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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트레킹길/제주도올레길

2022.02.05. 제주 올레길 18코스 트레킹

by 하여간하여간 2022. 2. 7.

1. 일자 : 2022.02.05.(토)

2. 누구랑 : 혼자

3. 트레킹 구간 : 간세라운지-사라봉 정상-화북비석거리-화북포구-삼양해수욕장(10.5km)

 

4. 산행소감

제주 올레길을 걷고 싶었다. 언젠가 차분히 걸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제주는 여러번 왔지만 관광지만 둘러보거나 한라산과 윗세오름 산행이 주였다. 마치 광주원산우회에서 한라산 산행을 간다기에 편승하여 제주를 향한다. 1코스부터 걸어야 하지만 혼자이기도 하고 올레길은 처음이여서 제주항에서 가장 가까운 18코스를 걷기로 한다. 아름다운 제주 해안 풍광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제주는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다. 한라산은 하얀 눈으로 덮여 거대한 흰 지붕으로 변해 있다. 어제 저녁 눈이 많이 왔단다. 어디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한라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는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뻥 뚫어준다. 아름답다. 또 한가지 제주에 오면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제주 아픔을 잊을 수가 없다. 18코스에는 소중한 4.3 현장이 있다. 4.3 현장은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후벼판다. 또 18구간에은 제주의 유배지 역사 흔적과 조선 거부 김만덕 상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총 거리 19.8km이지만 나는 여러 역사적 흔적을 찾는라 하루 종일 10.5km 정도를 겨우 걸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해변과 제주의 아픔 그리고 제주의 역사 문화를 찾아 걷는 18코스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어떤이는 가장 심심한 구간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제주 올레길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제주는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하고 잘 발달한 힐링 숲길과 독특한 제주민의 삶의 현장이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어 특별자치도로 지정된 관광지이기도 하다. 이번에 제주 올레길 18코스를 혼자서 걸었다. 버스도 탔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다. 앞으로 언젠가 시간을 내어 제주 올레길을 걷는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버스를 타고 구석 구석 살펴보리라. 자신감이 생겼다. 좋은 시간이였다.

 

5. 18코스 올레길 19.8km 중 10.5km 구간 트레킹

간세라운지-사라봉 정상-화북비석거리-화북포구-삼양해수욕장(10.5km)

 

관덕정 분식(간세라운지) 18코스 시작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덕로8길 7-9/(지번) 일도일동 1448/ 영업시간 매일 08:00 ~ 20:00/ 070-8682-8651

 

관덕정 분식집은 큰 거리에서 조금 골목으로 들어와 있다. 초보자는 잘 찾기가 어렵다.  위의 주소지로 잘 찾아와야 한다.

 

제주 올레길 17코스 종점과 18코스 시작점을 알리는 안내판

 

버려진 알루미늄 캔과 고철로 만든 간세(나규환 작)/'간세'는 제주 올레의 상징인 조랑말의 이름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왔습니다. 제주올레 친구 기업인 CU에서는 버려진 천을 재활용해 만든 '간새인형'을 만난 수 있습니다.

 

제주 올레길은 파란색 화살표로 가는방향을 표시하였다. 

 

중간 중간 이렇게 파랑과 빨강 리본으로 표시기를 달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걷는다. 거리 중간에 '이도1동 옛길을 찾아서' 설명 안내판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본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곳 이도1동 관덕정은 조선시대 병영으로 군사훈련지이고 귤림서원은 교육기관이 있던 곳으로 마을 역사의 흔적이 재미 있다.

 

지도상 광해군 유배지라 표시되어 있어 살펴보았지만 유배지 흔적은 없고 새로운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올레길은 본죽과 태사랑 헤어염색전문점 사이 도로로 방향을 튼다.

 

제주성지를 만난다. 이제 제주읍성, 귤림서원, 오현단, 향현사, 제주향로당 등 제주 역사의 숨결을 만난다.

 

제주 성지이다.

 

귤림서원이다.

 

 

장수당이다.

 

유천석/처마의 낙숫물이 구멍을 뚫는 돌이라는 뜻

 

오현단/ 조선시대에 이 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오현이란 1520년(중종 15)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에 제주에 유배 왔던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에 유배 왔던 우암 송시열이다. 5명 중 3명의 유배객으로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이다.   

 

오현 조두석

오현을 기리고 제향을 올리기 위해 세워 놓은 위패 형식의 다섯 돌

 

 

지방 기념물 제1호 오현단 표지석

 

충암 김정 임절사(절명시) 시비

 

臨絶辭 /충암 김정(1486~15210)

 

投絶域兮作孤魂(투절역혜작고혼) 절도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매

遺慈母兮隔天倫(유자모혜격천륜사랑하는 어머니 버리고 천륜을 끊었도다

 

遭斯世兮殞余身(조사세혜운여신)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죽이니

乘雲氣兮歷帝閽(승운기혜력제혼구름을 타고 천제의 궁궐을 거쳐

 

從屈原兮高逍遙(종굴원혜고소요굴원을 좇아 높이 소요하려는데

長夜冥兮何時朝(장야명혜하시조어둡고 긴긴 밤은 언제 새려나

 

耿丹哀兮埋草萊(경단애혜매초래사무치는 붉은 마음 풀숲에 묻치었네

堂堂壯志兮中途摧(당당장지혜중도최당당한 큰뜻 중도에서 꺾이었으니

千秋萬歲兮應我哀(천추만세혜응아애천추만세에 응당 나를 슬퍼하리라

 

충암은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대사헌·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 때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간다. 이 행동 때문에 죄가 더해져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0개월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훗날 사림파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조광조와 함께 복권되어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규암 송인수 시비

 

珍島碧波亭 借忠岩金淨韻 / 규암 송인수

벽파정 충암 김정 시에 차운하여 /규암 송인수

 

孤忠輕性明 /고충경성명 /외로운 충성은 달처럼 밝고 가벼워

端棹任沈浮 /단도임침부 /노 끝에서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구나

日落芳洲遠 /일락방주원 /해는 지고 멀리 모래밭이 너무도 아름다워

招魂意轉悠 /초혼의전유 /가신님의 혼을 부르며 몹시도 그리워하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사르 당한 송인수는 전라감사 1543~44년 시절에 이곳 진도 벽파정을 방문하여 김정의 시를 보고서 위시를 짓는다. 그도 조선 선비요, 사립으로서 기묘사화 때 순절한 김정을 애도하였으리라.

※ 참고로 진도 벽파나루에서 제주로 떠나면서 지은 김정의 시

 

벽파를 건너며 읊다. / 김정(1486~1521)

渡碧波口號 /도벽파구호

 

宇宙由來遠 /우주유래원 /우주는 예로부터 심원하나

生本自浮 /인생본자부 /인생은 원래부터 떠다니는 삶이라네

扁舟從此去 /편주종차거 /작은 배 한척에 몸을 싣고 이제 떠나면

回首政悠悠 /회수정유유 /고개를 돌려 보아도 아주 아득하겠지

 

청음 김상헌 시비

 

동계 정온의 야금 시비

 

동계 정온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을 처벌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하라는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된다. 지금도 대정현성 안에는 동계 정온의 유배지 터가 남아다.

 

우암 송시열의 매중유감 시비

 

滄波萬里中(창파만리중) / 우암 송시열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여든세 살이나 살아온 늙은이가

滄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 물결 머나먼 길 유배 가는 중.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말 한마디 어찌하여 큰 죄가 되어

三黜赤云躬(삼출적운궁) 세 차례나 쫏 겨나 궁한 신세로세.

南冥溟信風(남명단신풍) 남쪽 깊은 바다 바람 따라 따르리

貂俱舊恩在(초구구은재) 옛날에 털옷 주신 임금님의 은혜(恩惠)

 

우암 송시열은 1689년 1월 희빈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하지만, 이후 노론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추앙받았다.

 

오현 시비 전경

 

새로 세운 오현 추모비인가? 5각형 탑  각 면에 오현의 간단한 경력을 새겼다.

 

중암 김정선생/중종25년(1520) 제주유배

 

규암 송인수선생/중종29년(1534) 제주목사

 

청음 감상헌선생/선조34년(1601년) 안무어사

 

동계 정온선생/광해군6년(1614년) 대정 유배

 

우암 송시열선생/숙종15년(1689년) 제주유배

 

증주벽림/ 유교 성현인 증자와 주자가 벽처럼 서 있다는 뜻의 마애명

 

'증주벽림'은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겼다.

 

광풍대/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뒤의 달이란 뜻으로 '광풍제월'에서 유래

  

귤림서원묘정비/ 귤림서원의 연혁과 오현 생애를 소개한 비석

 

우암 송시열 적려유허비

 

 

노봉 김선생 흥학비

 

향현사유허비

 

충암 김선생적려유허비

 

새로 세운 충암 김정선생 적려유허비

 

2월 한라산은 흰눈으로 덮여 있지만 제주는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었다. 수선화 같기도 하다.

 

 

향현사이다.

 

향현사 뒤에 제주읍성으로 오르는 계단이지만 출입을 금지해 놓았다.

 

향현사 앞 소나무

 

맞은편 출입구에 세워진 오현단 입구 표지석/역 방향으로 올레길을 걷는 분들을 위해 이곳에 오현단 입구 표시를 하여 놓았나 보다.

 

가락천 터

 

옛선조가 쉬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 뒤로 이곳 옛모습을 설명해 놓은 안내 표지가 많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제주읍성(濟州邑城)

제주읍성은 1105년(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읍성은 행정적인 목적 외에도 군사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자 1565년(중종 20) 곽흘 제주목사가 성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 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돌이 쓰이면서 제주읍성의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현재는 이렇게 짧은 구간만 남아 있다.

 

제주성지와 제이각

 

제이각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 남문동측 위에 건립하였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이어서 제주읍성을 내려다 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1850년 전후의 평화로운 시대에는 관리와 선비들의 경승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 올라가는 가파른 돌계단이 있어서, 올라가보니 아담한 규모의 제이각이 돌성곽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가판른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아이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제이각 망루

 

을묘왜변과 제주대첩 벽화

 

을묘왜변이란?

1555년(명종10) 음력 5월 11부터 동년 음력 6월 27일까지 왜구가 조선 남해안에 침입하여 여러 군현들을 유린한 사건으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 후 조선이 일본과 교역량을 줄이자 경제적으로 난관을 격게 된 왜인들이 전라도 영암에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했다. 

 

제주대첩은?

남해에서 대패한 왜구 1000여명이 60척의 배에 나눠 타고 6월 27일 제주 화북포로 쫏기어 와서 제주주성을 3일간 포위함에따라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 수군이 화북포 밖에서 총통으로 화북포에 정백해 있는 왜선을 격파하는 사이 제주목사 김수문은 특공대 70명으로 하여금 적진을 뚫고 들어가 왜구를 대파하고  대승을 거두어 왜선 9척을 포획하였다.

 

귤림추색 옛터 표지석/ 옛날엔 이 일대가 귤 생산단지였단다. 가을에 귤이 익을 때 이곳 남성에 올라 바라보면 온천지가 황금물결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단다.

 

오현교를 건너고

 

오현교에서 바라본 산지천 아랫방향

 

오현교에서 바라본 산지천 윗방향

 

제주올레길은 이 건물 사이로 나 있는 골목길로 접어 든다.

 

벽화 골목이다.

 

몇번의 골목길을 지나

 

제주동문공설시장 10번 입구에 닿는다.

 

동문시장으로 접어 들고

 

1게이트와 12게이트 방향으로 우틀하여 걷다보면

 

김진구 김춘택 유배지가 있다는데, 흔적은 없고 동문시장 상가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1게이트 쪽으로 좌틀한다.

 

동문시장커뮤니티라운지를 지나면 

 

제주동문시장 게이트 1이 나온다.

 

해병혼 해병대 기념탑과 탐라문화광장을 향해서 걷는다. 

 

탐라문화광장

 

다리를 힘겹게 떠 받치고 있는 조형물 

탐라문화광장에서 기념 한 컷

산지천은 바다를 향하고

 

나는 충혼탑 광장에서 기념 한 컷

 

해병혼 충혼탑

 

이제 산지천을 따라 걷는다. 광제교를 지나고

 

산지천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많다. 제주민들의 삶을 설명해 놓은 안내표지도 자세하다. 시간이 나면 별도로 이곳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다.

 

올레18코스 건입동 안내 표자판

 

산지천의 아름다움

 

산지천 빨래터

 

예쁜 조형물이 산지천과 잘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오나 보다. 천변에 파란 파래가 끼어 천이 살아 있다.

노릿물이다. 제주 한라산에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흘러 내려와 해안을 만나서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샘이 있다.  

 

산지교

 

생명이 살아 있는 산지천 왜가리가 한가롭게 먹이를 찾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깨끗한 산지천에는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모여 먹이 활동을 한다.

 

김만덕 기념관

 

조선 거부 김만덕은 당시로서 양반 규수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에 상식을 깨고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상업을 한 인물이다. 제주산물을 육지에 팔고 육지의 곡물을 제주에 파는 양방향 상업을 하여 거부가 된다. 가뭄이 들어 이문을 많이 낼 수도 있을 때도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많이 구입하고 파는 박리다매로 서민들의 생활을 걱정하였고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제인였다. 이익을 개인의 영달에 쓰지 않고 어려운이에게 나누어주는 배품의 의인이였다. 

  

의인 김만덕을 생각한다.

 

영전 앞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에 도전정신과 나눔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다.

 

기념관 안에 있는 김만덕 비석의 조형물/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

 

건입포 유적지/ 탐라 개벽설화에 나오는 건들개터, 고대 탐라때의 교통항으로 추정되며 1897년(광무1년)부터 취항하면서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발전하였다.

 

올레길은 기린모텔을 지나 큰길로 향하지만

 

나는 골목으로 살짝 들어와 제무 물사랑 홍보관 앞

 

제주근대 제조업의 효시라고한 단추공장터를 살펴본다.

 

김만덕 객주

 

옛 건입포 안내 표지석

 

신지항 유물 출토 터 표지석

 

김만덕 객주를 살짝 들여다 본다.

 

제주통합사령부 부대주둔 기념 표지석

 

제주해양경찰서 함정 부두

 

제주연안여객터미널 입구이다. 올레길은 여기서 큰도로를 건너 주정공장 옛터로 간다. 하지만 나는 연안터미널 광장에 우뚝 솟은 탑이 있어 잠깐 들러 간다.

  

연안여객터미널에 새워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관광안내도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는 이곳이 옛 제주세관이 있었나 보다.

 

연안여객터미널에 새워진 기념탑/ 무슨기념탑일까?

 

보목 등명대 복원

 

연안여객터미널 입구에 새워진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배는~  터져 나오라 애슬픈 물결 위로 오 한된 바다!' 싯구가 애닲다. 

 

연안여객터미널 입구

 

연안여객터미널 앞 정원 새워진 일제 강제동원 노동자 상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평화와 해방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의 선한 눈망울을 뒤로 하고 전지동굴 판답시고 오름으로 해안 절벽으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 정문

 

제주주정공장 터로 다시 돌아왔다.

 

옛 주정공장 터 비문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 당시 수많은 제주민중들이 끌려와 감금당한 채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모진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옛 주정공장 터이다.

 

4.3 유적지 제주주정공장 옛터(4.3 당시 민간인 수용소)

 

주정공장 옛터는 역사기념관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4.3 위령 조형물은 공사장 뒷편에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동굴진지

 

4.3 위령 조형물 '그날의 슬픔'

 

4.3 위령 조형물 탑 바닦엔 그날의 아픔을 생생히 남긴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절규가 새겨저 있다. 아픈 역사이다.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다시 올레길을 걷는다.

 

긴 계단을 오르고 나면

 

건입동 벽화길로 들어선다. 

 

찾아와서 고맙습니다. 올레18코스 사라봉 방향 표지 조각품이 반긴다.

 

칠머리당 영등 굿 벽화/칠머리당에서 열리는 '칠머리당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풍작 및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음력 2월에 시행하는 대표적인 제주 세시풍속이다.

 

마을을 지나고

 

올레길 표지를 따라서 걷다보면

 

벽화의 거리가 나온다. 수 많은 벽화중에서 몇 점을 여기 올린다.

 

사라봉으로 가는 길목에 제주 바다가 보이는 조망이 확트인 구간을 지나고

 

마을길을 돌아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사라봉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사라봉 공원 입구

 

건입동 포제지 유래 

 

건입포제당

 

긴 오름 계단을 오른다.

 

사라봉 일제 동굴 진지/ 억울하고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사라봉 정상으로 오르면 벗나무가 반긴다. 3월 벗꽃이 만개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길일 것 같다.

 

오름 길목에 동백 꽃을 보았다. 붉은 빛이 유난히도 아름답다. 하지만 제주사람은 저 동백이 떨어질 때  4.3이라는 아픈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제주4.3의 상징은 동백이다.

 

동백을 볼 때마다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이 핏빛으로 떨어지는 저 동백은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피고 진다. 

 

사라봉공원 표지석

 

사봉낙조

 

사라봉 정상엔 팔각형 정자가 새워져 있다. 저 정자 위에서 바라본 제주 풍광은 가히 제일이다.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이제 사라봉에서 올레 표지를 따라 내려선다.

 

사라봉 공원입구 안내표지판

 

별도봉 입구에서 올레길은 해안을 따라 걷는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영등대왕 해신선왕 신위

 

배 용왕부인 도원신 신위

 

남당 할마님 남당 하르바님 신위

 

제주사람은 영등신이 떠나면 봄이 온다고 믿는다.

 

한적산 올레길을 걷는다.

 

제주 9부두와 10부두 풍광

 

애기 업은 돌을 지나고

 

한적산 올레길을 걷다보면

 

여유와 한가로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참으로 좋다. 

 

제주 올레길 인증 쉼터가 나온다.

 

모작벤치는 시민들이 가져다 주신 오래된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의자입니다.

 

화북동 역사와 문화 안내판

 

화북동 역사

 

기념 한장하고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제주외항 방파제 뒤로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져진다.

 

지나온 올레길

 

제주 화북동 일대가 보이고

 

올레길은 숲길을 지나

 

별도봉으로 오르는 또 다른 입구와 만난다.

 

화북천을 가로지른 원두교를 지난다.

 

화북천은 건천이다. 원두교에서 바라본 화북천의 아래방향

 

윗 방향

 

절단된 화북천을 복원하라! 화북곤을동 청정지역 만드는 대책위 프랑카드

 

올레길 표시를 따라 화북동을 향한다.

 

화북동 문화유적탐방안내를 자세히 본다. 볼 것이 많다.

 

화북비석거리

 

곤을동 4.3유적지

 

곤을동 마을은 제주 4.3때 초토화되어 집과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아 이곳이 아름다운가? 그냥 보면 아름답게 볼지도 모른다. 난 가슴이 멍멍하여 발걸음을 옳길 수가 없다. 

떨린 마음을 간신이 부여 잡고 조심 조심 잃어버린 마을(곤을동)로 발걸음을 옮긴다.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울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데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타 페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였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깨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로 끌고 가서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데곤을 17가구 모두 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뒈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 주고 있다.

 

4.3 해원상생 거욱대

집과 사람은 오간데 없고 그 돌담만 남아 이 원통하고 억울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곤을동 초토화 마을 유적터에~

 

제주 4.3은 2000년 1월에 '4.3 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어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고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곤을동 아픈 역사를 모듬고 제주 바다는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다.   

 

제주시 화북동 곤을마을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으며 화북천 시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곤을, 안곤을로 나눠어진다. 곤을 마을은 고려 충렬왕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한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지 7백년 이상이 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화북천에 서식한 기수갈고둥

 

올레길에서 만난 독특한 집이다. 옛 제주집을 그대로 활용한 독특한 집에 시선이 간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가옥일까?

 

지나온 올레길을 돌아본다. 별도봉이 눈에 들어 온다.

 

올레길은 이제 해안을 끼고 걷는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볼 것이 너무 많아 이제 7.0km를 걸었다. 아직 12.8km가 남았다.

 

제주 해안선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올라온 하얀 물보라가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무형문화유산보호 협약판넬이 어느 담벽에 녹쓸고 있다. 아쉽다.

 

화북포구가 정겹다.

 

어른물(남탕) 제주에 해변에는 이런 ~물이 많다. 한라산에서 삼다수가 지하로 흘러 내려와 바닷물을 만나면서 이렇게 지상으로 솟아 올라 용출수가 된다. 

 

이곳 물은 민물이며 바로 뒤에 있는 물은 바닷물이다. 신기하다. 

 

아름다운 화북포를 보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화북포구빙수집이지만 커피도 판다. 주인님이 아주 친절하다. 

 

바로 옆에 큰짓물(서착물) 또 있다. 주인말로는 이곳에서 옛날 아낙들이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고 하였단다.

 

맑은 삼다수물이 깨끗하게 고였다. 

 

다시 마을 골목길을 지난다.

 

무슨 성벽인것 같기도하고 돌담인 것 같기도 하고

 

해신사 입구다. 해신을 모셔놓은 제각이다. 바다를 생업으로 하고 있는 바닷가 사람들은 바다신을 늘 숭배하고 산다. 마을의 안녕과 어로의 풍요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매년 정원 대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이곳 화복포에도 해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해신지위' 돌로 만든 위패

 

바로 옆에 또 다른 해신을 모시는 위패가 있다.

 

화북포 유지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 되었던 포구

 

또 하나의 금돈지물

 

화북동역사문화탐방코스

 

올레쉼터

 

화북옛길 걸음락

 

해병대화북전우회 눈을 사로 잡는다.]

  

동마을 복지회관을 지나고

 

올레길 표지를 따라 마을길로 들어선다.

 

바다를 가로질러 올레길이 나있고

 

주변에는 용천수가 솟아나는 목욕탕이 많다.

 

이 믈은 바닷물일까? 용천수일까?

 

별도환해장성

 

별도환해장성을 정교하게 쌓아 놓았다.

 

안쪽은 초원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말을 관리하였을까? 군사요충지였을까?

 

별도연대

 

연대는 직선거리의 동태를 자세히 관찰하는 동시에 해안의 경계를 감사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겸하였다. 

 

별도연대에 올라 푸른 제주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저 제주바다가 아름답다라고 하지만 그 옛날 유배온 사람들이나 제주사람은 저 바다가 어떤 바다였을까?

 

올레길은 다시 골목으로 접어 들고

 

조금 비켜 고래물이 있다. 그곳을 잠시 들려 본다.

 

고랫물유래

 

마을길을 돌아 돌아

 

올레길은 평화로운 들길을 지난다.

 

화북동 일대는 새로운 유통 단지를 만드느라 온통 공사장이다. 올레길은 이 공사장을 가로질러 걷는다.

 

서펜물(아랫물)

 

제주엔 이런 용출수가 많다.

 

올레길은 마을을 지난다.

 

올레길은 해안을 끼고 걷지만 나는 시간이 꽤 흘러 이제 돌아가야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궷물샘이다.

 

새각시물 

 

벌낭포구에 도달한다.

 

벌낭포구의 아름다움 취해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돌담을 쌓고 물이 빠지면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잡는 제주만의 독특한 어로법이다. 삼앵해수욕장을 지나면서 오늘 올레길 걷기를 마무리한다.

 

제주 올레길18코스는 아직 9.5km  남았는데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역사 유적지와 4.3 유적지 그리고 아름다운 제주 해안 풍광에 빠져 완주를 못하고 여기서 접는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어서 올레길 18코스를 완주하리라.