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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명산

2020.11.08. 산청 왕산(923.2m) 100+명산-구형왕릉과 유의태, 허준의 동의보감촌 산행

by 하여간하여간 2020. 11. 9.

1. 일자 : 2020.11. 8(일)

2. 누구랑 : 원산우회

3. 산행구간 : 전 구형왕릉 주차장-수정궁터(왕릉사지)-류의태약수터-망경대-망바위-소왕산(가짜왕산)-왕산-여우재-동의보감촌

4. 산행 개념도

5. 산행소감

 

산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 중에 하나이다. 산청하면 생각나는 곳이 생초면이다. 산약초가 많이 나는 청정지역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조선 선조대왕 시대 임진왜란 중에 창궐한 몹쓸 병이 전국을 휩쓸 때 명의 유의태는 제자 허준에게 자기 몸을 가르고 병든자의 병을 고치도록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스승의 의술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은 허준은 당대의 모든 동양(중국, 일본, 조선) 의료서를 정리하고 스승으로 부터 배운 치료법과 본인이 체험한 의술을 총 망라하여 동의보감이라는 동양 최대의 의료서를 집대성하였다. 이 두분이 활동한 곳이 산청이다. 산청군은 유의태와 허준의 동의보감을 태마로 동의보감촌을 조성하고 한방 체험장과 한방치료체험을 할 수 있도록 관광지를 조성하여 국내외적으로 관심이 많은 지역이 되었다. 왕산은 동의보감촌을 감싸고 우뚝 솟은 산이다. 또한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의 태왕궁지로 가락국 10대 왕인 구형왕의 석릉이 있는 산이기도 하다. 또한 정상에 오르면 지리산 천왕봉을 비롯 중봉 하봉과 두류봉의 북쪽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필봉산과 연계하여 산꾼들에게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산이다. 산행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정상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 두류봉과 언젠가 가본 기억이 있는 와불산이 조망된다. 눈을 약간 북쪽으로 돌리면 황매산이 뚜렷이 다가오고 정수산과 둔철산이 조망되며 다시 왼쪽으로 돌리면 대봉산과 거망산 황석산 금원산과 기백산이 아련히 하늘금으로 다가온다. 필봉산을 올라야 아름다운 조망을 선명히 볼 수 있는데 안전을 위해 포기하고 여우재에서 하산하기로 하였다. 

 

6. 왕산 소개

 

산청 방장산(지리산) 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 자락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의 태왕궁지이다. 서기 162년 김수로대왕은 첫번째 왕자인 거등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 왕후를 보주황태후로, 궁은 태왕궁으로 산은 태왕산으로 명명하셨다. 대왕께서는 태양원군으로 38년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23일에 서거하셨다. 330여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의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께서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가락 지품천 태왕산은 구형왕께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이름을 수정궁이라 편액하고 수년간 은거하다가 붕어하시니 존호를 양이라 하였다. 훗날 흥무대왕 김유신대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동안 시능을 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고, 왕의 5대 외손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은 제향을 받드는 비용으로 왕산일대 토지를 하사하셨다. 왕산삼릉기에 의하면 '산양현 서쪽 모뚱이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에는 왕릉이 있다. 무릇 릉은 가락국 10대 구형왕의 능침이고, 태자 대각간 서현과 증손 대장군 유신이 왕대에 시조대왕의 묘우를 추봉하고, 이 절에 구형왕사를 세워 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왕산이라 지명한 것은 이 사적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가락국 태왕산에서 유래가 되어 '왕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시조(김수로대왕)의  사적이 있고, 양왕(구형왕)과 흥무대왕(김유신대장군)의 역사가 깃든 '가락국 삼왕의 고적지' 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한 '가락국의 영토는 '동으로 황산강이요, 서남으로 창해에 이르고, 서북으로 지리산 끝까지를,  동북으로 가야산을 경계로 두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현치연혁에서 '산청은 옛 변한 땅 가락지품천으로 신라 경덕왕이 산양현으로 고치고, 고려말에 산음현, 조선시대 영조는 산청현으로 바꾸었는데, 옛날엔 왕산아래 금계의 위에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회계 아래 경호 위로 옮겼다.' 하고 ' 왕산의 옛 이름은 방장산 중 가락 태왕산으로 고려시대에는 모락산,  조선시대에는 왕산으로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7. 왕산 산행 추억

김유신 사대비/흥무대왕 김유신대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동안 시능을 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다. 

 

산청 왕산 구형왕릉

구형왕릉은 10대 임금인 구형왕(양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이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락국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국내 유일의 피라밋 형 석릉으로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족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일곱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의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 조차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1971 2 9일에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산청 구형왕릉 앞에서 인증

전면 중앙에서 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이 둘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로 하단 길이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 세로 40cm, 깊이 68cm의 석문이 마련 되어 있다. 구형 왕릉에 대한 역사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 산청현읍지, 대동지지, 조선환여승람 등에 있으며, 능의 심릉 사실로는, 조선시대 문신 이행의 왕산조릉기, 승려 탄영의 왕산사 목함기, 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 등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왕릉 주위에 흥무대왕 김유신장군의 '시능터'와 '사대비'가 있고, 주변의 암석에는 '장보암'을 비롯하여 구형왕릉 임을 알려주는 각석들이 있으며, 왕산 아래 가락국양왕덕양전에서는 한해 두 차례 왕과 왕후의 음덕을 기르는 춘 추 대제가 봉향된다.

 

산청 구형왕릉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가락국시조김수로대왕의 10대 세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시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491년~521년)의 아들로 서기 521년에 가락국 제10대왕으로 등극하셨다. 휘는 구형이시며 존호는 양으로 계화왕후와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과 증손으로 흥무대왕 김유신과 5대 외손으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을 두셨다. 서기 532년(법흥왕19년)에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나라를 선양하고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 하신 유언으로 산아래 경좌의 언덕 석릉에 영면하시게 된다. 

 

고즈넉한 구형왕릉의 만추
수정궁터를 향해 가는 길목에 가을을 만났다. 길위에 쌓인 낙엽을 휘날리며 가을을 만끽한다.
수정궁터(왕산사지) 쉼터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다.
왕산사 부도탑과 연기비/왕산사는 절터(왕산사지)만 남아 있다.

왕산사의 내력

왕산사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의 옛 궁터로 왕께서 등극한지 162년에 태자 거등에게 양위하시고 지품천 방장산 별궁으로 이거하여 자호를 '보주황태왕' 왕후를 '보주황태후'라 하고 산을 '태왕산'이라 궁을 태왕궁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수정 샘물을 마시며 휴양을 하였으며, 가뭄에도 맑은 샘물이 변함 없으니 훗날 수정궁으로 편액하였다.

 

10대 구형왕(신라 법흥왕19년)에 이르러 '백성을 기르는 토지로서 백성을 해함은 인자로써 할 일이 아니다' 하시며 양민지도의 덕성으로써 나라를 양위하고 계화왕후와 함께 지품천 방장산 동쪽 건좌의 유허 수정궁에 은거하시다 승하하시니, 관민이 석릉으로 모셨다. 구형왕(시호 양)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 대왕의 9세손으로 노종, 무력, 무득 세 아드님을 두셨다.  훗날 왕손 신라 대각간서현이 수정궁을 왕산사로 삼고, 왕증손 흥무대왕 김유신이 수로 왕묘를 왕대에 추봉하고, 구형왕사를 건립하여 선대의 명로를 빌고 향회를 받드는 원찰로 삼았으며, 외증손 범민(문무대왕 661~681)은 납전 30결을 내려 향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대장군 김유신이 7년 동안 시능하면서 대를 삼아 무예를 익혔던 까닭에 태각간 김유신 서사대가 있다. 살펴보건대, 왕산사의 전기는 신동국여지승람(1539년) 등에 구형왕릉과 왕대암이 함께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의 승려 탄영(1857~1929년)이 친한 왕산사기에서  그 사실이 있다. 천 여년의 긴 역사를 잠신했던 구형왕과 왕산사의 황금빛 진해는 용솟음치고 서광서린 방광은 선던리를 비추고 훈훈한 동풍이 삼라만상을 침묵속에서 깨어나게 하니 연기의 법이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게 승화할 것이다. 아울러 예와 덕을 숭상하는 군자들에 참고하는 바를 두고자 연기비를 세움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진여의 불씨를 남긴다. 서기2016년 1월, 가락국양왕릉덕양전 참봉 김태훈

  

류의태 약수터

류의태는 누구인가?

1516, 조선조 중종 11년에 경상도 산음현 정태 (현재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마을)에서 태어난 유의태는 그 당시 백성들에게 신의로 불리어진 인물이었다. 유의태는 서출의 신분이었기에 관리로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풍부한 학식과 의술은 당대에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유의태가 한창 의료 활동을 하고 있던 시대는 거듭되는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하여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수렴청정하고 있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와 무소 불위로 전횡하고 있는 윤원형, 그리고 양반 계급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유의태는 서출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질박한 풍자와 양반사회를 통박하는 기질을 보여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시 산음(산청)이라는 곳은 산세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의료혜택을 받기 힘들었다. 유의태가 의성으로 추앙받는 것은 의인으로써의 의술 능력도 있지만 지역적으로 유리한 곳에 태어난 덕분이기도 했다.

 

유의태는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와 물, 공기, 토양 등으로 인해 효험이 높은 약초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백성을 위하려는 마음과 약초의 만남이 유의태를 의성으로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의태의 명성이 절정에 달하자 주위에서 궁중의 내의원에 들어가면 어의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양했다고 한다. 제자로 찾아오는 젊은이들도 많았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 그들이 의술을 배우려는 목적이 병자를 구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농은 민안부선생과 망경대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지낸 농은 민안부선생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역성혁명에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유신 가운데 한분으로 고려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 남하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옳지 못한 부귀는 오히려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불의지부귀 여아여부운)는 말씀을 생활신조로 삼아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과 만고충절을 실천함으로써 선비의 귀감이 되어, 후세의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춘 추계의 분향을 이어 가고 있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 왕산 중턱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하며 고려와 임금을 그리워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기 위해 이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다.

 

농은 민안부선생은?

농은 민안부 선생은 본관이 여흥으로 고려말 송경(지금의 개성)에서 살면서 예의판서를 지냈다. 이때 13751388(고려 32대 우왕)에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우군 도통사에는 이성계, 좌군 도통사에는 조민수를 임명하여 명나라의 랴오둥을 정복하여 사기를 꺾어 놓고자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조민수를 구슬려 마침내 군대를 돌이키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 이성계 장군은 군대를 돌이켜 돌아와 실권을 잡아 1392년에 조선을 세웠다.

고려가 이렇게 망하고 보니, 많은 충신들은 이성계에 불복하므로 정몽주, 이색, 조민수, 권근 등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다른 충신들도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 갔다.

두문동이란 조선이 세워지자 이에 반대하던 고려의 신하들 72명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들어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싸우다가 이성계로부터 죽임을 당한 곳이다.

이러한 곳인 두문동에 민안부 선생도 들어갔다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물러났다.

그리하여 민안부 선생은 멀리 남쪽을 향해 이 고장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 한계에 까지 내려와 숨어 지내며, 산과 강을 벗삼아 농사를 짓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또한, 그의 아들 민유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벼슬하지 않았다그후 후손이 번영하였는데, 조선 500년간 산청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농은 민안부 선생의 절의와 지견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민안부 선생은 이 고장에 은둔하면서 고려의 왕실을 그리워하며, 생초면 대포리와 금서면 화계리에 걸쳐있는 왕산 중턱의 큰 바위까지 올라가 항상 고려의 옛 서울인 송경(현재의 개성)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그 뒤, 큰 바위를 망경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손들이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후손들이 대포향사를 생초면 대포리에 세워 봄, 가을에 향사로서 그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망경대 정상석 인증
망경대에서 바라본 황매산, 바랑산, 감악산

망경대에서 한참을 오르면 조망이 확 트인 망바위가 나온다.

망바위에서 바로본 가야할 왕산과 필봉산 줄기/ 하늘금에는 웅석봉이 우뚝 솟아 거대한 산줄기를 거느린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황매산 감암산 부암산 하늘금과 살짝 왼쪽 앞쪽으로 정수산과 둔철산 하늘금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경호강 풍광   

사실 경호강은 이름이 여러번 바뀌는데 처음 람천의 이름으로 운봉에서 시작하여 인월과 산내를 거쳐 마천까지 람천으로 흐르다가 마천부터 임천으로 이름을 바꾸어 유림면 상촌까지 흐르고 다시 경호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생초를 지나 산청읍까지 흐른다. 다음부터는 남강의 이름으로 진양호로 흘러들어가 진주를 거처 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황매산 감악산 하늘금/ 경호강은 유유히 흐르고
소왕산(가짜 왕산) 표지석 
왕산 정상 표지석/ 하늘금에는 지리 천왕봉과 중봉 하봉 두류봉이 아련하고 오른쪽은 와불산 줄기이다. 
왕산에서 인증
왕산 정상 저멀리 하늘금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아련하다

 

필봉산을 배경으로 한 장/ 하늘금에는 황매산과 정수산 그리고 둔철산이 선명하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풍광의 경호강은 필봉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청군 산청읍내까지 흐르고 산청읍내부터 저멀리 둔철산 쪽으로는 남강이 되어 진양호로 흘러 들어간다. 

 

여우재/이곳에서 필봉산을 가려면 곧장 직진을 한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 안전한 산행을 하기로 하고 하산하기로 하였다.

 

오르진 않았지만 필봉산 정상석을 여기 옮긴다./여우재에서 필봉산 오름은 급경사 오름이다. 필봉산은 암석으로 되어 주변 조망이 확트여 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하여 주변 조망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다. 
귀감석(귀감석은 땅의 지력을 돋우는 응기석이다.)

귀감이란 현대인들에게 본 받을 만한 본보기 또는 모범을 말한다. 귀감석을 통해서 나오는 기운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왕산에서 제일 강하게 주맥으로 맺혀진 석경의 강기와 필봉산에서 석경을 통해 내려오는 문기와 혈처에서 응결될 응기이다.

귀감석의 글자는 주로 하늘에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던 고대의 글자체와 거북이 등 껍질에 글자를 새겨 점을 치기 위해 쓰던 갑골문자를 사용하였다. 최상부 글자(4자)는 '천하귀감'으로 이것은 모든 것의 거울이요 본보기로써 삶의 기준이라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두번째 글자는 행혹사지 지혹니지'이다 하나의 육각 속에 한자씩 넣어두다가 그 중앙부위 육각에는 두자를 써 놓았다. 맹자의 말로써 '가는 것과 멈추는 것 모두 하늘의 명령인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위에서 세번째 육각속 글자 배열은 oo좌 라고 읽고 두 자씩 새겨져 있다. 글자 해석의 시작점은 사실상 없다. 우측으로 도는 방향에 따라 몇 자만 해석한다.

금표좌 : 학업성취의 뜻이다. 적게는 학업수업과 크게는 직업 또는 채용시험과 입학시험에 합격이 되길 바라는 좌이다.

니금좌 : 학자가 때때로 학문을 닦아 대도를 성취하는 좌이다. 시험에 급제하여 고향에 알릴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궐좌 : 오직 자손이 잘 되도록 하는 힘의 성취 또는 기운이다.

의위좌 :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존경하며, 사랑이 성취되는 뜻을 함축한 자리라는 의미이다.

중앙은 의양자리이다. 옛사람들은 의양자리를 다른 말로 운패통이라고 불러 뜻을 운용하는 통점으로 사용했다. 귀감석의 중심부인 의양은 기가 돌이나 바위에 모여 샘솟아 밖으로 나오는 구멍의 자리라는 뜻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있다.' 이 말은 귀감석 의양의 요약이다. 의양자리를 감싸는 문구의 일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스승을 해부한 제자 이야기

스승 류의태를 해부한 허준 설화 이야기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흐르는 서늘한 얼음 동굴

허준이 스승 류의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스승의 유서가 펼쳐저 있습니다.

 

'내 생전에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병든 몸이나마 내 몸을 너에게 준다. 명심하거라.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거라'

 

반위(위암)에 걸린 류의태는 허준이 원하는 인체와 의술에 대해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해부하라는 유서를 남깁니다. 세상 모든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당부하는 마지막 서찰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스승에게 허준은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의원이 되기를 두려워하거나 의약과 침으로 돈이나 탕하게 되거든 나를 벌하여 주옵소서'

 

제자를 위해 몸을 내어준 스승과, 스승의 뜻을 알기에 눈물을 머금고 해부를 했던 제자

 

그 숭고한 상황을 함께 느껴보세요 

 

스승을 해부한 제자 이야기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흐르는 서늘한 얼음 동굴은 어디일까?

밀양 운문산 상운암 가는 길목에 제2의 얼음굴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이곳이 실제 수술하는 장소이다.  

류의태 이야기

산청군 향토사학자 손성모씨에 따르면 유의태는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 정태) 출신으로 서자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도 심했지만 적자와 서자에 대한 차별도 높았다. 서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과거를 보지 못했다. 유의태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서자 출신으로 정상적인 공부를 못하고 의술을 전공해 이름을 날렸다. 손씨는 '허준선생이 유의태의 제자로 오게 된 것도 허준의 할머니가 정태 출신이고 가까운 친척이였기 때문'이라며 '허준 할머니는 허준의 재주가 아까워 유의태 선생에게 보내 의술을 공부시켰고 유의태 선생도 동병상련의 처지라 허준을 제자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산청군 금서면에 유의태 약수터가 있는데 유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난치병도 이 물로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눈이 내린 한 겨울에도 김이 나는 약수터는 유의태 선생 활동 시 한약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 약물통)였고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애용하였다'고 손씨는 설명했다.

 

www.youtube.com/watch?v=2XHYTrKPuxc&feature=emb_title

의원은 영달의 길이 아니다

 

의원은 돈을 버는 길이 아니야

영달에 꿈이 있다면

중국말을 배워 역관이라도 될일이지

 

돈버는데 욕심이 있다면

장사치가 될일이지

 

의원의 소임은

병자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이 첫번째 소임이다

둘째도 셋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이다

 

 

 

신의 허준의 일대기

조선조의 명의 허준의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이다. 1539년 내의원에 천거되어 의관으로 봉직하면서 명성을 높였으며 어의로서 임금의 병을 진료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호종공신이 되었다. 1596년에 선조의 특명으로 내의원 편집국에서 동의보감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의관들이 흩어지니 허준은 단독으로 명받아 1610년 광해2년 14년만에 완성하여 1613년에 25권 25책으로 발간한 동의보감학의 백과전서로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일본 까지 널리 알려진 이 책은 병의 근본 치료방법, 정신수양과 섭생문제에도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해주고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의서를 언해하여 편찬하였다. 1604년 양평군으로 봉해졌고 1606년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615년 광해군7년 8월 77세로 타계하니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도리 산 129번지에 있다. 

 

산청의 의인들

산청을 중심으로 활동한 명의로 '유의태-허준-유이태-초객과 초삼' 등의 의인들이 있다. 이들이 특히 산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산청의 1000여종의 풍성한 산약초를 약재로 사용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유의태는 조선조 중종대에 활동한 의인이고 허준은 선조대에 할동하였고 유이태는 숙종대에 활동하였으며 초객과 초삼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의인이다.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스승 유의태는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문학적으로 상상화 되었고 실제는 허준은 스승을 모신적이 없으며 아마 류의태는 허준보다 후대에 유명한 신의인 유이태가 아닌가 하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향토사학자 손성모는 허준 이전에 유의태가 실존하였다고 주장한다. 

 

유이태 劉以泰 1652 ~ 1715

()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숙종의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이때 공로로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가인 산음(현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하여 중국의 명의 편작에 비유될 정도였다고 한다.

홍역 예방·치료에 대한 의학전서인 마진편(痲疹篇)을 펴냈으며, 이 외에도 실험단방(實驗單方). 그의 경험을 적은 인서문견록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중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은 책이름만 전할 뿐 실물이 공개된 바 없었다.

삼목영(三木)이 저술한 조선의서지(朝鮮義書誌)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두 책의 사본을 소개하면서 인서문견록은 경험방 중에서 아주 우수한 것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2009년 산청한방약초축제 개최 때 일본 무전(武田) 행우서옥(杏雨書屋)에 소장되어 있던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이 공개되었다. 이 책은 서문이 붙어 있는 장서본으로서 연구가치가 큰 것으로 여겨진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개 사람의 한평생을 바라보건데, 병이 없는 자가 드물다. 그렇지만 병든 자로 하여금 능히 자기의 병을 조치할 수 있는 방도를 알려준다면 반드시 몸이 훼상하는데 이르지 않아도 될 것이니 가치 조심하지 않으랴

내가 평소에 경험한 여가지 잡병 치료법과 여기저시서 얻어 들은 단방을 한 책에 수록하여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고자 했으니 구료하는 방도가 비록 의문(醫門)의 전서와 같이 상세하지 않더라고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데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다. 기축년(1709) 가을(8) 인서노부가 쓰다.”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설화로 유이태 설화가 가장 많이 채록되어 있는데, 그의 설화인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그의 묘소는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번지에 있다.

 

■ 초객 楚客 1751 ~ 1812 ·초삼 楚三 1754 ~ 1809

산청의 명의인 초객(楚客은 자초삼(楚三은 자)형제는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 출생으로 본관은 양천이다.

형인 초객의 호는 문포(文圃), 본명은 허영(許郢)이고, 아우인 초삼의 호는 호은(湖隱), 본명은 허언(許鄢)이다.

초객은 약처방에 능하였고 초삼은 침술로 이름을 떨쳐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생 초삼이 침으로 응급치료를 하면 형인 초객이 약을 써서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 진양의 향토사를 기록한 진양지(晉陽志)에 이들의 명성을 전해주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초객이 금강산 방면을 돌다가 어느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마침 약을 달이고 있었다. 약봉지에 초객탕이라고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기에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주인의 아이가 두창(頭瘡)으로 사경을 헤매는데, 의이 이르기를 나을 약이 없다고 했다. 영남에 당대의 화타, 편작이라 불리는 허초객이란 명의가 있어 환자들이 흔히 그 이름을 약포에 적어 복용하면 혹여 살아날 수도 있다하기에 시험 삼어 해 본 것이라 하였다. 초객이 웃어 말하기를 이름만 빌려 쓴 약을 주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을 찾아가 처방을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고 약처방을 알려주니 얼마 있다가 환자가 낫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시 초객·초삼형제의 명성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청을 근거로 활약하면서 초객이 저술한 경험의약자료인 진양신방(晉陽神方)은 한국한의학연구원에, 진우신방(晉隅神方)은 산청한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 지방의학 발전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산청지역의 소중한 의약문화유산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이다.

초객선생의 묘소는 진주시 수곡면에, 초삼선생의 묘소는 산청군 단성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