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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

2022.11.06. 문경새재 과거 길 트레킹

by 하여간하여간 2022. 11. 9.

1. 일자 : 2022.11.06.(일)

2. 누구랑 : 광주 지오트레킹

 

3. 산행 구간 : 주차장-제1관문(주흘관)-타임캡술광장-문경새재 오픈세트장-조령원터-마당바위-주막-교귀정-용추-산불됴심비-조곡폭포-제2관문(조곡관)-조곡약수-문경새재아리랑비-낙동강발원지-장원급제길-제3관문(조령관)-연풍새재 길-고사리주차장

 

 

 

4. 산행소감

 

문경새재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함께 한다고 해 놓고 함께하지 못해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는 광주 지오트레킹에서 문경새재 트레킹을 한다기에 문경새재도 그립고 또 광주지오트레킹과 함께 하고자 문경새재로 향한다. 문경새재는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지난 추억이 생생하다. 백두대간 할 때도 조령을 지나면서 더욱 추억이 깃든 곳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와 과거에 합격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임진왜란 때 선조의 부름을 받은 신립장군은 왜 조령을 마다하고 평지인 충주 탐금대를 택해서 왜군에 대패했을까? 한말 항일투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운강 이강년 장군의 자취가 궁금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문경새재로 향한다. 문경새재 길목엔 옛 선비들의 싯구가 즐비하다. 그 많은 선비들과 상인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생긴 사연이 애닮다. 늦가을 온 산하가 붉은 단풍으로 물들 때 문경새재 길에도 붉은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을 선물한다. 트레킹이지만 역사 공부하는 하루이다. 

 

 

5. 산행추억

주차장은 차량으로 만원이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등산로 안내도

 

 

깜찍한 안내판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새재비

 

 

문경새재 종합안내

 

 

문경새재

명승 제 32호

문경새재는 조선의 옛길을 대표하는 관도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의 초점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새들도 쉬어 넘는 힘든 고개'라는 뜻의 조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제3관문(조령관)까지 650m에 이르는 고갯 마루를 닦았다. 이로써 문경에서 괴산, 연풍을 잇는 대로가 개통되었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원)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 기능을 했다.

문경새재는 산성을 쌓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사적 제147호)과 국립 여관에 해당하는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정자, 주막터, 성황당 그리고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남아 있다.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 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높은 조선 최고의 옛길이다.

문경새재 일대는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숲길 등 경관 가치가 뛰어나다. 현재 '옛길 걷기체험' 등 옛길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체험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어 현대인들의 조선시대 옛길과 선비 문화를 누릴 수 있다.

 

 

 

붉은 단풍이 물들고 있는 옛길엔 체험행사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경관

 

붉은 단풍에 취하고

 

 

또 취하고

 

 

체험 행사장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 아래서 한장

 

 

옛 도공의 집념

 

 

오늘 함께한 광주지오트레킹 회원님들과 인증

 

문경새재 과거 길 표지석 앞에서

 

 

제1관문 주흘관을 향해서

 

 

문경관문

 

사적 147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였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로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년)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은 왜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후퇴하였는가?

 

나의 생각

이렇게 중요한 문경새재를 어찌하여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은 버리고 충주로 후퇴하였을까? 누가 봐도 부산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고 당연히 문경새재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 길을 막으면 왜군이 한양으로 쳐들어 오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길목을 지키고 사수했어야할 것인데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니 후퇴하였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다. 선조는 신립장군이 왜군을 무찌를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에게 임무를 맡겼지만 무능한 조선의 신립장군은 보병이 많은 왜군을 기마병이 많은 우리 조선군이 이길 것으로 생각해서 평야지대인 충주 탄금대로 유인하였다고 한다. 종사관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만큼 조령의 협곡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을 할 것을 신립에게 권했다. 그러나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인 데 반해 아군은 기병이므로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신립은 기병을 출동시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했다. 만약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 문경새재 협곡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왜군을 협곡 위에서 공격하였다면 왜군이 힘을 못 쓰고 물러났을 것인데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중요한 군사 요충지를 버렸으니 왜군은 힘 한번 쓰지 않고 그 어려운 백두대간을 넘어 한양으로 진격해 들어 온 것이다. 굳게 믿었던 신립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완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의주로 도망을 쳤으니 한심하기 이를 대가 없다.  전쟁이 나면 왕이나 왕세자가 제일 앞에서 목숨을 바쳐  싸워야 그를 따르는 백성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킬 것 아닌가? 자기만 살겠다고 서울에 세자 광해만 남겨두고 떠난 선조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이였는가?

 

만약 육지에서 신립장군이 문경새재를 지키고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보급로를 차단하였다면 일본이 조선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은 사적 147호이다.

 

 

제1관문 주흘관 경관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 협곡을 높은 성으로 쌓고 완벽하게 군사 요새화 하였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로 한양으로 진격을 못하니 얼마나 중요한 관문인가? 임진왜란 이전에 이렇게 성을 쌓고 신립장군이 이곳을 지켰다면? 우리의 역사는 다르게 전개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주흘관 옆 조령천의 구조물이 특이하다.

 

 

주흘관

 

 

백두대간 천년비젼선포 기념비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광장

 

타임캡슐탑

 

 

전나무

 

 

이 길은 예로부터 청운의 꿈을 품은 영남의 선비들을 비롯한 길손들이 한양으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 이곳에 길의 개설과 함께 심어진 수령 600여년의 높은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 새재길을 오가던 길손들의 벗이 되어 오더니 1978년 9월 11일 수명을 다하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이 그루터기를 경북 개도 100주년을 기념한 타임캡슐광장을 조성하면서 1998년 10월 전방 15m 지점으로 옮기고 그 씨앗에서 자생한 40년생 전나무가 타임캡슐 뒷편에서 고이 자라고 있다.

 

주흘관 이정표

 

 

감나무와 파란 하늘에 가을이 무르 익는다.

 

 

문경새재와 운강 이강년(1858.12.30~1908.10.13)의 의병항쟁

 

문경새재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한 분인 운강 이강년선생이 일본군과 두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인 곳이다. 선생은 1858년 문경군 가북면 도태(현 가은읍 상괴리)에서 태어나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지만,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갑오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고, 전기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1896년 2월 23일 도태장터(가은 상괴 1리)에서 창의하여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 해 3월 20일부터 약 한달 동안 일본군의 주요 병참선인 조령의 동원촌 (현 2관문과 3관문 사이 동화원)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수안보와 평천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07년 8월 일제의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선생은 제천에서 거의하여 연합의진을 결성하고 8월15일 제천 천남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였다. 다시 충주성을 공경한 후 9월 문경으로 진군하였다. 1907년 9월 7일 문경읍을 장악한 운강의병부대는 9월 9일 주흘루 주변 민가를 소각하고 약탈을 일삼은 일본군을 격퇴하고 주민들을 위로하였다. 해국사를 거쳐 당포로 진출하여 9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갈평에서 마을에 불지르고 만행을 일삼던 일본군 1개 소대를 괘멸시켰다.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물러나 단양 영월로 진출한 후 약 1년간에 걸쳐 일제침략에 항거하여다.

선생은 1908년 7월 2일 제천 작성산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그 해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운강 이강년 독립투사님에게 삼가 고개 숙여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이런 훌륭한 의병장들이 전국 각지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지만 무능하고 사욕에 미친 왕과 중앙 대신들의 잘못으로 나라를 빼았겼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비통하다.

 

 

문경 선정비군

비석을 세우는 본래 의미는 충 효 예 등의 덕행을 후세에 전하여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데 있다. 이곳의 선정비군은 흔히 선정비 송덕비등으로 불러지는 것으로 대게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주로 1700~1800년대 세워졌으며 관찰사 및 순찰사 3개 군수 및 현감 7개 기타 2개가 있다. 이 비석군은 문경읍 관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옮겨 주흘관(1관문) 뒤에 있었으나 경북개도 100주년기념사업인 타임캡슐 매설로 인하여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태조 왕건 촬영세트장 입구

 

 

이 조형물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아~ 영화 촬영 카메라 맨이네

 

 

 

태조왕건촬영셋트장이 소나무 너머로 보인다. 이곳은 패스한다.

 

 

문경새재 과거 길엔 가을이 짙게 물들었다.

 

 

산책객들은 짙어가는 가을에 한가로운 시간이다.

 

 

너무나 고운 붉은 단풍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

 

상주목사 이익저의 불망비

 

 

쉼터

 

조산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이다.

 

 

새재길 옆으로 흐르는 물이 맑다. 많은 이들이 지나가도 이렇게 깨끗한 물이 흐르니 우리도 이제는 수준 높은 산책 문화가 자리 잡는가 보다. 좋은 일이다.

 

지름틀 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참깨 들깨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판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다.

 

 

 

등룡정

등룡정은 현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사정(활을 쏘는 곳, 사장이라고도 함)으로서 삼청동 운룡정, 사직동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필운동의 등과정과 더불어 서촌오사정으로 불리어졌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이 정자는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 촬영을 위하여 재현한 촬영 세트로 이순신의 장인이자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강궁이었던 "병진"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며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과 원균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이다.

 

 

조령원터

 

 

조령원터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을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조령원터의 전체 면적은 1,980㎡(600평)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은 너비 2.8m~3m, 높이 2.9m 내외이고 동쪽 57.6m, 서쪽 53m, 남쪽 38.9m, 북쪽 37.7m의 대칭변 길이가 모두 다른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이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부를 물설주로 세웠다.

문경시에서는 조령원터 복원을 위해 1977년과 1997년 2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터가 두개 층에 걸쳐 발견되었는데 발굴 보조서에 따르면 상단의 건물지에서 고려시대 온돌유지와 부억시설의 일부가 드러났다. 또한 이를 비롯하여 와편,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철제 화살촉,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서쪽 돌담 중간에 문지가 남아 있는데 돌담을 성벽의 육축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부를 물설주로 세웠다.

 

 

2014년도의 선답자가 담은 조령원 안쪽 모습

 

 

지금은 텅비었다.

 

 

돌담의 쌓는 모습이 다체롭다

 

큰돌 작은돌을 균형있게 잘도 쌓았다.

 

 

무주암

누구든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다.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고 한다. 새재골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있는 곳으로 바위 위에 앉으면 맞은 편 조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영남대로 옛 과거길이 나있다. 옛 선비의 심정으로 걷고 싶었지만 선두 대원들과 너무 떨어져 이 길은 패스한다.

 

 

 

문경새재 트레킹 길은 잘 정비되어 넓고 편안하다. 길 주변에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잘 잘라서 아름다운 숲길을 만들고 이렇게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길손을 반긴다. 

 

 

 

 

마당바위

타원형으로 된 이 바위는 긴쪽이 약 5m,  짧은 쪽이 약 4m로써 지금은 새재를 찾는 많은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다.

 

 

 

상처난 소나무

[v]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학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렇게 소나무 송진을 채취하려고 소나무에 상처를 낸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다. 나라 없는 설움은 백성만이 아니고 소나무도 함께 힘든 실련을 같이 격어야 했다.

 

 

영남대로 옛 과거 길이 다시 합쳐진다.

 

중간 중간에 이렇게 돌탑을 쌓고 있다. 간절한 소원이 들어있나 보다.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는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고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주막을 조국순례 자연보호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간 선비들 중에는 이곳 주막에서 기생들과 연분이 나 과거 시험은 팽개치고 주색놀음에 빠진 얼빠진 선비들이 있었으니, 고향에서 낮이나 밤이나 성공하여 돌아올 아들과 지아비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부모 형제 마누라가 얼마이던가? 그런가 하면 과거에 합격하여 의기 양양 이 주막에 들러 한 잔의 술로 추억을 달랜 올곧은 선비가 또 얼마만이던가? 예나 지금이나 정신 차린놈과 못차린 놈은 있으니 인간사가 다 그런것 아닌가?

 

 

  

어떤 선비가 주막에 묵으면서 시 한수를 남겼다.

 

 

함께한 대원들이 잠시 한숨을 돌리고

 

 

문경새재 박달나무

예로부터 문경새재는 민요로 알려진 만큼 막달나무 자생지로 유명하며 현재는 2관문계곡, 꽃밭서들 등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박달나무

 

 

다시 만난 붉은 단풍의 우아함

 

 

현감 이인면의 선정비와 애휼비

 

 

 

 

 

교귀정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엄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상감사 도임 행차

 

 

용추약수터 이정표

 

용추약수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깍아 샘을 만든 뒤, 반듯한 천정석과 큰 바위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조곡관(제2관문) 축성 당시(선조 27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새재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뭍혀 오랜세월 세간에 잊혀 있던 것을 2003년 10월 복원하였다.

 

선답자가 담아 준 용추샘

 

 

교귀정 소나무

이 교귀정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족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형태와 수형으로 그 신비감을 더해 준다.

 

 

교귀정 소나무

 

교귀정

 

교귀정 바로 앞 새재용추정 시 한수를 남긴다.

 

 

 

용추계곡

 

 

용추(아랫방향)

 

 

용추 각자

제1관문과 2관문 중간 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소를 이루었는데 이를 용추라 한다. 이곳은 새재 옛길의 백미로 곱히며, 용추 글씨를 새긴 사람은 구지정이다. 구지정은 본이 능성이고, 현종 7년(1666)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공주와 황주 목사를 지냈다.

 

 

용추 각자

 

 

 

용추에는 넓은 바위가 계곡을 따라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마 옛 선인들은 이곳 용추에서 흐르는 계곡물에 시름을 씻고 곡주 한 잔에 정담을 나누었을 것 같다. 시도 짓고 풍류를 노래 했는지 모른다. 이곳이 문경새재 길에서 백미이다.

 

 

태조 왕건 드라마 중 궁예가 최후의 독백을 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곳이 이 용추 바위에서이다.

 

 

교귀정 이정표

 

주흘 영사 시비

 

안동부사 김수근의 타루비

 

문경새재 길은 이렇게 넓고 완만하여 산책객들에겐 안성맞춤이다. 길 양변으로 문학적 역사적 선조들의 흔적이 즐비하다.

 

 

기도굴

문경새재 길은 하늘재와 더불어 최양업 신부(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 번재 한국인 사제)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순회 전교활동을 위하여 넘나들던 곳으로 새재입구(문경읍 진안리)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은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기도굴은 길이 7m, 폭 5.5m, 높이 1m 크기의 자연동굴로써 이 굴은 조선시대 말기에 박해를 피해 교우들과 함께 숨어 지내며 기도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지나면서 설명만 보았다. 실제 기도굴은 가보지 못해 아쉽다.

 

 

 

꾸구리 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를 움직인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문경새재 과거 길(옛길)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 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옛길은 보기만 하고 패스한다.

 

 

소원성취 돌탑이다.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 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못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산불됴심 표지석

표석의 설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진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문경새재 길 가에 아늑한 호수가 정겹다.

 

 

새재길  한쪽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운치를 더해 준다.

 

 

인증 한장

 

 

물레방아 물을 꽤 멀리서 나무 수로를 만들어 이끌어 오고 있다.

 

 

 

 

거제부사 윤수인의 애민선정비 와 현감 이인면의 거사비

 

 

조곡폭포

 

 

주흘산 등산로 안내도

제2관문인 조곡관 앞에 세워진 주흘산 등산 안내도이다. 제2관문에서 주흘산으로 가는 중간에 꽃밭서들이 있다.

 

꽃밭서들

제2관문(조곡관)에서 주흘산 등산로 4km지점에 위치한 꽃밭서들은 진달래꽃과 문경새재의 토작수종인 물박달나무 군락지로 주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긴 돌을 세워 놓고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소원성취를 기원한 수백개의 돌탑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이곳에 돌탑을 쌓아 기원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전하여 진다.

 

나는 꽃밭서들을 가보지 못하고 안내판에서 읽기만 하였다.

 

 

제2관문 이정표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합격기원 기발이 나부낀다. 조곡교를 지나면서 광주학생 수능대박을 빈다.

 

 

 

제2관문인 조곡관은 협곡이 유난히도 좁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뒤에서 본  영남제2관문

 

제2관문을 통과하면 넓은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산책객들은 여기서 한숨을 돌린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새재 넘어 소조령길 제1코스 새재길(9.1km,3~4시간)

영남과 기호지방을 이어주는 새재는 조선시대 사람과 물자가 가장 많이 넘나들던 번잡하고 애환이 서린 길입니다. 수많은 선비가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 길에 올랐고, 영남 북부의 세곡이 이 길을 통해 충주 가흥창으로 모였으며, 조선통신사가 걷던 길입니다. 계립령, 죽령, 추풍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넘던 새재를 통해 우리의 전통 문화와 선인들의 삶을 되짚어 살피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문경새재 과거 길(옛길) 한시가 있는 옛길

조선시대 서현들께서 문경새재를 넘나들며 남겨 놓은 한시들을 감상할 수 있는 옛길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문경새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한시가 있는 옛길을 걸었다. 한시를 한수 한수 카메라에 담아 여기 올린다. 선인들의 애환을 구절 구절 느끼길 바란다.

 

 

부봉등산로 입구

백두대간이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면서 한가지를 뻗은 후 주흘산(1106m)을 또 한가지를 뻗어 부봉 6개 봉우리를 만들어 놓고 제3관문(조령관)과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을 이어 놓고 있다. 6개 봉우리는 916m~933m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기자기한 등산로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능선과 문경새재 계곡의 경관이 아름답다.

 

 

부봉 등산로 가는 입구 표지석

 

 

 

한참을 올라왔나? 조령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 표지석

 

 

해발 400m 현위치 지점을 지나고

 

 

문경새재 아리랑 시비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다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를 넘어갈재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바위굴로 가는 표지석

 

바위굴

 

바위굴 앞에서

 

 

바위굴과 새재우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오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저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 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새재우"는 문경새재에 내린 소낙비를 말하는 것으로 근대 김유정의 단편소설 "소낙비" 처럼 예나 지금이나 청춘 남녀는 비가 오면 비를 피해 우산을 바치면서 우연히 만나고 그 만남으로 깊은 인연을 만드니! 인연이 그리운 사람은 소낙비 올 때를 기다려  좋은 일이 있길~ ㅋㅋ

 

 

귀틀집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우물정자 모양이 되고 "방틀집" "말집" "목채집" "틀목집" "투방집" 혹은 "정한식집" 이라고도 한다.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시베리아, 파미르고원, 북유럽, 아메리카 산악지대 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변에 남아 있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 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방법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엇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아귀를 지어 놓으며, 나무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보온성이 좋고, 특히 자연 소재 그대로 주거생활에 반영해 습기조절, 산림욕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오늘날 옛 형식을 보완하여 현대인의 웰빙 주거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문경새재 귀틀집은 길에서 멀리 떨어져 가보지 못했다. 아쉽다.

  

 

 

이진터

임진년 왜장 '고니시 유기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 때 선조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새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기가막힐 일이다. 김여물 등의 부하들의 현명한 극간을 무시한 신립장군의 독선 그의 아집이 역사를 그르친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민초들을 죽임으로 몰아 넣었는가?  생각해보면 한사람의 멍청한 지도자를 만나면 이렇게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통탄하고 통탄할 일이다.

 

 

이진터 이정표

 

 

해발 500m지점을 지난다.

 

 

누군가 비석을 세우고자 한 흔적이다. 왜 미완성일까? 궁금하다.

 

 

동화원 이정표

 

동화원쉼터는 새재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선두와 거리가 많이 차이가 나서 동화원쉼터는 패스한다.

 

 

문경새재 길에 붉은 단풍이 비단 융단을 깔았다.  대원들 잠깐 기념 한장

 

지오트레킹 임원들이다. 모두 모두 자기 일처럼 봉사하고 협력한다. 늠늠하다.

 

 

낙동강발원지 표지가 눈에 확 들어 온다. 뭐이여! 낙동강 발원지라고~  낙동강 발원지는 태백인데~ 문경에 무슨 낙동강 발원지여~  다시 카카오맵을 본다.  태백은 북쪽 끝이고  문경은 서쪽 끝인가? 암튼 설렌 마음으로 낙동강 발원지를 가본다.

 

 

문경 초점 낙동강 발원지 

 

오래전 선답자가 담은 문경초점 낙동강 발원지 물이 풍성하고  맑다.

 

오늘은 낙엽이 떨어져 발원지를 덮었다.

 

 

좀더 확대하여 본다. 낙동강 발원지를 지나면서 문경새재 길은 조금 경사도가 있다. 아마 고개에 가까워 진다는 것이다.

 

 

 

경사도가 있는 새재길을 어느정도 오르면 이렇게 편안한 새재길이 펼쳐지고 제3관인 조령관이 가까워진다.

 

 

제3관인 조령관 바로 아래에 금의 환향길 표지가 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 길을 걷는 선비들은 얼마나 기뻣을까? 지금도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외무고시, 의사고시, 교사임용고시 등 고시를 합격하면 집안의 경사이고 개인적인 영광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길을 걸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의 손가락질을 당한 이도 있고 짧은 기간이지만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그 공덕을 길이 길이 기억하고 칭송하라고 한 이도 있다. 

 

굳이 이 길을 걷지 않아도 사람으로써 도리를 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늘 배풀고 봉사하고 차별하지 않는다면 이 길을 걷는 이보다 더 백성들은 칭송하고 공덕을 오래 오랙 기억하는 것이 민심이고 천심이지 않던가?

 

사람의 가치는 시험에 합격하고 안하고 가 아니라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냐 안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문경새재 책바위 이야기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지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자 몸을 고치고자 유명하다는 문경 도사에게 물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  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 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책바위가 있는 길을 걷지 않았다. 저 아래 낙동강 발원지가 있는 곳을 거쳐 곧바로 올라오면 이 책바위를 거쳐 이곳제3관 조령관 바로 아래로 오른다. 

 

 

제3관문에 도착

 

 

백두대간이 지나는 조령이다. 제3관문인 조령관이다. 이곳을 넘으면 곧 바로 충북 괴산이며 서울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 옛날 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 그 얼마인가? 지금은 관광지로 변하여 한양과 영남의 소통 기능이 없어 졌지만  그 옛날 죽령과 추풍령 그리고 조령이 한양으로 가는 3대 대로였으니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까? 지금으로 말하면 경부고속도로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적인 문경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을 배경을 기념 한장을 남긴다.

 

 

 

영남 제3문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고 3중으로 성을 쌓고 철벽 같은 수비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렇게 전국 각지 요새 요새를 철통 같은 방위 체제를 구축하였으면 그렇게 쉽게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수 많은 백성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유비무한이란 말이 있다. 평소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 유사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백두대간 이정표 마패봉 0.9km, 조령산 6.1km 이정표이다. 백두대간 할 때 이곳을 지나면서 얼마나 지쳤는지 가야할 길만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늘재에서 이화령까지 백두대간 길을 죽은 줄 알고 걷고 또 걸었다.  이정표를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군막터 -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기소

 

 

조령 제3관문 옆 쉼터에 '새재를 지나는 길에' 라는 옛 선비의 시비가 있다. 

 

 

 

조령약수

조선 숙종 34년(1708년) 조령성 구축시 새재정상(650m)에서 발견된 이 샘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 길을 넘나들 때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역사 속의 면약수로서 사철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물을 즐겨 마시면 장수 하는 백수령천이라고 한다.

 

지금은 물이 말라 있다.

 

 

 

조령 산신각

 

 

조령 옆길로 차가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해발 642m 지점이다.

 

 

조령산 등산안내도

 

 

제3관문 이정표에서 조령관을 담았다.

 

 

다시 한번 영남 제3관(조령관)을 담아보고

 

 

이제 조령관을 넘었다. 이곳은 괴산 땅 연풍면이다. 괴산 조령관 앞에서 기념 한장

 

 

 

함께한 대원들이 영남3관(조령관)을 넘고 단체 기념 한장

 

 

똑같이 괴산에서도 문경새재 과거 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괴산에서는 연풍새재 과거 길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ㅋㅋ 두 지역을 싸움 붙이는 것은 아니다. 

 

 

과신 연풍면의 문경관문 안내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이 괴산 연풍면 쪽에 세워져 있다.

 

 

단체 인증

 

 

충북 이미지 석탑 앞에서 인증 한장

 

 

연풍조령정과 우물

 

연풍새재비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역봉 사이를 넘는 새재는 고려사 지리에 초점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새재의 유래는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고개' '하늘재인 옛 계립령을 대신하여 새로 만든 길'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에 있다'고 하여 새재라 하엿다고 전해진다. 이하 문경새재와 같음

 

제3관문이 조령관을 사이에 두고 문경새재와 연풍새재가 갈린다. 역서부터는 연풍새재가 되어 고사리 주차장까지 내려 간다.

 

 

연풍새재에 새재를 노래한 시 한수가 낙엽속에 은은하다.

 

 

시화연풍 길 이야기

 

 

청풍명월 고개 이야기

 

 

과거길 선비 동상탑

 

 

내려오는 길에 붉은 단풍이 정열적이다. 너무나 예쁜 단풍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

 

 

이곳도 나무로 수로를 만들고 물레방아를 돌렸나 보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오랫만에 만난 이기열고문님과 한장

 

 

신성봉으로 오르는 이정표

 

 

고사리 주차장 1.3km 지점 이정표

 

 

연풍새재길도 붉은 단풍으로 비단길이 되었다.

 

 

오후 햇살에 빛나는 붉은 단풍이 너무나 예쁘다. 

 

 

너무 예뻐 한장을 더 담고 또 담고

 

 

 

함께간 대원님이 예쁘게 한장을 담아 준다. 맘에 든다. 감사하다.

 

 

함께한 대원님들과 예쁜 단풍 아래에서 잠시 한장

 

 

연풍새재길도 옛 선인들의 싯구가 많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연풍새재길

 

 

한참을 내려 왔나 고사리에 도착하나 보다. 어느 산장에 저리도 예쁜 단풍이 오후 햇살에 빛나고 있다. 예쁘다. 아름답다. 올해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단풍이 되려나?

 

 

 

붉은 단풍으로 비단을 깔아 놓은 이 길을 어떻게 걸을까? 어떤 마음으로 걸어야 하나?  나는 격하게 아름다워 감히 이 길을 걷지를 못하겠다. 생명을 다하고 낙엽으로 떨어져 저리도 아름답게 딩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근사하지 않을까? 나도 저리 근사했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살아 가면 저리 근사해 지리라! 사실 저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리라!

  

 

마음 다듬어 기념 한장을 남긴다.

 

 

또 다른 단풍 옆에서 발길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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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단풍과 붉은 단풍이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렵다.

 

 

마지막 붉은 단풍의 열정

 

 

연풍새재 어사또가걷던길 상가 이정석인가?

 

 

고사리에 도착 마패봉과 신성봉을 바라본다.

 

 

종점 고사리 주차장

 

 

하산주로 소백산 생막걸리는 너무나 시원했다.

 

다시 올려다 본 신성봉

 

 

고사리 주차장에 있는 백두대간 굽이치는 신성봉 표지석 

 

 

오늘 역사 탐방이며 가을 붉은 단풍길인 문경새재 과거 길과 연풍새재(소조령길) 과거 길을 걸었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여서 많은 역사적 내용을 접할 수 있고 또 아름다운 단풍 힐링길이여서 하루가 너무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