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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서해랑길

2023.02.11.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 6코스(진도) - 벽파진과 삼별초의 역사 기행길

by 하여간하여간 2023. 2. 14.

1. 언제 :  2023.02.11.(토)

2. 누구랑 : 송아산악회

3. 서해랑 6코스 : 녹진국민관광지-진도타워-둔전방조제-에코브릿지-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벽파진방조제-연동마을-선황산임도 -용장寺-용장성-용장성주차장)

 

 

 

 

 

4. 산행소감

아침부터 설렌다. 오늘은 서해랑길 진도 6코스를 걷기 때문이다. 진도 6코스란 진도에 있는 서해랑길 6코스란 의미이다. 진도에서는 첫번째 서해랑길이다. 진도대교를 건너면 바로 녹진국민관광지가 있는데 거기서 시작한다. 새벽부터 먼길을 달려 왔는데 정작 녹진관광지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앞이 잘 안보인다. 날씨가 청명하면 진도타워가 우리를 선명히 반길텐데 안개속에 뭍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진도타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제란 때 이 고장 진도에서 참여한 많은 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묵념을 올린다. 이번 서해랑길 6코스에서 나는 벽파진과 용장성 두 곳이 관심이 가는 곳이다. 벽파진은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을 치루기 전에 본영을 두었던 곳이면서, 조선시대 제주로 귀양 간 많은 정객이나 관리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험난한 뱃길에 올랐다. 파도를 헤쳐서 가는 뱃길은 험난하기도 하였지만 한과 섦음과 억울함과 두렴움이 교차하는 항로였다. 벽파진이 늘 궁금했다. 오늘 드디어 벽파진을 가 볼 수 있어서 기대가 된다. 또 고려 때 몽고 침입에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가 제주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까지 이 곳 진도 용장성에 진을 치고 용감히 항거했던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어 사뭇 숙연해진다. 용장성도 처음 가는 길이다.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이다. 나로서는 이번 구간이 관심과 흥미가 많은 구간이다. 조상들의 삶의 현장을 걸으면서 그 당시 선조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을까? 오늘 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 살아 갈 것인가?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은 이런 기대와 셀렘으로 걷는 길이다.

 

 

5. 산행추억

 

진도대교를 막 건너면 녹진관광지 입구에 세워진 서해랑길 진도6코스 시점 안내도이다. 진도 6코스는 진도에 있는 서해랑길 6코를 이미한다. 녹진광광지가 시점이다. 총 15.5km 이다. 

 

서해랑길 진도 6코스 시점(녹진 광광지) 안내도 앞에서 오늘 함께 동행할 대원들과 출발 기념 한장을 남긴다. 대부분 서해랑길을 완주하고자 한 목표를 갖고 참여한 의지가 강한 분들이다.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여기 열명한 용사들은 젊은 시절 조국과 민족 그리고 인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6.25 한국전쟁과 월남전의 격전장에서 불굴의 용기와 신념으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 역전의 용사들로 ........

 

 

◎ 진도타워로 향해서 가는길

 

사뭇 급경사 길이다. 인도를 따라 가는 길이다.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오붓하고 정겹고 사랑이 넘치는 순간이다.

 

진도타워를 향해 급하게 오른다.

 

시점으로부터 0.5km 지점 현위치 안내이다. 노란색이다. 나의 서해랑길 후기는 이 현위치 노란색 안내를 중심으로 거리나 위치를 정리하고자 한다.

 

 

◎ 진도타워 입구에 세워진 임진왜란 정유재란 참전 진도 인물 기념비

 

김성진, 김수생, 박영희, 박내종

 

박인덕, 박종, 박헌, 박희령, 박희승

 

박기수, 양계원, 이천구, 오계적

 

조명신, 조의발, 조수의

 

조유남, 조탁, 조응무, 조덕린, 하수평

 

한분 한분의 숭고한 희생에 묵념을 올린다.

 

충무공 이순신 조형물

 

진도 타워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뭍혔다.

 

 

서해랑길 진도 6코스는 진도 타워에서 바닷가 쪽으로 급경사 내려 간다.

 

망금산 강강술레터 가는길

망금산은 1597년 정유재란 음력 9월 16일 13척의 배로 133여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지(울돌목)에 연접하여 울돌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해발 115m의 나지막한 산이다. 이순신 장군이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 망금산에 토성을 쌓고 부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남장을 시켜 산봉우리를 원을 그리며 반복하여 돌게 하자 왜적은 대규모 군사이동으로 오인, 혼란을 일으켰다. 지금도 산봉에는 망터가 있고 그 밑으로 강강술레터(길)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급경사 나무계단을 내려가면

 

강강술레터가 있는 망금산으로 향한다.

 

망금산 강강술레터는 공사 중으로 출입금지이다. 

 

망금산에서 오른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고

 

무궁화 동산으로 잡아 든다.

 

배달의 꽃 무궁화 "무궁화 동산"

 

진도 갯벌습지 보호지역 해안으로 

 

서해랑길 표지

 

진도갯벌습지보호지역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향한다.

 

 

해안을 따라 걷는다.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다. 생명이 살아 꿈틀거린다.

 

드넓은 갯벌을 따라 걷는다. 해안 겟내음이 새롭게 느껴진다.   

갯벌에는 어디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물길이 있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자연이 만든 것이기에 그렇다.

 

안개 자욱한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은 몽한적으로 사색의 길이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시점으로 부터 2.2km 지점을 통과한다. 둔전리 1-10.

 

드넓은 만금마을 해안을 따라 걷는다. 저기 보이는 섬은 넙섬이다.

  

긴 해안길을 따라 걷는다.

 

습지보호지역 2호 진도갯벌

 

살아있는 진도 갯벌

 

아름다운 생명의 갯벌이다. 썰물이여서 더욱 갯벌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굴섬과 넙섬이 아침 안개에 아스라이 뭍혔다.

 

 

신동마을에서 흐러오는 물을 관리하는 수문

신동마을 앞 방조제

 

습지보호지역

 

진도갯벌 습지보호구역 생태지도 안내도

 

시점에서 4.1km 현위치 : 둔전리 산 28-14

 

습지보호지역 입구에서 인증 한 장

 

습지보호지역 풍광 몇 장

 

 

굴섬은  잔잔한 침묵속에 잠들고

 

습지보호지역

 

둔전 방조제를 걷는다.

 

 

둔전리 마을 들녁

 

방조제 밖으로는 드넓은 갯벌이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갯벌에서 어부는 무엇인가 열심히 수확물을 담는다.

 

두전 방조제 끝에 세워진 "진도 갯벌습지보호지역" 안내판

 

돌아본 둔전 방조제

 

둔전 방조제 그 끝에 시점에서 6.2km 현위치 : 오류리 618-1

 

왼쪽으로 급하게 꺽어 서해랑길은 이어진다.

 

지나온 둔전 방조제와 드넓은 갯벌을 바라보며~

  

이곳 바다는 우수영에서 진도대교 울돌목을 지나 해남쪽으로 이어지는 물길이다.

 

진도해안은 어디를 걸어도 아름답다. 생업에 종사하는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싱싱한 생명을 탄생시킨 아름다운 터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해안길을 걷는 것은 행복이다. 동행하는 이들과 오손 도손 걷는 길은 행복이고 감사고 건강이다.

 

해안길은 굽이 굽이 돌아 계속된다.

 

시점으로 부터 9.2km 현위치 : 오류리 328-1

 

오류리 마을 앞 들녁은 태양광발전 단지로 바뀌었다. 친환경에너지 정책으로 시행하였지만 수지타산이 안맞는다고 걱정이다. 에너지 정책이 잘 되어서 태양광발전 시설을 갖춘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길 바란다. 항구적인 영업이익이 있길 바란다.

 

 

대파농사가 풍년이다. 겨우내 눈발을 이기고 싱싱하게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 가옥이다. 옛날 어린시절 살았던 집이 생각난다. 우리네 어린 시절 집들은 저렇게 스레트지붕에 앞 6칸 측 2칸집이 대부분이였다. 부억은 그름으로 시커멍고, 사랑방과 마루가 있는 집 구조이다. 정겹다. 

 

진도읍에서 벽파여객터미널로 가는 벽파 지방도로 801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이다.

 

고군면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 방향으로 걷는다.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를 향하여 벽파마을로 향한다.

 

호국의 얼 벽파마을

 

관찰사들의 공덕비인가?

 

벽파마을 입구에서 이충무공전첩비 입구에서 전첩비를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유형유산 제5호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이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비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같다.

 

"벽파진 푸른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서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 7일 적선 18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그리운 대통령 김대중대통령과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이 2008년 2월 16일 다녀간나 보다. 기념 식수가 잘 자라고 있어 다행이다.

 

벽파마을에서 벽파정으로 오르는 입구에 세워진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 안내문

 

 

◎ 벽파진

 

벽파진이다. 그리도 가 보고 싶은 벽파진이다. 생각보다 한가하다.

 

 

벽파정에 다가갈수록 맘이 설렌다.

 

벽파정의 아름다운 모습

 

벽파정

벽파정은 1207년(고려희종3) 진도의 관문인 벽파 나루 언덕에 창건하여 1465년(조선 세조 11) 중건하였으나 허물어지고 옛자취만 남아 있다가 이정자는 내왕하는 관리와 사신들을 영송하고 위로하던 곳으로 정객과 문인들이 아름다운 경승과 감회를 읊어 많은 싯구를 남긴 명소이다. 벽파진은 정유재란(1597)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2척 남은 배를 이끌고 16일 동안 바닷목을 지키실 때 향민들은 공을 도와 죽음으로 명량대첩을 이루었고, 고려말에는 삼별초군이 들어 온 유적지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벽파정을 군민들의 뜻에 따라 새터를 다듬어 이곳에 세우다. 2016년 7월 진도군수

 

인증 한 장 남기고

 

벽파정을 둘러본다.

 

조선시대 제주로 귀양 간 많은 관리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험난한 뱃길에 올랐다. 파도를 헤치고 가는 뱃길은 험난하기도 하였지만 한과 섦음과 억울함과 두렴움이 교차하는 항로였다.

 

 

 

벽파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몇 장 담는다.

 

아름다운 벽파정

 

 

벽파정 앞 감부도

 

남도 이순신 길 조선수군재건로

 

벽파마을 : 역사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 아담한 마을이다. 

 

벽파정을 다시 돌아보고

 

벽파정과 이별을 한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오마 벽파정아~

 

 

◎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이곳 벽파정은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삼별초군이 강력하게 항거하였는데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오는 관문이였다. 지금부터 걷는 서해랑길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이기도 하다.

 

원종 11년(1270년) 6월에는 삼별초 배중손이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이해 8월 용장사를 도읍으로 정하고 몽고군에 저항하였으나, 9개월만인 1271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의 장군 김방경이 몽고 원수 흔도 등과 함께 침입하여 삼별초를 토벌함에 진도가 함락되어 주민의 대부분은 몽고로 잡혀가고 진도는 거의 빈터가 되었다.

 

벽파정 아래 목섬으로 가는 이정표

 

긴 방조제를 걸어서

 

방조제 끝에  서해랑길 진도6코스 시점으로부터 10.8km 현위치 표지 : 벽파리 산 2-3

 

서해랑길은 급하게 꺽여 오른다.

 

한참을 걷다보면 시점으로부터 11.2km 현위치 표지 : 벽파리 280-4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곧장 가지 않고 90도 꺽어 연동마을 거쳐 선황산 임도길로 향한다.

 

가우리 표지를 지나고

 

연동마을 향해 걷는다. 저기 고개를 넘으면 연동마을이다.

 

연동마을과 서낭상과 선황산

 

연동마을

 

연동마을 길을 지나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복잡한 연동마을 길을 걷는다. 방향표시를 잘 찾아가야 한다.

 

마을 앞에서 다시 90도로 오른쪽으로 꺽는다.

 

연동마을 안쪽으로 구 서해랑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을 담벽에 그려진 산수화

 

이곳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바로 가도 된다.

 

싱싱한 봄 배추

 

이곳에서 왼쪽으로 90도 꺽는다.

 

담벽에 삼별초호국역사탐방길 표지판

 

무슨 작물일까? 노란 새싹이 강하게 올라온다.

 

이곳에서 서해랑길과 삼별초호국역사의 길은 오른쪽으로 꺽어 선황산 임도 길로 향한다.

 

시점으로 부터 12.5km 현위치 표지 : 벽파리 109

 

삼별초호국역사탑방길은 지루하게 오름길로 접어 든다.

 

긴 오름길을 지나

오르고

 

또 오른다.

 

용장성으로 가는 이정표를 지나고

 

선황산과 용장성으로 가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성황당산성터 이야기

 

진도군 군내면 용장마을 동쪽의 선황산을 일컫는다.
「옥주지」에 따르면 지금의 용장이 있는데 고진도에 따라 선황신당을 건립하면서 산성을 쌓아 변란이 있으면 입보처로 삼았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이에 주목하여 진도지역의 향토사가들은 선황산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굴조사 결과 선황산에는 제사 유적과 제사에 사용될 제물을 준비하는 용도나 장대로 추정되는 건물지만 확인되었다. 2~3m 높이의 건물지 기단이 흙으로 덮어있었기 때문에 토성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성황당산성터 고개를 넘어 용장성으로 내려 간다.

 

서낭산 정상

 

용장성 전경 

용장마을 위로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항거 했던 용장성이 위치해 있다.

 

배중손 장군 동상 그의 기개가 느껴진다.

 

 

숭의문

 

배중손 장군 항몽 순의비

 

 

고려항몽충혼탑

 

1. 삼별초의 정의

 

고려시대 최씨무인정권의 특수 사병부대

 

1219(고종 6년)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기가 도적과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최씨가의 정치적 권력을 탄탄히 할 목적으로 야별초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야별초의 숫자가 많아지자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고군의 포로였다가 탈출해 온 군사들을 신의군이라 불렀다.

후에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3개 별초군의 조직을 삼별초라 총칭한다.

여기서 별초란 " 용사들로 조직단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삼별초는 대몽항전에서 고려의 정규군 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했다.

 

 

2. 삼별초 항쟁

 

징기스칸에서 쿠발리아칸까지 동아시아 전역, 세계의 5분의 2를 복속시킨 몽고제국은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에게 과중한 공물과 군사를 요구하여 받아갔다. 그런 중에 몽고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했다.

이에 개경정부는 1232년 강화 천도를 강행 했지만, 수차에 걸쳐 더 강압적인 몽고 침략을 받았다. 결국 몽고와 협상을 맺고 몽고의 명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 몽고 속국이 되었다.

이 때 삼별초는 크게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 몽고와 개경 정부에 강력히 저항, 반기를 들고 봉기했다. 개경정부는 몽고의 지시대로, 몽고 세력을 업고 삼별초 명단을 입수 삼별초를 쳤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한 후 관부를 철치하고 반몽정권을 수립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고려사>는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했다.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여 방을 붙였으나 삼별초는 따르지 않았다. .... "삼별초는 그들의 이름이 적힌 문서가 몽고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더욱 반역하는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3. 자주 고려의 깃발을 들고 진도로!

 

삼별초는 1270년 6월 3일 자주 깃발을 들고 1,000여척의 함선에 재물과 많은 백성을 싣고 진도로 향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8월 19일에 진도 벽파진를 통해 용장성에 거점을 확보 했다.

 

※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택한 이유

1. 개경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독자적 세력기반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거리라는 점

2.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는 선박을 이용해 남하하기 좋다는 점

3. 몽고군이 두려워하는 해중도서라는 점

4. 진도는 동국여지승람에 옥주로 기록한 것처럼 땅이 기름지고 농 수산물이 풍부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점

5. 연안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둔 조곡의 수송이 지나는 길목이여서 전략상 유리하다는 점

6.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 최씨 무인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있었고, 제3대 집정인 최항 만전이 진도 한 절에 머물렸다는 기록으로 봐서 진도의 지리적 조건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는 점

 

이 같은 입지적 조건에 의하여 삼별초는 '자주 고려의 항몽 깃발을 들고' 군내면 용장사를 중심으로 용장리 일대에 삼별초의 중요시설을 집결시킨다.

 

이 대목을 <고려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1270년(원종 11년) 8월 19일에 진도에 입거 도성으로써 용장성을 쌓고 궁실 등을 조영했다.

 

용장산성은 용장리 뒷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토성으로 사적 제126호 이며, 용장 황궁터는 개성 송악산 만월대 왕궁터와 같은 9단의 석축기군과 건물지가 남아 있다.

 

  

4. 개경정부와 맞선 독자적 정권 수립

 

개경으로 환도한 개경정부는 왕의 시호마저 몽고가 정해주는 몽골 속국으로 전락되었다. 반면 삼별초는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새 도읍지 진도를 정통고려 왕국으로 독자적 정권을 수립했다.

 

이무렵 삼별초는 진도민들을 모두 삼별초편으로 만들어 전라도 연해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했으며 경상도 남부 연해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 안정기에 이르면서 남해 거제 등지를 장악하여 해상왕국의 위력을 떨쳤다. 또한 장흥, 강진, 합포, 전주, 동래 등지를 공략하여 항전의 힘을 육지까지 구축했다. 개경에서도 노비 등이 난을 일으켜 삼별초의 새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고려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김방경이 몽고 원수 아해와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진도를 쳤는데 그때는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적에게 항복했다."

" 적 배중손은 함께 갔던 사신을 억류하고 황제의 조서를 박천주에게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이 조서는 받을 수 없다. 다만 우리 국서라면 명하는 대로 따르겠다.' 라고 말했다."

이무렵 삼별초는 최상의 세력으로 기세가 등등했다.

 

 

 

5. 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다.

 

삼별초는 진도정부만이 '정통고려'라고 명명 했다.

일본 동경대학의 사료편찬소에 보관 중인 진도정부의 외교문서(고려첩장불심조조)가 그 증거로 남아 있다.

1989년 일본 NHK는 다큐멘터리 역사탄생 (수수께끼의 괴문서)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는 진도정부 삼별초가 보낸 외교문서라 밝히고, 1268년 개경에서 보낸 외교문서와 1271년 진도에서 보낸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서 두 문서를 비교 분석했다.

 

<1268년 개경에서 보낸 외교문서>

하나, 몽고와 군신지예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몽고 황제의 덕을 높이 치하하고 있다.

둘, 몽고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1271년 진도정부의 외교문서>

하나, 몽고를 위취(짐승의 무리)라고 하거나, 몽고는 동정심도 없고, 몽고 풍습을 오랑케의 습속으로 표기

둘, 몽고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셋, 진도 정부야 말로 정통의  '고려'임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첩장'이라 이름 붙인 문서를 보내고,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진도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했다.

넷, 몽고 침략의 위기적 상황을 일본과 공동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이것은 삼별초 진도정부가 자주적 정통 '진도에 또 하나 고려'를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역사가들에 의하여 주동자인 배중손을 반역자에 넣고 <삼별초의 난>으로 기록했으나, 1977년 이후 삼별초 호국정신이 재평가가 되면서 <삼별초의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여 속국이 되지 않기 위한 삼별초의 봉기를 반란으로 볼 수없는 것이다.

 

 

6. 진도 고려왕국 삼별초의 패망

 

몽고의 쿠발리이는 삼별초를 섬멸한 후 일본을 공략, 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삼별초를 압박해 들어왔지만 삼별초의 세력을 꺾지 못했다. 삼별초는 몇 차례 승전보ㅇ를 올린 전적으로 의기 충천하여 방심하기시작했도 몽고군을 앝잡아 보았다.

그 틈을 노려 여몽연합군이 결성되어 전함을 자수 확보하고 무기와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여 중, 좌, 우익으로 나뉘어 진도를 공략했다.

고려 김방경과 몽고 흔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벽파진을 공격했고, 몽고 장수 홍다구가 거느린 좌군은 노루목쪽으로 상륙 지막리 오신리 방면을 거쳐 두시난골로 접어들어 용장성의 뒤편 골짜기로 진격했다. 

고려 김석과 몽고장수 고을마가 거느린 우군은 군직구미로 상륙하여 용장성 동쪽 난곡으로 진격하였다.

 

삼별초는 숫자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포을 무장한 연합군의 급작스런 기습작전에 밀려 패주했다. 왕 온은 패주하던 중 지금의 왕무덤재 일대에서 추격부대에 잡혀 참살 당하고 김통정은 금갑포에서 제주도로 향했다. 진도 아녀자, 궁녀, 관아에서 부리던 종 등은 몽고군에 잡혀가느니 죽음을 택하다며 돈지벌 큰 둠벙에 몸을 던졌다.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몽고는 군사가 부족하니 문무관 산직과 백정 잡색 및 승려까지 검열하여 충당하라" 하였다. 또한 "고려 정부 4품관 이상 집에서는 종 1명씩 내어 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과 함께 진도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처음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니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협공 작전으로 냅다치니 적이 처자를 버리고 도망 갔다."

 

 

7. 진도의 삼별초 관련 유적

 

- 벽파항 :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1270년 8월 19일 강화도를 출발한 삼별초군의 1000척의 함대가 벽파에 입항

- 진도 용장성 왕궁 터 :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국가지정 사적 제126호

- 용장사 :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도 지정 유형 문화재 제 17호 석불좌상이 있음. 1241년 최항 만전이 용장사에 온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나옴

- 녹진 :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에 삼별초 초성이라 기록되어 있음.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총공격을 단행했을 시 상륙지임. 군직구미 : 몽고장수 고을마 상륙지, 노루목 : 몽고장수 홍다구가 상륙한 곳 

- 금갑진성 :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김통정 일행이 제주로 건너간 포구. 전라남도 기념물 제 234호 지정

- 진도 남도진성 :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국가지정 사적 제127호

- 배중손 장군 사당 :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매년 6월 15일 제사를 지내고 있음.

- 전 왕온의 묘 :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도지정 기념물 제 126호. 매년 5월 15일 진도문화원 주최 능제를 지내고 있음.

- 왕무덤재 :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홍다구에 의해 온왕이 죽어 묻힌 곳으로 가는 언덕이라 하여 왕무덤재라고 부름

- 사천(핏기내 마을)리 :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삼별초군과 진도민들의 피가 내를 이룬 곳이라 해서 붙어진 지형

- 삼별초 궁녀둠벙 :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궁녀와 사신, 진도민들이 몽고군에 잡혀가느니 죽음을 택한 큰 둠벙 여기 급창둠벙이라고도 함

 

 

8. 삼별초 4년 항쟁사

 

1270년(원종11)

5월 : 고려 왕실이 몽고에 항복하여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복종하지 않았음. 왕이 삼별초를 타일렀으나 듣지 않자 삼별초 명부를 압수 했음

6월 : 배중손, 노영희 등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여 6월 3일 강화를 떠났음. 개경 김방경과 몽고 송만호가 군사를 끌로 삼별초를 뒤쫒던 중 남영 앞 영흥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 위세에 눌러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감.

8월 :

강화 출발 두 달 여 만인 8월 19일 진도 벽파진에 상륙하여 용장산성을 쌓고 관부를 설치했음.

9월 : 전라도 토척사 신사전과 전주부사 이빈이 삼별초 공격 소식에 도주하여 면직 당함

11월 : 삼별초가 제주를 함락 삼별초의 기세 충전, 몽고는 김방경을 보내 삼별초를 토벌하라 명했음

12월 : 김방경이 진도에서 삼별초와 대처 중 생포되었다가 탈출했음

 

1271년(원종12년)

1월 : 몽고 사신 두원외 와 고려 원외장 박천주가 진도 벽파정에서 몽고의 친서를 전했으나 배중손은 몽고사신을 억류하고 조서를 돌려주었음. 연합군을 공격 병선을 납치하고 100여명을 살해했음

3월 : 삼별초가 승전을 하고 많은 전함을 불태웠음

4월 : 개경정부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그의 조카 희와 홍을 진도에 파견했으나 삼별초군이 듣지를 않았음

5월 : 김방경 홍다구 흔도를 대장으로 여몽여합군은 화포와 많은 군사를 끌고 사면을 둘러싸서 일시에 진도를 공격했음. 왕은 의신면 논수골에서 참수. 김통정은 잔류군을 이끌고 제주로 갔음. 진도 삼별초 패망

9월 : 재상들이 흔도에게 삼별초군 이외 무고한 벡성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

11월 :추토사 김방경에게 관직을 올려줌

 

1272년(원종 13년)

5월 :  제주의 삼별초는 항파두리에 내성과 외성을 쌓았음

6월 : 개경정부는 전라도에 남아 있는 삼별초를 토벌했음

8월 : 개경정부는 김통정을 설득했으나 실패했음

11월 : 삼별초가 안남도후부를 공략하고 함포와 거제를 공략하여 전함 5척을 불태웠음

 

1273년(원종 14년)

4월 : 김방경이 흔돈와 함께 병력 1만명과 전함 160척을 끌고 제주에 들어가서 삼별초를 붕괴시킴.

         삼별초의 4년 항쟁의 끝.

7월 : 김방경이 황제의 소환으로 원나라에 가서 금장식 말안장과 금은 등을 하사 받음

 

 

 

 

9. 삼별초 관련 주요 인물

 

배중손

고려 무인정권 말기의 장군으로서 삼별초 내몽항전 봉기의 주도자. <고려사>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어 있다. 배중손의 출생지를 진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에 "역적들의 고향이었던 상주, 청주, 해양, 진도 등의 고을 이름을 격하시킬 것을 청하였다." 는 기록과 고려 때 진도군 임회현의 토착 성씨가 배씨였다는 점이다. 또한 최씨 무인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진도에 있었다는 기록에 의하여 배중손이 진도인으로서 최씨가와 연관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특이한 것은 삼별초 대장격인 배중손의 죽음에 대하여는 어느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통정

강화도에서는 강화 교동 출신으로 구전되고 있다. 대몽항전 당시 장수로 삼별초에 합류했다. 진도가 여몽연합군에 패하자 삼별초 잔류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항파두리 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에는 김통정을 특출한 장수로 묘사된 설화가 많이 있다.

 

왕 온

고려 후기 왕족으로 영녕공 준의 맏형이다. 삼별초의 장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진도 삼별초가 패망한 뒤 아들 완과 함께 참살되었다. 의신면 침계리 왕의 무덤 옆에는 그가 타고 가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있다.

 

 

홍다구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고려 침략을 도왔던 홍복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 받아 몽고의 충신 노릇을 한 자. 진도와 제주도에서 삼별초 진업을 선두 지휘한 몽고의 앞잡이이로써 훈장을 받았고 몽고 버슬에 올랐다. 몽고 침략시에 고국인 고려에 온 갖 행패를 부렸다.

 

유존혁

삼별초의 세력이 진도로 옮길 때 함께 내려와 남해현을 거점으로 웅거하다가 삼별초가 제주도로 갈 때 배 80척을 끌고 갔으나 김방경 등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박천주

삼별초 회유라는 명분으로 몽고 서찰을 들고 진도 벽파정에서 배중손 등을 만났다. 삼별초는 몽고의 회유서찰을 던져버리고 몽고 사신을 억류했다. 박천주는 살아 돌아가서 조서를 받지 않았다고 보고 했다.

 

김방경

고려 후기의 삼별초 진업에 공을 세웠던 무장이다. 몽고의 일본 원정 때 고려군을 아끌고 출정했으며, 몽고를 들락거리면서 몽고로부터 큰 벼슬과 상을 받았다.

 

 

 

10. 삼별초, 숭고한 고려의 혼이여

 

아~ 진도는 또 하나 고려였네

이 땅을 지켜온 이름 모를 사람들

아직도 들리는 저들의 함성

 

동백꽃 피고 해당화 피는

살기 좋은 옥토강산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용맹한 군사들이여 늠름한 군사들이여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살리세

기름진 이 땅과 저 푸른 바다와 

사시사철 변화하는 산과 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나라를 지키자

 

이 땅에 동이 튼다. 새 날이 온다.

오랑케를 물리치고 새 고려를 세우자

낫 들고 일어나세, 호미 들고 일어나세

우리 백성 힘을 모아 새 나라를 만드세

아~ 진도는 또 하나의 고려였다.

 

국악 오페라

"구국의  고려전사, 삼별초" 중 백성과 장군의 노래

 

진도 삼별초 항몽사

 

진도 삼별초 항몽사

 

고려 항몽 충혼탑에서 인증 한장

 

 

그리운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님과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이 2008년 2월 16일 이곳을 다녀 가셨다.

 

용장성 홍보관 : 안에를 들어가 보지 못했다. 시간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와서 차분히 둘러봐야 할 것 같다.

 

◎ 용장사

 

용장사 가는길

 

진도 용장사 범종각

 

 

영장사 석탑

 

진도 용장사 염불당

 

진도 용장사 극락전

 

진도 용장사 석불좌상

 

◎ 진도 용장성 

 

진도 용장성 관광 안내도

 

진도 용장성

사적 제126호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몽골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고종 18년(1231) 고려는 몽골이 침략해 오자 항전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 전쟁을 치렀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였다. 배종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어 왕족인 승화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로 남하하여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용장성은 총 길이가 12.7km이며 높이는 4m 내외로, 군내면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 능선을 따라 용장산을 빙 두르고 있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성벽이 남아 있고, 성 안에는 궁궐의 자리와 용장사가 있던 절터가 남아 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의 왕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궁궐과 성을 만들었는데,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자주국방의 기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용장성 아래 있는 샘물

 

 

 

용장성 궁궐터

 

서해랑길 진도 6코스 종점 인증

 

서해랑길 진도 6코스 종점이면서 진도 7코스 시점 안내

 

 

오늘 의미 있는 역사길을 걸었다. 이충무공 벽파전 전첩비와 벽파정 그리고 삼별초호국역사 탐방로를 걸었고 용장사와 삼별초 항몽 거점인 용장성과 그리고 궁궐터를 돌아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이 통치를 잘 못하거나 외교를 잘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죽어나는 것은 죄없는 일반 백성이며, 그 희생을 다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역사는 늘 부침이 있어 왔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의기롭게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보존되고 있음을 상기하고 후손에게 더 풍요로운 국가를 물려주기 위해 이 시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깊은 사색의 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