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자 : 2023.06.25.(일)
2. 누구랑 : 광주지오트레킹
3. 산행구간 : 지리산둘레길 9코스 : 덕산-위태(11.0km)
5. 산행소감
2021.09.22. 지리산둘레길 8코스를 마무리하고 오랜시간이 흘렀다. 오랜기간 함께 할 산우님을 찾았지만 여러사정이 여의치 않아 마땅한 산꾼이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광주지오트레킹과 지리산 둘레길을 다시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진즉 마무리를 했어야 할 지리산둘레길을 마무리 못하고 멈춰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다시 지리산둘레길을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
6월 지리산 둘레길은 이미 여름산행으로 접어 든다. 후덥지근하고 지루한 포도 위를 걷는 것은 고역이지만 또 구간 구간 시원한 바람과 울창한 숲 그늘을 만나고 지리산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산행 맛이다. 지리 천왕봉 아래 참샘에서 발원한 시천천이 시천면 양단에서 덕천강과 만나 진양호로 들어가는 큰 강줄기를 직접 바라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경남 산청의 지리산 줄기 아래 고즈넉히 자리 잡고 있는 남명 조식선생의 산천재가 왜 덕천강 줄기에 자리잡고 있는가? 궁금한 점을 한눈에 풀어주는 둘레길이였다. 구 한말과 그 이후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위태로울 때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지리산을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전개한 경남창의대 의병들의 주 활동 지역을 지나가면서 온 산하가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그 참혹한 상황을 느끼며 걷는 먹먹한 둘레길이였다.
6. 산행 추억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 맞은편 산천재 한쪽 모서리에 위치한 덕산- 위태 시종점
남명 조식선생기념관 안쪽 남명선생기념 동상
산천재 (국가 문화재 사적 제 305호)
서북쪽으로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 그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과 삼장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양당에서 다시 만나 덕산을 이룬다. 덕산에 위치한 산천재는 바로 조선중기의 큰 선비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이 61세 부터 돌아가실때 까지 평생 동안 갈고 닭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화생들에 의해 계승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효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게 되었다. 남명 조식선생은 조선유학의 종사로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사뭇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천문, 지리, 의약, 국방, 음양, 도류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돈이, 소웅, 장재, 정이 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 원시유학으로 돌이가 공자와 안자의 고풍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선생의 경의정신 (敬義精神) 과 실천 유학은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저 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를 살았다. 이같은 시대를 맞아 선생은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학을 통감하면서 직설적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을 외면 하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횡포, 조정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닥지 않은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 이였다. 특히 선생이 올린 을묘사직소나 무진봉사 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가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생의 명명과 은연 중에 형성된 재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선생을 벼슬로 불렀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나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평가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한 기상으로 만품을 굽어 보고, 추상연일 같은 위엄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셨다. 선생의 이같은 기상과 위엄, 출처와 학문은 만세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였으며, 그 문도들은 이를 스스로가 본 받고 또한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서원을 짓고 강학 활동을 벌였다. 국가문화제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산천재 일원은 바로 이같은 일련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현제 사적지 안에는 남명선생이 당시 문도들을 가르치던 산천재, 영면하고 계시는 묘소, 위패를 모신 여재실, 선생의 학덕을 기르기 위해 세운 신도비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1 km 떨어진 곳에는 강우유림의 본산으로 선생을 봉향한 덕천서원이 있다.
이 서원 안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가 있어 봄과 가을로 향사를 올리며 매년 가을에는 선생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비문화축제의 일환으로 남명제가 열린다.
또한 경내에는 남명기념관이 새롭게 조성되어 남명 선생의 삶과 사상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산천재를 지나서 큰길을 따라 걷는다.
항일의병장 조인환 공훈비
조인환(曺仁煥, 1878~1909.11.11.) 의병장은 산청 삼장면 출신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12대손 이다.
1907년 박동의(朴東義) 의병장과 더불어 산청 덕산에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하였다. 이 의병부대가 지리산 의병, 경남창의대다.
조인환 의병장은 박동의 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함께 산청 덕산은 물론 산청읍, 단성, 하동, 남원 입석리 등 지리산을 넘나들며 일제 군경을 공격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용맹하고 의기가 넘쳐도 어쩔 수 없는 전력차, 기운 대세를 돌이킬 길이 없어 결국 1909년 11월 늦가을, 하동 옥종면 월횡마을에서 일제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그 전투에서 휘하 의병 13명과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하동 옥종 월횡마을!
경남창의대의 이야기를 따라 그들의 전적지를 표시해 두고 하나로 이어진 그 길이 우리 의병들의 피가 산하를 적셨던 곳! 바로 지리산 둘레길 9코스 길을 걸으면서 '이 일대가 경남창의대 의병들의 활동 무대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당시 의병들의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에 가슴이 뭉클해 진다.
여기서 잠깐!
"경남창의대(慶南倡義隊)"에 대하여 살짝 살펴보자.(어떤분의 블로그 글을 여기 소개한다)
경남창의대는 구한말 아니..경술국치 이후에도, 서부 경남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활약한 당시 의병부대 중에서도 규모도 컸고, 강력했고, 또 많은 활약을 했던 부대였다. 대체적으로 1907년 군대해산과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 이후에 경술국치 이후까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과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연합 의병부대다. 이들은 수십에서 2백 여명 정도 단위의 여러 부대로 나뉘어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서로 연계해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제군경을 상대로 싸워 나갔고, 또 다른 부대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가진 강력한 부대로 일본군경에 큰 위협이 되었다.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병들은 대략 1만 1천여를 헤아렸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경남창의대에 속한 의병들이었다.
우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들의 흔적은 하동 악양 정서리 취간림 속 '지리산 항일의병 기념탑' , 하동 옥종
안계리 '류명국 의병장 공훈비', 산청 덕산 산천재 밖의 '조인환 의병장 공훈비' , 그리고 하동 화개 의신마을의
'무명의병총' 등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찰 법계사와 지리산 대원사도 그렇고.
박동의 의병장
경남창의대를 이끈 창의대장은 산청 출신 박동의(朴東義, 1867~1908) 의병장이다.
일제군경이 남긴 기밀문서 등에서 보이는 그의 행적은 휘하에 의병장 14인, 의병은 1천 여에 달했고, 지리산 깊은 골 사찰인 산청 법계사와 하동 쌍계사, 칠불사 등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박동의 의병장에 대한 일본군 기록
경남창의대에는 해산된 대한제국군인들도 합류해서 신식소총도 보유했고, 화승총과 지장포 같은 무기도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1908년 3월 산청경찰서와 군청공격, 4월 합천우체국 공격, 6월과 8월엔 남원 입석과 하동수비대 공격 등 산청, 하동, 진주, 함양, 남원, 광양 등 지리산권을 배경으로 오가며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10월 17일, 경남창의대장 박동의 의병장이 산청 덕산에 주둔하던 중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고 결국 산청 시천면 동당리에서 전사하게 되면서 경남창의대 활동이 축소되고 말았다.
박매지 의병장
하지만, 박동의 의병장이 전사 한 후에 경남창의대는 하동 출신 박매지 의병장을 중심으로 재결집하고 활동을 다시 개시한다. 박매지 의병장은 전해지기로 지리산 연곡사에서 산화한 고광순 의병장의 휘하에 있다가, 고광순 의병장이 전사한 후에 수십명의 의병을 수습하여 박동의 의병장의 의진에 참여했다.
박매지(朴每之, 이명 박인환, 1882~1909)의병장은 하동 악양출신으로 지리산에서 활약하던 포수출신으로 명사수로 유명했다. 15, 16세 때에 이미 호랑이도 잡았다. 원래는 대략 그가 거느린 의병들의 수를 30~40명 정도로 봤는데, 최근에 발굴된 일본군이 작성한 소위 '폭도수령조서(暴徒首領調書, 1909년 3월)'라는 문건의 기록으로 보니 그가 거느린 병력이 무려 4백에 이르렀다.
박매지 의병장에 대한 일본군이 작성한 폭도수령조서
조서에서 보이는 지리산 의병장으로 윤승지(尹承旨) 의병장은 6백, 양문칠(梁文七) 의병장은 25명, 일본군경 측 기록으로는 1909년 당시 활동하던 의병장은 3백 여, 의병은 1만1천 여였다. 그중에서 4백 이상의 의병부대가 셋인데 그중 둘이 경남과 지리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매지 의병장은1907년과1908년 하동 악양의 신금벌과 봉황대 전투에서 일본군경에게 큰 타격을 준
전투로 유명하고, 그외에도 군자금 모금과 동료 탈출을 위해 진주에 잠입하여 진주형무소를 폭파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잡혔다가 탈옥에 성공했고 또 1909년에도 함안의 칠원경찰서 습격 등 대일항쟁을 주도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시아 최강이라는 일제의 군경을 상대로 열악한 전력의 의병을 이끌고 싸우는데 늘 큰 부담과 위험을 안고 싸우다 결국 박매지 의병장도 1909년 7월, 진주 대평면 신풍리 한들전투에서 일제군경과 조우하여 전투 중에 그만 전사하게 된다. 겨우 서른도 안된 젊은 나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경남창의대, 지리산의병의 투쟁은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단다. 창의대장 두분의 전사 이후에도 또다른 의병장과 의병부대들이 그 뒤를 이었고, 경술국치 이후까지도 그 저항은 이어졌다고 한다. 물론 경술국치로 인한 국권침탈과 그 직전 '남한대토벌' 작전 등,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탄압으로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친다.
경남창의대 의병들의 주력 무기인 화승총
그러나 우리가 지리산 깊은 골, 산청 대원사와 대원사 계곡의 수려한 경관에 감탄할 때, 기억할 일이다. 그곳은 바로, 경남창의대. 지리산 의병들이 피를 뿌렸던 격전지였음을!
그리고 또 기억할 일이다. 지리산을 오르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기전, 쉬어가며 찬 약수에 목을 축이던 그곳, 지리산 법계사도 경남창의대의 의병전쟁 속 치열한 격전지였고, 그때문에 일제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우리에게 되돌아 온 것임을!
의병이란 존재에 대해서 일본도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의 열강들은 이들을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정규군인 또는 국제법상의 교전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에게 의병은 일개 '폭도'였다. 당시 열강 대부분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로 같은 입장에 있었고, 이름도 못 들어본 나라를 위해 강대국인 일본과 외교적 마찰을 감수해야할 이유도 없었으니, 이런 순간에 외면하게 되지.
일본군경들 모습
우리 의병에게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받는 것, 이게 중요했던 이유는 당장 실질적이고 큰 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싸우는 명분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느냐의 여부가 걸린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의병 전투원이 적과 교전하다가 적에게 피체되었을 때,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적 근거와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입장에서 의병의 싸움, 전쟁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에 맞서 싸운다는 정당한 명분을 가진 것이고 의병은 그 전쟁에 나선 전투원이라는 국제적인 인정.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앞서 서울의 각국 외교공관에 우리의 입장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 정당한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또 프레데릭 메켄지의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 에
언급한 것처럼, 종군기자 인터뷰를 통해서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도 기울이고 했다.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우리 의병들의 모습
만약에 일본측이 말하는 것 처럼 우리 의병들이 그냥 화적이고 비적이고, 폭도라면, 재물을 노리고 방화, 살인, 약탈을 일삼는 그런 화적, 비적이 이런 외교적 노력, 명분싸움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그런 비적, 화적이라면 이들이 아시아에서 최강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강군이라는 일본군경을 상대로 목숨걸고 전투를 벌이고, 이어갈 이유가 있겠느냐?
화적, 비적 떼에게 승산이 없고, 죽음을 감수한 전쟁, 지키기 위한 전쟁이란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말인가? 당시 우리 의병은 일본측 말대로 폭도, 비적, 화적(火賊)떼가 아님이 명백하다.
일본을 포함하여 당시 열강들, 국제사회가 이들을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하였느냐의 여부가 의병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일 수 없다. 그들이 언제 약소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해 관심이나 가진적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의병의 성격과 의병전쟁의 성격에 대한 규정은, 일본과 일본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시선으로 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 경남창의대. 기억하라.
치열하게 타오르던 1907년 정미년의 의병전쟁,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진주와 지리산에도
그 불길은 일고 있었고, 그 중심에 경남창의대가 있었다.
다시 지리산 둘레길 9코스로 돌아와서
시천마을 옥수수잎 사이로 저 멀리 하늘금에 우뚝 다가오는 봉우리가 어디여! 지리산 천왕봉이네! 아 ~ 남영 조식 선생이 왜 이곳 시천에 터를 잡았나 궁금증이 일시에 풀린다. 조선 남쪽 최고봉인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덕천강 줄기에 자리를 잡은 이유을 알겠다. 학문은 실천과 함께 해야 살아있는 학문이 된다고 하는 그의 청정한 신념과 서릿발 같은 기상을 천왕봉과 늘 느끼고 청정함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 이곳 시천이였을 것 같다.
지리산 천왕봉을 당겨본다. 남명 조식선생의 기상을 오늘은 천왕봉에서 느낀다.
지리산 둘레길은 덕천강을 향해 좌측으로 덕산문화의 집 쪽으로 향한다. 길가에 해바라기가 정열적으로 피었다.
한여름으로 향하는 6월 하순 해바라기와 함께 여름이 익어간다.
산청 117-1번 덕산 0.6km 이정목을 만난다. 둘레길은 덕천강변을 따라 덕산시장으로 향한다.
오늘 함께한 대원님들이 잠시 대장님의 안내를 받는다.
덕천강이 진양호를 향해 가는 여유로운 풍광을 담았다. 앞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산은 수양산이다.
덕천강은 시천면을 지난다. 덕천강변에서 저기 하늘금에 웅장한 산줄기를 담았다. 구곡산이다. 구곡산 줄기는 황금능선을 거쳐 써리봉과 중봉을 지나 천왕봉에 닿는다.
덕천강이 너무 정겨워 자꾸 카메라를 눌렸다.
산청 118번 덕산 1.0km 이정목
기념한장 남기고
시천면에 있는 청류정이다. 마을 어르신분들이 시원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다. 정말이지 맑은 물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야말로 자연 쉼터이다. 청류장이다.
덕산시장을 지나고
원리교 입구 이정목
산청 119번 덕산 1.3km 원리교 이정목이다.
원리교 난간에는 예쁜 꽃이 만발하였다.
돌아본 원리교
길가에 있는 도화정이다. 이 도화정에 서면 시천천과 덕천천이 합수되어 양단수가 되어 덕천강을 타고 진양호로 흐르는 기막힌 풍광을 즐길 수있다.
충효와 경로석
시천천과 덕천강이 합류한 풍광을 읊은 남명선생의 시조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武凌)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여기서
두륜산은 지리산을 의미한다. 두륜산 양단수는 덕천천과 시천천을 의미한다.
원리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산청 120번 덕산 1.5km 이정목
둘레길은 천평교쪽으로 급하게 꺽는다.
저기 보이는 덕산고등학교 뒷편에 덕천서원이 있다. 오늘은 선두와 많이 떨어져 덕천서원을 들러보지 못하고 그냥 지난다. 유서 깊은 덕천서원은 나중에 다시 둘러보기로 한다. 산청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남명조식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천평교를 지나면서 가야할 둘레길을 바라본다.
천평교
다리교각에 설치된 화분아래 틈새로 시천면을 담았다.
교각 위에 설치된 화분위로 예쁘게 핀 꽃을 배경으로 덕천강을 담아본다.
금환락지 (金環落地)
하늘을 이고 선 천왕봉!
아늑하고 비옥한이 땅!
서신마을 뒤편 자그마한 산봉우리에 선녀가 앉아있다
선녀는 다리미로 구곡산 구폭치마를 다리며 금가락지를 천평들판에 빼어놓았다
원리, 사리, 천평리를 울타리 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상은 가락지를 닮아있다
덕산중 · 고등학교 뒤편 동산은 다리미 형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천평들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금환락지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산청 121번 덕산 1.6km를 지나는 양단수 이정목
양단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리(시천천)과 삼장리(덕천천)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이곳 양단에서 다시 만나 덕산을 이루며 이후 덕천강이 되어 진양호로 흘러들어 간다.
양단수 : 저기 보이는 다리 아래 흐르는 물줄기는 덕천천 주 줄기이며 바로 앞에 흐르는 물줄기는 시천천이다. 두 물줄기가 이곳 양단에서 합수 되어 덕천강을 이루면서 진양호로 향한다. 두 물줄기를 두류산(지리산) 양단수라 한다.
양단수 합수지점이다.
이제 지루한 아스팔트 위를 부지런히 걷는다.
길가엔 개망초가 지천이다.
돌아본 시천면
가뭄에 저리도 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히 서 있는 품격에 경의를 표한다. 한갓 수풀도 저리 당당하거늘 우리네 삶도 저리 당당하여야겠다.
산청 123번 송하마을 앞 이정목
송하마을에는 잘 지어진 전원 주택들이 강변을 따라 쭉~욱 서있다.
패랭이 꽃이 무엇가 외치고자 한 절실함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일까?
양귀비
덕천강 강변에 자리잡은 산천재를 바라보며 걷는다.
걸어야 할 지리산둘레길 9코스
산청 124번 덕산 3.0km 이정목
20번 지방도로 덕산1교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걷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이 온 몸을 휘감는다.
산청 125번 덕산 3.5km 이정목
20번 지방도로 덕산1교를 지난다.
여름 피서지로는 다리 밑이 최고지요
이미 돌아가신 광주에 산꾼 백계남님의 시그널을 여기서 보네! 감회가 새롭다. 그의 영면을 빈다.
덕천강을 따라 둘레길을 걷는다. 둘레길은 지역마다 지리적 특성과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이곳을 지날 때 나는 덕천강 줄기가 제일 궁금하였다. 직접 볼 수 있어 나에겐 새롭다.
길가에 음용수 터가 있는데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고 있어 이끼가 더욱 신비함을 보여 준다.
산청 125-1번 덕산 4.1km 이정목을 지난다.
덕천강은 유유히 진양호로 흐르고
되돌아본 둘레길
지나가는 둘레길 주변에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개망초는 농사를 망친다고 하여 개망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개망초를 볼 때마 꽃잎 한송이 한송이는 볼품없지만 저렇게 함께 군락을 이룰 때 멋진 풍광을 자랑하듯이 늘 힘없고 빽없는 민초들의 모습 같기에 개인적으론 무척이나 정이가는 꽃이다. 힘없는 백성이 함께 저렇게 군락을 이룰 때 세상이 바뀌고 그것이 민심이고 천심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덕천강을 따라 한참을 머문다.
아름다운 덕천강이여 안녕 이제 이별을 하자 진양호로 잘 흘러가서 남강을 이루고 부산포로 가쳐 남해 바다로 흘러가거라
장미와
둘레길은 굽이 굽이 돌아가고
중태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발길을 잡는다.
산청 중태 마을에는 감나무 농장이 천지다.
산청 126번 중태마을 이정목
중태마을을 향하는 둘레길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후덥지근하다. 땀이 비오듯 하다.
전봇대를 담쟁이가 아름답게 휘어 감았다.
어느 감나무 농장에 있는 정자 쉼터
길고 지루한 중태 마을로 향하는 둘레길
가끔 마을 담아래 예쁜 여름 꽃이 지친 산꾼을 반갑게 맞아준다.
원추리
감자꽃
산청 126-1번 덕산 5.2km 이정목
저기 보이는 곳이 중태마을이다.
담벽아래 접시꽃
중태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하고
중태 안내소 둘레길 인증도 하고
잠시 쉬었다가
중태경로당
다시 출발하며 함께한 대원님들을 담았다. 순박하고 건강한 분들이다.
산청 126-2번 이정목. 중태마을은 온통 단감나무 밭이다. 산청감은 이곳에서 수확하나 보다.
하늘 높이 치솟은 무릉은 어떤 곳일까?
80이 넘은 분들도 같이 걷는다. 씩씩하고 건강하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태재를 향해 걷는 발걸음을 금계국이 반갑게 맞이한다. 아름답고 여유로운 길을 산우님들과 이러저런 담소를 나누면서 걷는 길이 참으로 좋다. 더구나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에 흔들이며 걷는 길은 말해 무얼하리!
아늑한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길은 구 한말 경남 창의대 의병들의 활동무대였다. 막강한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목숨을 바쳐 강력히 저항하다 승화한 의병들의 장렬한 희생 앞에 고개 숙여 마음속 묵념을 올린다. 숙연한 산길이다.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 둘레길엔 이제 밤꽃은 서서히 지고 올 가을 탱탱하게 영글을 밤을 준비를 하고 있다.
길가에 지천으로 열려 있는 딸기에 쑥 빠진 산우님들
깊은 계곡과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이 계속되고
중태리 계곡에는 대나무 밭이 군대 군대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살아 있는 자연 생태계를 느낀다.
산청 126-3번 덕산 6.5km 이정목
삼화사 이정석
계곡은 깊고 하늘은 높다. 오늘은 하늘이 가득이나 흐려 있지만 맑았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계속된 오름길은 산꾼을 지치게 한다.
개인 농원 입구에 꽃이 만발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앞을 지난다.
호두열매
이쯤에서 계속 된 오름 둘레길에 숨이 찬다. 물 한 모금 마시면서 한숨 쉬어 간다.
산청 127번 유점마을 이정목(덕산 7.7.km)
지나온 둘레길을 돌아보니 산골마을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산골 마을 2
산청 128번 덕산 7.9km 이정목
중태정자 쉼터
산청 129번 덕산 8.3km 이정목
소나무 숲길 속으로 접어들고
줄곧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이제 여기서 부터 중태재까지 산길로 접어든다.
산청 130번 덕산 8.8km이정목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중태재까지 산길이 가파르다.
한발 한발 있는 힘을 다해 오른다.
드디어 오늘 오름길의 끝 중태재이다.
하동 001번 덕산 7.8km 중태재 이정목(하동 이정목에는 덕산 - 위태까지를 9.7km 로 표기하여 놓았다. 어느 곳이 맞을까? 산청은 11.0km, 하동은 9.7km 이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이곳을 넘으면 하동군이 된다.
중태재 이정목 인증 한 장 담고
이제 급경사 내리막 길이다. 미끄러지기 쉬운 내리막길을 조심 조심 내려간다.
중간에 대나무 숲길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목에 아늑한 저수지를 만나다.
하동 003번 덕산 8.5km 이정목을 잡초 속에서 찾았다.
개망초가 예쁘게 피어 있는 저수지 둑에서 잔잔한 물결 너머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 본다.
참으로 한가하고 아늑한 산골 풍광이다.
위태마을 향해 부지런히 걷는다.
굽이 굽이 돌고 돌아 내려가는 둘레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산골 풍광들
하동 004번 덕산 8.8km 이정목
하동 005번 덕산 8.9km 이정목
하동 006번 덕산 9.3km 이정목
하동 007번 덕산 9.6km 이정목
오늘의 지리산 둘레길 9코스 종점인 위태 마을에 도착했다.
하동 008번 덕산 9.7km, 위태 0.0km 이정목
위태마을 버스정류장과 마을 표지석
지리산 둘레길 9코스(덕산-위태)와 10코스(위태-하동호) 시종점
지리산 둘레길 9코스 완료 인증 한 장 남기고
오늘 지리산 둘레길 9코스(덕산 - 위태) 11.0km를 걸었다. 경남창의대 의병들의 강력한 항일 투쟁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걷는 의병길이였다. 지금은 한가롭게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 볼 수 있지만 6.25 한국전쟁과 구한말 이후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들과 독립투사들 그리고 더 이전에는 정유재란과 임진왜란 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지킨 민초들의 의병 활동을 가슴 깊이 새겨보는 역사의 길을 걸었다. 걷는 발걸음은 힐링이지만 의병을 생각한 마음은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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