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3.12.10.(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3. 산행구간 : 영산포 등대 - 황포돛배 선착장 - 영산포 홍어거리 - 영산강 제5경 '금성상운' - 영산교 - 영산대교 - 빛가람대교 - 나주대교 - 영산강 문화관 - 영산강 제 6경 '평산낙안' - 승촌보 - 서창교 - 영산강자전거길 안내센터 - 극락교 (22km)
◎ 영포인트 트레일 무등 1187
무등산 정상인 인왕봉이 57년만에 개방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해발고도 0m에서 무등산정상 1,187m까지 무동력으로(걸어서) 걷는 트레킹으로 광주지오트레킹(대장 김명수)에서 최초로 시도한 프로그램이다.
4. 산행 소감
하여간, 산길따라 20년, 숱한 산길을 헤매다가 이제 물길따라 걷자고 영산강변을 따라 걷는다. 희망이지만 우리나라 5대강(한강 ,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강변길을 모두 걸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일단은 시작을 했다. 하는데까지 해보자. 혹시라도 완주할 수 있다면 근사하지 않겠는가? 다행이 4대강은 강변에 자전거 길을 정비하여 놓아 한결 쉽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영산강 트레킹을 마무리 한다면 훨씬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영산강 트레킹 4구간을 걷는다. 벌써 나주를 지난다. 나주는 호남의 중심지이다. 전라도라 할때 전주와 나주를 줄여 전라도라 했다. 드넓은 나주 평야 한가운데로 흐르는 영산강의 풍요로움이 나주를 전라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에너지 수도로 발돋움하느라 그 기세가 힘차다.
이곳 나주를 지날 때 임진년 의병장 김천일 장군을 비롯한 나주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시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나주역사에 얽힌 사연, 반남 고분과 가야 문화 그리고 왕건의 고려 통일에 결정적 역활을 한 나주 오씨 일가의 이야기 등 이루말 할 수 없는 역사 문화적 이야기들은 영산강과 연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 구간이다. 여기서는 의병장 김천일 장군에 대해서만 정리하려고 한다.
자동차로 영산강둑길을 여러번 달렸지만 내 발로 직접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사뭇다르다.
스치는 바람소리, 흔들리는 억새노래, 여여한 강물흐름, 부드러운 아침안개, 붉게 물든 저녁노을, 반짝이는 비늘물결, 넉넉한 가을들녁, 변화 무쌍 구름춤새, 시시각각 공기냄새, 지저기는 새소리, 청아한 물소리 모든 것이 살아 있고, 모든 것이 제 나름 모습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자연 속에 나즈막히 살아 숨 쉬는 사람들, 이 아름다운 세상과 함께 흐르는 영산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무상의 덕을 안고~
구석 구석 아름다운 사진을 제공해 주신 박옥현님(노무현재단), 임진택님, 이병두님, 트레킹 길 안내와 현위치 등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김명수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5. 트레킹 이모저모
◎ 나주 영산포 등대
영산강은 남도의 젓줄이다. 350리 굽이쳐 흐르는 물길은 나주에 이르러 비로소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물자 그리고 문화가 서로 교류하며 발전해 왔던 문명의 길이었다.
이 물길을 통해 중세의 신문명 삼종인 선종과 차 도자기가 전해져 찬란한 남도의 문화를 꽃피울 수 이었다.
그러한 물길의 국제항구는 원래 목포(택촌 앞)에 있다가 회진포(다시)로 이어지다 현재의 영산포로 자리하였다.
일제는 드넓은 나주평야의 쌀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수탈의 전진기지로 영산포를 개발하고 영산강의 수위를 관측하고자 이 등대를 1915년 현 위치에 세웠다. 일명 영산포 등대로 불리는 이 시설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km 뱃길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이정표로 사용되었으며 영산강 수운의 래드마크로 남도인의 기억속에 자리하고 있다.
◎ 영산포 홍어거리
영상포는 서남해의 추자 멸치젓을 비롯하여 각종 해산물의 집산지였으며, 특히 흑산도 홍어의 소비와 유통으로 명성을 떨쳐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 '삭힌 홍어'의 탄생 이야기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나주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삭힌 홍어'의 유래는 고려시대 영산현에 속했던 흑산도 사람들의 내륙 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때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 고려조정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쇄한 정책을 시행하여 서해안 일대 섬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때 흑산도는 당시 영산현에 속했는데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터전을 잡았고, 새로 터를 잡은 곳의 강을 영강 혹은 영산강이라 이름 지었다.
영산포 사람들은 흑산도 근처까지 나가 고가잡이를 한 뒤 영산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때 흑산도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홍어를 포함하여 여러 고기들을 싣고 왔는데 보름 정도의 향해 기간에 홍어만 빼고 나머지 고기는 모두 썩거나 상해버렸다. 그중 홍어를 꺼내 먹어보니 약간의 썩은 냄새와 톡 쏘는 맛이 별미였다고 한다.
이것이 시작되어 먹게 된 '삭힌 홍어의 탄생'은 쇄한 정책에 따른 영산도 사람들의 영산포 이주로부터 시작이 되어 영산도 사람들의 흑산도에서의 고기잡이까지 여러 상황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 영산강 너른 품에 안긴 영산포와 홍어 이야기
◇ 영산포에 살어리랏다.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 서해안 일대 섬 사람들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강을 따라 이곳까지 피난 와 머무르곤 하였고 그러는 사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 톡 쏘는 바로 그 맛, 삭힌 홍어! 맛 좀 보시오
영산포는 고려말 부터 600년 이상 흑산도 홍어가 거래되어 온 홍어의 본 고장이다. 흑산도 홍어가 영산포까지 배에 실려 오는 과정에 숙성되었던 것에서 유래한 '삭힌 홍어'는 톡 쏘는 독특한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함께 먹는 '홍어삽합'이 유명하다. 홍어는 예부터 귀한 손님이게 대접하던 음식이고 결혼식, 회갑, 초상 등 집안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다. 홍어가 빠지면 한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홍어는 전라남도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다.
◎ 황포 돛배 선착장
황포돛배는 바닷물이 영산강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던 시절 과거 영산강 물길을 이용해 쌀, 소금, 미역, 홍어 등 온갖 생필품을 실어 나르던 황토로 물들인 돛을 단 배를 말한다.
영산강 황포돛배는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1976년 상류에 댐이 들어서고 영산강 하구둑이 만들어지자 1977년 마지막 배가 떠난 후 자취를 감췄다. .
그후 지난 2008년 30여 년 만에 옛 모습 그대로 부활한 황포돛배는 다시 영산강을 오르내리고 있다. 영산강 비단물결을 따라 유람하는 황포돛배 투어는 나주 여행의 백미이다
옛 목선 그대로 재현되어 운치가 그만인 빛가람 1호와 2호, 한옥 지붕이 멋스러운 나주호, 발굴된 고려 시대 뱃조각을 복원해 위엄을 갖추고 부활한 왕건호까지 황포돛배 투어는 나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이색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황포돛배 나루터 주변으로 강을 따라 영산포 홍어거리, 영산포 역사갤러리가 있으며, 강건너에 영산강체육공원이 있다.
◎ 영산강 제5경 '금성상운'
상스런 구름이 지평선 위에 누워있는 나주평야
영산강 트레킹 구간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금성상훈' 표지석 앞에서 단체 인증
기념도 하고
나도 기념 한 장을 남긴다.
파란하늘이 높다. [제로포인트 트레일 무등 1187] 도 기념하고
파란 하늘에 솟대가 반긴다.
◎ 영산교
영산강을 가로 질러 영산포를 잇는 구 도로이다.
트레킹은 영산교를 건넌다.
일본인 지주 가옥과 영산포 역사갤러리 표지가 있지만 나중에 방문하기로 하고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산교를 건넌다.
영산강둔치 체육공원
영산교를 지나서
현위치 : 담양댐에서 64.5km 지점
현위치 체육공원 이정목
현위치 : 담양댐 64.2km 지점을 지난다.
강변엔 수양버들 종류의 가로수가 즐비하다. 아직 푸른 낙엽이 딩구는 직선길이 이체롭다.
영산포를 멀리서 조망한다. 언젠가 영산강이 범람할 때 이곳 영산포의 영산강둑이 무너져 영산포가 심한 수혜를 입은 적이 있다. 평소 늘 물길을 잘 관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유비무한이다.
◎ 영산대교를 지나서
영산대교는 국도 1번도로와 지방도 13번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영산강을 건너는 중요한 기능을 한 다리이다.
영산대교를 지나 한참을 걷는동안 영산강변의 아름다움에 눈이 호강이다.
신령산 쉼터를 지나고
영산강변의 몽한적 풍광 앞에 넋을 잃고
스치는 바람소리, 흔들리는 억새노래, 여여한 강물흐름, 부드러운 아침안개, 붉게 물든 저녁노을, 반짝이는 비늘물결, 넉넉한 가을들녁, 변화 무쌍 구름춤새, 시시각각 공기냄새, 지저기는 새소리, 청아한 물소리, 모든 것이 살아 있고, 모든 것이 제 나름 모습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자연 속에 나즈막히 살아 숨 쉬는 사람들, 이 아름다운 세상과 함께 흐르는 영산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무상의 덕을 안고~
영산강변 풍광
나주 종합스포츠 파크를 지나고
만나는 쉼터에서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조달한 싱싱한 홍어와 막걸리 한잔으로 오늘의 기분을 만끽한다.
쉼터 현위치
쉼터 현위치 : 영산강 하구언 기점 70.3km 지점이다.
담양댐 62.3km 지점을 지난다.
담양댐 62km 지점 통과 오손 도손 걷는 걸음, 행복한 트레킹
트레킹 길은 이제 억새 밭 사이를 향하고, 저 넓은 억새밭 너머에 영산천이 영산강과 만나는 지점이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영산강변 억새 밭을 지나면서 임진왜란 나주 의병 김천일 의병장을 생각한다.
여기서 잠깐!
임진왜란 당시 나주 의병 김천일 의병장에 대하여 공부하자.
김천일 의병은 몸이 약했다. 그의 나이 55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의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 탈환을 위해 나주 금성관에서 의병을 이르키고 의병장이 된다. 수원과 강화에서 왜군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후퇴하는 왜적 병력을 상대로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여하여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진주성이 함략되자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전사한다. 그의 의로운 정신은 어디서 오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 김천일 의병장
1537년(중종32년) 1월 나주의 흥룡동에서 독자로 태어나 출생 이틀 만에 모친을 여의고 동냥젖으로 연명하다 보니 어린 시절 영양섭취가 부족해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았다. 더구나 생후 6개월 만에 부친마저 돌아가 양성 이씨 외가댁 외할머니 손에 양육되었다.
그는 19세 때 명망이 높았던 일제 이항(李恒, 1499~1576)에게서 학문을 배운다. 이어 김인후(金麟厚), 진도에 유배와 있던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성혼(成渾), 정철(鄭澈) 등과 교류한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으로 인해 김천일은 나주지역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훗날 임진왜란 때 일찌감치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을 표방하고 북상하던 정신적 바탕이기도 하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 당시에는 성혼과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온건한 입장을 표명하며 조속히 옥사가 종결되기를 바랬다.
나주 정렬사에 봉안된 김천일 장군 초상
1573년(선조 6) 그의 나이 22세 때 조목(趙穆), 이지함(李之菡),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 주부(軍器寺 主簿)에 제수된다. 이어 용안현감, 강원도·경상도 도사, 순창군수, 수원부사 등 주로 지방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세금과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신망이 높았다.
◇ 정렬사
7월 3일은 음력으로 5월 16일. 김천일이 나주시 과원동 금성관(錦城館) 망화루(望華樓) 앞에서 의병을 일으킨 뜻깊은 날이다. 정렬사에는 김천일 장군을 주향(主享)으로 그의 아들 좌승지 상건(象乾, 1557~1593), 충민공 양산숙(梁山璹, 1561~1593), 관해 임회(林檜, 1562~1624), 후조당 이용제(李容濟, ?~1597) 등 5명의 위패를 모시고 호국 의병활동을 기리는 사당이다.
드론으로 바라 본 나주 정렬사
◇ “비록 약하나 죽음으로 보답할 터”
‘내가 통곡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서 군부(君父)가 파월(播越)하고 있는 때에 세신(世臣)인 내가 목숨만 건지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장차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난리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힘이 약해 상대가 안 된다 해도 그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죽지 않고서는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창의사김공정렬사비(倡義使金公旌烈祠碑)>
시호 교지
김천일은 이어 5월 16일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璹), 박환(朴懽) 등과 함께 300명의 근왕의병을 이끌고 한양 탈환을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55세의 나이였다. 당시 김천일은 ‘몸이 허약해 갑옷의 무게도 이기기 어려웠으나 국난을 극복하려는 뜻이 굳세고, 충성심이 강해 뭇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할 수 있었다’라고 한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갑신 6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의 졸기’>
수원에 도착한 김천일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독성산성(禿城山城, 독산성이라고도 부른다)을 거점으로 삼고 유격전을 전개해 왜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군세는 어느덧 수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 같은 배경에는 군량미를 500석이나 대준 양성이씨(陽城李氏) 외가가 큰 도움이 됐다. 김천일의 언양김씨 후손들은 오늘에도 양성이씨에 대한 감사의 뜻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나주 정렬사 앞 김천일 장군 동상
1592년 7월 초 김천일과 전라병마절도사 최원(崔遠)은 수원에서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도성 주변의 적을 견제하고 행재소와 여타 지역의 연락망을 잇기 위해서였다. 김천일은 이후 1593년 4월 왜군이 도성에서 철수하기까지 약 7개월여 강화도를 활동거점으로 삼는다. 그는 8월 6일 양화진전투에서 200여명을 죽이고 수급 92개를 얻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 제2차 진주성전투서 아들과 순절
전쟁 중 진주성에서는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 6일부터 10일까지 5일 동안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의 지휘 아래 3,800명의 조선 관군이 3만명의 왜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진주대첩’으로도 불리는 1차 진주성전투는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임진왜란 대첩으로 불린다. 승리를 거둔 데에는 김시민의 리더십과 철저한 전투준비가 큰 몫을 했다. 또 동서남북으로 정언충, 최경회, 임계영, 정기룡, 최강, 이달, 김준민 등 각 의병부대가 외곽에서 지원태세를 갖춘 채 왜군을 배후에서 노리고 있는 것도 큰 힘이었다.
1차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곡창지대인 왜군의 호남 진출을 차단했고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왜군 보급로를 막음으로써 한양 이북의 전투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결국 1593년 1월 평양성이 조명연합군에게 함락당한 후 평양에 있던 군대뿐만 아니라 함경도, 경기도, 강원도에 있던 전체 일본군은 서서히 퇴각하기 시작해 1593년 4월 조선은 한양을 수복하게 된다.
1차 진주성 전투 상황도
남쪽으로 후퇴하던 왜군은 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패전을 설욕할 겸 영호남을 교두보로 삼아 다시 북상하고자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 철수 중인 일본군을 총동원해 진주성 내 조선인을 남김없이 죽일 것과 진주성 함락 후 전라도를 공략할 것을 명령한다.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1593년 6월에 있었던 2차 진주성전투이다. 왜군은 이를 위해 1차 때보다 3배 이상 많은 9만3,000명의 대병력을 동원했다. 조선군 병력은 의병을 중심으로 겨우 6,000여명이었다.
<김천일은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 여러 장수와 함께 뜻을 더욱 굳게 가다듬고 향불을 피워 죽음으로 지킬 것을 맹세하고는 8일 밤 9일 낮을 쉬지 않고 전쟁을 독려하며 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에서 비가 연일 퍼부어 성대(城臺)가 무너져 내리고, 용맹한 장수로서 온 군사가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던 황진이 또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적병이 더욱 급하게 성을 타고 올라오니 혈전을 벌인 지 9일째 되는 날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2차 전투때는 1차에 비해 외부 지원군이 없었던 반면 왜군병력은 더 많은 등 훨씬 열악한 조건이였다.
김천일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죽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반드시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죽어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싸우다 죽는 것은 영광스럽고,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욕이 된다. 우리들이 지금에야 죽는 것도 너무 늦은 것이다. 다만 나는 의리상 흉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그의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당시에 그를 애도하는 사람이 ‘살아서는 의로운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7년 3월 20일자 기사]
임진왜란 때 왜군과 2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촉석루와 남강
전투 시작 8일 만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이 모두 전사했다. 군사와 백성 6만여명이 죽었고 소나 말 등 가축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왜군은 성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고 우물을 덮고 나무를 베어 잔혹하게 1차 전투에서 패한 분풀이를 했다. 6월 28일이었다.
진주성 내 창렬사 :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두차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진주성 전투는 계층과 지역을 막론하고 끝까지 죽음으로 항전함으로써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는 의미가 크다. 이 전투로 인해 왜군도 2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와 결국 호남 진출을 포기하고 부산지역으로 후퇴해 명나라와 휴전협정을 하게 되었다.
◎ 다시 영산강 트레킹 길로 돌아와서
영산천 합수점을 보아야 하는데 트레킹길은 드넓은 억새 강변으로 나 있다.
끝 없는 억새 강변길은 일제시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나주역사에 얽힌 사연, 반남 고분과 가야 문화 그리고 왕건의 고려 통일에 결정적 역활을 한 나주 오씨 일가의 이야기 등 이루말 할 수 없는 역사 문화적 이야기들은 영산강과 연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 구간이다. (여기서는 정리를 생략한다.)
다시 억새 밭길 사이로 돌아와서
꿈결 같은 억새 밭 사잇길을 걷는 지금은 영산강 트레킹의 또 다른 맛이다.
빛가람 대교가 보이고
빛가람 대교
빛가람 대교는 나주가 최근 혁신도시로 지정되어 에너지 수도로 탈바꿈하는 시기에 나주시청과 혁시도시를 바로 연결하기 위해 새로 만든 다리이다.
빛가람 대교를 지나면서
노무현재단광주지부 박옥현 이사님과 추억 한장. 박옥현 이사님은 참 친절하다. 세심한 배려가 몸에 베었다. 트레킹 내내 말벗이 되어 준다. 고맙고 감사하다.
빛가람 대교 아래에서 추억 한장 담고
빛가람 대교를 지난다.
다목적생태광장을 지나고
이런 저런 세상사 이야기 나누며 걷는 이길은 참으로 행복한 길이다. 누구든 편안한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 보길 강추한다.
길을 걷는다. 끝이 없는 이 길, 걷다가 지치면 쉬어 가면 되는 길, 쉬엄 쉬엄 여유롭게 걸을 수 있어 좋은 길
무선 무인기를 취미로 하는 분들을 만난다.
무인기 주인의 허락을 받고 무인기를 들고 한폼~ ㅋㅋ
이것 저것 호기심이 많아~
친절한 설명
나주대교가 저 멀리 보이고
나주대교를 지나면서
나주대교를 지나서 만난 쉼터에서 잠시 쉬어 간다.
전망대도 지나고
언젠가 이슬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이곳에 와서 따스한 커피 한잔에 피어오른 영산강 물안개를 바라보는 운치를 생각한다.
몽한적일 것 같다. 편한 사람과 함께라면~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담양댐 58km 지점을 지난다. 잠시 뚝방길을 지나
트레킹 길은 다시 뚝방길과 헤어져 억새 받으로 접어 든다.
고인돌일까?
장성천 합수점이 보인다.
장성천
광주 삼도에서 발원하여 나주 노안 들녁의 젓줄이 되고
이곳에서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또 걷고
걸어서
현위치 나주 No. 76 광주까지 1.0km 지점을 지난다.
광주와 나주 경계를 지난다. 현위치 광주 No. 0 담양군까지 30.7km 지점 이정표를 지난다. 이제 부터 광주이다.
광주입성 인증하고
영산강의 제2지류인 지석천을 만나는 중요한 합수점을 담지 못했다. 아쉽다. 나중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지석천 합수지점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 이 그림은 승촌교에서 바라본 지석천 합수부 방향 사진이다.
◎ 지석천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홍수피해가 잦아 둑을 쌓고 보를 만들었으나 계속 둑이 터지자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로 바쳐 둑 속에 묻고 보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 강을 '드들강'이라고도 한다.
영산강의 제2지류이며, 길이는 55㎞이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580m)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경전선과 나란히 북류해 화순군 도곡면 동부에서 화순천를 만나고, 다시 유로를 서쪽으로 바꾸어 남평면 경계에 이르러 나주댐에서 흘러온 대초천을 합친 뒤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이천보를 지나 영산강에 흘러든다.
승촌보 K - water 영산강보 관리단이 아련히 보이고
승촌보 캠핑장 표지를 지나
승촌보가 저기 있네!
영산강 수계도, 발원지 기점 71.2km 지점을 지난다.
승촌보 K - water 영산강보 관리단, 영산강 문화관이 지척이다.
◎ 영산강 문화관
영산강 문화관 모습
예쁜 사인 구조물을 담았다.
영산강 문화관 앞에서 기념 한 장을 남긴다.
국토종주 영산강 자전길(승촌보) 안내판
영산강 자전길 대통령 이명박 기념탑
갈대 숲 사이로 승촌보가 대단하게 다가온다.
영산강 문화관
통합기준점
이곳에서 오전 트레킹을 마치고
차로 이동하여 13번 지방도로변 노안가든에서 토종 백숙에 막걸리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와 오후 트레킹을 시작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 영산강 제 6경 '평산 낙안'
극락강과 황룡강 물길이 손잡고 흐르는 승촌보 일대의 넉넉한 경관
'모래톱에 내려앉은 기러기'라는 뜻으로 해오라기를 비롯한 많은 철새들의 쉼터인 영산강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표현한 말이다.
평산낙안 사진 놀이
◎ 승촌보
영산강 승촌보는 광주 남구 승촌동과 나주시 노안면을 연결하는 보로 총길이가 512m이며, 수문은 4개(길이 50m 수문 2개, 30m 수문 2개)가 있다.
이 가동보 4개는 500mm의 집중호우에도 홍수를 관리할 수 있다고 한다.
평상시 5m의 수심을 유지하고 있는 승촌보 바로 옆에는 영산강문화관, 캠핑장, 파크골프장이 있다.
승촌보 구조물은 쌀겨를 형상화 한것이라고 한다. 호남 평야의 풍요로움을 나타낸 걸까? 풍요롭길 바라는 염원일까?
승촌보 야경 - 다른분 블로그에서 퍼옴
승촌보 주변은 사계절 아름다운 곳이지만 특히 가을철 억새와 갈대의 화사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승촌보에서 바라 본 지석천 합수점 방향
승촌보를 지나서
이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때 오른쪽 강변을 따라 걷는다. 맞은편 마을은 봉호마을이다.
승촌보길을 지나서 다시 긴 강변 트레킹길을 따라 걷는다.
승용교를 지난다.
승용교는 지방도 49번도로로 나주 빛가람 혁신도시가 들어설 때 장성 - 광주 - 나주혁신도시를 잇는 '빛가람장성로'로 영산강을 지나는 다리이다.
초겨울 길가의 잡초 무더기는 한여름 울창했던 영화를 버리고 한 세월을 마감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파란하늘 아래 그 모습이 당당하다. 늙음도 저리 당당하길 바란다.
영산강 강변은 끝도 없는 억새와 갈대의 향연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 저리 살아있는 숲을 이루며 자연은 스스로 건강한 생태를 복원한다. 초 겨울 앙상한 억새는 내년 봄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건강히 살아나겠지?
안전하게 강변길을 걷도록 지자체에서 데크도 잘 정비 하여 놓았다.
잠시 쉬었다가
긴 억새밭 사이를 오랫동안 걸었다.
국가지점번호
비거주지역(산악, 들, 강 등)에서 응급상황 발생시 위치를 알려주는 소중한 번호이다.
영산강에 낙시대를 드리운 강태공
잔잔한 강변에 세월을 낚고 있는 저 강태공은 어떤 마음일까? 한마리라도 더 잡을려고 애를 쓸까? 흐르는 강물에 세월을 흘러 보내고 있는 걸까?
내가 만약 저기 있다면 세월을 낚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 세월을 낚고 싶다. 이제 인생의 저녁 무렵 여유롭게~ 한가하게~ 행복하게~ 천천히~ 지나온 삶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보자.
강변 억새
쉼터에서
장우창 총무님께서 직접 김장김치 준비해서 먹걸리 1박스 들고 마중을 나왔다.
이런 정성이 어디 있을까? 나는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한다. 장우창 총무님의 정성에 감동한다.
장우창 총무님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쉬었다가 다시 출발
황룡강 합수점
◎ 황룡강
영산강의 제1지류이다. 국가하천, 지방1급하천, 지방2급하천으로 나누어져 있다. 장성군 북하면에서 지방2급하천이 시작되고, 이후 북하면 용두교에서 지방1급하천으로 바뀌며, 광주광역시로 흘러들어 광산구 동남부를 관통한 다음 광산구 삼도동에서 평림천과 합류하여 국가하천으로 바뀌어 유계동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장성군 북하면 쌍웅리 황룡강유역은 영산강 유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백암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황룡강 상류를 막아 만든 장성호가 있고 주변에 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강이 흐르는 주변에는 황룡면, 황룡동, 황룡마을, 사호동, 복룡동 등 황룡강에서 비롯한 지명이 많다.
해가 너윗너윗 석양으로 기울고
황룡강 합수점을 지나
영산강의 일부인 극락강을 따라 걷는다.
서창 억새밭! 극락강변을 따라 펼쳐진 서창강변 억새 물결이 장관을 이룬 11월 중순 쯤 '서창억새축제'가 열린다.
서창교
서창마을 지나고
서창에는 서창 막걸리가 유명하다.
중촌배수통문(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243-5)
서창포구 이정표
서창교 아래 어느 음악 예술인의 연주에 잠시 쉬어간다.
서창천 배수통문
징검다리를 건넌다. 그림이 아름답다.
서창천은 광주 풍암저수지와 진평제 그리고 금호저수지 물을 모아 극락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오늘의 영산강트레킹 4구간 종점인 영산강 자전거길 안내센터
영산강 자전거길 안내센터 앞에서
오늘도 22km를 걸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하늘을 난다.
무엇이든 하나 하나 이루어 갈 때 삶의 의미는 생기지 않는가?
오늘도 살아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