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명산

2020.03.22. 여수 진달래 영취산(510m)

by 하여간하여간 2020. 9. 2.

1. 산행일자 : 2020.03.22(일)

2. 누구랑 : 원산우회 번개

3. 산행구간 :  GS공장뒤 임도삼거리- 억새평원- 450봉- 진례산 정상

                - 도솔암- 봉우재- 흥국사 - 저수지 주차장

4. 산행 소감 
 
봄의 화신 진달래
진달래가 피면 봄인가
봄이오면 진달래가 피지 
 
춘래불사춘
진달래는 피었지만
세상은 코로나로 꽁꽁 얼어 있다
어서 온 국민의 마음에
따스한 봄이 오길  바란다 
 
영취산 진달래가 피면
비로소 봄이 온다
따스한 봄볕에 붉은 진달래
참으로 예쁘고 반갑다.

 

5. 산행개념도

6. 영취산 소개

 

여수시 삼일동과 상암동에 걸쳐서 자리한 영취산은 해발 510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산세가 수려하지도, 높지도 않은 영취산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은 봄이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를 국내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경남 창녕의 화왕산, 경남 마산의 무학산과 더불어 전국 3대 진달래 군락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다. 30~40년생 진달래 수만 그루가 33만여제곱미터에 걸쳐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어, 매년 4월이 되면 온 산은 붉게 타오르게 한다.

영취산 등반은 산이 낮은 만큼 어느 코스로 잡든 4시간 정도면 가족 산행이 가능한 정도 이다. 진달래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코스는 호남정유 위의 임도나 상암초등학교를 산행 기점으로 하여 450m봉을 거쳐 영취산 정상으로 올라 봉우재로 내려선 뒤 진래봉으로 다시 오른다. 진래봉에서 헬기장, 439m봉을 지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 흥국사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무박산행을 할 때는 위의 역코스로 흥국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450m봉에서 정상까지가 진달래가 가장 볼만한데 길이 험할 수도 있고, 어두울때 이곳을 지나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산행 시간을 잘 조절하여야 한다.

영취산은 매년 4월이면 축달래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 기간중에는 영취산 산신제, 청소년 백일장, 사진 촬영대회, 진달래 아가씨 선발대회, 향토먹을거리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져 진달래를 찾아온 상춘객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영취산이란 이름은 석가모니가 최후로 설법했던 인도의 영취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영취산의 등산지도를 보면 영취산과 진례산으로 구분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국가지리정보원은 2003년 5월 17일자로 산의 명칭을 <영취산>에서 <진례산>으로 변경고시하였으나, 사람들은 지금도 관례적으로 439m봉의 이름인 영취산을 산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수반도의 주산인 영취산은 예로 부터 지역민들에게 신령스런 산으로 인식되어 기우제나 치성을 드렸던 곳이다. 전통기원 도량이었던 금성대가 있고 그 아래 기도도량인 도솔암이 지어져 오늘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호남 여수읍지에는 도솔암과 함께 기우단이 있어 매우 영험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방 수령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기우시를 남기는 등 구한말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왔었다고 한다. 또한 영취산의 넓은 산자락에는 흥국사가 자리 하고 있는데, 흥국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로, 1195년(고려 명종25년)에 보조국사가 창건 하였다. 흥국사 안에는 대웅전(보물 제369호)을 비롯해 보물 제578호인 대웅전 후불 탱화, 원통전, 팔상전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어울러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승병 수군이 있어, 이곳 흥국사 안에서 300여명의 승병 수군이 훈련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해발 510m의 산 정상에 서면 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과 어선들이 한눈에 보이고, 광양만과 여천공단, 동북쪽으로는 광양의 백운산, 묘도가 선명하다.

 

7. 흥국사 소개

여수 영취산 중턱에 자리한 흥국사는 1195년(고려 명종 25)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창건되었다.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다 하여 흥국사(興國寺)라고 했다.

보조국사가 이곳 흥국사에서 순천 송광사로 옮긴 후 흥국사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게 되어 100여 년 가까이 토굴과 같았다고 하며, 이후 원나라의 침공 때 사찰이 모두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인 1560년(명종 15)에 법수대사가 중창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義僧水軍) 거점이었다. 승병과 수군 지휘소이자 훈련소인 이곳에서 자운 · 옥형 두 스님의 지휘 하에 승병 700여 명이 호국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활동했다. 왜란 기간 동안 호남지역 의병 · 승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흥국사의 의승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일본군을 막아내는 일에 힘썼다.

후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흥국사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다. 이때 법당과 요사 등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1624년(인조 2)에 계특 대사가 건물을 중창했으며, 1690년 법당을 증축하고 팔상전을 새로 지었다. 1780년에 선당(禪堂)을, 1812년에 심검당(尋劍堂)을 각각 중건했고 1925년에는 칠성각과 안양암을 새로 지었다.

흥국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탱화, 홍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동종, 목조지장보살삼존상 · 시왕상 일괄 및 복장 유물이 있으며, 그 외에 다수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가 있다.

 

8. 산행 추억

GS칼텍스 뒤 주차장에서 산행 시작 영취산 등산로 입구

 

코로나로 번개지만 함께한 원산우회 회원들

 

3월 봄이 오는 길목에 푸르름은 생명을 잉태한다
하여 선배님도 생명의 남도 봄을 담느라 바쁘고
18세 새악시처럼 연초록 새싹은 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봄은 그래서 좋다

 

연록색 새싹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희망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봄의 향연
임도를 한참 오르고.
임도를 한참 오르다 보면 영취산 정상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 우리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영취산 하면 진달래다 남도 진달래를 가장 먼저 전하는 곳이다. 영취산에서 만난 진달래
영취산은 온통 진달래다. 앞으로 사진은 온통 진달래 뿐이다.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1922년 7월 『개벽』 25호 발표

 

가야할 진례봉이 저멀리에 있다.

 

진례봉 인증

 

진례봉 정상에서 산우님들과
봉우재를 향하여 하산

 

봄의 화신 산매화가 수줍게 맞이한다

 

봉우재에서 돌아본 진례봉 정산과 지나온 능선길

 

진례봉에서 하산길에 만난 큰바위 

 

봉우재 가까이에서 바라본 진례봉

 

봉우재 도착해서

 

진례봉에서 하산길에 만난 진달래

 

이 아름다움을 

 

 

봉우재에서 가야할 419 시루봉을 바라보면서 진달래 군락을 담아본다.
진달래 속으로 사랑하는 맘을 담아 본다 

 

봉우재에서 흥국사로 하산길을 잡았다. 한참을 내려오면 돌탑이 참 많다. 중생들을 구제하고자한 한 구도자의 간절함일까? 
흥국사 전경의 몇 곳을 담아본다.

 

흥국사 홍교

여수 흥국사 홍교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다리.

 

보물 제563호. 다리 높이 5.5m, 길이 40m, 너비 3.45m, 홍예(虹霓) 지름 11.3m. 부채꼴 모양의 화강석 86개를 맞추어 틀어올린 홍예는 완전한 반원을 이루고 있다. 단아하고 시원스러운 홍예의 양옆에는 학이 날개를 펼친 듯 둥글둥글한 잡석으로 쌓아올린 벽이 길게 뻗쳐 조화를 이룬다.

측면의 석벽은 이른바 난적(亂積)쌓기로, 무질서하면서도 정제된 석축을 보여주는데 끝부분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곡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미를 보여준다. 잡석 위에는 시렁돌 네 개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다시 세로로 돌기둥을 올린 다음, 맨 위쪽에 흙을 덮어 자연스럽게 노면(路面)을 만들었다.

다리 밑에서 올려다보면 홍예 한복판에 양쪽으로 마룻돌[宗石]이 돌출되어 있고, 그 끝에 돋을새김한 용두(龍頭)가 다리 밑 급류를 굽어보고 있다. 다리 바로 밑에는 울퉁불퉁한 바위가 솟아 작은 소(沼)를 이루었고 물 속으로 보이는 바닥도 역시 너럭바위여서 홍교는 결국 암반 위에 세워진 셈이다.

임진왜란 뒤 국난에 대비하여 흥국사에 주둔시켰던 승병에 불안을 느낀 관아에서 지맥을 끊고자 홍교를 가설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것보다는 300명이나 되는 승병이 하는 일 없이 놀고 지내고 있기 때문에 절에서 그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다리를 놓았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흥국사의 홍교는 석축의 구성, 노면의 자연스러운 곡선, 굽이치는 계류와 바위가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다움을 상승시키고 있다.

 

주차장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