 선원제전집도서 목판

보물

 

선원제전집도서 목판은 지리산 신흥사나 순천 송광사 계통의 판본을 바탕으로 복원된 것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 겨울 지리산 능인암에서 다시 새겨져 이곳 하동 쌍계사로 옮겨진 이후로 현재까지 22판이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져 전해지고 있다.
「선원제전집도서」는 당나라 규봉대사가 자신이 쓴 불교 교리집 선원제전집 100여권에서 요점만 간추려 정리한 책으로 서, 권상, 권하 세부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원제전집도서」에는 이책의 저술 목적이 제시되어 있으며 5가지 종류의 참선(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또한 선종과 교종을 비교한 내용과 이들이 화합할 수 있는 방편이 제시되어 있다.
권하 제25장과 제26장은 한 판에 양면에 2장의 글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한 면에 좌우로 2장씩 4장의 글이 새겨져 있어 목판은 좌우로 긴 사각형 모양이다. 현재 보각 경판과 중복 경판 3판을 포함하여 80장 22판이 완전한 구성으로 남아 있다. 

 

◎ 쌍계사 명부전

 

 

하동 쌍계사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23호

 

명부전은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과 명부(사람이 죽은 뒤 영혼이 가는 세계)의 10대 제왕인 시왕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13년(1687)에 성안 화상이 처음 지었고, 숙종 36년에 신민 화상이 보수하였다. 죽은 자가 생전에 지은 업보를 심판하여 그의 영혼이 가야할 길을 정한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기둥머리 장식이 간략하여 소박한 느낌이 든다. 건물 아래를 받치는 기단을 1단으로 낮게 쌓았는데, 중심 건물인 대웅전 보다 낮게 지으려 한 듯하다. 기둥머리의 장식물이 비교적 작고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한 점 등은 조선 후기의 수법으로 보인다.

 

 

쌍계사 명부전 주련

地藏菩薩誓願力(지장보살서원력)   지장보살님 크신 원력의 힘  

恒沙衆生出苦海(항사중생출고해)   항사같은 많은 중생 고해에서 건지시네 

十殿照律地獄空(십전조율지옥공)   시왕전 심판하고 지옥을 비우셔서 

業盡衆生放人間(업진중생방인간)   업이 다한 중생들 인간세계에 나게 하는도다. 

莫言地藏得閒遊(막언지장득한유)   지장보살 한가롭다 말하지 마오 

地獄門前淚不收(지옥문전누불수)   지옥문 앞에서 눈물 거두지 못하시네.
 

 

 

◎ 하동 쌍계사 해탈문

 

 

◎하동 쌍계사 육화요

 

하동 쌍계사 육화요 주련

 

◎ 하동 쌍계사 종무소

 

 

 

쌍계사 종무소 주련

八萬四千眞敎理(팔만사천진교리)     팔만사천가지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은 

無聞無說無盡法(무문무설무진법)     들음없고 설함없으며 다함없는 법이로다. 

一念普觀無量劫(일념보관무량겁)     한 생각에 무량한 세월 널리 관하니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     오고 감과 또한 머무름도 없도다 

如是了知三世事(여시료지삼세사)     이와같이 삼세의 일을 밝게 안다면 

超諸方便成十力(초제방편성십력)     모든 방편 뛰어넘어 십력갖춘 부처님 이루리라.
 

 

 

 

 

◎ 쌍계사 수각

 

 

◎ 하동 쌍계사 해행요

 

 

하동 쌍계사 해행요 주련

 

大道元無門(대도원무문)      큰 도는 원래 문이 없고

舌頭本無骨(설두본무골)      혀끝은 본래 뼈가 없도다

到處傳春色(도처전춘색)      이르는 곳마다 봄빛을 전함에

柳綠又花紅(류록우화홍)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도다
處處菩提路(처처보제로)      곳곳이 깨달음의 길이요 

頭頭功德林(두두공덕림)      물건마다 공덕의 숲이로다

云何本來空(운하본래공)      이른 어찌 본래 공함인고?

明月滿空庭(명월만공정)      밝은 달이 빈뜰에 가득하도다

語黙與動靜(어묵여동정)      말하고 묵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皆是作佛事(개시작불사)      다 이 불사이거늘
日日勤行處(일일근행처)      날마다 부지런히 행하는 곳에

大道在其中(대도재기중)      대도가 그 가운데 있도다

 

◎ 쌍계사 성보전

 

 

성보전 주련

世尊四十九年說(세존사십구년설)    세존께서 사십 구년 동안 설하신 법문이

勸持黃葉啼兒止(권지황엽제아지)    황엽을 가져서 아희 울음을 그치게 권합이로다 

黃葉亦在無孔笛(황엽역재무공적)    황엽이 또한 구멍없는 젖대가 있어서 

爲君吹起太平歌(위군취기태평가)    그대를 위하여 태평가를 부르는도다

往古諸佛無去來(왕고제불무거래)    옛적의 모든 부처님께서 오고감이 없으신데 

歷代祖師何處去(역대조사하처거)    역대의 조사께서는 어느곳에 가셨는고? 

幻身隨緣數出沒(환신수연삭출몰)    환신은 반연따라 자주자주 나고 죽으나 

法身凝然本不動(법신응연본불동)    법신은 응연해서 본래 움직이지 않는도다.

雲藏古寺難藏聲(운장고사난장성)   구름이 옛절은 감추나 경쇠소리는 감추기 어렵고

雨濕江山不濕煙(우습강산불습연)   비가 강과산은 젖게하되 연기는 젖게하지 못하도다 

萬里長城初一石(만리장성초일석)   만리장성은 한덩이 돌로 시작되고 

恒沙功德始一行(항사공덕시일행)   항하사와 같은 공덕은 한가지 행으로 시작된다.
水底泥牛耕白月(수저니우경백월)   물밑에 진흙소는 흰달을 갈고  

中木馬驟淸風(운중목마취청풍)   구름가운데 나무 말은 맑은 바람을 몰아간다. 

生死路頭君自看(생사로두군자간)   나고 죽는 길 머리를 그대는 살펴보라 

活人全在死人中(활인전재사인중)   산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도다.
 

 

 

 

◆ 쌍계사 대웅전영역 국보, 보물, 문화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국보 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소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로,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로 애장앙 5년(804)에 당나라로 가서 신감 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고, 흥덕왕 5년(830)에 중국 선종의 법맥을 잇고 신라로 돌아와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지금의 쌍계사인 옥천사에서 입적하였다. 885년에 헌강왕은 혜소에게 진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대공령탑이라는 탑호를 내려 탑비를 세우도록 했다. 이 비석의 글은 최치원이 짓고 쓴 사산비명** 가운데 하나로 당대의 문장 연구의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전체 높이는 363cm, 비석 몸체의 높이는 213cm, 너비는 약 100cm, 두께는 22.5cm이다.

 

* 속성 : 스님이 되기 전의 성

**사산비명 : 신라 때 최치원이 남긴 네 편의 비명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환영스님이 새겼다. 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 쌍계사를 창건하고 역대 왕의 존경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 쌍계사에서 77세로 시적하였다.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혹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경은 2.3cm, 자수는 2,423자이다.

 

 

 

◎ 최치원 선생은 왜 智異山(지리산)을 知異山으로 썼을까?

* 진각선사탑비에서 지리산을 찾아보세요

 

참으로 궁금하다. 최치원 당시에는 지리산을 知異山으로 썼을까? 아니면 최치원이 잘 못 썼을까? 당대의 최고 문장가요 석학인 최치원이 잘 못 쓸리는 없고 언제부터 지리산을 智異山으로 썻는지가 의문이다.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교수를 역임하신 최석기 교수님이 쓴 《남명과 지리산》 15p. "智異山은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에서 보이기 사작하여~~" 라고 했는데, 정작 최치원이 직접 쓴 진각선사탑비에는 知異山이라고 썼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 하동 쌍계사 구층 석탑

 

하동 쌍계사 구층 석탑

이 탑은 고산 화상께서 인도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모니부처님 진시사리 3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시사리 2과 그리고 전단나무 불상 일존을 모셨다. 이 탑은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유사한 형식으로 불기 2541년(서기 1988년) 1월 3일 시공하여 불기 2534년(서기 1990년) 3월 15일에 완공하였다. 발심 서원한 백창기 부부의 단독 시주로 이루어졌다.

 

 

◎ 하동 쌍계사 마애여래좌상

 

 

하동 쌍계사 마애여래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48호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일컫는 말로, 쌍계사 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큰바위에 불상을 두꺼운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불상 둘레를 깊이 파내어, 불상을 작은 방에 모셔 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가 크고 얼굴에 살집이 많으며 귀가 어깨까지 처진 모습이 자비로와 보인다. 손은 옷으로 덮어 있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아주 소박하여 부처님이라기보다눈 스님처럼 보이는 특이한 약사여래불이다

 

◎ 하동 쌍계사 석등

 

하동 쌍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28호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아니라 부처의 진리를 빛으로 비춰 중생을 깨우치고 선한 길로 이끈다는 뜻도 있다. 쌍계사 석등에는 등불을 놓아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과 그 위에 얹는 지붕들이 없어서 본디 모습을 알기 어렵다. 위 받침돌은 여덟 잎의 연꽃이 위로 솟게 조각하여 대칭을 이룬다 받침돌에 새긴 연꽃무늬는 입체적이고 사실적이지만 석등의 기둥은 가늘고 길며 단순한 형태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쌍계사 마애 삼존불

 

 

 

 

◎ 하동 쌍계사 부도전

쌍계사 부도전은 절집의 명성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

 

삼신산쌍계사사적비명병서

 

 

 

◆ 지정 문화재

 

다음 자료는 쌍계사 홈페이지 자료를 활용하여 여기 소개한다.  

 

◎ 진감선사 부도(보물 제380호)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이 탑은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고 위는 머리장식부분이다.

기단은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렸다. 그 위로 다시 솟은 연꽃무늬를 새긴 윗받침돌을 올려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다. 기단 위에는 두꺼운 괴임돌이 삽입되어 눈에 띄는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있다. 탑신의 몸돌은 밋밋한 8각이다. 지붕은 넓으며 밑면에는 서까래인 듯 보이는 받침을 두고 있다. 추녀는 끝에서 위로 들려있고 여덟 곳의 귀퉁이 끝에는 아름다운 꽃조각이 앙증맞게 솟아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있고 짧은 기둥 위로 타원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모든 부재를 8각형으로 조성한 탑이며, 각 부의 비례가 적당하지 않고 조각도 생략되거나 형식화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탑비와 함께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제925호)

 

원래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던 불화로 1688년(숙종 14) 비단바탕에 조성되었으며, 화기에 따르면 당시 古法堂의 영산회탱으로 조성 ·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상내용을 살펴보면 전체 화면은 3분의 1 가량을 중앙의 본존불이 차지할 정도로 크게 묘사하였고, 그 아래로 협시보살인 문수 · 보현이 시립하고 있다. 그 옆으로부터 계단식으로 각각 사천왕, 4보살, 6제자, 4여래, 6위의 용왕과 대신 등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광배 화염을 따라 20위의 화불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인 비교적 단순한 구도이다.

본존은 둥글고 풍만한 상호에 이목구비가 아담한 원만상이며, 오른손은 어깨 높이에, 왼손은 배에 댄 설법인 수인을 취하고 있다. 또한 우견편단으로 내놓은 오른쪽 어깨로 인해 더욱 건장한 인상을 주고 있다.

화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應慧비구가 說明하였고, 畵圓비구는 嘉善大夫 天信 · 一行 · 處澄스님이다. 화원들 가운데 천신비구는 보물 제578호인 여수 興國寺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1693년)에도 화원으로 참가하였고, 처징스님은 복장을 시주하였다. 시주자 15명 가운데 눈에 뛰는 인물은 後排施主者인 義森비구인데, 1711년 국사암을 중창한 스님이다. 또한 丁時翰의 기행서인 산중일기에 보면 1686년 8월에 방문했을 때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玉軒비구만이 山中碩德秩에 보이고 있다.

총고 402⨉총폭 291.5㎝, 화고 377⨉화폭 272㎝이다.

 

 

◎ 대웅전 삼세불탱(보물 제1364호)

 

중앙의 석가모니불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약사불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도를 배치한 삼세불탱화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석가모니불도는 화면 상단 중앙에 큼직하게 본존불을 그린 다음, 좌우 대칭이 되게 문수·보현을 비롯한 8대보살과 제석·범천, 2위의 타방불, 가섭·아난존자를 비롯한 10대제자, 용왕·용녀와 6금강, 2위의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은 17∼18세기 유행의 전형적인 키 모양의 광배에 악귀를 물리치는 뜻을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뾰족하며,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귀·눈·입·코 등은 단정하나 몸의 형태가 네모꼴을 이룸으로써 18세기 후반의 불화들에서 나타나는 경직성을 느끼게 한다.

약사불도는 아미타인과 같은 손모양을 하고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게 일·월광보살을 비롯한 6대보살과, 2위의 사천왕, 12신중을 그려 놓았다. 전반에 걸쳐 인물의 형태와 색채 및 표현기법 등은 석가모니불도와 유사함을 보이나, 아미타불도와 함께 화면 구성이 다소 느긋함을 볼 수 있다.

아미타불도는 주불을 비롯하여 주위에 빙둘러서 관음·세지보살을 포함한 8대보살과 2위의 사천왕, 2위의 타방불, 마치 16나한의 모습과도 같은 10대제자를 배치시켜 놓았다. 이 삼세불도는 18세기 전반 전라도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대표적 불화승 ‘의겸’으로부터 1780년대의 ‘승윤’ ‘평삼’으로 이어지는 불화승의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형태를 갖춘 18세기 후반의 대형불화로서 비교적 정교한 필치와 화려하면서도 은은함을 보여주어 화풍파악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 팔상전 팔상탱(보물 제1365호)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탱화란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 법당에 걸 수 있게 만든 불교그림을 말한다.

팔상탱의 여덟 장면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팔상탱은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폭의 장면은 건물과 구름·나무·산을 이용하여 구분짓고, 각 장면마다 이에 따른 내용을 적어 놓고 있어 그림을 이해하기에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각 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수목의 표현은 도식적이지 않고, 일반회화 속의 나무와도 같아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각 폭마다 동일하게 화면의 아랫부분에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았는데, 이 기록을 통해 옹정 6년, 즉 1728년에 일선·후경·명정·최우·원민·처영·신영·영호 등 8명의 승려화가들에 의해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패널형식의 각 폭 모두 주요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나타낸 간단한 구도로, 전체적인 구성이 1725년에 그려진 순천송광사팔상도와 비교할 때 색채만 약간 다를 뿐 거의 같은 도상을 보여주고 있어 동일본을 사용하여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석가팔상도 가운데 예천용문사팔상탱(1709년)에 이어 비교적 제작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공간감과 색채의 조화 등 그에 상응하는 화풍상의 특징도 보여주고 있다. 여유로운 경물의 배치와 함께 일반회화에서 볼 수 있는 수목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기법 또한 18세기 전반의 팔상도나 감로왕도 등에서 종종 보여지고 있어,

당시 또는 앞선 시기 일반회화와의 관계까지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는 데 자료적 가치가 있다. 현재는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쌍계사 괘불(보물 제1695호)

 

석가모니불을 보신불로 그리고,삼처전심 가운데 염화시중을 나툰 선종 사찰의 괘불이다.
원만한 상호와  건장한 체구,훤출한 의습,조화있는 장엄을 갖춘 수작이다.
1799년도 삼베에 채색한 작품이며,높이 14미터 폭6.7미터에 달하는 현존 최대의 괘불이다.
쌍계사 보살계 회향하는 날(음 3.7)에 하루만 바깥으로 나가서 괘불대에 걸린다.
스님들 20여명이 이운해서 거는 모습은 장관을 연출한다.

 

◎ 쌍계사 감로왕도(보물 제1696호)

 

쌍계사 감로도는 현재 쌍계사 성보박물관 2층 진열실에 전시되어 있다.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화면 향우측 하단 雙松 위쪽으로 구름에 흰색의 보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 감로도는 구름을 경계로 상단에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불·보살군이 있고, 하단에는 아귀와 제단, 召請儀式을 행하는 승려들 그리고 육도제상의 일들이 전개되어 있다. 우선 상단의 불·보살군을 살펴보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한 구름 위에 모두 답할연좌(踏割蓮座)를 밟고 서 있으며, 제단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

향우측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세지보살(勢至菩薩)과 목건련존자, 아난존자가 한 그룹을 이루고 그 앞으로 칠여래(七如來)가 있으며, 그와 나란히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중심으로 사여래(四如來)와 삼보살(三菩薩), 그 뒤로 번을 들고 천의자락을 흩날리는 인로왕보살 등의 한 그룹이 있다. 향좌측 최상단에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벽련대반(碧蓮臺畔)’이 푸른 천공에 떠 있는데, 벽련대반은 18세기 감로탱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도상의 하나로 修道寺 감로도(1786)와 같이 여러 무리들에 의해 호의를 받으며 운반되는 되거나 백천사 운대암(白泉寺 雲臺庵) 감로도(1801)과 같이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도상을 더욱 부각시키는 등 18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하단의 화면 가운데에는 음식과 꽃 장엄이 베풀어진 제단과 도재를 거행하고 있는 야외법회장면이다. 연당초가 그려진 천을 덮고 자주색 천판의 시식대 위에는 흰쌀을 수북하게 쌓아 올린 제기와 감로수가 담긴 작은 종지가 제일 앞 열에 놓여 있고, 그 뒤에는 각종 과일을 담은 그릇과 그 사이사이에 초가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째 열에는 화지(花紙)와 지전(紙錢)이 꽂혀 있으며, 시식대 양측에는 꽃이 담긴 큰 화병으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의 좌측으로 의식을 행하고 있는 승려들은 다른 군상들보다 좀도 부각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의자에 앉아 금강령을 흔들며 고혼을 부르면서 재를 주도하고, 그 뒤로 각각의 손에 바라, 나발, 법고를 치는 범패승들이 있으며, 그 옆으로 재주(齋主)들이 녹색, 적색, 청색의 복식을 갖추고 시식대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시식대 앞으로는 합장하는 아귀와 흰쌀을 수북이 담은 사발을 든 아귀가 있다. 발우를 든 아귀의 옆으로는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으로 8명의 고혼(孤魂)이 표현되어 있는데, 고혼을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한 사례는 벌거벗은 3명의 소아가 불안한 모습으로 있는 약선사(藥仙寺)소장 감로도(1589)나 주색의 몰골법으로 사람의 형상을 그린 조전사(朝田寺) 소장 감로도(1591)에서 이미 보이고 있어 이러한 묘사법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 쌍계사 감로도(1728)라고 할 수 있다. 하단은 시식대와 아귀를 빙둘러 육도제상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향좌측에는 유희를 즐기는 사당패와 재주를 넘는 아이들, 사미승을 질책하는 승려, 인간의 각종 죽음, 객사나 횡사자의 생전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들이 전개되어 있다. 제단의 좌측은 제단에 가깝게 배치된 장면에는 장수가 스스로 목을 자르는 모습과 好佛先王과 후비와 관료, 이에 관련된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고, 화면의 외곽과 아래에는 들불이 일어나 사람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나 말발굽에 깔려 죽는 사람, 호랑이에 물려 죽는 사람 우물에 빠져 이를 보고 슬퍼하는 유가족 등 예기치 않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중국식의 복제를 따르고 있으며, 이들 각각의 장면은 흰 구름이나 구릉산 위에 그려진 두 그루의 소나무로 구분되어 있다. 색채는 황색의 바탕 위에 붉은색과 녹색, 청색으로 진채의 색감을 살리고, 군데군데 인물들은 황백의 옷을 입어 화면의 단순함을 피할 뿐 아니라 부드러운 느낌도 주고 있다. 한편 화면의 상단과 하단을 구분하는 기괴하게 솟은 산들은 준법을 사용하여 높고 험한 산을 나타내었으며, 암산에 걸린 엷은 비취색, 황색, 자주의 구름은 먹선으로 윤곽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흰색으로 선염하여 입체적인 느낌은 물론 서운(瑞雲)의 분위기를 나타내었으며, 높은 천공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 쌍계사 동종(보물 제1701호)

 

 

쌍계사 대웅전내에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음통상단에 장식된 연꽃의 가장자리 연판이 부서져 없어진 것을 제외하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빛을 띠고 있으며, 종견으로부터 차츰 벌어지면서 종복으로부터는 수직으로 내려오는 외형선을 가진 전통형 종이다. 천판을 움켜진 듯한 사족(四足)의 단용(單龍)이 있는데, 음통은 두 줄의 마디선에 의해 3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맨 상단에는 바깥 화판이 벌어지고 안쪽은 오므라진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역U자형의 단용은 비늘의 표현은 없으나 등선에는 지느러미가 촘촘히 나 있고 머리에는 뿔이 있으며, 입을 벌리고 이빨과 혀가 드러나 있다. 천판과 상대가 접하는 종견에는 입상화문대가 돌아가는데 화판의 끝이 삼각형으로 뾰족하며, 상반신만 있는 승상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상대는 문양판을 사용하였는데 테두리는 작은 연주문양대가 있고 그 안은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는 연판문을, 하단에는 연속운문이 매우 유연한 선으로 돌아가고 있다. 상대와 붙은 유곽(乳廓)은 연화당초문으로 장식된 유곽대(乳廓帶)와 육엽연화문 종유(六葉蓮花文 鍾乳)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이단 원문범자(二段 圓文梵字)로 된 문양대가 있는데 상단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하단에 「파지옥진언(坡地獄眞言)」이 양각되어 있다. 원권범자 문양대 아래에는 위패(位牌)와 4구(4軀)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이 바꿔가며 배치되었는데 보관과 두광을 갖춘 보살입상은 연화가지를 든 채 합장(合掌)한 모습이며, 개부(蓋部), 신부(身部), 신부(身部)받침의 3단으로 구성된 위패는 상면에 「종면벽석 삼도미륭 혜일장명 법주필과(宗面碧石 三道弥隆 惠日長明 法周必果)」의 서원이 양각되어 있다. 종복(鍾腹) 아래에는 명문(銘文)이 있으며, 하대는 연화와 작약이 바꾸어가며 피어나 있는 당초문을 주연으로 처리하였다.

쌍계사 종의 명문에는 “신사삼월(辛巳三月)(1641) 쌍계사 대종(雙溪寺 大鍾)으로 주성(鑄成)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시주자나 화사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쌍계사 종은 한국종 특징인 音筒과 고려후기 종의 특징인 입상화문대를 갖춘 전통형 종으로 용뉴와 종신의 비례감이 안정되었으며, 용의 모습이나 乳廓 및 보살상 등 각부 문양도 짜임새가 있다. 또한 쌍계사 종과는 문양의 내용 혹은 배치, 종의 형태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삼막사종(1625), 남원 대복사종(1635), 법주사종(1636), 무량사종(1636) 등과 양식적인 면에서 매우 유사하며, 연화형 종뉴의 형태는 17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명장 사인비구(思印比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쌍계사종은 조선후기 범종 연구의 범주인 17세기 전반의 경상도 지역의 범종의 유형은 물론 활동한 유파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자료임.

 

◎ 쌍계사 삼장보살탱(경남 유형문화재 제384호)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쌍계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탱화는 조선 정조 5년(1781) 5월에 제작되었는데, 금어(金魚) 승윤(勝允), 만휘(萬輝), 홍원(泓源), 지순(智淳) 등을 비롯하여 평삼(平三), 단해(端海), 승문(勝文), 함식(咸湜), 왕연(旺演), 유성(維性), 출정(出定), 왕인(旺仁), 보신(普信), 극찬(極贊), 찰삼(察森), 두찬(斗贊), 거봉(巨奉), 계탁(戒卓), 월현(月賢), 능치(能治) 등 편수(片手)에 16명이나 참여하였다.

가로가 긴 직사각형(243.7cm×373cm)인 1폭(11부(副) 1포(鋪))으로 원래 쌍계사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옆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과 그의 권속들이 그려져 있고, 향우측(向右側)에는 지지보살(持地菩薩)과 그의 권속들, 향좌측(向左側)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그의 권속들로 배치되어 있다. 탱화의 전체적인 구도는 2단으로 상단에는 천장·지지·지장보살이 표현되고 하단에는 대좌와 그 양옆에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주로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채색되어 흰색과 황색, 청색 등이 사용되었다.

탱화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선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외곽에는 호분을 바르고 있다. 특히 양록색의 사용이 돋보이는데, 이 색은 18세기 지리산일대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불화제작을 했던 의겸(義謙)이 즐겨 사용하던 색으로 호남지역 불화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양식적 특징과 구도 및 도상이 선암사 삼장보살도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19세기 전라도지역 삼장보살도의 모본이 될 정도로 조선시대 불교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 팔상전신중탱(경남 유형문화재 제385호)

 

 

경상남도하동군화개면운수리의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신중탱화이다. 쌍계사 팔상전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고 쌍계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쌍계사 고법당 제석신중탱(雙磎寺古法堂帝釋神衆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128㎝, 세로 181.4㎝이다. 위태천을 중심으로 하고 양옆에는 호법신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에 있는 도상들은 빈틈없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에 황록색의 채운(彩雲)과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져 있다. 주로 사용된 색은 붉은색과 녹청색이며 군데군데 금분이 보인다.

화면 그림 아랫부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화기가 있으며 이를 통해 1781년에 제작된 쌍계사 국사암 신중도를 따라 1790년(정조 14) 4월에 그렸으며 금어(金魚) 평삼(評三), 홍원(弘愿), 지순(智淳), 극찬(極贊) 등을 비롯하여 찰민(察旻), 양수(揚修) 등 여러 사람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2003년 4월 17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5호로 지정되었다.

 

 

◎ 쌍계사 국사암 아미타후불탱(경남 유형문화재 제386호)

 

주색 바탕의 화면에 황색선으로 도상을 묘사한 선묘불화이다. 1781년 제작된 이 탱화는 금어 함식(咸湜)이 그렸다. 화면 상단 중앙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높은 연화좌대에 결가좌하고 그 아래쪽 좌우에는 팔대보살상이 시립하고 있으며, 그 위쪽에는 십대제자상이 좌우측에 각각 5구씩 배치되어 있다. 화면 상단 천공에는 합장형의 분신불이 작게 묘사되어 있다. 견본채색의 재질인 이 탱화는 세로가 긴 직사각형(155.5cm×113.7cm)으로 1폭(3부(副) 1포(鋪))이다. 당초 국사암 인법당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쌍계사 차나무시배지(경남 기념물 제61호)

 

차나무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많이 재배되는 나무로 원산지는 중국으로부터 미얀마, 인도의 아샘 지방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년생 가지는 흰색으로 잔털이 많고, 2년생 가지는 회갈색이며 잔털이 없다. 잎은 뾰족한 긴 타원형으로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회녹색이다. 꽃은 10∼11월에 피고 열매는 이듬해의 가을에 익는다.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차나무의 종자를 왕의 명으로 지리산 줄기인 이곳에 처음 심었으며, 그 뒤 흥덕왕 5년에 진감선사가 차를 번식시켰다고 전한다. 지금도 화개장터 입구에서 쌍계사를 지나 신흥에 이르는 양쪽 산기슭에는 야생의 차나무밭이 12㎞나 뻗어있다. 이곳의 차는 대나무의 이슬을 먹고 자란 잎을 따서 만들었다하여 죽로차 또는 작설차라고도 하며, 피로를 회복시켜주고 정신을 맑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는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알게 해주는 곳으로, 지금도 야생의 차밭이 남아 있어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